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하시는 하나님 (호4:1-5)
본문
사람은 때로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흔히 부모들이 자식 문제로 속상할 때 땅이 꺼지도록 탄식을 합니다. 아마 그때가 부모에게 있어서는 가장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자식을 길러 놓았는데, 그래서 기대도 많이 했는데 이 자식이 엉뚱한 짓을 하고 다닐 때 부모들은 탄식합니다. 어거스틴이 방탕하게 돌아다닐 때 그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이 돌아와 주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를 10년이나 했는데도 아들이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아예 아들이 돌아올 기미조차 없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잃게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려고 이 자식을 낳았단 말인가.” 그때 암브르시우스라는 감독이 탄식하는 어머니 모니카에게 이런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주어집니다. 집 나간 아들은 꼭 돌아올 겁니다.” 어거스틴은 결국 15년 만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돌아온 지 한달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람이 한탄을 많이 하면 일찍 죽습니다. 그런 상한 가슴을 지니고 세상을 오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부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한탄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탄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용서도 하셨고 은총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랬으면 알아듣고 깨우쳐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무감각합니다. 해도 너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침내 탄식을 하십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호4:1)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신앙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진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관계 맺는 생활이기 때문에 진실이 꼭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 관계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 진실이 없습니다. “(호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고 했습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삭막하고 거칠다는 말입니까 이 백성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진실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한마디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했던 이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단기적으로 보면 요령이나 거짓으로 승리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좀 길게 보고 평생을 내다보면 결코 거짓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거짓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진실이 없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인애”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인애가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인애는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바로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는 그 인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저주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과 강포와 피흘림뿐입니다. 그러니 그 나랄 그 백성이 무슨 복을 받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엉뚱한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땅에 우상 숭배가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이 땅에 우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끔 이단들이 나타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고 바른 신학이 없으니까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호소하고 타이르고 은총을 베풀어도 모릅니다. 바른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양만 잡아 바치면 다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양만 잡아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양고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그러고 나서 여전히 우상에게 추파를 던지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를 못했던 것ㅎ입니다. 이 무지함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시골에서 목회하는 전도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을 심방 갔는데 선반 위에 단지 하나가 아주 빛이 날 정도로 깨끗이 닦여 있더랍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저 단지 속에 무엇을 넣어 두었길래 볼 때마다 저렇게 깨끗하게 닦아 놓고 계십니까”
그러자 집사님이 “보고 싶으면 한번 보세요.” 하더니 단지를 내려서 보여 주는데 십자가도 나오고 불상도 나오고 마리아 상도 나왔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에 왜 이런 것들을 넣어 두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 여집사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천국에 누가 갔다 온 것도 아닌데 이 다음 죽은 후에 가서 예수가 짐짜면 예수 편에 서고 부처가 진짜면 부처 편에 서면 될 것 아닙니까” 하고 미안한 마음도 없이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거기 어디에 진실이 있습니까 거기 어디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고 거기 어디에 바른 신학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어떻게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신뢰를 보낼 수 있으며 관심을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관심을 베풀고 애정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조차도 없다”고 탄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진실하고 인애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2. 저주를 자청한다고 탄식하십니다. “(호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살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너무나 지식이 없고 고집스럽고 패역합니다. 그러니까 땅에 저주가 내립니다.
그런데 그 저주가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의 주변에 내립니다. 3절이 그 말씀입니다. “(호4:3)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 한마디로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무지하고 완악하고 타락하면 자연이 먼저 벌을 받습니다. 또 부모가 죄를 지으면 부모가 벌을 받지 않고 자식들이 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성적으로 문란해서 성병을 얻으면 그 아이들이 저능아 아니면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받을 벌을 자식들이 대신 받는 경우입니다. 로마가 그래서 멸망한 것 아닙니까
로마 말기에는 사회 지도층이 모두 성적으로 문란해서 저능아와 지체부자유아가 많이 태어났고 결국 그 나라가 망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는데 벌은 그 아들이 받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이 타락하고 퇴폐하고 죄를 지으면 대신 자연이 벌을 받습니다. 오늘도 보면 사람들이 무지하고 양심이 불량해서 폐수를 마구 버립니다. 밤에 몰래 말입니다. 그러면 돈을 조금 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을 벌 것 같지만 그것은 함께 죽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자기만 잘살겠다고 분별 없이 마구 내다 쏟아 버리는데 그러면 모두가 함게 죽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타락하면 인간이 받을 벌을 자연이 그대로 받습니다. 먼저 자연이 저주받아서 죽습니다. 그러면 맨 먼저 깨끗하던 물이 죽습니다. 다음에는 물고기가 죽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습니다. 자연에 대한 저주는 곧 사람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도 몰래 폐수를 버립니다. 무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무지하면 모두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3.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탄식하십니다. “(호4:4)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제사장인들 존중하고 그 지시인들 따랐겠습니까 그러니 그 나라가 얼마나 혼돈했겠습니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어른들이 무시되고 존경받지 못하면 그 나라는 혼란스럽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는 백성들이 질서인들 지킬 것이며 도리인들 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살아가는 집단 속에는 권위 공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집에는 권위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날 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들으시고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면 뚝 그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집안이 질서가 있는 집안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권위 공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집안의 권위 공간은 사랑방입니다. 사랑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는데도 여전히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그 집안은 다된 집안입니다. 이미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린 집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다툼이 많고 원망이 많고 권위자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들 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이제는 사랑방도 없어졌지만 권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권위는 돈에서 나옵니다. 돈 없는 아버지 어머니는 더 이상 권위 공간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 자체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오늘은 돈이 없으면 더 이상 권위를 인정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부모들은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하다못해 조그만 집문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허물어져 가는 권위를 그나마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시 어머니는 손가락에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끼고 살았습니다. 큰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는 그 반지 저 주세요.” 시어머니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둘째 며느리가 또 말합니다. “그 반지 저를 주고 가세요.” 또 쾌히 승낙했습니다. 이 며느리들이 아디아몬드 반지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공산주의의 권위는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이 시어머니의 권위는 반지에서 나왔습니다. 후에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까 그 반지는 가짜였습니다. 이 현대물을 먹고 자란 똑똑하고 야무진 며느리들이 그 반지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시어머니에게 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 싸우다가도 교회 안에 들어오면 뚝 그쳐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엄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그래야 권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이 잘 안 되는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큰소리가 나오고 다툼이 일어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럽니다. 권위가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거의가 다 갈등과 분열과 인간의 소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이렇게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노골적으로 대통령에게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급자들이 상급자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권위 공간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 위급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서서 수습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호세아 때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그 제사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나라의 모든 문제를 제사장들이 맡아서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권위 공간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사장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싸우려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럽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을 하십니다. “(호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 여기서 어미는 나라를 말합니다.
결국 이 고집스럽고 무지한 백성들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한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끝장입니다. 백성들의 무지가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저주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무지가 문제입니다. 자식이 무지하면 부모가 탄식을 합니다. 백성이 무지하면 그 후손들이 탄식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무지하면 하나님이 탄식을 하십니다. “이 나라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도다.” 얼마나 뼈아픈 탄식입니까 이렇게 무지한 백성들을 보시고 한탄하시다가 자연을 향해서 호소하십니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얼마나 처절한 탄식입니까 오늘 이 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면 죄입니다. 그것이 무지고 그것이 패역입니다. 그래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 돌아온 지 한달 만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람이 한탄을 많이 하면 일찍 죽습니다. 그런 상한 가슴을 지니고 세상을 오래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부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한탄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탄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용서도 하셨고 은총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랬으면 알아듣고 깨우쳐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무감각합니다. 해도 너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침내 탄식을 하십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호4:1)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신앙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로, “진실”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관계 맺는 생활이기 때문에 진실이 꼭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 관계가 성립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 진실이 없습니다. “(호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고 했습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삭막하고 거칠다는 말입니까 이 백성들이 복을 받겠습니까 진실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한마디 거짓말을 해서 평생 원했던 이 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 위에 세워지는 나라는 곧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단기적으로 보면 요령이나 거짓으로 승리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좀 길게 보고 평생을 내다보면 결코 거짓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거짓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진실이 없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둘째로, “인애”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인애가 없다고 탄식하십니다. 인애는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바로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는 그 인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저주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과 강포와 피흘림뿐입니다. 그러니 그 나랄 그 백성이 무슨 복을 받고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엉뚱한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땅에 우상 숭배가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이 땅에 우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끔 이단들이 나타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고 바른 신학이 없으니까 이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호소하고 타이르고 은총을 베풀어도 모릅니다. 바른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양만 잡아 바치면 다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양만 잡아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양고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그러고 나서 여전히 우상에게 추파를 던지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를 못했던 것ㅎ입니다. 이 무지함이 문제입니다. 언젠가 시골에서 목회하는 전도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 가정을 심방 갔는데 선반 위에 단지 하나가 아주 빛이 날 정도로 깨끗이 닦여 있더랍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저 단지 속에 무엇을 넣어 두었길래 볼 때마다 저렇게 깨끗하게 닦아 놓고 계십니까”
그러자 집사님이 “보고 싶으면 한번 보세요.” 하더니 단지를 내려서 보여 주는데 십자가도 나오고 불상도 나오고 마리아 상도 나왔습니다. 이 전도사님이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에 왜 이런 것들을 넣어 두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 여집사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혹시 누가 압니까 천국에 누가 갔다 온 것도 아닌데 이 다음 죽은 후에 가서 예수가 짐짜면 예수 편에 서고 부처가 진짜면 부처 편에 서면 될 것 아닙니까” 하고 미안한 마음도 없이 말하더랍니다. 여러분, 거기 어디에 진실이 있습니까 거기 어디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고 거기 어디에 바른 신학이 있습니까 그러고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보시면서 어떻게 그 사람에게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신뢰를 보낼 수 있으며 관심을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당시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들에게 관심을 베풀고 애정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조차도 없다”고 탄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진실하고 인애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습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2. 저주를 자청한다고 탄식하십니다. “(호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살기 때문에 결국에는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너무나 지식이 없고 고집스럽고 패역합니다. 그러니까 땅에 저주가 내립니다.
그런데 그 저주가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의 주변에 내립니다. 3절이 그 말씀입니다. “(호4:3)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 한마디로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무지하고 완악하고 타락하면 자연이 먼저 벌을 받습니다. 또 부모가 죄를 지으면 부모가 벌을 받지 않고 자식들이 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성적으로 문란해서 성병을 얻으면 그 아이들이 저능아 아니면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모가 받을 벌을 자식들이 대신 받는 경우입니다. 로마가 그래서 멸망한 것 아닙니까
로마 말기에는 사회 지도층이 모두 성적으로 문란해서 저능아와 지체부자유아가 많이 태어났고 결국 그 나라가 망했습니다. 다윗이 죄를 지었는데 벌은 그 아들이 받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이 타락하고 퇴폐하고 죄를 지으면 대신 자연이 벌을 받습니다. 오늘도 보면 사람들이 무지하고 양심이 불량해서 폐수를 마구 버립니다. 밤에 몰래 말입니다. 그러면 돈을 조금 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돈을 벌 것 같지만 그것은 함께 죽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자기만 잘살겠다고 분별 없이 마구 내다 쏟아 버리는데 그러면 모두가 함게 죽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타락하면 인간이 받을 벌을 자연이 그대로 받습니다. 먼저 자연이 저주받아서 죽습니다. 그러면 맨 먼저 깨끗하던 물이 죽습니다. 다음에는 물고기가 죽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습니다. 자연에 대한 저주는 곧 사람에 대한 저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지금도 몰래 폐수를 버립니다. 무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무지하면 모두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3.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탄식하십니다. “(호4:4)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제사장인들 존중하고 그 지시인들 따랐겠습니까 그러니 그 나라가 얼마나 혼돈했겠습니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어른들이 무시되고 존경받지 못하면 그 나라는 혼란스럽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는 백성들이 질서인들 지킬 것이며 도리인들 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살아가는 집단 속에는 권위 공간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집에는 권위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집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날 때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들으시고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면 뚝 그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집안이 질서가 있는 집안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권위 공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집안의 권위 공간은 사랑방입니다. 사랑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는데도 여전히 싸움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그 집안은 다된 집안입니다. 이미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린 집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많습니다. 다툼이 많고 원망이 많고 권위자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너무 가볍게 대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아들 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이제는 사랑방도 없어졌지만 권위도 사라졌습니다. 오늘의 권위는 돈에서 나옵니다. 돈 없는 아버지 어머니는 더 이상 권위 공간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그 자체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는데 오늘은 돈이 없으면 더 이상 권위를 인정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부모들은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살아갑니다.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하다못해 조그만 집문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허물어져 가는 권위를 그나마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시 어머니는 손가락에 큼직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끼고 살았습니다. 큰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는 그 반지 저 주세요.” 시어머니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둘째 며느리가 또 말합니다. “그 반지 저를 주고 가세요.” 또 쾌히 승낙했습니다. 이 며느리들이 아디아몬드 반지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습니다. 공산주의의 권위는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이 시어머니의 권위는 반지에서 나왔습니다. 후에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까 그 반지는 가짜였습니다. 이 현대물을 먹고 자란 똑똑하고 야무진 며느리들이 그 반지가 가짜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시어머니에게 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 싸우다가도 교회 안에 들어오면 뚝 그쳐야 합니다. 순간적으로 엄숙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그래야 권위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것이 잘 안 되는 시대입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큰소리가 나오고 다툼이 일어나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럽니다. 권위가 상실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거의가 다 갈등과 분열과 인간의 소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이렇게 권위 공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노골적으로 대통령에게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급자들이 상급자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권위 공간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에 위급한 사건이 발생해도 나서서 수습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호세아 때 그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그 제사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나라의 모든 문제를 제사장들이 맡아서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권위 공간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백성들이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제사장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순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제사장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싸우려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럽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을 하십니다. “(호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 여기서 어미는 나라를 말합니다.
결국 이 고집스럽고 무지한 백성들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한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끝장입니다. 백성들의 무지가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저주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무지가 문제입니다. 자식이 무지하면 부모가 탄식을 합니다. 백성이 무지하면 그 후손들이 탄식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무지하면 하나님이 탄식을 하십니다. “이 나라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도다.” 얼마나 뼈아픈 탄식입니까 이렇게 무지한 백성들을 보시고 한탄하시다가 자연을 향해서 호소하십니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얼마나 처절한 탄식입니까 오늘 이 같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면 죄입니다. 그것이 무지고 그것이 패역입니다. 그래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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