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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의 기다림과 그 내용 (사30:18-33)

본문

전 시간에 스바냐서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신앙의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생활의 실수나 도덕적인 수치는 대부분 다 압니다. 자기의 신앙의 수치를 모르는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살 수 없습니다. 신앙과 생활의 수치를 모르면 패배자인데, 육신적인 패배보다도 주님 앞에서의 엄청난 패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는 반드시 자기의 신앙과 생활을 알고 말씀을 따라서 수치되는 것 또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 말씀, 주님, 성령님도 여기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린 것은 신자가 주의 큰 날과 나의 큰 날을 모르면 신앙에 결핍합니다. 주의 큰 날은 성육신 하신 날이나 십자가 지신 날이나 부활하신 날이나 재림하신 날인데 그날 전부가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큰 날을 세우시고 그 큰 날 안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모르면 한 마디로 그 신앙은 수치스러운 신앙이요, 결핍된 신앙입니다. 성경은 주의 큰 날이나 자기 신앙의 수치를 알지 못하면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시온의 딸들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수치입니다.
시온의 딸들이 동일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찬양하는데 그 찬양을 알지 못하고 남의 일같이 생각하는 심령은 그 신앙 자체가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들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면 안됩니다. 또 종교인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주인의 집을 채우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것 같지만 성경은 이 신앙을 ‘문턱을 뛰어넘음’ ‘강포와 궤휼로 주인의 집을 채움’이라는 수치스러운 일, 부끄러운 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주의 뜻을 알지 못한 것, 주의 심령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신앙을 보냈다 할찌라도 수치를 모르는 자들아 하시고 재차 부르짖는 것은 돌아오라 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라! 자기의 수치된 것을 모르면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너희가 취한 것은 술을 먹고 취한 것이 아니라. 비틀거리는 것은 독주를 먹고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29:9) 이 사람들이 다 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취한 사람들, 모임에 취한 사람들, 교권에 취한 사람들… 이 취한 것이 술을 먹고 취한 것도 아니지만 은혜에, 성령님에 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돌아오라! 돌아오면.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양자의 기다림’입니다. 양자는 하나님과 나와 둘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다림이 무엇인가 동시에 나는 하나님을 향해서 무엇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있는가 땅의 것인가, 몸의 것인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인가 아니면 성령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내용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다림이 없는 신앙은 서서 걸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는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이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분노의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이것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바른 신앙, 정당한 신앙, 성경 말씀에 해당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많은 교회가 웃을 일입니다. 많은 교회가 웃는다 해도 우리 자신은 이런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취해서 비틀거린다 해도 진리로 인해 취하거나 진리로 만족하지 못하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성경 말씀은 나를 지적할 것입니다. 양자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기다린다 해도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내가 정당한 은혜의 풍성을 기다린다 해도 주님이 기다리지 않거나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힘써도 안됩니다. 불의가 아니고 비진리가 아니고 아름답고 귀하고 정확한 것을 기다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기다림은 참으로 귀중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한 기다림이나 내가 하나님을 향한 기다림이 참 귀한데, 내용 없는 기다림은 무익합니다. 열심도 그렇습니다. 충성도 그렇습니다. 내용 없는 일들은 무익할 뿐입니다. 아무리 기다린다 해도 내용이 성서적으로 분명하지 않으면 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다리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이 나를 향해서 기다리는 기다림이 무슨 내용입니까 나를 심판하려고, 저주하려고, 보복하려고 기다린다고 하면 그 기다림은 우리에게 불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없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아버지께서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이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기다림입니다. 몇해가 되었든지 돈을 얼마나 탕진했든지 몸이 얼마나 상했든지 그것은 불문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의 심령입니다. 아버지의 기다림은 호세아, 곧 하나님이 고멜을 기다리는 기다림과 같습니다. 사생자를 몇이나 낳았든지 몇해 동안 몸을 망치는 생활을 했든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말을 듣긴 하지만 주님을 믿은 후에, 안 후에 과연 구원이나 성결이나 의나 풍성한 은혜를 앞에 놓고 기다린 적이 있습니까 사모한 적이 있습니까 만일 주님을 기다리고 사모하고 있다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밤이 맟도록 내 건강을 위해서 내 직업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도 귀하겠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성도에게 있습니다. 확실히 주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내용을 사모하고 기다린 적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다리시는 것을 불신하거나 거역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하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역시 신앙의 실수입니다. 부족한 것입니다. 마땅히 기다려야 될 일을, 기다려야 할 분을 기다리는 것이 귀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내가 달리되 향방 없는 달림이 아니라. 똑바른 정확한 향방이 있어서 그를 향해서 달린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생은 각각 다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가 향방 없는 달림이 아니요, 향방 있는 달림인가 하는 것입니다. 향방이 정해졌다 해도 전력을 다 하라고 했고 또 주님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정리하고 주님을 좇겠습니다’ 하고 왔다면 뒤를 돌아 보는 일은 합당치 않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마태 8:22) 이것이 주님의 요구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전쟁을 하고 있는 장군이나 병사들이 승리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시간, 많은 경제, 많은 피흘림,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생을 각오하면서 싸우는 싸움이 당연히 승리입니다. 승리 없는 싸움은 희생만 당할 뿐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귀한 것을 희생하면서 싸우고 있지만, 승리와 전혀 상관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면 귀하지 않습니다. 향방 있는, 올바른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승리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패배하느냐, 승리하느냐 하는 것이 이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잡혀서 종이 되느냐, 내가 승리자가 되느냐! 세상의 종으로 살다가 죽느냐, 약속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기업을 누리고 주님의 신부로 깨끗하고 빛나는 예복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는 생각은 전쟁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부적당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사상이라고 하면 신앙이 안됩니다. 정확해야 됩니다. 날카로와야 합니다. 어느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정확성이 있어야 승리를 노래하게 됩니다. 병든 사람이 의사를 사모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기로 각오한 사람, 죽으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의사도 별 가치가 없습니다. 약이 가치가 없습니다. 삶이 가치가 없습니다. 왜 죽음으로 끝내려고 하니까. 그러나 그 사람이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의사가 필요합니다. 약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병든 사람의 심정입니다. 우리가 목이 마르다고 말은 하지만 정말로 주님 자신, 말씀에 대해서, 생수에 대해서 목마른 적이 있습니까 만일 목마른 적이 있다고 하면 그가 죽기 전에 체면도 제도도 양심도 불사합니다.
염치와 제도와 규칙과 양심을 넘어서 물을 마셔야 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가 여호와를 사모하나이다. (시편 42:1) 그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입니다. 그도 세상에 살았고 나도 세상에 삽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 당신을 사모합니다.’ 하는 이런 사모는 참으로 귀합니다. 배고픈 어린 아이가 잠들기 전에는 웁니다. 젖을 찾습니다. 그런 심령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런 심령이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모양, 이 꼴입니다. 배가 고파서 잠들기 전에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아이의 심령을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서 찾아 보십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가 여호와를 사모하나이다’ 하는 사모를 우리 마음 속에서 찾아 보십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 자신이나, 주님 자신인 성령님에 대해서 그토록 목마름이 없다고 하면 그 신앙은 물어 보나마나입니다.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가 파수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실지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그 때에 주신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하박국 2:2)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어떤 공간에 똑똑히 기록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마음에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는 일각이 여삼추입니다. 한 시라도 이 사모함을 채우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사모함이 없다면 생각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은혜를 알고 풍성을 알고 나 없는 생활을 알고 세상이야 어떻든지 구속한 주만 보기를 원하지만 그 원함과 함께 길을 걷지 못합니다. 생활에 옮기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족입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이사야 29:9) 차라리 그럴 바에는 소경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들의 취함은 포도주로 인함도 아니요,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도 아니라. (이사야 29:9)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취해 있습니다. 모든 묵시가 마치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이라. (이사야. 29:11) 누구에게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고 자기의 구원과 성결을 찾고 사모하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봉한 책입니다. 성경 말씀이 묻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고멜같은 내가,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리라 (호세아 2:19) 하시는 그 분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탕자가 돼지 방틀을 정리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므비보셋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말씀이 없이도 돌아가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와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못돌아갑니다. 이 성경 말씀이 봉한 책이 되면 못돌아갑니다. 이 성경 말씀이 고멜같은 나를, 탕자같은 나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모든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이 묵시가 묻혀 있으면, 비밀이 되어 있으면, 돌아가는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떤 교회나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비춰질 때에 그 말씀과 함께 돌아가는 법입니다. 그 말씀이 묻혀 있지 않고 내게 나타나서 내 마음을 울리고 내 심령을 울리고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끊고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해 주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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