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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노인이 됩니다 (사46:3-7)

본문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제 나름대로는 성도들에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준비했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상의 격변기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목숨을 걸고 지켰던 사상이나 전통, 관습이 하루 아침에 쓸모없고 낙은 것으로 판단되어 버리는 가치판단의 혼란을 가져온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가치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200년 전에 한국에 카톨릭이 들어왔을 때에 수 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왜 순교를 당했느냐 하면 조상 신을 섬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6.25사변이 끝나고난 다음에 카톨릭에서는 제사 지내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했습니다. 과거에는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치판단이 이렇게 흐려지고 달라져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졌습니다. 효도에 대한 개념도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수 십년 전만 해도 자식은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 했습니다. 효도는 모든 도(道)의 근본이었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인생을 헌신짝처럼 버렸던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나는 나의 인생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만약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자기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효도를 하지 않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중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시대입니다. 몇년전의 어버이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80나는 시어머니에게 구경시켜 드린다고 하면서 서울 사는 사람이 부산에 내려 갔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 80세된 시어머니를 부산에 내려가서는 버리고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요사이 제주도에 이런 일이 맣다고 합니다. 관광시켜 드린다는 명목으로 모시고 가서는 노인을 그 먼 제주도에 내려놓고는 자기들기리 비행기타고 도망와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귀찮은 존재인 부모님을 어떻게 하면 떼어놓고 살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생각과 그렇게는 효도할 수 없다는 오늘의 생각이 뒤섞여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할수 없어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의 세계가 노인의 세계, 노인의 지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출산율은 자꾸 떨어지고 반대로 의학이 발달하고 경제생활이 윤택해짐에 따라서 사람의 수명은 점점 길어져서 이웃 일본의 통계를 보니까 노인의 비율이 과거에는 전인구의 4%였으나 현재는 전 인구의 13%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노인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노인의 문제는 정부나 사회, 가정, 교회 모두가 힘을 기울여야만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효도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러한 문제를 떠나서 우리 모두가 노인의 입장에서 어데게 노련을 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가장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평범한 진리는 우리 모두가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노인이 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절대로 노인이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방법이 꼭 한가지 있는데 젊어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젊어서 죽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노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나도 노인이 된다"는 관점에서 노인들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노년의 생활은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불행하게 됩니다. 은퇴후의 인생이나 노년의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되느냐 혹은 추한 인생이 되느냐 하는 것은 노년이 되기 전까지 어떤 생활양식으로 살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40-50대의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현재의 인생은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에 어데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중년은 과거 처오년 시절에 잉태 되어졌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노년의 인생의 성패는 40-50대에 잉태 되어지는 것입니다. 30대, 40대, 50대의 성도님들은 아직 인생의 대낮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대낮은 황혼이 출생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노년을 잘 살기 위해서는 좀더 일찍 준비해야만 합니다. 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은퇴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그때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하고 바둑도 두고 등산도 하고 낚시도 하는 등 취미생활을 하겠다"하고 말입니다. 또 예수 믿는 성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내가 노인이 되면 예수 잘믿고 신앙생활 잘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으며 전도도 많이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거의 노년의 인생을 샐패하게 됩니다. 은퇴 후에 이것 저것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할 수도 없지만 그때는 그 모든 것이 이미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어더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느냐에 따라서 노년의 신앙생활이 결정되는 것인데 지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노인이 되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잠기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노인이 되어 온종일 멍하니 앉아 있어도 절대로 성경을 못 본다는 말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그런 젊음이 없으면 노인이 되어도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아름다운 노년의 생활을 보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호주의 의사인 '새드릭 테일러'박사가 목사들만 상대로 연구를 하여 연구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제목이 '목사 살해'였습니다. 거기에 보면 목사의 건강이 대부분 형편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대부분 많은 병을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또 목사의 수명이 과거보다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첫째가 과로이고 두번째는 교인들로부터 정신적인 압박감을 너무 많이 받고 세번째는 운동부족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을 좀더 건강하게 잘살게 하기 위해서 두가지를 제시했는데 첫번째로 목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규칙적인 운동이며 두번째는 목사를 깊이 이해해주는 친구를 많이 사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목사가 친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인들 중에 몇 사람들과 좀 가까이 지내려고 하면 다른 교인들과 원수가 되기 쉽기 대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목사가 나중에 노인이 되면 제일 불쌍한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40-50대에 노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취미생활할 수가 없는 것이 현 실정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목사가 월요일에 낚싯대 들고 낚시하러 가는 것을 교인이 본다면 "야, 우리 목사 낚시에 미쳤다"고 야단이 날 겁니다. 목사가 무슨 운동 좀 하러 다니면 운동에 미쳤다고 할테고 말입니다. 목사들이 취미생활할 것이 없어요. 그래서 혹 쉬는 날에는 집에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노년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웃도 친구도 없이 참으로 비참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40대-50대에 여가를 어떻게 활용하고 선용하며 젊어서 조각나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노년을 준비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노년의 생활이 행복하냐 또는 불행하게 되느냐는 사실이 결정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특수화 시킬 때에 성공하게 됩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전문가가 되고 특수한 재능을 개발할 때에 사회에서 외부적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기에 따라서 직업이 결정되고 인생의 외적인 성패가 결정됩니다. 이것은 인간 외부에서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 출세했다저 사람 성공했다"고 하는 판단은 대부분 외적인 판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특수화시킴으로 한편 인생의 폭과 넓이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박사'라고 하면 넓을 '박'자를 쓰는 것인데 요즈음 사람들은 '박사'의 '박'자가 넓을 '박'이 아니라 엷을 '박'자라고 말합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모기박사가 계시는데 그분은 죽으라 사나 세상에서 모기밖에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의 노년생활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특수화시킴으로 희생시켰던 것들, 인생의 넓이와 폭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발견해던 인생을 내부에서 발견하는 것이 노년의 생활입니다. 젊은날에 열심히 돈을 모읍시다. 그리고 돈도 정성도 정력도 모두 자식에게 쏟아 버리고 자기는 없습니다. 번 돈을 자식에게 다 물려주고는 자식에게 큰 기대를 겁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부모와 실망을 안겨주며 제 잘난 탓에 인생을 잘사는 줄 압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전인생을 살다가 그 자식으로부터 큰 실망을 얻게 될때 그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현재 일밖에 모르는 분있지요 자기 일에 몰두해서 미쳐있는 사람, 열심히 뛴다고 모든 사람함테 칭찬받는 사람, 자기 인생에 전력투구하는 사람들은 잠간 자기의 인생을 멈추고 자신의 인생의 노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회사에는 00아니면 회사가 안된다우리 학교에 저 사람이 없으면 일이 안된다"는 소리를 듣고는 죽을지 살지 모르게 그저 일만 하는 분들은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은퇴하거나 일거리를 놓게 되거나 노인이 되면 갑자기 이상하게 되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지기 앓게 되고 허무해지고 공허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인생에 몰두했지만 인생의 넓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젊어서는 자기의 인생을 외부에서 발견했지만, 그래서 성공도 했지만 은퇴하고 노인이 되면 인생을 내부에서 발견해야지 외부에서 계속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내부에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기술을 40대 50대에 전혀 터득하거나 습득하지 못했기에 노년이 되면 대부분 불행하게 되고 생각지도 않은 병이 찾아와서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부터 여러분의 노년의 인생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여가를 선용해서 여러분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순간 순간의 여가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기도의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신앙의 훈련을 40-50대에 쌓아놓지 않으면 노인이 되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다가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셋째 연세 많으신 성도님들은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체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겉으로 늙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더 많은 욕심과 아집에 사로잡힙니다. 노욕이 무섭습니다. 겉으로는 늙었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내가 늙긴 왜 늙어. 아직 탄탄한데"하며 안늙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본능적으로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에 싸움이 생기며 고부간에 갈등이 심화됩니다. 기관이나 단체나 모임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주책없는 노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아지면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외적인 것은 자꾸 포기하고 체념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넷째 늙는다는 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아프기도 하고 자식을 못살게 하기도 한다고 그럽니다. 이것은 유명한 정신의학자의 말입니다. 그러나 노년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별을 배우는 학교라고 합니다. 종교 사회학자인 '뒤로껭'이라는 사람의 글에서 자기 경험을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병으로 앓고 있는 나이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이 '뒤르껭'이 그에게 병문안을 갔더니 살 소망이 전혀 없는 이 친구가 "내가 회복이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하면서 계획을 세우더랍니다. 그래서 '뒤르껭'이 생각하기를 "아하! 저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감추기 위해서 저렇게 계획을 세우고 있구나"하고 깨닫고는 조용히 그 친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죽음 저 쪽을 바라보면 좀 더 멋지게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있다네"하고 말했더니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고맙네, 고맙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노년을 보내야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으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착각입니다. 믿는다고 죽음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안됩니다. 죽음은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만큼 큰 적이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대적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그렇게 가볍게 처리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앞에 놓고 "하나님이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하시옵소서"하고 기도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받아들고 허허 웃으면서 독배를 마셨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다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도 그는 웃으면서 독배를 마셨습니다.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기의 믿음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지금까지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영혼이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는 철학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신앙의 죽음은 이런 죽음이 아닙니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속에 갇혀있다가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자유를 얻는다는 그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죽음앞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건너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때에, 부활을 바라볼 때만 죽음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이가 바깥세상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저 세상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음도 이 길수 있는 확실한 부활의 소망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놀라운 사실을 보여주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잔을 두려워하셨지만 부활에 대한 놀라운 소망을 통하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고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도 영원한 부활을 바라보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이사야46장의 말씀을 보면 "네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날 때부터 내가 품어 주었고 안아 주었는데 너희가 노년이 되고 백발이 되어도 내가 너를 품어 주고 내가 너를 안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여러분의 노년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말씀과 기도와 신앙의 훈련으로, 그리고 성도들과 가까이 지내는 아름다운 교제에 의해 노년이 되어서도 서로 전화만 하면 찾아올 수 있는 신앙의 동지들을 많이 사귀면서 노년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노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속에서 아름답게 이뤄지며 주책없는 노인이 아니라 아름다운 노년이 되도록 준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고, 현재 노년의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은 죽음 건너 영원한 부활을 바라보며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 세상의 외부의 것을 많이 포기하고 체념하고 하나 하나 세상의 줄을 끊으며 내면의 세계를 더 넓혀가는 아름다운 노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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