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은 인간교육이다 (사39:5-8)
본문
유아세례를 받는 귀여운 자녀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의 마음에는 비록 제가 키우는 자녀들은 아니지만 사랑의교회에 소속된 귀한 어린 생명들이라 생각하니 '정말 잘 키워야 하겠구나' 하는 다짐이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제 우리의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고 교육시킬만한 곳은 교회와 예수를 믿는 신앙의 가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디에다 우리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겠습니까 3년이 멀다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교육 행정부에다가 우리 자녀들을 안심하고 맡기겠습니까 아니면 돈을 받아먹고 성적을 멋대로 조작하는 학교 당국에다 우리의 자녀들을 맡기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대학에 넣고 보자고 날뛰는 돌아버린 세상과 부모들의 손에 이 귀한 후손들을 안심하고 맡기겠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아직 양심이 살아있고 무엇이 참된 자녀교육인가를 바로 알고 있는 곳은 교회와 예수 믿는 가정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후 자녀를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 그 원리와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바로 받는 부모는 그 말씀대로 자녀를 교육할 수밖에 없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교회는 그 말씀대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배우고 가정에서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자녀를 맡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으며 우리 모두가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의식 우선 먼저 생각할 것은 올바른 자녀교육은 부모가 후 세대에 다음 세대를 위해 투철한 책임의식을 느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하는 투철한 책임의식이 있을 때 우리가 자녀교육을 바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이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대나라 왕 중에서 그런 대로 선한 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라고 평가받은 몇 안 되는 왕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라 안에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와 우상숭배를 청소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신한국'이 아니라 '신유대' 나라 건설을 위해 불철주야로 애썼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개혁작업에 있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끔찍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히스기야가 40대 초반 내지 중반쯤 된 때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종기가 난 것입니다(사38:21). 이것은 단순한 종기가 아니었습니다. 치명적인 종기, 곧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덩어리가 손에 잡힐 정도로 발전한 상태라서 이제는 어떠한 약을 써도 나을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로 죽음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38:1) 가정을 정리하고 유언할 모든 말을 생각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날벼락과 같은 통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신하들을 다 물러가게 한 후 혼자 방에 남아 벽을 향해 등을 돌리고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서 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들로 우상숭배의 악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왔는 지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매달렸습니다.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그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면서"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애절하게 매달리는 히스기야를 보시고 드디어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다시 보내서 "내가 네 눈물을 보고 네 기도를 들었노라. 네 소원대로 건강을 주마. 그리고 네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마. 그 뿐 아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적국 앗수르를 내가 막아서 네 생전에 앗수르로 인해서 나라가 침공을 당하거나 망하게 되지 않도록 내가 철저히 막아주겠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는 다시금 건강을 회복하고 일어났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국들로 퍼져갔습니다. 각국으로부터 축하 사절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신흥 제국으로서 주변국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던 바벨론 나라의 왕도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완쾌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을 보고 요즈음 우리 나라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누가 찾아 왔다하면 혼이 빠져 부산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황송하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해서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신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시키고 자랑을 했습니다. 유대 나라가 땅덩어리는 작지만 그래도 경제력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 창고 문을 활짝 열고 얼마나 많은 보화들이 쌓여 있는 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나라의 군사력도 과시하고 싶어서 무기고를 열어 모든 무기를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대접한 후 바벨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시며 그에게 무서운 재앙을 선고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네가 지금까지 자랑하던 것,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모든 보물을 이번에 온 바벨론 왕의 사신이 보고간 그대로 바벨론 왕이 와서 다 빼앗아 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사신들에게 구경시켜 준 것이 무슨 대단한 악이라고 하나님이 이토록 끔찍한 저주를 퍼부으실까요 우리가 겉으로 보아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엄밀하게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제 덤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루살이같이 자기의 어떤 건강이나 젊음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덤으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회복을 축하하는 사신들이 왔을 때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자랑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어야 했습니다. 그까짓 무기고나 보물 창고를 구경시키면서 자기 과시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려 주셔서 내가 다시 하늘의 태양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노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언반구 하지 않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근본이 잘못된 사람이라 판단하시고 그토록 엄청난 저주를 예언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끔찍한 저주를 들으면 두려움에 떨며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현대 번역으로 보면 이런 말입니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또 가르되 나의 생전에는 평강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현대 번역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전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손이야 포로로 끌려가 환관이 되든 말든, 나라가 나중에 망하든지 말든지 그게 자기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그저 앞으로 남은 15년 동안만이라도 전쟁이나 기근이 없고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말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서 받아서 키우는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 어떻게 자기 당대만 편안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자식들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망나니 같은 아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밑에서 어떻게 선한 자식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므낫세가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이어서 50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온 나라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왕들이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배가 이미 기울어져 물이 펑펑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는 그런 망나니 같은 자녀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만일 자녀의 장래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렇게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나는 어떻게 돼도 좋사오나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잘못했사오니 저주를 거두어 주옵소서. 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는 자기 몸에 난 병으로 인해서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벽을 향해 엎드려 등잔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통곡하고 기도했으면서도 자기 자녀의 운명과 나라의 장래를 놓고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기주의자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부모입니까 내가 범한 죄가 자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녀에게 무서운 정신적, 영적 피해를 끼쳐 그를 망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기도하는 부모입니까 아니면 '나는 나이고, 애들은 애들이다'하는 생각으로 자녀를 키우는, 자기밖에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입니까 가정의 행복과 건강과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모르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자랑하다가 자녀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을 낳았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책임을 지려고 몸부림을 쳐도 책임질 수 없는 자녀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녀 양육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 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어쨌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무책임한 부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절대로 자녀교육을 바로 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히스기야의 그 독한 더러운 균으로 의식이 오염된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님께서 깨끗하게 살균해주시고 우리를 다시금 새롭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책임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자녀를 지켜보고 책임 지는 그런 부모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녀교육은 인간교육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자녀교육은 곧 인간교육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를 교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지, 어떤 상품을 제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교육이지,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성공 못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 다와야 한다. 네가 아무리 잘 된다 해도 인간답지 못하면 네 인생은 실패작일 뿐이다."하고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라."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라."고 자녀들을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급인력일수록 자기 직업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불만족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교육 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자기 만족을 위해 자녀를 교육하는 경향이 너무 지나치다 보면 자녀 교육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부모들이 왜 그렇게 되어 갈까요 그것은 정신없이 변화되는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는 '우리들을 위해 오래 남아 있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일이면 또 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전문적인 기능공이라고 할 지라도, 또 뭔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나는 금새 바보가 되어 또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된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이삼십 년 동안 익혀서 그래도 자신 있게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불안이 점점 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거꾸로 마음의 불안을 더 고조시킵니다. 이럴수록 부모가 자녀교육을 자기 스트레스나 욕구불만을 푸는 수단으로 이용하게될 소지가 다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심리학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욕구 불만이나 자기의 스트레스를 푸는, 자기의 어떤 꿈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대타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향을 일컬어서 심리학적으로 '전위'(displacement)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전위'를 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감사와 강아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뇌물이 많이 들어올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했던 평양감사가 뇌물을 조사해 보고는 도무지 양에 차지를 않았습니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그는 원님을 불러놓고 어떻게 일을 했기에 이것밖에 안 들어왔냐고 마구 몰아 세웠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힘을 다해서 해도 안 되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고 기분이 좀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분을 감사한테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밑에 있는 이방에게 가서 한바탕 했습니다. 이방은 이방 나름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호통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원님한테 풀 수는 없고, 그 대신 집에 돌아가서 여편네를 불러 놓고 한바탕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여편네는 여편네대로 생각할수록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잔소리를 한참 퍼부었습니다.
며느리 역시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한테 대드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해서 투덜투덜 대며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강아지가 자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넙죽하게 엎드러져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괜히 부화가 치밀어서 강아지의 배를 냅다 걷어차면서 "이놈의 개새끼는 왜 맨날 여기 와서 자느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것이 소위 '평양감사와 강아지'라는 속담입니다. 감사의 욕구 불만이 전위에 전위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은 부엌에서 잠자고 있는 죄 없는 강아지까지 손해를 본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위가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과시에 대한 욕구불만을 나이 어린 자녀를 무대 위에 스타로 올려놓음으로써, 혹은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만들고, 일류 대학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자격지심을 해소해 보려는 보상의식이 부모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는 부모가 불만스런 자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성공이요 행복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의 가치관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훌륭한 사람은 곧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녀에게 주입시킵니다. 내신성적 1등급에 일류대학, 인기학과, 고속승진, 이런 것들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며, 따라서 부모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이미 끝난 인생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오늘날의 학교교육을 일컬어 일렬로 서 있는 빈 병들이 힘없이 돌아가고 있는 칠성사이다 공장의 생산라인에다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그 공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빈 병들이 생산라인 위에 즐비하게 열을 이루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병에 사이다를 가득 채우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마개를 막고, 또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 다음 후속 작업을 합니다. 어느 병도 예외가 없습니다. 똑같은 생산라인을 따라서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똑같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병이 흔들려서 사이다가 반쯤 채워진 병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불량품으로 처리됩니다. 그런 불량품이 많아지면 위에서는 품질 관리를 잘하라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학교교육이 바로 이와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각자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개인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학생들을 똑같은 규격의 빈 병처럼 다룹니다. 개인차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공부 잘하는 것만 유일한 기준으로 취급합니다. 오늘날 학교가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만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는데도 잘 못 따라오거나 성적이 나쁘면 무조건 불량품 취급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공장식 학교교육은 부모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성적이 나쁘면 불량품 취급을 합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부모를 실망시키는 불효자요, 미래가 없는 인생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부모들은 학교 성적과 대학 입학을 자녀의 인간 됨을 좌우하는 절대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인식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은 하나의 상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아래서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되는 것보다 점수를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은 내가 사람답게 살기 보다 남보다 앞서는 똑똑함을 과시하기를 바라시는구나'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자기 점수를 올려 주려고 선생님에게 돈 봉투를 전해주는 우리 엄마, 참 고마운 분이다'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커닝을 해서라도 일단 점수를 올려놓고 보자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조건인 이상, 돈 가진 부모가 다른 학생을 떨어뜨리고 돈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 눈앞에 공개된 여러 가지 교육비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를 욕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수치요, 책임이라고 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어느 의사 부부의 답안지 유출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적어도 의사라고 하면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공부도 할만큼 했고, 사회에서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기 자식들을 대학에 넣겠다고 돈으로 성적 답안지를 유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안지를 자식에게 던져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라. 그러나 너무 잘 쳐서 의심받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해라."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부모가 던져준 그 답안지를 들고 열심히 외우고 있는 자식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될 지 한번 상상을 해보시란 말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렇게 교육받은 자녀 마음에 도덕이나 윤리, 양심, 인간다움이 설자리가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난 후 학교에 가서 제발 퇴학만 시키지 말아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느끼고, 누가 뭐라고 말하기 이전에 조용히 물러났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제발 퇴학만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벌써 가치관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런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점수로 보고, 좋은 대학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통해 자기 만족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이웃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에 대해 은근히 희열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이 많은 사람 앞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행복이요 세상사는 기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부모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변질된 마당에 그 자녀들의 가치관이 성하게 남아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토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도전 행위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자녀를 사람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인간의 최고 가치는 창조자가 되시고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받은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라 살다가 자녀를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벌써부터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께는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늙어서 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합니까 왜 자녀들이 그렇게 냉정하고, 부모를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홀대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사람으로 바로 양육했더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잘 양육했는데 며느리가 못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며느리를 키운 부모가 잘못한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저 좋아서 춤을 추고, 성적 오르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사 주면서 키우다 보니 자랑스러운 상품은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를 지금 늙어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런 꼴이 되면 이 나라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이 세계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그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교육 풍토를 향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자식은 점수로 우열을 매기는 상품으로 만들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소리쳐야 합니다. 말씀 교육이 인간 교육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마땅히 행할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순종하는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성장하고 나중에 늙어서도 마땅히 행할 그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평생 교육"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이것만큼 확실한 평생교육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면 그 자녀가 늙어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을 평생 잊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격으로 살아가는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만 키우는 햇수가 많아질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게 바로 이 자녀교육입니다. 제가 평소에 자녀교육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해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교육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끔 저는 주일 날 저녁에 가정예배 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좀 힘이 들어 그렇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잘 안 맞기 때문입니다. 한 7시쯤 되어 "얘들아, 우리 가정예배 좀 드리자. 이리 오너라." 하면 막내 놈이 투정을 합니다. "아빠, 11시 반 3부 예배 참석해서 예배드리고 대학부 들어가서 6시에 마치고 이제 왔는데 또 예배예요" 맞는 말입니다.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배우고 예배 드렸는데 또 무슨 예배냐는 것입니다. 또 큰놈은 큰놈대로 "우리는 토요일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요. 그리고 4부 예배 들어갔다가 성가대하고 5시에 왔는데 또 예배를 드려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목사 가정인데 어떻게 자식들의 핑계 앞에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애들이 "'예배', '예배' 하지 말고 좀 자유롭게 이야기도 하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하기에 제가 막내 놈을 앞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할거야.뭐라고 했는데요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어. 신명기 6장 6절 말씀 기억나나니 한번 펴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니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 다음을 계속 읽어 봐.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잖니 그러니까 오후에 대학부 갔다와도 그게 핑계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너희들을 가르쳐야 되고 우리 가정은 예배를 드려야 돼." 그래서 아이들을 이긴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자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형편 생각해주고 또 여러 가지를 고려해 주다 보면 자녀들과 함께 말씀을 놓고 앉을 시간이 일 주일에 몇 번은 고사하고 한번도 없을 가능성이 목사 집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등한히 하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자녀를 말씀으로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잔소리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부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그래도 예수 잘 믿는다고 소문도 나고 순장을 할 정도면 참 믿음이 좋은 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집안에도 가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자녀가 중학교 3학년이 되거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주일이 되어도 교회를 잘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나 교역자가 한두 주가 지나도 안나오니까 염려가 되어 전화를 해 본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애가 몇 주 째 안 나왔어요. 다음 주에는 꼭 좀 보내 주세요. 아픈 것은 아니죠"하고 안부전화를 하면 그 부모가 당장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지금 우리 애가 3학년이잖아요 금년에는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공부해야지요. 지금 성적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주일 날 교회 못나가도 올 한 해만 양해해 주세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 했을까 하고 한편으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면 자녀에게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다. '신앙생활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 성적을 올리는 것이 주일 학교에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벌써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자녀가 자라서 나중에 어떻게 될 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부모가 희생을 치르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얘야, 오늘은 주일이야. 교회 가야 한다. 만약 네가 교회 가서 예배드리느라 성적이 떨어진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함으로 받을게. 너 성적 떨어져도 좋아. 너 어떻게 하다가 대학에 실패해도 좋아.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라.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단다." 사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분반 모임을 하고 하다 보면 마음이 들떠서 집에 돌아가서도 한참 동안 공부가 안됩니다. 그러다 보면 주일은 공부를 못하고 그냥 보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공부를 안 한 만큼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부모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말한다고 해 보십시오. "너 주일날 신앙생활 하느라고 영향을 좀 받았구나. 그러나 나는 참 감사한다. 네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감수했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참 대견스럽다." 자녀에게 그 부모가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 부모님은 사람되는 것,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 하는 인식이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자녀가 배우게 됩니다. "얘야, 예수는 평생 믿는 것 아니냐 하지만 공부는 일년 하는 거야. 일년 해서 네 운명이 좌우되는 거야. 이놈아."하고 악을 쓰고 달려들면 자녀의 성적이 조금 올라갈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특수 고등학교도 붙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에는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는 치명적인 상처가 남습니다. '예수는 평생 믿을 거고 공부는 일년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다음에 직장에 들어가서도 '내가 과장되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 것도 한 일 년 하면 되는 거지. 예수는 평생 믿을 거 아니냐'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자녀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참 아름다운 집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에 못 다니신 분이고, 그의 아내 역시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그 집사님의 한이요, 평생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아들들은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기계를 가지고 뜯었다가 다시 맞추고 하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부부는 자식이 그런 것을 흥미 있어 하는 것을 보고 대학에 보낼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녀를 공업고등학교로 진학시켰습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서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얼마나 신나게 사는 지 모릅니다. 그 자식들이 얼마나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아름답게 자라는지, 또 그 부모도 얼마나 떳떳하게 자식들을 대하는지를 제가 볼 때 참 놀라운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생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자녀가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희생인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스위스에 사는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만 되면 대학 갈 아이와 평생 직업을 가질 아이가 딱 갈라진다고 합니다. 아예 학교에서 이렇게 분리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1년 동안만 서로 다른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의 진로를 결정하는 최고 결정자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서는 부모도 거역을 못한다고 합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은 고급 직업을 가진 이웃이 있는데, 그의 자녀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아이는 대학 가는 것을 포기하셔야겠습니다. 직업전선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이에 대해 그 부모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항상 얼굴이 평안이 넘치고, 자녀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이 그 부모 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자녀가 그렇게 마음에 실망을 주어도 상처가 안됩니까" 그랬더니 그 부모는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만 에요. 자식 역시 하나님께 받은 대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어깁니까 내가 공부 많이 했다해서 꼭 공부 많이 시켜야 될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장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부모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으이그 이 놈아, 내가 너 만할 때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아니 우등상은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디서 너 같은 놈이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냐" 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면 자녀가 설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로서는 태어난 것 자체가 한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날 낳으라고 그랬나'하고 반발심만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를 그런 식으로 키우면 안 됩니다. 설사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한다 할 지라도 "야, 너 공부 못한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어.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거야. 하나님은 너에게 다른 좋은 점들을 많이 주셨지 않니 네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내가 밀어줄께. 대학 못 가도 괜찮아. 걱정하지마." 하고 말한다면 벌써 부모가 자녀 앞에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 우리 부모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정말 중요시하시는구나.' 하고 부모님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 전에 나온 '우리'지에서 읽으셨을 줄 압니다만, 어떤 집사님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공부가 신통하지 않았는지 몹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을 찾아가야 되나 찾아가지 말아야 하나'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은 찾아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키우면 세상 아이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우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세상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셔야 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어떤 방법에 따라서 키우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간을 창조하셔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후 자녀를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지, 그 원리와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바로 받는 부모는 그 말씀대로 자녀를 교육할 수밖에 없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교회는 그 말씀대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배우고 가정에서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야말로 오늘 이 시대에 자녀를 맡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으며 우리 모두가 부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의식 우선 먼저 생각할 것은 올바른 자녀교육은 부모가 후 세대에 다음 세대를 위해 투철한 책임의식을 느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다음 세대를 내가 책임지겠다.' 하는 투철한 책임의식이 있을 때 우리가 자녀교육을 바로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이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대나라 왕 중에서 그런 대로 선한 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 3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이라고 평가받은 몇 안 되는 왕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라 안에 만연하고 있던 부정부패와 우상숭배를 청소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신한국'이 아니라 '신유대' 나라 건설을 위해 불철주야로 애썼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개혁작업에 있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끔찍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히스기야가 40대 초반 내지 중반쯤 된 때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종기가 난 것입니다(사38:21). 이것은 단순한 종기가 아니었습니다. 치명적인 종기, 곧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덩어리가 손에 잡힐 정도로 발전한 상태라서 이제는 어떠한 약을 써도 나을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로 죽음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38:1) 가정을 정리하고 유언할 모든 말을 생각하라는 마지막 통보를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날벼락과 같은 통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신하들을 다 물러가게 한 후 혼자 방에 남아 벽을 향해 등을 돌리고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서 이 나라를 새롭게 하고, 백성들로 우상숭배의 악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 왔는 지 주님께서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저를 데려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매달렸습니다.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그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면서"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애절하게 매달리는 히스기야를 보시고 드디어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이사야를 다시 보내서 "내가 네 눈물을 보고 네 기도를 들었노라. 네 소원대로 건강을 주마. 그리고 네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마. 그 뿐 아니다. 네가 두려워하는 적국 앗수르를 내가 막아서 네 생전에 앗수르로 인해서 나라가 침공을 당하거나 망하게 되지 않도록 내가 철저히 막아주겠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히스기야는 다시금 건강을 회복하고 일어났습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국들로 퍼져갔습니다. 각국으로부터 축하 사절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신흥 제국으로서 주변국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던 바벨론 나라의 왕도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완쾌된 것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을 보고 요즈음 우리 나라 지도자들이 미국에서 누가 찾아 왔다하면 혼이 빠져 부산을 떠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황송하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해서 정신을 잃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신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구경을 시키고 자랑을 했습니다. 유대 나라가 땅덩어리는 작지만 그래도 경제력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 창고 문을 활짝 열고 얼마나 많은 보화들이 쌓여 있는 지도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나라의 군사력도 과시하고 싶어서 무기고를 열어 모든 무기를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대접한 후 바벨론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시며 그에게 무서운 재앙을 선고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네가 지금까지 자랑하던 것,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모든 보물을 이번에 온 바벨론 왕의 사신이 보고간 그대로 바벨론 왕이 와서 다 빼앗아 가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재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네게서 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사신들에게 구경시켜 준 것이 무슨 대단한 악이라고 하나님이 이토록 끔찍한 저주를 퍼부으실까요 우리가 겉으로 보아서는 그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엄밀하게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제 덤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루살이같이 자기의 어떤 건강이나 젊음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 덤으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회복을 축하하는 사신들이 왔을 때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자랑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어야 했습니다. 그까짓 무기고나 보물 창고를 구경시키면서 자기 과시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살려 주셔서 내가 다시 하늘의 태양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노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언반구 하지 않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근본이 잘못된 사람이라 판단하시고 그토록 엄청난 저주를 예언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끔찍한 저주를 들으면 두려움에 떨며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현대 번역으로 보면 이런 말입니다. "그대가 전하여 준 주의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거역하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또 가르되 나의 생전에는 평강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현대 번역을 보면 보다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살아있을 동안만이라도 평화와 안전이 계속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손이야 포로로 끌려가 환관이 되든 말든, 나라가 나중에 망하든지 말든지 그게 자기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그저 앞으로 남은 15년 동안만이라도 전쟁이나 기근이 없고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말에서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서 받아서 키우는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책임지는 왕으로서, 어떻게 자기 당대만 편안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런 발상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자식들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망나니 같은 아버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밑에서 어떻게 선한 자식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므낫세가 누구입니까 그는 아버지를 이어서 50년 동안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온 나라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그 후에 일어난 왕들이 나라를 바로잡아 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배가 이미 기울어져 물이 펑펑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 무책임한 아버지 밑에서는 그런 망나니 같은 자녀가 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만일 자녀의 장래와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이렇게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나는 어떻게 돼도 좋사오나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잘못했사오니 저주를 거두어 주옵소서. 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그는 자기 몸에 난 병으로 인해서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벽을 향해 엎드려 등잔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통곡하고 기도했으면서도 자기 자녀의 운명과 나라의 장래를 놓고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기주의자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부모입니까 내가 범한 죄가 자손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녀에게 무서운 정신적, 영적 피해를 끼쳐 그를 망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면서 기도하는 부모입니까 아니면 '나는 나이고, 애들은 애들이다'하는 생각으로 자녀를 키우는, 자기밖에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입니까 가정의 행복과 건강과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모르고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자랑하다가 자녀들의 정신상태를 완전히 망쳐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식을 낳았으면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물론 아무리 책임을 지려고 몸부림을 쳐도 책임질 수 없는 자녀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녀 양육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자신 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교육이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어쨌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무책임한 부모,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절대로 자녀교육을 바로 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히스기야의 그 독한 더러운 균으로 의식이 오염된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님께서 깨끗하게 살균해주시고 우리를 다시금 새롭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책임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자녀를 지켜보고 책임 지는 그런 부모가 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녀교육은 인간교육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자녀교육은 곧 인간교육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를 교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지, 어떤 상품을 제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교육이지, 세상에서 성공하라고 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성공 못해도 좋다. 하지만 사람 다와야 한다. 네가 아무리 잘 된다 해도 인간답지 못하면 네 인생은 실패작일 뿐이다."하고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되라."가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하라."고 자녀들을 몰아 붙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급인력일수록 자기 직업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불만족을 보상하는 수단으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교육 심리학자들은 부모가 자기 만족을 위해 자녀를 교육하는 경향이 너무 지나치다 보면 자녀 교육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부모들이 왜 그렇게 되어 갈까요 그것은 정신없이 변화되는 사회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연중에 우리는 '우리들을 위해 오래 남아 있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일이면 또 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전문적인 기능공이라고 할 지라도, 또 뭔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나는 금새 바보가 되어 또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된다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이삼십 년 동안 익혀서 그래도 자신 있게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불안이 점점 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스트레스는 거꾸로 마음의 불안을 더 고조시킵니다. 이럴수록 부모가 자녀교육을 자기 스트레스나 욕구불만을 푸는 수단으로 이용하게될 소지가 다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심리학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욕구 불만이나 자기의 스트레스를 푸는, 자기의 어떤 꿈을 대신 이루어줄 수 있는 대타로 자녀를 이용하는 경향을 일컬어서 심리학적으로 '전위'(displacement)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도 '전위'를 말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평양감사와 강아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뇌물이 많이 들어올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했던 평양감사가 뇌물을 조사해 보고는 도무지 양에 차지를 않았습니다.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 그는 원님을 불러놓고 어떻게 일을 했기에 이것밖에 안 들어왔냐고 마구 몰아 세웠습니다. 그러자 원님은 '힘을 다해서 해도 안 되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고 기분이 좀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분을 감사한테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밑에 있는 이방에게 가서 한바탕 했습니다. 이방은 이방 나름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호통에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원님한테 풀 수는 없고, 그 대신 집에 돌아가서 여편네를 불러 놓고 한바탕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여편네는 여편네대로 생각할수록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잔소리를 한참 퍼부었습니다.
며느리 역시 기분이 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한테 대드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해서 투덜투덜 대며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강아지가 자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넙죽하게 엎드러져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괜히 부화가 치밀어서 강아지의 배를 냅다 걷어차면서 "이놈의 개새끼는 왜 맨날 여기 와서 자느냐"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것이 소위 '평양감사와 강아지'라는 속담입니다. 감사의 욕구 불만이 전위에 전위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은 부엌에서 잠자고 있는 죄 없는 강아지까지 손해를 본 것입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위가 오늘날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하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과시에 대한 욕구불만을 나이 어린 자녀를 무대 위에 스타로 올려놓음으로써, 혹은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만들고, 일류 대학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자격지심을 해소해 보려는 보상의식이 부모들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자녀는 부모가 불만스런 자아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는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성공이요 행복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기 때문에 자녀의 가치관을 왜곡시켜 버립니다. '훌륭한 사람은 곧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자녀에게 주입시킵니다. 내신성적 1등급에 일류대학, 인기학과, 고속승진, 이런 것들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며, 따라서 부모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이미 끝난 인생이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오늘날의 학교교육을 일컬어 일렬로 서 있는 빈 병들이 힘없이 돌아가고 있는 칠성사이다 공장의 생산라인에다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 그 공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빈 병들이 생산라인 위에 즐비하게 열을 이루어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병에 사이다를 가득 채우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마개를 막고, 또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 다음 후속 작업을 합니다. 어느 병도 예외가 없습니다. 똑같은 생산라인을 따라서 똑같은 과정을 통해서 똑같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병이 흔들려서 사이다가 반쯤 채워진 병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불량품으로 처리됩니다. 그런 불량품이 많아지면 위에서는 품질 관리를 잘하라고 불호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학교교육이 바로 이와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각자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개인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개성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학생들을 똑같은 규격의 빈 병처럼 다룹니다. 개인차 따위는 아예 무시하고 공부 잘하는 것만 유일한 기준으로 취급합니다. 오늘날 학교가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만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는데도 잘 못 따라오거나 성적이 나쁘면 무조건 불량품 취급을 당합니다. 이와 같은 공장식 학교교육은 부모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성적이 나쁘면 불량품 취급을 합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은 부모를 실망시키는 불효자요, 미래가 없는 인생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녀가 어떤 인간이 되는가 하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부모들은 학교 성적과 대학 입학을 자녀의 인간 됨을 좌우하는 절대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인식을 강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자녀들은 하나의 상품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아래서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되는 것보다 점수를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은 내가 사람답게 살기 보다 남보다 앞서는 똑똑함을 과시하기를 바라시는구나'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자기 점수를 올려 주려고 선생님에게 돈 봉투를 전해주는 우리 엄마, 참 고마운 분이다'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커닝을 해서라도 일단 점수를 올려놓고 보자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조건인 이상, 돈 가진 부모가 다른 학생을 떨어뜨리고 돈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 눈앞에 공개된 여러 가지 교육비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를 욕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수치요, 책임이라고 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어느 의사 부부의 답안지 유출 사건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적어도 의사라고 하면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추앙을 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공부도 할만큼 했고, 사회에서 엘리트계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이 자기 자식들을 대학에 넣겠다고 돈으로 성적 답안지를 유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답안지를 자식에게 던져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라. 그러나 너무 잘 쳐서 의심받지 않도록 알아서 잘 해라."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부모가 던져준 그 답안지를 들고 열심히 외우고 있는 자식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될 지 한번 상상을 해보시란 말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렇게 교육받은 자녀 마음에 도덕이나 윤리, 양심, 인간다움이 설자리가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은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난 후 학교에 가서 제발 퇴학만 시키지 말아달라고 매달렸다고 합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느끼고, 누가 뭐라고 말하기 이전에 조용히 물러났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제발 퇴학만은 시키지 말아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벌써 가치관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런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식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점수로 보고, 좋은 대학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통해 자기 만족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이웃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에 대해 은근히 희열을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자신이 많은 사람 앞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행복이요 세상사는 기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구조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부모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변질된 마당에 그 자녀들의 가치관이 성하게 남아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토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도전 행위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자녀를 사람되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인간의 최고 가치는 창조자가 되시고 온 우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받은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라 살다가 자녀를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그 대가를 톡톡하게 치르게 될 것입니다. 아니 벌써부터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께는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습니다만 한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늙어서 왜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합니까 왜 자녀들이 그렇게 냉정하고, 부모를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홀대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를 사람으로 바로 양육했더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아들은 잘 양육했는데 며느리가 못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며느리를 키운 부모가 잘못한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저 좋아서 춤을 추고, 성적 오르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사 주면서 키우다 보니 자랑스러운 상품은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를 지금 늙어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가 그런 꼴이 되면 이 나라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이 세계가 그 대가를 받게 되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그 피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교육 풍토를 향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자식은 점수로 우열을 매기는 상품으로 만들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하여 순종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소리쳐야 합니다. 말씀 교육이 인간 교육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6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마땅히 행할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순종하는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성장하고 나중에 늙어서도 마땅히 행할 그 길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즈음 "평생 교육"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이것만큼 확실한 평생교육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면 그 자녀가 늙어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을 평생 잊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격으로 살아가는 귀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 역시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만 키우는 햇수가 많아질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게 바로 이 자녀교육입니다. 제가 평소에 자녀교육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입니다. 자녀교육에 대해 자신 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교육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가끔 저는 주일 날 저녁에 가정예배 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좀 힘이 들어 그렇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잘 안 맞기 때문입니다. 한 7시쯤 되어 "얘들아, 우리 가정예배 좀 드리자. 이리 오너라." 하면 막내 놈이 투정을 합니다. "아빠, 11시 반 3부 예배 참석해서 예배드리고 대학부 들어가서 6시에 마치고 이제 왔는데 또 예배예요" 맞는 말입니다. 하루종일 교회에 가서 배우고 예배 드렸는데 또 무슨 예배냐는 것입니다. 또 큰놈은 큰놈대로 "우리는 토요일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요. 그리고 4부 예배 들어갔다가 성가대하고 5시에 왔는데 또 예배를 드려요"하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목사 가정인데 어떻게 자식들의 핑계 앞에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애들이 "'예배', '예배' 하지 말고 좀 자유롭게 이야기도 하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자"고 하기에 제가 막내 놈을 앞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할거야.뭐라고 했는데요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어. 신명기 6장 6절 말씀 기억나나니 한번 펴봐.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니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 다음을 계속 읽어 봐.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했잖니 그러니까 오후에 대학부 갔다와도 그게 핑계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너희들을 가르쳐야 되고 우리 가정은 예배를 드려야 돼." 그래서 아이들을 이긴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자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형편 생각해주고 또 여러 가지를 고려해 주다 보면 자녀들과 함께 말씀을 놓고 앉을 시간이 일 주일에 몇 번은 고사하고 한번도 없을 가능성이 목사 집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등한히 하면 큰 일 납니다. 우리가 자녀를 말씀으로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잔소리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신부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워서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그래도 예수 잘 믿는다고 소문도 나고 순장을 할 정도면 참 믿음이 좋은 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집안에도 가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자녀가 중학교 3학년이 되거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주일이 되어도 교회를 잘 안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들이나 교역자가 한두 주가 지나도 안나오니까 염려가 되어 전화를 해 본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애가 몇 주 째 안 나왔어요. 다음 주에는 꼭 좀 보내 주세요. 아픈 것은 아니죠"하고 안부전화를 하면 그 부모가 당장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지금 우리 애가 3학년이잖아요 금년에는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공부해야지요. 지금 성적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주일 날 교회 못나가도 올 한 해만 양해해 주세요." 얼마나 답답하면 그렇게 했을까 하고 한편으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면 자녀에게 한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자리잡게 됩니다. '신앙생활보다 공부가 더 중요하다. 성적을 올리는 것이 주일 학교에 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 벌써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자녀가 자라서 나중에 어떻게 될 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부모가 희생을 치르는 것을 보여줘야 됩니다.
"얘야, 오늘은 주일이야. 교회 가야 한다. 만약 네가 교회 가서 예배드리느라 성적이 떨어진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함으로 받을게. 너 성적 떨어져도 좋아. 너 어떻게 하다가 대학에 실패해도 좋아. 주일날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겨라.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단다." 사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분반 모임을 하고 하다 보면 마음이 들떠서 집에 돌아가서도 한참 동안 공부가 안됩니다. 그러다 보면 주일은 공부를 못하고 그냥 보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공부를 안 한 만큼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부모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말한다고 해 보십시오. "너 주일날 신앙생활 하느라고 영향을 좀 받았구나. 그러나 나는 참 감사한다. 네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감수했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참 대견스럽다." 자녀에게 그 부모가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 부모님은 사람되는 것,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구나.' 하는 인식이 깊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자녀가 배우게 됩니다. "얘야, 예수는 평생 믿는 것 아니냐 하지만 공부는 일년 하는 거야. 일년 해서 네 운명이 좌우되는 거야. 이놈아."하고 악을 쓰고 달려들면 자녀의 성적이 조금 올라갈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특수 고등학교도 붙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의 마음에는 평생을 두고 지워지지 않는 치명적인 상처가 남습니다. '예수는 평생 믿을 거고 공부는 일년 하는 거야.' 그래서 그 다음에 직장에 들어가서도 '내가 과장되기 위해서 이렇게 애쓰는 것도 한 일 년 하면 되는 거지. 예수는 평생 믿을 거 아니냐'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자녀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참 아름다운 집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에 못 다니신 분이고, 그의 아내 역시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 그 집사님의 한이요, 평생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아들들은 공부에는 별로 취미가 없습니다. 기계를 가지고 뜯었다가 다시 맞추고 하는 것만 좋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달란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부부는 자식이 그런 것을 흥미 있어 하는 것을 보고 대학에 보낼 생각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녀를 공업고등학교로 진학시켰습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와서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며 얼마나 신나게 사는 지 모릅니다. 그 자식들이 얼마나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아름답게 자라는지, 또 그 부모도 얼마나 떳떳하게 자식들을 대하는지를 제가 볼 때 참 놀라운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희생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서 자식을 키우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자녀가 내 욕심대로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희생인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스위스에 사는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만 되면 대학 갈 아이와 평생 직업을 가질 아이가 딱 갈라진다고 합니다. 아예 학교에서 이렇게 분리시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1년 동안만 서로 다른 교육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의 진로를 결정하는 최고 결정자는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서는 부모도 거역을 못한다고 합니다.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은 고급 직업을 가진 이웃이 있는데, 그의 자녀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아이는 대학 가는 것을 포기하셔야겠습니다. 직업전선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이에 대해 그 부모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항상 얼굴이 평안이 넘치고, 자녀들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이 그 부모 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자녀가 그렇게 마음에 실망을 주어도 상처가 안됩니까" 그랬더니 그 부모는 오히려 그런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천만 에요. 자식 역시 하나님께 받은 대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어깁니까 내가 공부 많이 했다해서 꼭 공부 많이 시켜야 될 자식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보장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부모들과는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으이그 이 놈아, 내가 너 만할 때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아니 우등상은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디서 너 같은 놈이 태어나 가지고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주냐" 하고 소리를 냅다 지르면 자녀가 설 곳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로서는 태어난 것 자체가 한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날 낳으라고 그랬나'하고 반발심만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녀를 그런 식으로 키우면 안 됩니다. 설사 자녀가 공부를 잘 못한다 할 지라도 "야, 너 공부 못한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어. 다른 뜻이 있어 그런 거야. 하나님은 너에게 다른 좋은 점들을 많이 주셨지 않니 네가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내가 밀어줄께. 대학 못 가도 괜찮아. 걱정하지마." 하고 말한다면 벌써 부모가 자녀 앞에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 우리 부모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정말 중요시하시는구나.' 하고 부모님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방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 전에 나온 '우리'지에서 읽으셨을 줄 압니다만, 어떤 집사님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 놓고 공부가 신통하지 않았는지 몹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을 찾아가야 되나 찾아가지 말아야 하나'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은 찾아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키우면 세상 아이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우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세상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선택하셔야 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어떤 방법에 따라서 키우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의 방법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대답을 들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