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아 내게 나아와 들으라 (사48:12-19)
본문
유일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요, 예배시간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행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이 바로 예배입니다.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 섬기면 또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신을 찾고 신을 섬기며 경배하는 종교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은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다른 종교는 신이 어디든지 있다고 믿는 범신론 혹은 다신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도 신이 있고, 돌에도 신이 있고, 물고기에도 신이 있고, 동물에도 신이 있고, 태양도 신이고, 달도 신이고, 별도 신이고 산도 신이고, 물도 신이고, 바가지 하나도 다 신으로 알고 섬겨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그런 신, 세상에 있는 그런 많은 신들이 아니고, 유일하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들이나 나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곤충과 같은 것들은 사람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이지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고, 동물은 동물입니다. 어떤 스님이 말한것처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경질을 부리거나 돈이 없어서 우리에게 교통비를 타 가는 그런 분이 아니시며 오히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넉넉히 우리 인간의 모든 삶을 책임지실 수 있는 부유하고 능력 많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은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환난을 당할 때 넉넉히 건지시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인간의 행위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은 내 영혼의 풍성한 양식과 은혜를 받는 시간이고, 내 정신과 모든 피곤한 몸을 영적으로 회복하는 큰 잔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많이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임금이 잔치를 베풀어 놓고 사람을 초청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배는 영화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나도 영화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참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므로 내가 잘 되게 됩니다. 내 영광을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므로 내가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내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임으로 내가 높아지고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므로 그 축복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부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은혜와 영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그를 만남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통치자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땅에서도 우리가 어떤 기관을 찾아가 보면 지위가 높을수록 결재하는 난이 언제나 마지막으로 미루어져 있습니다. 과장보다는 부장이 더 힘이 있고, 부장보다는 국장이 더 힘이 있고, 국장보다는 이사나 또 위에 있는 차관이나 장관이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있는 국무총리가 결재하고,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결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도 어려운 것은 높은 분이 결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결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은 투표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영원히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주어진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화롭게 하지 않아도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이 행위는 인간으로 말하면 한없는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이 변하며,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인간에게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절망 속에서도 어디에서 누구의 버림을 받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최종 결정자이신 하나님의 결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만 나오면 언제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이 다 안되는 사람도 쓰임을 받을 수 있고 버림받은 사람도, 절망적인 사람도, 내일 죽을 사람도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소생시켜 주시고 이길 수 있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저주와 멸망과 불행에서 건져 낼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새롭게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이 바로 예배시간인 것입니다. 역대상 29장 10-13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께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주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은 그가 인간의 모든 일을 좌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준비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크게 2가지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에 보면 “(삼하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절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외적인 준비 하나님은 깨끗한 몸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문화는 깨끗합니다. 의복문화도, 음식문화도, 가정도 깨끗합니다. 길거리도 깨끗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나라에 가 보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길거리라 더럽습니다. 골목마다 돼지머리, 소머리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드립니다. 매우 더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의 예배문화는 깨끗합니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의복도 다 깨끗한 것이 기독교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합니다. 기름은 밝은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슬픈 기색을 띠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장례식 때에는 여자들이 다 머리를 풀었습니다. 머리를 다 풀고서 슬프게 울었습니다. 가장 큰 슬픔을 머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나아와야 됩니다. 머리단장을 잘 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의복을 갈아입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정한 의복, 깨끗한 의복, 우리 집에서는 제일 좋은 의복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야 합니다. 의복은 남자든 여자든 정장이 좋습니다. 전능하신 자 앞에서 설 수 있는 예복이어야 합니다. 의복은 물론 인류가 처음 입을 때에는 자기를 위해서 입었지만 오늘날 의복문화는 언제나 상대방을 위하여 입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예의인 것입니다. 상대를 존경하는 표시이고 만나는 분을 위해서 내가 입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왜 옷을 함부로 입느냐,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의복을 입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존경할 사람, 보이고 싶은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누가 어떻게 봐 주느냐에 신경을 안 쓰는 타락한 의복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문화가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2. 내적인 준비 성경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지금까지 주신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또 우리를 만나시려고 하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기다려지고 감격스럽고 흥분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없는 영광스러움으로 예배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종교는 무당을 데려다 굿하는 것처럼 한 사람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외는 다 방관자요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경하는 예배가 아니고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그냥 몽롱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지, 그냥 무슨 일 행하는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나를 죄악 중에서 건져 주시고, 밤에도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자녀의 길을 열어 주셔서 인도하시는 그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경험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예배 중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두 시대의 예배 예배는 크게 두 시대의 예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구약시대의 예배요, 다른 하나는 신약시대의 예배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말하면 구약시대의 예배는 성전예배와 회당예배로 나눌 수 있고, 신약 시대의 예배는 초대교회 예배가 있고, 더 나가면 카타콤에서 고난 중에 드렸던 예배가 있고, 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에 자유를 주면서 오늘날 구교에서 내려오는 카톨릭의 예배가 있고, 그 다음에 쯔빙글리나 칼빈이나 루터에 의해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개신교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조금씩 다른 면이 있지만 큰 줄기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늘날까지 항상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의 예배는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직접 드리는 예배가 거의 없습니다. 간접예배입니다. 본인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리 예배로서 내 대신 양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어서 못나갑니다. 나는 드리지 못하고 제사장이 나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줍니다. 그러니까 나는 성전에 양을 몰아다 주는 역할만 하고 예배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물론 1년에 몇 번의 절기에는 참여하는 적이 있어도 대체로 자기가 직접 드리는 예배는 구약에는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만남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길이 열려지고, 담이 무너지게 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화평의 계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4장 20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진짜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어디서 예배를 받으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어디서든지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그 영혼이 어떤 영혼이냐 하는 본인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예루살렘으로 찾아가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찾아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는 예배입니다.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그가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 찾아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예배는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사람도 의로워야 되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되고, 몸에도 흠이 없어야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불구의 몸을 갖고 있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어도 성전 가까이에 못나갑니다. 양을 몰고 성전 가까이 못나갔습니다. 흠이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시체를 만져도 안되었습니다. 시체를 구경해도 못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도 깨끗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가 흠없는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불결한 것을 다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병든 자에게 다가갑니다.
구약성경 같으면 아예 성안에도 못 들어오는 문둥병 환자도 주님은 찾아가셔서 치료해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친구로 사귀시며 누구를 사랑하시며 누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구약시대로 말하면 근처에도 못 가는 분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고 죄인들이 은혜를 받고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린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숫자에도 넣지 아니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구약은 어른 같아야 들어가는데 신약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가는 새로운 길이 열려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새 시대에 맞는 예배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구약에서 요구하는 율법의 예배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가장 낮은 자를 찾으시고 죄사함 받은 이러한 새시대의 감격과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른 자가 물이 좋고, 배고픈 자가 양식을 볼 때 기뻐하듯이 피곤한 사람이 잠이 잘 오듯이 피곤한 사람, 병든 죄인, 목 마른 사람, 무거운 짐 진 사람이 짐을 내려놓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짐이 없다. 죄가 없다. 문제가 없다고 하는 분에게는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고 예배가 아무 의미가 없지만 죄인이 예배를 드릴 때 주님으로부터 내리는 은혜는 한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은 은혜를 못 받지만 죄 많은 세리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누구나 벌거벗은 것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잠잠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문제를 가지고 내어놓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낱낱이 용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건져내시기를 원하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변명하거나 교만하거나 내가 죄가 없다고 하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대항하거나 하나님의 자비를 그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예배시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왜 말씀으로 모아져 있는가 하는 의미를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들으라,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사48:14)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고 하십니다. 그냥 듣지 말고 모여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제사는 언제나 개인적이지만 교회는 모여야 됩니다. 문제를 다 가지고 모이면 모든 문제를 예배를 통하여 함께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여서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고 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여서 듣고 가까이 나와서 들어야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들으면 평강이 강같이 흐릅니다. 우리 삶에 평강이 흐릅니다. 가정에 평안이 강같이 흐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축복이 강같이 흐릅니다. 여러분의 영육에 평안이 강같이 흘러갑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내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를 바다 물결 같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듣는 것이 어떤 소리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이 되고 양식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먹고 다른 것을 먹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다 파괴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회복하는 것도 말씀이고 인간의 모든 삶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배시간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듣는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은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인간의 행위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큰 잔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은 내 영혼의 풍성한 양식과 은혜를 받는 시간이고, 내 정신과 모든 피곤한 몸을 영적으로 회복하는 큰 잔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많이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임금이 잔치를 베풀어 놓고 사람을 초청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배는 영화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나도 영화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참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므로 내가 잘 되게 됩니다. 내 영광을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므로 내가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내게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임으로 내가 높아지고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므로 그 축복이 내게 주어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부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은혜와 영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 그를 만남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통치자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땅에서도 우리가 어떤 기관을 찾아가 보면 지위가 높을수록 결재하는 난이 언제나 마지막으로 미루어져 있습니다. 과장보다는 부장이 더 힘이 있고, 부장보다는 국장이 더 힘이 있고, 국장보다는 이사나 또 위에 있는 차관이나 장관이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있는 국무총리가 결재하고,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결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도 어려운 것은 높은 분이 결재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이 결재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은 투표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영원히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우리로 말미암아 주어진 영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화롭게 하지 않아도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이 행위는 인간으로 말하면 한없는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간이 변하며,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인간에게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절망 속에서도 어디에서 누구의 버림을 받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최종 결정자이신 하나님의 결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 앞에만 나오면 언제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이 다 안되는 사람도 쓰임을 받을 수 있고 버림받은 사람도, 절망적인 사람도, 내일 죽을 사람도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소생시켜 주시고 이길 수 있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저주와 멸망과 불행에서 건져 낼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새롭게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순간이 바로 예배시간인 것입니다. 역대상 29장 10-13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께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주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은 그가 인간의 모든 일을 좌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준비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크게 2가지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에 보면 “(삼하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한 절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 외적인 준비 하나님은 깨끗한 몸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문화는 깨끗합니다. 의복문화도, 음식문화도, 가정도 깨끗합니다. 길거리도 깨끗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나라에 가 보면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길거리라 더럽습니다. 골목마다 돼지머리, 소머리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드립니다. 매우 더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오는 우리의 예배문화는 깨끗합니다. 마음도, 생각도, 몸도 의복도 다 깨끗한 것이 기독교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합니다. 기름은 밝은 모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슬픈 기색을 띠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장례식 때에는 여자들이 다 머리를 풀었습니다. 머리를 다 풀고서 슬프게 울었습니다. 가장 큰 슬픔을 머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나아와야 됩니다. 머리단장을 잘 하고 나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의복을 갈아입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정한 의복, 깨끗한 의복, 우리 집에서는 제일 좋은 의복을 예배시간에 사용해야 합니다. 의복은 남자든 여자든 정장이 좋습니다. 전능하신 자 앞에서 설 수 있는 예복이어야 합니다. 의복은 물론 인류가 처음 입을 때에는 자기를 위해서 입었지만 오늘날 의복문화는 언제나 상대방을 위하여 입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예의인 것입니다. 상대를 존경하는 표시이고 만나는 분을 위해서 내가 입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왜 옷을 함부로 입느냐,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의복을 입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존경할 사람, 보이고 싶은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누가 어떻게 봐 주느냐에 신경을 안 쓰는 타락한 의복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문화가 오늘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2. 내적인 준비 성경은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지금까지 주신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또 우리를 만나시려고 하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기다려지고 감격스럽고 흥분이 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없는 영광스러움으로 예배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종교는 무당을 데려다 굿하는 것처럼 한 사람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외는 다 방관자요 구경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경하는 예배가 아니고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그냥 몽롱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지, 그냥 무슨 일 행하는지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환난에서 건져 주시고, 나를 죄악 중에서 건져 주시고, 밤에도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자녀의 길을 열어 주셔서 인도하시는 그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경험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예배 중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두 시대의 예배 예배는 크게 두 시대의 예배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구약시대의 예배요, 다른 하나는 신약시대의 예배입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말하면 구약시대의 예배는 성전예배와 회당예배로 나눌 수 있고, 신약 시대의 예배는 초대교회 예배가 있고, 더 나가면 카타콤에서 고난 중에 드렸던 예배가 있고, 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에 자유를 주면서 오늘날 구교에서 내려오는 카톨릭의 예배가 있고, 그 다음에 쯔빙글리나 칼빈이나 루터에 의해서 이루어진 오늘날의 개신교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를 보면 조금씩 다른 면이 있지만 큰 줄기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오늘날까지 항상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의 예배는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직접 드리는 예배가 거의 없습니다. 간접예배입니다. 본인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리 예배로서 내 대신 양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어서 못나갑니다. 나는 드리지 못하고 제사장이 나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줍니다. 그러니까 나는 성전에 양을 몰아다 주는 역할만 하고 예배에는 참여하지 못합니다. 물론 1년에 몇 번의 절기에는 참여하는 적이 있어도 대체로 자기가 직접 드리는 예배는 구약에는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갑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만남처럼 예수로 말미암아 길이 열려지고, 담이 무너지게 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화평의 계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은 4장 20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하는데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진짜 예배입니까 하나님이 어디서 예배를 받으십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면 어디서든지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나아가서 예배드리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그 영혼이 어떤 영혼이냐 하는 본인의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예배는 예루살렘으로 찾아가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신약은 찾아가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는 예배입니다.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우리를 그가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 찾아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찾아오시는 주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예배는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됩니다. 사람도 의로워야 되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되고, 몸에도 흠이 없어야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불구의 몸을 갖고 있거나, 신체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어도 성전 가까이에 못나갑니다. 양을 몰고 성전 가까이 못나갔습니다. 흠이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시체를 만져도 안되었습니다. 시체를 구경해도 못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도 깨끗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가 흠없는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불결한 것을 다 고치시고 치료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병든 자에게 다가갑니다.
구약성경 같으면 아예 성안에도 못 들어오는 문둥병 환자도 주님은 찾아가셔서 치료해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친구로 사귀시며 누구를 사랑하시며 누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구약시대로 말하면 근처에도 못 가는 분들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고 죄인들이 은혜를 받고 어린 아이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린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숫자에도 넣지 아니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구약은 어른 같아야 들어가는데 신약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가는 새로운 길이 열려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새 시대에 맞는 예배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구약에서 요구하는 율법의 예배가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가장 낮은 자를 찾으시고 죄사함 받은 이러한 새시대의 감격과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른 자가 물이 좋고, 배고픈 자가 양식을 볼 때 기뻐하듯이 피곤한 사람이 잠이 잘 오듯이 피곤한 사람, 병든 죄인, 목 마른 사람, 무거운 짐 진 사람이 짐을 내려놓을 때 얼마나 좋습니까 나는 짐이 없다. 죄가 없다. 문제가 없다고 하는 분에게는 교회가 아무 의미가 없고 예배가 아무 의미가 없지만 죄인이 예배를 드릴 때 주님으로부터 내리는 은혜는 한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은 은혜를 못 받지만 죄 많은 세리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누구나 벌거벗은 것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잠잠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문제를 가지고 내어놓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낱낱이 용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어떻게 해서라도 건져내시기를 원하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변명하거나 교만하거나 내가 죄가 없다고 하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대항하거나 하나님의 자비를 그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예배시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의 중심이 왜 말씀으로 모아져 있는가 하는 의미를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사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들으라,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사48:14)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고 하십니다. 그냥 듣지 말고 모여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제사는 언제나 개인적이지만 교회는 모여야 됩니다. 문제를 다 가지고 모이면 모든 문제를 예배를 통하여 함께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여서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고 하십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모여서 듣고 가까이 나와서 들어야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들으면 평강이 강같이 흐릅니다. 우리 삶에 평강이 흐릅니다. 가정에 평안이 강같이 흐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축복이 강같이 흐릅니다. 여러분의 영육에 평안이 강같이 흘러갑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내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를 바다 물결 같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듣는 것이 어떤 소리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생명이 되고 양식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먹고 다른 것을 먹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과 아름다움이 다 파괴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회복하는 것도 말씀이고 인간의 모든 삶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배시간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듣는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은 말씀을 들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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