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녀를 잊지 않습니다 (사49:14-21)
본문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배출한 위대한 신학자 5명만 꼽으라고 한다면 성(聖)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e, 354-430)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힙포의 감독 이 될 때까지 자신의 신앙 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고백한 책이 바로 참회록입니다. 어거스 틴이 자신의 참회록에서 고백한 바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방탕아였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범하곤 했습니다. 학문을 싫어했기에 억지로 공 부하는 일이나 특히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 배우기를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친구들과 더불어 빈둥거리며 남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밤중에 이웃집 배나무를 흔들어 배를 따먹 기도 하고, 돼지에게 던져 주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결혼도 하기 전에 한 여인과 수년동안 동거생활을 하고, 아이까지 갖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가 부모님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가면서 하고 애를 태우며 집을 멀리 떠나 생활 할 때에도 그의 어머니 모니카(Monica, 333-387)는 아들 어거스틴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도 쉬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니카는 밤이면 밤마다 아 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루는 꿈을 꿉니다. 모니카가 어느 나무로 만든 자(水準尺) 위에 섰 습니다. 이때 한 키가 큰 청년이 모니카에게 다가와서 수심에 잠겨있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 으며 왜 슬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아들이 저렇게 타락의 길을 가고 있으 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그 청년이 아들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아들 어거스틴이 어머니 모니카 곁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의 기도로 다시 어머니께로 돌아온다는 뜻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모니카는 목사님에게 가서 아들 어거스틴이 바로 돌아오도록 해달라고 부 탁했더니, 목사님의 말씀은 "잘 될 터이니 그만 돌아가시오. 그처럼 눈물의 자식은 결코 멸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회개하고 신앙으로 돌아와(387년) 힙포의 감독이 되어 30여년간 재임하면서 기독교계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 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음같이 부모님도 결 코 그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손바닥에 새기는 것입니다. 20절에는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이 라고 하셨습니다. 배앓이를 하면서 열달동안 고생하며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 까 부모는 자식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 제4권 2장에서 "정당한 부부관계가 아닌 남녀관계에서 자식이 생 기면 싫어할 것 같지만, 일단 태어난 자식은 변함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미숙아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장애아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부모님은 그 자녀를 사랑할 뿐 아니라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말씀 입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심지어 동물의 왕국에서 원숭이가 죽은 새끼를 언제까 지나 들고 다니고 품에 품고 있는 것을 보면 짐승의 모성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젖먹이 아기를 품에 품고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나 가련해 보여서 얼마를 동정하면서 아기를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포대기 에 쌓인 아기를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다그쳐 묻자 이 여인은 "아기가 죽은지 벌써 오래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잊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기의 고통과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은 부모의 분신 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며 그 사랑은 무한의 사랑임을 보 여줍니다. 동시에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상입니다. 오늘은 이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은혜와 은덕을 기리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김을 부모님 섬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을 섬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I. 효도는 약속있는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 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첫 4개의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계명이며 그 다음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 첫 계명인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 이 길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번영하고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데 비유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부모가 자녀를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지 못하시고 마 치 손바닥에 기록해둔 것과 같이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고난과 고통을 통해 생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생산하셨 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신앙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섬겨야 하고 공경 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에 조건이 없는 것 같이 자녀들도 부 모사랑과 공경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 건강하지 못한 부모, 가난한 부모, 심지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님이라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 것이 자식된 바른 도리입니다. 신명기 21:18-21에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 그 어미의 말을 순종 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치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출애굽기 21:15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 일지니라."고 엄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가장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섬기지 않는 불효의 죄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요, 효도함으로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약속있는 첫 계명이요, 축복받는 신앙인의 바른 생활입니다. 특히 효도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 효도입니다. 이는 아예 효를 행하 지 않는 것입니다. 불효입니다.
둘째는 소극적 효도입니다. 이는 효에 대해 무심한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적극적 효도입니다. 효도할 일을 찾아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효도는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찾아서 해야 합니다.
II. 효도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골로새서 3:20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의 기초는 순종입니다. 마태복음 21:28 이하에 예수님 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보낸 두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들은 '예'하고 포 도밭에 나가지 않았지만,
둘째는 '아니요'하고도 나중에 포도밭에 가서 일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예'하고 밭에 가지 아니한 아들보다 '아니요'하고도 밭에 가서 일한 순종하는 아들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것은 '예'하고 실제로 대답처럼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순종함으로 복받은 아들입니다. 그는 평생 장수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했습니다. '아 니요' 하면서 순종하는 순종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순 종하는 효도입니다. 구약의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시어미니가 룻에 게 친정으로 가라고 나를 떠나라고 했을 때에도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 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 시리니.(룻 1:16)"라고 거절하며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 른 유일한 여인으로 축복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으로 순종해야 참된 효도입니다. 효도는 순종으로부터 시작되는 윤리의 기초요 첫걸음입니다.
III. 효도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이고도 감상적인 효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생활의 효도여야 합니다. 어느 단체가 최근 65세 이상 되신 부모님을 상대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노인들이 자녀에 게 가장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다음 세 가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 지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아프다."는 말입니다. 노인들은 어지간히 아파서는 자식들 보는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외롭다."는 것입니다. 특히 혼자되신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외롭다는 말을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자식들 은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용돈좀 달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공원에 가서 점심을 굶는 한이 있어도 점심값 좀 달라고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앉아 계시는 노인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자식들이 미리 알아서 어디 아프신 데는 없는지, 외로워하시지는 않는지, 용돈이 없어 궁해 하시지는 않는지를 늘 살펴서 이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효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어른들에게는 여기에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에 교회가는 일 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 드리는 것입니다. 평생 다니시던 교회에 어떤 일로 나가지 못하시면 마치 죽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둘째는 헌금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대는 앞에서 돌아가는데 파란 배추잎(만원짜리 지폐)을 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종대왕 은 고사하고, 율곡선생이나 퇴계선생도 없어 동전만 쨍그랑하고 내거나 아니면 그냥 헌금대 를 지나쳐 보내야 하는 때에는 하나님 눈치보다 옆 사람 눈치보기에 은혜고 말씀이고 저 멀 리 달아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에서 하는 노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키거나 아기를 보는 일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지 모릅니다. 그래서 효도는 구체적이 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저녁 때 기다리는 부모님께 곁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떨어져 살면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전화로라도 대화가 필요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 인이 특별히 효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절대로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세 계 어느 곳에 있든지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난 자식이라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밀라노에서 회개하고 신앙으로 돌아와(387년) 힙포의 감독이 되어 30여년간 재임하면서 기독교계의 큰 별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 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음같이 부모님도 결 코 그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손바닥에 새기는 것입니다. 20절에는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이 라고 하셨습니다. 배앓이를 하면서 열달동안 고생하며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 까 부모는 자식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 어거스틴도 그의 고백록 제4권 2장에서 "정당한 부부관계가 아닌 남녀관계에서 자식이 생 기면 싫어할 것 같지만, 일단 태어난 자식은 변함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미숙아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장애아로 태어나든지 아니면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을지라도 부모님은 그 자녀를 사랑할 뿐 아니라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말씀 입니다. 이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심지어 동물의 왕국에서 원숭이가 죽은 새끼를 언제까 지나 들고 다니고 품에 품고 있는 것을 보면 짐승의 모성애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젖먹이 아기를 품에 품고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나 가련해 보여서 얼마를 동정하면서 아기를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포대기 에 쌓인 아기를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왜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다그쳐 묻자 이 여인은 "아기가 죽은지 벌써 오래되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이것이 자녀를 잊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기의 고통과 고난 중에 낳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은 부모의 분신 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며 그 사랑은 무한의 사랑임을 보 여줍니다. 동시에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상입니다. 오늘은 이같은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그 은혜와 은덕을 기리는 어버이 주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김을 부모님 섬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섬기는 마음과 자세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부모님을 섬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I. 효도는 약속있는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1-2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 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에서도 첫 4개의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계명이며 그 다음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 첫 계명인 제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 이 길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번영하고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데 비유해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령 부모가 자녀를 잊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지 못하시고 마 치 손바닥에 기록해둔 것과 같이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고난과 고통을 통해 생산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고통과 고난을 통해 생산하셨 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신앙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섬겨야 하고 공경 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에 조건이 없는 것 같이 자녀들도 부 모사랑과 공경에는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부모, 건강하지 못한 부모, 가난한 부모, 심지어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님이라도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 것이 자식된 바른 도리입니다. 신명기 21:18-21에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 그 어미의 말을 순종 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치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출애굽기 21:15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 일지니라."고 엄하게 명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가장 무서운 죄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섬기지 않는 불효의 죄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요, 효도함으로 복을 받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효도는 약속있는 첫 계명이요, 축복받는 신앙인의 바른 생활입니다. 특히 효도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적 효도입니다. 이는 아예 효를 행하 지 않는 것입니다. 불효입니다.
둘째는 소극적 효도입니다. 이는 효에 대해 무심한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적극적 효도입니다. 효도할 일을 찾아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효도는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찾아서 해야 합니다.
II. 효도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골로새서 3:20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효도의 기초는 순종입니다. 마태복음 21:28 이하에 예수님 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보낸 두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들은 '예'하고 포 도밭에 나가지 않았지만,
둘째는 '아니요'하고도 나중에 포도밭에 가서 일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예'하고 밭에 가지 아니한 아들보다 '아니요'하고도 밭에 가서 일한 순종하는 아들이 낫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것은 '예'하고 실제로 대답처럼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가르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순종함으로 복받은 아들입니다. 그는 평생 장수의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했습니다. '아 니요' 하면서 순종하는 순종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순 종하는 효도입니다. 구약의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시어미니가 룻에 게 친정으로 가라고 나를 떠나라고 했을 때에도 룻은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 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 시리니.(룻 1:16)"라고 거절하며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그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오 른 유일한 여인으로 축복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쁨으로 순종해야 참된 효도입니다. 효도는 순종으로부터 시작되는 윤리의 기초요 첫걸음입니다.
III. 효도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이고도 감상적인 효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생활의 효도여야 합니다. 어느 단체가 최근 65세 이상 되신 부모님을 상대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노인들이 자녀에 게 가장 말하기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다음 세 가지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 지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아프다."는 말입니다. 노인들은 어지간히 아파서는 자식들 보는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외롭다."는 것입니다. 특히 혼자되신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외롭다는 말을 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자식들 은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용돈좀 달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공원에 가서 점심을 굶는 한이 있어도 점심값 좀 달라고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앉아 계시는 노인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자식들이 미리 알아서 어디 아프신 데는 없는지, 외로워하시지는 않는지, 용돈이 없어 궁해 하시지는 않는지를 늘 살펴서 이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효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어른들에게는 여기에 세 가지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주일에 교회가는 일 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 드리는 것입니다. 평생 다니시던 교회에 어떤 일로 나가지 못하시면 마치 죽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둘째는 헌금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헌금대는 앞에서 돌아가는데 파란 배추잎(만원짜리 지폐)을 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종대왕 은 고사하고, 율곡선생이나 퇴계선생도 없어 동전만 쨍그랑하고 내거나 아니면 그냥 헌금대 를 지나쳐 보내야 하는 때에는 하나님 눈치보다 옆 사람 눈치보기에 은혜고 말씀이고 저 멀 리 달아나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에서 하는 노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키거나 아기를 보는 일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지 모릅니다. 그래서 효도는 구체적이 고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저녁 때 기다리는 부모님께 곁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떨어져 살면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전화로라도 대화가 필요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 인이 특별히 효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은 절대로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세 계 어느 곳에 있든지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난 자식이라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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