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없는 자에게 주신 희망 (호2:2-23)
본문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본래 음란한 여인이였지만 남편과 결혼한 후에도 다시 남편을 떠나 갔습니다. 이때에 호세아는 떠난 아내를 생각하며 아이들을 바라보고 ‘어미와 쟁론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쟁론’이란 소리내어 싸우는 것을 의미하지만 악한 행동의 중단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노력을 포함한 강한 논쟁을 의미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만이 그 ‘어미’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호세아의 마음은 이미 깨어졌고 실연당한 남자로서만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보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이 없자 결국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2:2)고 선언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긴 남편으로서의 슬픔을 한 없이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러한 고멜에 대해서 연민과 동정과 분노를 느끼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입니다.
1.고멜의 비극
(1).세상을 사랑함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내 기쁨과 내 슬틀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2:5) 고멜은 세상적인 것, 떡과 물과 양털, 삼, 기름, 술틀을 더 사랑한 나머지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버리고 세상을 따라갔습니다. 결국 고멜에게 임한 심판은 부끄러움과(3상), 곤고함(3하) 자녀들에게 화를 물려준 것입니다(4).
세상을 사랑한 고멜의 죄과는 자녀들까지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므로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십니다”(신5:9) ‘
그러므로’는 2장에 세번에 걸쳐 나타나는데(6,9,14) 하나님께서 부득이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멜은 부끄러운 일을 행하되 피동적으로가 아니라 창녀의 소굴로 떠나는 고멜을 그냥 버려둘 수가 없어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뒤어 넘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범죄하는 길을 징계의 가시 울타리로 담을 쌓아서 막으십니다. 하나님이 죄인 길을 막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버린 자식입니다. 고멜처럼 영원보다 현세를 더 좋아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떡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가장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에 불은 마음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부르심에 대한 무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만물의 출처에 대한 무지 “저희가 비밀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록”(2:8) 고멜의 무지는 자게에게 준 것이 다 호세아(하나님의 상징)의 것인줄 모르는 데 있었습니다(2:5하). 떡과 물은 사람의 생명을 위한것이요, 양털과 삼은 몸을 위한 것이며, 기름과 술은 기쁨과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고멜은 이 모든 생필품과 문화용품을 다 호세아가 준 것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호세아의 소유와 사랑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셧습니다. 무지가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죄중의 가장 큰 죄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원리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우리는 얼마나 바알을 섬겼으며 사치와 열락을 위해 사용하였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좋고 결심이 굳어서 죄와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담이 되어 주시고, 간수해 주시고, 가시 울타리로 막아 주셔서,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때문임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3).탕자의 비애(슬픔과 설음)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2:10) 고멜이 뭇 남성을 따라 갈 때에 처음에는 기쁨이 오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공허와 흔암 뿐이었습니다. 좌절과 낙담 뿐이었습니다. 그제야 저가 말합니다.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2:7)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애통하는 회개가 필요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했습니다. 징계를 통한 이스라엘은 탄식 뿐입니다. 탕자의 고백은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일 뿐입니다. ‘수치를 드러낸다’는 말씀은 깊이 숨겨져 있는 수치스러운 죄악 까지라도 그들이 연애하던 자앞에 드러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징계와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게서는 바로 그세상 앞에서 나팔을 불어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가시담으로 막고 곡식과 포도주를 도로 찾은 것은 고멜이 호세아의 사랑과 모든 것이 그의 것인 줄 모르는 무지를 깨우쳐 주기위한 호세아의 사랑이 응집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시 울타리를 쳐서 죄길로 가는 것을 막으실 뿐 아니라 소유물을 탈취하기도 하시면서 죄와 완전히 연관을 끊도록 하십니다. 죄를 철저히 끊지 못하면 뜷어진 전대가 될 것이요 금고에는 좀과 동녹이 설칠 것입니다. 늘 배앗기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더 이상 세상 것에 연연하지 못하게 ㅎ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병들고 때로는 고통이 따르고 실패와 죽음에 이르지만 이것은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려져도 자기 사람, 쓰러져도 자기 백성, 실패해도 자기 자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돌아만 오면 하나님의 것이 모두 내것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소망의 문 징계로 끝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위로와 보호로 자기 백성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6절에서 20절에는 회복의 방법이 제시됩니다.
(1).하나님의 설득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2:14) ‘거친 돌’은 포로의 땅을 의미하고 ‘개유하다’는 말은 설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의 땅으로 끌고가서 거기서 설득하고 위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포로의 땅, 억압된 고통에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말로 위로하라’는 원문의 뜻은 ‘마음에 말하겠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지,정,의의 장소일 뿐아니라 생명과, 능역의 뿌리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 능력과 위로와 소망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므로 이루어집니다.
(2).하나님의 약속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2:15중) 15-23절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약속이 나타납니다. ‘아골 골짜기’는 해골이 굴러 다니는 고통의 장소, 돌무덤으로 환란을 의미합니다(수7:26). 그러나 내게로 돌아오면 고통 당하고 신음하는 장소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약속된 것입니다. 활과 칼을 꺽어 전쟁을 없이하고 평안히 눕게 하신다고 했습니다(2:18). 평화는 실패한 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오직 승리한 자에게만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 승리한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우상을 따라가고, 거짓을 따라가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 따라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따라가는 아골 골짜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해골만 굴러 떨어지는 곳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이 일은 이루어지고 맙니다. 내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만 붙드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 이란 단어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보면 ‘응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응답하다’라는 뜻을 말합니다.(사58:9,합2: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크게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르엘’은 ‘흩으진다’에서 ‘심는다’로 의미가 바뀝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름의 변화만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내용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재물도 인격도 세상의 친구도 다 흩어진 불행한 인물이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입어 돌아오는 복을 받고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심이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으면 열매가 있고 추수하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유하시고 그들을 돌이키는 이유는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함인 것입니다.(사43:25) 인간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입니다.(사43:21,엡1:6) ‘주는 나의 하나님’ 로루하마가 루하마가 되고, 로암미가 암미가 되어 진실한 고백을 하기에 이루게 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감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호소하는 성도의 부르지짖음 속에는 하나님이야 말로 ‘알파와’ ‘오메가’요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전체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추수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연고입니다. 루하마가 되고, 암미가 된 증거입니다. 더욱 깊은 감사와 차농과 영광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나늬 주, 나의 하나님’을 날마다 고백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고멜의 비극
(1).세상을 사랑함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내 기쁨과 내 슬틀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2:5) 고멜은 세상적인 것, 떡과 물과 양털, 삼, 기름, 술틀을 더 사랑한 나머지 가장 순수하고 신실한 사랑의 가치를 과소평가해 버리고 세상을 따라갔습니다. 결국 고멜에게 임한 심판은 부끄러움과(3상), 곤고함(3하) 자녀들에게 화를 물려준 것입니다(4).
세상을 사랑한 고멜의 죄과는 자녀들까지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므로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십니다”(신5:9) ‘
그러므로’는 2장에 세번에 걸쳐 나타나는데(6,9,14) 하나님께서 부득이 징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고멜은 부끄러운 일을 행하되 피동적으로가 아니라 창녀의 소굴로 떠나는 고멜을 그냥 버려둘 수가 없어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뒤어 넘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범죄하는 길을 징계의 가시 울타리로 담을 쌓아서 막으십니다. 하나님이 죄인 길을 막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버린 자식입니다. 고멜처럼 영원보다 현세를 더 좋아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떡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고 가장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고 있지는 않는지요 세상에 불은 마음은 하나님의 진실하신 부르심에 대한 무응답으로 나타납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만물의 출처에 대한 무지 “저희가 비밀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록”(2:8) 고멜의 무지는 자게에게 준 것이 다 호세아(하나님의 상징)의 것인줄 모르는 데 있었습니다(2:5하). 떡과 물은 사람의 생명을 위한것이요, 양털과 삼은 몸을 위한 것이며, 기름과 술은 기쁨과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고멜은 이 모든 생필품과 문화용품을 다 호세아가 준 것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호세아의 소유와 사랑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셧습니다. 무지가 죄는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죄중의 가장 큰 죄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원리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로 우리는 얼마나 바알을 섬겼으며 사치와 열락을 위해 사용하였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좋고 결심이 굳어서 죄와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불담이 되어 주시고, 간수해 주시고, 가시 울타리로 막아 주셔서,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때문임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3).탕자의 비애(슬픔과 설음)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2:10) 고멜이 뭇 남성을 따라 갈 때에 처음에는 기쁨이 오고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공허와 흔암 뿐이었습니다. 좌절과 낙담 뿐이었습니다. 그제야 저가 말합니다.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2:7)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애통하는 회개가 필요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가 필요했습니다. 징계를 통한 이스라엘은 탄식 뿐입니다. 탕자의 고백은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일 뿐입니다. ‘수치를 드러낸다’는 말씀은 깊이 숨겨져 있는 수치스러운 죄악 까지라도 그들이 연애하던 자앞에 드러내겠다는 말씀입니다. 징계와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게서는 바로 그세상 앞에서 나팔을 불어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가시담으로 막고 곡식과 포도주를 도로 찾은 것은 고멜이 호세아의 사랑과 모든 것이 그의 것인 줄 모르는 무지를 깨우쳐 주기위한 호세아의 사랑이 응집된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시 울타리를 쳐서 죄길로 가는 것을 막으실 뿐 아니라 소유물을 탈취하기도 하시면서 죄와 완전히 연관을 끊도록 하십니다. 죄를 철저히 끊지 못하면 뜷어진 전대가 될 것이요 금고에는 좀과 동녹이 설칠 것입니다. 늘 배앗기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시고 더 이상 세상 것에 연연하지 못하게 ㅎ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병들고 때로는 고통이 따르고 실패와 죽음에 이르지만 이것은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려져도 자기 사람, 쓰러져도 자기 백성, 실패해도 자기 자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돌아만 오면 하나님의 것이 모두 내것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소망의 문 징계로 끝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위로와 보호로 자기 백성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6절에서 20절에는 회복의 방법이 제시됩니다.
(1).하나님의 설득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2:14) ‘거친 돌’은 포로의 땅을 의미하고 ‘개유하다’는 말은 설득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의 땅으로 끌고가서 거기서 설득하고 위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포로의 땅, 억압된 고통에서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말로 위로하라’는 원문의 뜻은 ‘마음에 말하겠다’라는 뜻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지,정,의의 장소일 뿐아니라 생명과, 능역의 뿌리 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참 능력과 위로와 소망은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므로 이루어집니다.
(2).하나님의 약속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2:15중) 15-23절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약속이 나타납니다. ‘아골 골짜기’는 해골이 굴러 다니는 고통의 장소, 돌무덤으로 환란을 의미합니다(수7:26). 그러나 내게로 돌아오면 고통 당하고 신음하는 장소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하십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가 약속된 것입니다. 활과 칼을 꺽어 전쟁을 없이하고 평안히 눕게 하신다고 했습니다(2:18). 평화는 실패한 자에게는 오지 않습니다. 평화는 오직 승리한 자에게만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에 승리한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우상을 따라가고, 거짓을 따라가고, 남편 아닌 다른 남자 따라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따라가는 아골 골짜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해골만 굴러 떨어지는 곳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이 일은 이루어지고 맙니다. 내 모습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만 붙드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 이란 단어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21절에 보면 ‘응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응답하다’라는 뜻을 말합니다.(사58:9,합2: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크게 응답하여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르엘’은 ‘흩으진다’에서 ‘심는다’로 의미가 바뀝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이름의 변화만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내용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재물도 인격도 세상의 친구도 다 흩어진 불행한 인물이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입어 돌아오는 복을 받고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심이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바으면 열매가 있고 추수하는 날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사유하시고 그들을 돌이키는 이유는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함인 것입니다.(사43:25) 인간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함입니다.(사43:21,엡1:6) ‘주는 나의 하나님’ 로루하마가 루하마가 되고, 로암미가 암미가 되어 진실한 고백을 하기에 이루게 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감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호소하는 성도의 부르지짖음 속에는 하나님이야 말로 ‘알파와’ ‘오메가’요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 전체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추수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연고입니다. 루하마가 되고, 암미가 된 증거입니다. 더욱 깊은 감사와 차농과 영광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나늬 주, 나의 하나님’을 날마다 고백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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