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의 기다림과 그 내용 (사30:18-33)
본문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자잘못을 가려내서 잘한 것에 상을 주거나 못한 것에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그 사람의 신앙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 3:16-17) 이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려고 하는 일은 주님 자신이 아시는데, 심판이나 책망, 재앙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수십번, 수백번 반복하지만 아버지는 탕자에게 저주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탕자를 책망하고 싶은 생각도 절대 없습니다. 고멜같은 내 자신이지만 하나님은 고멜을 책망할 마음이 없습니다. 책망하려고 하면 주님이 십자가를 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안 져도 얼마든지 책망하고 심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독생자를 쳐다보며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점을 여러분의 신앙에 받아들여서 그 위에서 살아나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예레미야 32:40-41)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28:17)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언약입니다. 그 약속과 언약의 보증으로, 십자가로 인을 치시고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예레미야 32:40) 하나님의 이 약속, 이 언약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의 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긴긴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우리 마음 속에 세운다는 것, 또 움직이지 않고 절대의 약속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참 귀합니다. 영영한 언약 (예레미야 32:40) 약속이 영영하면 그 실행도 영영합니다. 영영한 약속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 영영한 약속이 선 사람, 이 약속을 가진 사람은 참 귀한데 이 영영한 약속을 내가 허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허물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이 약속을 허물고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지고 자빠질 때에 왜 넘어졌는가, 왜 자빠졌는가를 살펴보면 이 신실한 약속이 내 안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나를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고 멀리 떠나 갔다가도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것은 약속을 향한 나의 마음, 약속을 향한 나의 신앙이 새롭게 정리되면서 돌아설 수 없는 일에서 돌아서고 일어설 수 없는 일에서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어설 수 없는 일에서 일어선다 하는 의미를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어서기 어려운 일이 어떤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선포된 약속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세우시고 또 성경 안에 세우시고 우리를 향하여 기다리고 참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이사야 30:18) 이 말씀이 아직 여러분의 생활이 되지는 않는다 해도 이런 내용의 말씀을 잘 듣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하는 말씀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이사야 30:18)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려 해도 공의가 살아 있으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용서하려 해도 공의가 항의합니다. 이 말씀을 교회 앞에서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가 끝납니다.
그러므로 공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심판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저주스러운 일을 행한다 해도 사랑 안에는, 사랑하는 자에게는 저주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어떻게 처리하시고 기다리고 참으시고 일어나시고, 어떻게 복을 주기 위해서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가 하는 것을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돈을 버는 일, 생활을 하는 일이 다 귀하지만 이 신앙의 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의젓이 못섭니까 두려움 때문에, 내 죄와 허물 때문에, 내 추함 때문에 못섭니다.
탕자가 진작 돌아 왔을 터인데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면 아버지의 공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도 사실입니다.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왜 못돌아 갑니까 공의가 아버지와 탕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여러분에게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자빠짐이 있을 때에 아버지에게 돌아 가지 못하는 것은 공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에서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아 있는 이 사실을 깨달아 알면 탕자는 벌써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는 이 일에 대한 심각한 생각이 없이 긴긴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인 줄로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다는 공의의 하나님으로 더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어떻게 정리하셨기에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으면 그 공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 아직까지 내 것이 되지 않았어도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까지 이 땅에서 살려는지는 모르지만, 어서어서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정리한 것임을 확실히 믿어드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다만 복 주기 위해서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서 기다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자동적으로 나의 신앙의 걸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걷게 되어 있습니다. 사생자를 몇을 낳았다 해도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벌써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긴긴 세월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듣는 자가 없었습니다. 돌아 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눈물의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이사야 30:19)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 외에 다른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에 거하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시온에 거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온을 몰랐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모르고 새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습니다. 이 땅위의 누구든지 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그랬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가 시온, 새 시온, 새 예루살렘을 안 후가 귀하지, 그 전에는 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제 시온에 거하는 자로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로 그 걸음이 옮겨지고, 마음이 옮겨지고 또 기도도 찬송도 예배도 옮겨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시온에 거하고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는 고통하지 않을 것이라. (이사야 30:19)
예수를 믿는 여러분! 육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고통입니다. 이 몸을 벗는 날까지 육신의 고통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심령은 고통이 없는 자리로 눈물이 없는 자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참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우리는 말이 없는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복합니까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행위록과 생명록이 있는데 죽은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갑니다. 음부도 사망도 불도 나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놓습니다. 책들(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1:12) 권집사님도 권집사님의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나도 내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 행위록의 심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자비와 인자가 없습니다. 다 불못입니다. 이것이 2차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후에 생명록이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행위록에는 A급의 사람일찌라도 생명록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불못에 들어갑니다. 아주 귀 있게 들으셔야 합니다. 행위록에서 A급의 사람이 온 우주 안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도 생명록에 기록이 되어야 됩니다. 동시에 행위록에서 제일 끝자리, 죄인 중에 괴수라 해도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은 생명록이 그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어야 됩니까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어떻게 믿어야 안식합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을 우리 마음 속에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믿을 때에 안식합니다. 행위록에서 A급이라는 판정이 나도 생명록에 기록이 되지 않으면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위록을 추구합니다. 행위록을 가지고 싸웁니다. 시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사람에게는 생명록이 별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세요. “행위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생명록의 가치를 모른다.” 알 것 같습니까 생명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행위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시온에 거하는 사람들이 말로만 시온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사실이 바꿔지고 변합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 너 자신도 야곱이라 하지 말라 (창세기 32:28, 35:10) 여러번 말씀했지만 이 사실을 믿고 걸어야 하는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큰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재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사람들이,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하나님도 야곱을 인정합니다. 야곱도 야곱을 인정합니다. 둘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하는 그 야곱은 이미 죽어 장사 지내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아무 소용도 가치도 없는 옛 사람입니다. 야곱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노니. 하는 그 못박힘이 이런 내용을 깨달은 데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옮겨간 데 있습니다. 바울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이사야 30:20) 세상에 있을 동안에 겉으로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고 받게 됩니다. ‘환란의 떡, 고생의 물’ 입니다. 사람들은 다 환란의 떡이 없고 고난의 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서간 성도들 가운데 환난의 떡을 먹은 사람이 수없이 많고 고생의 물을 마신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하여 시온에 거하는 딸들아,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아 하고 부르시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시온에 거하고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눈물이 없는 호화찬란한 생활이 있게 되지만, 세상에 있을 때에 겉으로는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됩니다. 네 스승을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 (이사야 30:20)
하나님은 이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로만 우리 배를 채우시는 게 아닙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이 있지만 반드시 시온의 백성에게는 예루살렘의 백성에게는 네 스승을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는 말은 ‘항상 네 스승을 네 앞에 세우겠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을 여러분의 스승으로 알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환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을 때에 하나님은 스승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 스승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봉한 책이 아니고 덮어 놓은 계시가 아닙니다.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칠지라도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게 들리리니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라 (이사야 30:21) 봉한 책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이미 시온을 아는 사람, 시온의 딸들, 새 예루살렘을 아는 사람, 새 예루살렘의 딸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봉한 책이 아닙니다. 확실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이를 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말씀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사야 30:9)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예레미야 30:14) 왜 약이 없습니까 선견자에게 정직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약이 없습니다. 또 봉한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싸맬 수가 없습니다. 낫게 하는 약이 없습니다. 세상의 상처는 싸맬 수가 있지만, 신앙의 상처는 싸매지 못합니다. 언약하신 주님에게, 언약의 주님 자신에게로 돌아갈 때에만 상처를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예레미야 30:17)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멜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다른 방법과 다른 수단으로는 치료하지 못합니다. 돼지 방틀을 베고 누운 탕자의 상처를 다른 방법으로는 치료하지 못합니다. 고멜의 상처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품에, 호세아의 품에 돌아 갈 때에 치료됩니다. 우리의 상처는 주님께로 가야 주님 품에 돌아가야 상처가 치료됩니다. 내가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예레미야 30:21) 만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면 탕자도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이 없고 고멜도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도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내가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접근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서 접근한다, 주님을 향해서 접근한다. 참 귀한 말입니다. 접근이 없이는 풍성이 없습니다. 접근은 곧 풍성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냐! (예레미야 30:21) 만일 내가 가까이 오게 하지 않으면 담대히 내게 접근할 사람이 누구냐! 하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그런 말씀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의와 주님의 의를 섞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의를 얼마나 더 높고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의는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의가, 목사의 의가, 장로의 의가, 집사들의 의가 주님의 의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로 가까이 와서 서도록,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고 하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접근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함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 원함과 원함이 같아질 때 귀한 사실을 이루십니다.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아버지가 되겠다. (예레미야 30:22)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이 사실을 앞에 놓고 우리가 면밀히 생각해야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다림을 내가 아는가 그 심령을 내가 아는가 그 시간들을 내가 아는가 동시에 내가 정확한 요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 때가 언제인가, 만일 기다림과 기다림이 연합했다고 하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기다림과 기다림의 연합이 현재 내 신앙의 이것뿐인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독생자를 쳐다보며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이 점을 여러분의 신앙에 받아들여서 그 위에서 살아나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예레미야 32:40-41)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28:17)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언약입니다. 그 약속과 언약의 보증으로, 십자가로 인을 치시고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예레미야 32:40) 하나님의 이 약속, 이 언약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의 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깁니다. 긴긴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우리 마음 속에 세운다는 것, 또 움직이지 않고 절대의 약속 안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참 귀합니다. 영영한 언약 (예레미야 32:40) 약속이 영영하면 그 실행도 영영합니다. 영영한 약속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이 영영한 약속이 선 사람, 이 약속을 가진 사람은 참 귀한데 이 영영한 약속을 내가 허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허물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이 약속을 허물고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지고 자빠질 때에 왜 넘어졌는가, 왜 자빠졌는가를 살펴보면 이 신실한 약속이 내 안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약속이 나를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서고 멀리 떠나 갔다가도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것은 약속을 향한 나의 마음, 약속을 향한 나의 신앙이 새롭게 정리되면서 돌아설 수 없는 일에서 돌아서고 일어설 수 없는 일에서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어설 수 없는 일에서 일어선다 하는 의미를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어서기 어려운 일이 어떤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선포된 약속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세우시고 또 성경 안에 세우시고 우리를 향하여 기다리고 참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이사야 30:18) 이 말씀이 아직 여러분의 생활이 되지는 않는다 해도 이런 내용의 말씀을 잘 듣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하는 말씀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이사야 30:18)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려 해도 공의가 살아 있으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용서하려 해도 공의가 항의합니다. 이 말씀을 교회 앞에서 수없이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정리되고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가 끝납니다.
그러므로 공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심판이 없습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세상에 다시 없는 저주스러운 일을 행한다 해도 사랑 안에는, 사랑하는 자에게는 저주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를 어떻게 처리하시고 기다리고 참으시고 일어나시고, 어떻게 복을 주기 위해서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시는가 하는 것을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돈을 버는 일, 생활을 하는 일이 다 귀하지만 이 신앙의 깊은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의젓이 못섭니까 두려움 때문에, 내 죄와 허물 때문에, 내 추함 때문에 못섭니다.
탕자가 진작 돌아 왔을 터인데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 하면 아버지의 공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도 사실입니다. 돌아갈 면목이 없습니다. 왜 못돌아 갑니까 공의가 아버지와 탕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여러분에게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자빠짐이 있을 때에 아버지에게 돌아 가지 못하는 것은 공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십자가에서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아 있는 이 사실을 깨달아 알면 탕자는 벌써 돌아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 앞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는 이 일에 대한 심각한 생각이 없이 긴긴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인 줄로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다는 공의의 하나님으로 더 알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공의를 어떻게 정리하셨기에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으면 그 공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 아직까지 내 것이 되지 않았어도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까지 이 땅에서 살려는지는 모르지만, 어서어서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정리한 것임을 확실히 믿어드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참으시고 기다리시고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다만 복 주기 위해서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서 기다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자동적으로 나의 신앙의 걸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걷게 되어 있습니다. 사생자를 몇을 낳았다 해도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벌써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긴긴 세월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듣는 자가 없었습니다. 돌아 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눈물의 사람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이사야 30:19)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 외에 다른 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에 거하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시온에 거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온을 몰랐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모르고 새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습니다. 이 땅위의 누구든지 다 그렇습니다. 유명한 다윗도,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도 그랬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가 시온, 새 시온, 새 예루살렘을 안 후가 귀하지, 그 전에는 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제 시온에 거하는 자로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로 그 걸음이 옮겨지고, 마음이 옮겨지고 또 기도도 찬송도 예배도 옮겨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시온에 거하고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는 고통하지 않을 것이라. (이사야 30:19)
예수를 믿는 여러분! 육신의 고통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고통입니다. 이 몸을 벗는 날까지 육신의 고통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심령은 고통이 없는 자리로 눈물이 없는 자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참으시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우리는 말이 없는 죽은 사람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복합니까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행위록과 생명록이 있는데 죽은 사람들이 무론대소하고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갑니다. 음부도 사망도 불도 나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내놓습니다. 책들(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1:12) 권집사님도 권집사님의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나도 내 행위록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 행위록의 심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랑과 자비와 인자가 없습니다. 다 불못입니다. 이것이 2차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후에 생명록이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행위록에는 A급의 사람일찌라도 생명록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불못에 들어갑니다. 아주 귀 있게 들으셔야 합니다. 행위록에서 A급의 사람이 온 우주 안에서 한 사람이 나온다 할지라도 그도 생명록에 기록이 되어야 됩니다. 동시에 행위록에서 제일 끝자리, 죄인 중에 괴수라 해도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은 생명록이 그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어야 됩니까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어떻게 믿어야 안식합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언약을 우리 마음 속에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을 믿을 때에 안식합니다. 행위록에서 A급이라는 판정이 나도 생명록에 기록이 되지 않으면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위록을 추구합니다. 행위록을 가지고 싸웁니다. 시비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 사람에게는 생명록이 별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세요. “행위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생명록의 가치를 모른다.” 알 것 같습니까 생명록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행위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시온에 거하는 사람들이 말로만 시온에 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사실이 바꿔지고 변합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 너 자신도 야곱이라 하지 말라 (창세기 32:28, 35:10) 여러번 말씀했지만 이 사실을 믿고 걸어야 하는데 이것을 믿지 못하고 걷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큰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재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사람들이,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하나님도 야곱을 인정합니다. 야곱도 야곱을 인정합니다. 둘 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하는 그 야곱은 이미 죽어 장사 지내서 무덤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아무 소용도 가치도 없는 옛 사람입니다. 야곱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노니. 하는 그 못박힘이 이런 내용을 깨달은 데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옮겨간 데 있습니다. 바울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이사야 30:20) 세상에 있을 동안에 겉으로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고 받게 됩니다. ‘환란의 떡, 고생의 물’ 입니다. 사람들은 다 환란의 떡이 없고 고난의 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앞서간 성도들 가운데 환난의 떡을 먹은 사람이 수없이 많고 고생의 물을 마신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을 향하여 시온에 거하는 딸들아,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아 하고 부르시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시온에 거하고 새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눈물이 없는 호화찬란한 생활이 있게 되지만, 세상에 있을 때에 겉으로는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됩니다. 네 스승을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 (이사야 30:20)
하나님은 이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로만 우리 배를 채우시는 게 아닙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이 있지만 반드시 시온의 백성에게는 예루살렘의 백성에게는 네 스승을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시는 숨기지 않겠다’는 말은 ‘항상 네 스승을 네 앞에 세우겠다.’는 말입니다. 스승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을 여러분의 스승으로 알면 잘못입니다. 여러분이 환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을 때에 하나님은 스승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 스승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봉한 책이 아니고 덮어 놓은 계시가 아닙니다.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칠지라도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게 들리리니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라 (이사야 30:21) 봉한 책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이미 시온을 아는 사람, 시온의 딸들, 새 예루살렘을 아는 사람, 새 예루살렘의 딸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봉한 책이 아닙니다. 확실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이를 안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말씀입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정로를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사야 30:9) 네 송사를 변호할 자가 없고 네 상처를 싸맬 약이 없도다. (예레미야 30:14) 왜 약이 없습니까 선견자에게 정직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약이 없습니다. 또 봉한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상처를 싸맬 수가 없습니다. 낫게 하는 약이 없습니다. 세상의 상처는 싸맬 수가 있지만, 신앙의 상처는 싸매지 못합니다. 언약하신 주님에게, 언약의 주님 자신에게로 돌아갈 때에만 상처를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예레미야 30:17) 주님의 말씀입니다.
고멜의 상처는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다른 방법과 다른 수단으로는 치료하지 못합니다. 돼지 방틀을 베고 누운 탕자의 상처를 다른 방법으로는 치료하지 못합니다. 고멜의 상처는 약속대로 하나님의 품에, 호세아의 품에 돌아 갈 때에 치료됩니다. 우리의 상처는 주님께로 가야 주님 품에 돌아가야 상처가 치료됩니다. 내가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예레미야 30:21) 만일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면 탕자도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이 없고 고멜도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우리도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내가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접근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해서 접근한다, 주님을 향해서 접근한다. 참 귀한 말입니다. 접근이 없이는 풍성이 없습니다. 접근은 곧 풍성을 예고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냐! (예레미야 30:21) 만일 내가 가까이 오게 하지 않으면 담대히 내게 접근할 사람이 누구냐! 하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그런 말씀을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의와 주님의 의를 섞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의를 얼마나 더 높고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동시에 주님의 의는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의가, 목사의 의가, 장로의 의가, 집사들의 의가 주님의 의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로 가까이 와서 서도록,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지 않았다고 하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접근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함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 원함과 원함이 같아질 때 귀한 사실을 이루십니다.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아버지가 되겠다. (예레미야 30:22)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이 사실을 앞에 놓고 우리가 면밀히 생각해야 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다림을 내가 아는가 그 심령을 내가 아는가 그 시간들을 내가 아는가 동시에 내가 정확한 요구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린 때가 언제인가, 만일 기다림과 기다림이 연합했다고 하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기다림과 기다림의 연합이 현재 내 신앙의 이것뿐인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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