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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에서 진노로 (호2:2-13)

본문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질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질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질투의 차원을 넘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상 바알에게 정신을 팔고 살아가는 백성들을 타이르시고 달래도 보았지만 막무가내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 백성들에게 이제는 진노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질투하시다가 나중에는 그 질투가 분노로 변하고 진노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2: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 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우상을 따라가면 그 우상이 내게 떡을 주고 물을 주고 양털을 주고 포두주를 준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탈선의 원인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무당을 찾아가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 우상이 유익을 주고 복을 주고 일이 잘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싸들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던 사람이 어느 날 이단으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곳에 가면 육신적으로 훨씬 유익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익이 없으면 사람들이 가질 않습니다. 예전의 오대양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신앙생활도 할 수 있고 물질의 혜택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교주가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빚을 모두 갚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교주가 분명 구세주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그러다가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돈을 들여놓게 했습니다. 이자를 5부씩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돈을 싸들고 들어갔습니다. 나중에는 남의 돈까지 빌려다가 3부는 돈 주인에게 주고 나머지 2부 이자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신앙생활도 하고 돈도 벌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장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고 몰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오대양 사건의 배경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어디 가면 병이 낫는다더라 하면 그리로 몰려갑니다. 어디를 가면 신령하다더라 하면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바로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뭔가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탈선의 원인입니다. 고멜이라는 여인이 가정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습니다. 내 남편이 주지 못하는 것을 그 남자가 주는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내 남편은 무능해서 주지 못하는 떡과 물과 양털과 기름을 그 남자는 주는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가기만 하면 수지맞는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탈선의 원인입니다. 이렇게 이해 관계에 따라서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은 부부 사이에 갈등이 많고 불화가 많아서 가정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결혼할 때 이미 그 갈등의 원인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삭람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을 보지 않고 환경을 먼저 보고 입지나 배경을 우선 고려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곳에 이미 불화나 갈등의 요소가 잉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배경이나 입지나 환경이 영원합니까 살다 보면 그런 것들은 어느 순간 날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조건들이 순간적으로 상실되고 없어져 버리면 곧바로 갈등이 시작됩니다. 조건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무슨 힘으로 관계를 지탱할 것입니까 그러니까 가정들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가지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익 공동체입니다.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노사 관계입니다. 노(勞) 돈을 많이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회사에 나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노동자들이 노사 협상을 벌이면서 극렬하게 투쟁하는 이유도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사(使)는 돈을 가능하면 적게 주려고 합니다. 그래야 이익이 많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은 많이 시키고 돈은 적게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노사 관계는 언제나 긴장되고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이익 공동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정신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뭉쳐진 관계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가정입니다. 가정은 이익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정은 돈을 목적으로 해서 가꾸고 운영하고 일하고 봉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 주었다고 보수를 받고 품삯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낳아 20년 동안 기르느라고 투자하고 희생하고 밤잠을 설치고 정력을 낭비했으니 너는 그것을 계산해서 갚아라.” 하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데 수고비를 받지는 않습니다. 자식은 무조건 낳아서 기르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정신 공동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일은 정신 공동체의 차원을 넘어선 영적 공동체입니다. 영적 공동체는 유익을 찾아 따라다녀서는 안 됩니다. 이 교회를 가야 저 교회보다 빨리 장로가되고 내게 유익하겠다 하고 옮겨 다니는 것은 이익 공동체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부처님을 믿는 것이 더 유리하겠다 해서 옮기는 것도 이익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녀 고멜의 인생관입니다. 적어도 신앙에는 이런 이익 지향적인 의도는 없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이 그렇게 움직여진다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에게로 갔습니다. 바알에게로 가면 떡도 주고 물도 주고 양털도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보다 더 유리하고 이익이 많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단순한 이익 공동체입니다.
2. 그렇게 떠나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이번에는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무섭게 진노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노하셔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떠나는 백성들 앞에 가서 울타리를 쳐서 바알에게로 가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노래가 생각납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 심정은 바로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에게로 갑니다.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래서 그 길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가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갑자기 앞길에 가시 울타리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길이 콱 막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랍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이익을 찾아갈 때입니다. 세상을 제멋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앞길에 가시 울타리를 쳐서 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평안하던 길이 막히고 장애물이 생기고 사고가 나고 병이 나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터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시험 들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시험이 아니고 하나님의 길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치고 장애물을 설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데도 앞길이 훤히 뚫려서 형통하다면 그것은 무서운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길을 계속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곧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가다가 망하라고 그냥 놓아 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앞길을 막으시고 가시 울타리를 쳐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아이들이 탈선을 해서 잘못된 길로 자꾸 갑니다. 부모라면 그 아이를 그냥 놓아두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못 가게 꾸중하고 말리고 붙잡아 가두기도 하고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간섭이고 관찰입니다. 그렇게 길을 막으면 나타나는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빽을 동원하고 뇌물을 바쳐 가면서 일이 되도록 만들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빨리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실패하고 망하고 나서 손을 듭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포기해 버립니다. 술을 퍼마십니다. 그리고 폐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재빨리 알아차립니다. “그 동안 내가 너무 편안만 추구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구나” 하며 회개하고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가시 울타리라는 것을 알아 차립니다. 그리고 “에라, 될 대로 되라”가 아니고 “에라, 예수나 믿자” 하고 돌아옵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3. 이 백성드이 자꾸만 우상한테로 갑니다. 가면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는 줄 압니다. 그때 하나님이 앞길을 막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데 이 백성들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호2:7)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이 백성들이 그 앞길에 울타리를 쳐 놓으니까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려 합니다. 좋아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가다 보니 길이 막혀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있자니 고생스럽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바로 타협 신앙입니다. 이것이 이해 타산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이런 신앙인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매주일 꼬박 꼬박 교회에 나가자니 억울합니다. 그래서 가끔 주일날 예배를 빼먹고 등산을 갑니다. 가서 놀자니 마음이 하루종일 꺼림칙합니다.
이렇게 교회 빠지고 놀다가 넘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지는 것아닌가 해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타협을 합니다. 주일날 예배도 안 드리고 등산을 갔으니 혹시 사고라도 날까 걱정되어 기도나 하고 놀자고 간단하게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나면 훨씬 위로가 됩니다. 찬송도 짧은 것으로 1절만 부르고 기도하면 한결 더 위로가 됩니다. 그보다 더 위로를 받으려면 월요일날 새벽기도에 나오면 됩니다. 그러면 어제의 불안을 일거에 떨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타협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서 무슨 꽃이 피고 무슨 예쁘고 탐스럽고 향기로운 열매가 맺히겠습니까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골병 드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그 부모가 하는 모습 그대로 따라 배우고 그대로 흉내 냅니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하나님은 나무라십니다. “(호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 인간의 무지를 나무라십니다. 하나님이 먹을 것도 주고 입을 것도 주고 마실 것도 주었는데 이 백성들이 그것을 바알이 준 것인 줄 잘못 알고 있다고 꾸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화가 나셨습니다. “(호2: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 지금까지 베풀었던 은혜를 모두 거두어 들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양식도 빼앗고 물도 빼앗고 심지어는 치부를 가린 옷까지도 빼앗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서 옷을 벗겨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창피를 주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가릴 곳은 가려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가릴 곳은 가려야 합니다.
그런데 치부를 가린 옷까지도 빼앗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창피를 주고 고통을 주어 정신이 확 나도록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매를 들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동시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눈을 한번 부릅뜨면 추상같이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그토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지한 백성들을 달래기도 하시고 호소하기도 하시고 때로 타이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백성들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바알에게로 갑니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시고 처음에는 질투를 하셨습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쯤 백성들이 돌아와 주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기다릴 때 돌아와 주어야 환영을 받고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안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질투가 진노로 바뀝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모든 은혜와 축복을 한꺼번에 회수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심판입니까 부모는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때가 가장 서운합니다. 섭섭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합니다. 애써 길러 놓았더니 여자에게 푹 빠져서 부모는 안중에도 없이 미친 듯이 돌아다닐 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속만 상하는 것이 아니고 밉고 배신감을 느끼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의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고 은혜를 입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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