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사41:8-14)
본문
한 수도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하겠다고 알리며, 모든 사람들이 모이기를 강요했다. 시간이 흐르자 성전은 노인과 청년들로 가득 찼다. 모든 사람은 그 예배를 통하여 훌륭한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그 수도사는 설교를 시작하지 아니하였다. 대신에 촛대를 꽂아 둔 곳으로 가 밝게 타고 있는 초가 꽂힌 촛대를 집어들고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이 조각되어 있는 제단으로 올라갔다. 그 수도사는 조용하고 밝게 타고 있는 촛불로 못 박히신 예수님의 팔을 비추어서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였다. 다음에는 촛불을 옮겨 역시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른 한 팔을 비췄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촛불은 못 박힌 예수님의 두 발을 밝게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그 수도사가 일어나서 돌아섰습니다. 그때에도 손에 쥐고 있던 촛불은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춰 모인 사람들은 그 수도사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의 뺨을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기도를 하고서 사라졌습니다. 로버트 슐러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주셔서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누가 만들었고 이 땅에 신이 어디 있는가 어느 신이 진짜인가 주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어느 것이 중요한 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신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선택한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살았습니다. 더이상 다른 복이 필요치 않을 만큼 많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법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원통하고 원통한 통곡의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41:1) 섬들아 내 앞에 잠잠 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그 백성들이 그곳에서 잘 살고 번창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으로 애굽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자기들과 약속한 그 땅으로 인도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결국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지 않고 애굽에서 10가지 엄청난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이 벗어나게 하시고 광야를 무사히 40년 동안이나 지나게 하시며 이들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 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하나님입니다. (사41:3)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그 하나님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할 말이 없고 더이상 입을 가리울 만큼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라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바빴습니다 . (사41:5)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사41: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사41:7)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 된다 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살고 있으나 그러나 그 창조물들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고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은 주님 앞에 우상으로 얼룩지고 악으로 얼룩진 사람들이라 해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본문의 “그러나”“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등의 말씀은 그 백성들이 범죄 하여 그 죄악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해도 땅끝에서 부르시고 땅 모퉁이에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아무리 범죄 했어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백성들을 인도 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향해 “(사41:1) 섬들아 내 앞에 잠잠 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죄의 값은 분명히 지불해야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한 후에 그는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그 엄청난 회개를 다 어떻게 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가 언제 회개했느냐 하는 식으로 모든 악한 일을 당하게 했습니다. (삼하12:10-12)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과 같이 (삼하16:22에)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 하니라” 응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행위의 값은 분명히 계산해 주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 자는 주님이 말씀대로 축복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자는 주님의 말씀에 저주가 기록된 대로 값을 지불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데 현세에서 심판하고 죽음에서 심판하고 다시 사는 날 심판하십니다. 현세에서는 성경에 적용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의지 하는 자는 말씀 데로 축복하시고 자손 대대로 1000대까지 이르러 축복하시나 주님을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데 3-4대 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1) 이 세상에서 받는 축복도 두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은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는 성령님으로 되지 않고는 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을 믿는 자는 육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이 축복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한 축복입니다. 건강하고 자식이 잘되고 물질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축복을 겸해서 받기를 원합니다.
2)이 세상에서 떠날 때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 누가 주님을 바로 믿었는가 믿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갈라집니다. 주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지 죽음 이후에는 심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시는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습니다. (찾아 읽기) 눅16:19-31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비록 거지로 평생을 살았으나 주님을 믿은 관계로 믿음의 조상 품에 안겨 있으나 부자는 이름도 없이 한 악의 대상으로 비교하고 있으며 그가 지옥에서 불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는 보고 그 재야 정신이 들어 말을 합니다.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전에는 코방귀도 뀌지 않던 부자가 이제 지옥에서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가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기 형제를 생각하고 나사로의 너무나 좋은 형편에 있는 그를 보내 주시면 회개하리라 생각하고 자기 형제에게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 우리 각 사람 마나 자기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가지고 올지 모든 행위를 가지고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보일 행위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 한쪽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은 사람마다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재림 할 때 심판 주로 오셔서 사람들을 향해 “나는 너를 위해 죽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하고 질문하면 주님께 보일 행위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 할 것이고 그나마 작은 믿음이 있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마치 불 속에서 구원받는 것과 같이 가진 것 전혀 없이 몸만 구원받게 될 것이고 그나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옥에 빠져 후회와 실망과 좌절에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된 그 백성들의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성경에(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우리 아버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고린 도전서 (고전13:3-7)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자기좋을 대로 살아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셔서 인간을 만드시고 우리가 복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둠과 사망의 거친 길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여!, 이제는 나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다짐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상황 즉 병들었거나 말썽꾸러기거나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끝까지 돌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의 부모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즉 희생 정신과 용기와 인내와 무한한 포용력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 같지 않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사랑이며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요일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돼야 합니다. 먼저,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덮어준다” 또는 “보호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지붕을 가리키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허물이나 약점이나 문제나 잘못이라 할지라도 우선 덮어 주고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과오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공포하고 떠들고 다니는 부모가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덮어 주고 가리워 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비리나 과오를 들추어내어 비난하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비리를 용납하고 그 잘못을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잘못을 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식을 채찍질하고 바르게 잡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채찍을 드는 것입니다. 감싸주는 사랑은 안의 것을 들어내지 않고 해결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에서 보호해 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병아리를 암탉이 그 날개 아래 감싸므로 보호해 주듯이 사랑은 온갖 공격과 비난의 화살로부터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실례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덮어 주는 사랑, 감싸는 사랑은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사랑은 결국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는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 대해서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께서 결코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 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감당치 못하고 범죄 가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성품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주님의 백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와 주의 일에 합당하게 만드신다는 이 확실한 사실과 그 축복을 믿음으로 근거를 삼을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습니다. 끝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견딘다”로 번역된 희랍어는 “.아래서 버틴다” 또는 “.아래서 남아난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그 위에 무거운 짐들이 누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버텨내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최악의 경우에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견뎌내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밖으로 부터 오는 고통의 압력이 거세다 하더라도 거기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겨내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당하기가 어려워 그 잔이 물러가기를 위해 하나님께 세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 하시고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아시기에 그는 끝끝내 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 감당하기가 어려워 때로는 자살하고픈 마음을 먹게도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압력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무서운 박해를 견디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힘이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나의 설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축복기도를 하고서 사라졌습니다. 로버트 슐러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주셔서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누가 만들었고 이 땅에 신이 어디 있는가 어느 신이 진짜인가 주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어느 것이 중요한 가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며 중심에 하나님을 모신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선택한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살았습니다. 더이상 다른 복이 필요치 않을 만큼 많은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법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원통하고 원통한 통곡의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41:1) 섬들아 내 앞에 잠잠 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그 백성들이 그곳에서 잘 살고 번창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으로 애굽에 들어가 그곳에 머물면서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자기들과 약속한 그 땅으로 인도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그 곳으로 가지 않고 결국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지 않고 애굽에서 10가지 엄청난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이 벗어나게 하시고 광야를 무사히 40년 동안이나 지나게 하시며 이들에게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 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하나님입니다. (사41:3)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그 하나님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할 말이 없고 더이상 입을 가리울 만큼 하나님 앞에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 라고 누누이 강조하시고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바빴습니다 . (사41:5)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사41: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사41:7)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 된다 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살고 있으나 그러나 그 창조물들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고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고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사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은 주님 앞에 우상으로 얼룩지고 악으로 얼룩진 사람들이라 해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본문의 “그러나”“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등의 말씀은 그 백성들이 범죄 하여 그 죄악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해도 땅끝에서 부르시고 땅 모퉁이에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아무리 범죄 했어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백성들을 인도 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향해 “(사41:1) 섬들아 내 앞에 잠잠 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 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죄의 값은 분명히 지불해야 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한 후에 그는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그 엄청난 회개를 다 어떻게 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네가 언제 회개했느냐 하는 식으로 모든 악한 일을 당하게 했습니다. (삼하12:10-12)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과 같이 (삼하16:22에)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지붕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 하니라” 응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행위의 값은 분명히 계산해 주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 자는 주님이 말씀대로 축복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자는 주님의 말씀에 저주가 기록된 대로 값을 지불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데 현세에서 심판하고 죽음에서 심판하고 다시 사는 날 심판하십니다. 현세에서는 성경에 적용하여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의지 하는 자는 말씀 데로 축복하시고 자손 대대로 1000대까지 이르러 축복하시나 주님을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데 3-4대 까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1) 이 세상에서 받는 축복도 두 가지가 있는데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이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은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부르는 자는 성령님으로 되지 않고는 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을 믿는 자는 육적인 축복을 주십니다. 이 축복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통한 축복입니다. 건강하고 자식이 잘되고 물질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 축복을 겸해서 받기를 원합니다.
2)이 세상에서 떠날 때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 누가 주님을 바로 믿었는가 믿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갈라집니다. 주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일이지 죽음 이후에는 심판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시는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습니다. (찾아 읽기) 눅16:19-31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비록 거지로 평생을 살았으나 주님을 믿은 관계로 믿음의 조상 품에 안겨 있으나 부자는 이름도 없이 한 악의 대상으로 비교하고 있으며 그가 지옥에서 불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는 보고 그 재야 정신이 들어 말을 합니다. (눅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전에는 코방귀도 뀌지 않던 부자가 이제 지옥에서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가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기 형제를 생각하고 나사로의 너무나 좋은 형편에 있는 그를 보내 주시면 회개하리라 생각하고 자기 형제에게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아무리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우리는 주님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3)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올 때 우리 각 사람 마나 자기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가지고 올지 모든 행위를 가지고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보일 행위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 한쪽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은 사람마다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재림 할 때 심판 주로 오셔서 사람들을 향해 “나는 너를 위해 죽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 하고 질문하면 주님께 보일 행위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워 할 것이고 그나마 작은 믿음이 있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마치 불 속에서 구원받는 것과 같이 가진 것 전혀 없이 몸만 구원받게 될 것이고 그나마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지옥에 빠져 후회와 실망과 좌절에 빠져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된 그 백성들의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성경에(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우리 아버지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고린 도전서 (고전13:3-7)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자기좋을 대로 살아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셔서 인간을 만드시고 우리가 복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어둠과 사망의 거친 길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여!, 이제는 나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다짐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어려운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상황 즉 병들었거나 말썽꾸러기거나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을 끝까지 돌보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의 부모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즉 희생 정신과 용기와 인내와 무한한 포용력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과 같지 않고 영원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사랑이며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요일4: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돼야 합니다. 먼저,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덮어준다” 또는 “보호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지붕을 가리키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한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떤 허물이나 약점이나 문제나 잘못이라 할지라도 우선 덮어 주고 가리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과오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공포하고 떠들고 다니는 부모가 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덮어 주고 가리워 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비리나 과오를 들추어내어 비난하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비리를 용납하고 그 잘못을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잘못을 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식을 채찍질하고 바르게 잡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채찍을 드는 것입니다. 감싸주는 사랑은 안의 것을 들어내지 않고 해결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공격에서 보호해 주는 것도 의미합니다. 병아리를 암탉이 그 날개 아래 감싸므로 보호해 주듯이 사랑은 온갖 공격과 비난의 화살로부터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실례를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덮어 주는 사랑, 감싸는 사랑은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싸주는 사랑은 결국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는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둘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 대해서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께서 결코 저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쉽게 이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인도 해주십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감당치 못하고 범죄 가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고 실망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성품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모든 주님의 백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에와 주의 일에 합당하게 만드신다는 이 확실한 사실과 그 축복을 믿음으로 근거를 삼을때 우리는 모든 것을 바랄 수 있습니다. 끝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견딘다”로 번역된 희랍어는 “.아래서 버틴다” 또는 “.아래서 남아난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 말은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 그 위에 무거운 짐들이 누르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버텨내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최악의 경우에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견뎌내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밖으로 부터 오는 고통의 압력이 거세다 하더라도 거기 굴복하지 아니하고 이겨내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당하기가 어려워 그 잔이 물러가기를 위해 하나님께 세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 하시고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아시기에 그는 끝끝내 그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올 때가 있습니다. 너무 감당하기가 어려워 때로는 자살하고픈 마음을 먹게도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어떤 압력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많은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무서운 박해를 견디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힘이 있게 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