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후회 (호4:6-10)
본문
사랑과 후회라는 말 속에는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회는 사랑에서 발생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후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후회도 그만큼 크게 됩니다. 어느 잡지에 실린 한 어머니의 수기 제목이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자식을 낳아서 그렇게 애지중지 길렀는데 지금은 그 자식들이 부모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자식들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후회는 정말일 것입니다. 부모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굉장한 배신감을 느끼고 자식들에게 상당히 실망하셨던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가히 무조건적입니다. 어쩌면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우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하면서 키웁니다. 어떤 어머니가 다 큰 딸을 데리고 병원에 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제 딸이 시집 갈 날을 받아 놓았는데 걱정이 많습니다. 애가 어렸을 때 실수로 손가락 하나를 잃었는데 바로 반지낄 손가락입니다. 이제 혼인날은 다가오는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제 손가락을 이 딸에게 이식시켜 줄 수는 없습니까” 그러고는 눈물을 짓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거기 어디에 가식이 있고 조건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주 자연적으로 부모들에게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의 자식들은 모두 이 같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자식들이 이런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고 잊어버리고 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찍한 죄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길러 놓았는데 그 자식들이 커서 부모를 잊어버린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오죽하면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하고 수기를 쓰겠습니까 지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 같은 상한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 부모들만이 후회하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도 그렇게 속상해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그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참 기가 막힌 사랑입니다. 이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도더히 불가능한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게 해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만나를 먹여 살게 하십니다. 훈련을 다 마친 후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여보내십니다.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생활이 번영하고 삶이 평안했습니다.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차례입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백성 됨의 도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바람이고 인간의 도리입니다. 마땅히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배가 부르고 생활이 안정되고 평안하게 되니까 기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이 백성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통탄하십니다.
1.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이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조차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관심조차도 없어져 버렸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여러분, 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부부가 한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힘은 관심 때문입니다. 부부가 관심이 없어지면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몸은 한집에서 살지만 관심이 없어져 버리면 남남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알고 보면 관심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피를 상당히 강조합니다만 피가 무슨 상관입니까 피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피를 나눈 자식을 버리며 부모를 버립니까 피가 전부가 아닙니다. 관심입니다. 관심이 떠나면 호적상 기록 유무를 떠나서 아무 관계도 아닌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관심입니다. 천국은 신앙인들에게는 소중한 곳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것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한낱 허탄한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 없는 신화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애를 태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제는 끝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관계를 끊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배가 부르니까 관심이 없어져 버려서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육신의 세계에 머물러 살고 잇기 때문에 대부분 구원이나 은혜나 천국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관심입니다. 관심 없는 신앙은 이론에 불과합니다.
2. 배가 부르니까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호4:7) 저희는 번성할수록 죄를 짓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배가 부르니까 죄만 짓는다고 하면 그 부는 저주입니다. 부가 저주의 역할을 한다면 그 부가 무슨 축복입니까 사람은 가난이 축복인 사람이 있고 부가 축복인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가난이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넉넉함은 없어도 그 삶이 활기가 있습니다. 삶에 신선함도 있습니다. 그때는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고 살아 있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들이 가난했을 때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기도의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부해지게 되면 그 신선하고 생동감있던 신앙들이 모두 느슨해집니다. 가난하다가 부해지면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하고 더 은혜 생활할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닙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더 감하사고 더 영광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고 인간의 본능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이 백성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자그마치 430년 동안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겨우 36년간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광복절만 되면 “아아 우리 잊으랴” 하고 그때를 잊지 못해서 뼈에 시기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백성들은 430년 동안이나 애를 낳을 권리마저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백성들이 이제 생활이 안정되고 삶이 부해지다 보니까 엉뚱한 짓을 저지릅니다. 우상을 섬기고 무당을 찾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이 당이 이렇게 탄식이 많고 눈물이 많고 배은망덕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삶이 부해지고 안정되면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저잉 때로 경계의 선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가 이 지점에서 한눈을 팝니다. 다윗이 쫒겨다닐 때는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다닐 때 신앙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때 다윗은 참으로 강했습니다. 몸도 정신도 신앙도 그토록 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실수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언제 실수를 합니까 나라가 평안해지고 왕권이 강화되고 태평 성대를 누릴 때 그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때 다윗은 감히 낮잠을 즐깁니다. 방심합니다. 느슨해집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노아가 언제 실수합니까 노아는 세상이 악할 때 결사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타락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늘 긴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의인이라고 부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언제 실수를 합니까 세상에서 악이 다 물러가고 홍수가 모두 끝나고 포도 농사가 잘 되어서 대풍이 들었을 때, 생활은 안정되고 배는 부르고 긴장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는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 취합니다. 그리고 주정을 부립니다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추태를 부렸습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긴장이 풀리니 노아가 방심을 합니다. 노아의 실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만 해도 노아답지 않은 실수인데 그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 모습을 아들이 보고 웃었다고 그만 그 아들을 저주해 버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습니다. 그것도 성자 같았던 노아가 홍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들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때부터 그 아들은 검은 피부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흑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천대를 받았습니까 비극이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우는 사자는 삼킬 자를 찾아서 헤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우는 사자는 무섭지 않습니다. 사탄이나 사자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달려오면 사람들은 사전에 방어를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 때문에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진짜 무서운 사자는 웃으며 다가오는 사자입니다. 사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탄은 웃으며 다가오는 사탄입니다. 그런 사탄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방심하고 안심하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여름날 하루는 겨울날 열흘보다 더 많이 음식을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고생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갈 때는 대부분 긴장하면서 삽니다. 도전에 대비도 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비교적 실수가 적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배가 부르게 되면 방심합니다. 긴장을 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고난의 예수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환영받고 평안하고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광의 예수만 올려다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모두 영광을 위해 합니다. 형통을 기원하고 출세를 구하고 고생 없이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식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는 영광의 예수이기 이전에 고난의 예수입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 안에서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그 고난에 기쁨으로 의미 있게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영광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영광 지향적이 되면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같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예수 사후 허탈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버린 제자들같이 되기 쉽습니다. 본문을 보면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축복입니까 번성할수록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해야 하는데 번성할수록 더 범죄하고 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지고 더 외면하니 그게 무슨 축복이고 무슨 신앙입니까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배가 부르니까 회개도 없다는 것입니다. (호4:8) “그 마음에 죄악을 두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고는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가서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내 죄를 네게 덮어 씌우노니 나 대신 네가 죽어다오.” 그러고 나서 양을 잡아 제물로 바칩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대속이라고 합니다. 내 대신 죽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에게 마땅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아야 하고 그 양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죄송해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넌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양이 죽을 때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를 칩니다. 그래도 양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죄는 자기가 짓고 죄 없는 양을 죽이면서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고기를 뜯어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한탄하십니다. “저희가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고로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여 갚으리라.” 하나님은 여기서 인간을 사랑하셨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한 것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정성 다해 길러 놓았는데 후에 그 자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나서 후회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까 “내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죄를 짓는도다. 그리고 배부르니까 회개도 하지 아니하는도다. 고로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고 갚으리라.” 후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어머니처럼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하는 그 심정이 본문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 자신을 돌아다 보는 생활입니다. 지금 이 순간 후회하시며 탄식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나 자신 속에서 느껴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느끼며 사는 생활입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길러 놓았는데 그 자식들이 커서 부모를 잊어버린다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오죽하면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하고 수기를 쓰겠습니까 지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에는 이 같은 상한 가슴을 지니고 살아가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어찌 부모들만이 후회하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하나님도 그렇게 속상해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그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참 기가 막힌 사랑입니다. 이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도더히 불가능한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게 해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내십니다. 또 광야에서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만나를 먹여 살게 하십니다. 훈련을 다 마친 후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여보내십니다.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평안하게 살아갑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생활이 번영하고 삶이 평안했습니다.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차례입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백성 됨의 도리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바람이고 인간의 도리입니다. 마땅히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배가 부르고 생활이 안정되고 평안하게 되니까 기대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이 백성들이 이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통탄하십니다.
1. 배가 부르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말이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이제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조차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관심조차도 없어져 버렸다는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여러분, 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부부가 한몸을 이루어 살아가는 힘은 관심 때문입니다. 부부가 관심이 없어지면 남남이 되어 버립니다. 몸은 한집에서 살지만 관심이 없어져 버리면 남남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알고 보면 관심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피를 상당히 강조합니다만 피가 무슨 상관입니까 피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피를 나눈 자식을 버리며 부모를 버립니까 피가 전부가 아닙니다. 관심입니다. 관심이 떠나면 호적상 기록 유무를 떠나서 아무 관계도 아닌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도 관심입니다. 천국은 신앙인들에게는 소중한 곳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곳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것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한낱 허탄한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 없는 신화 이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애를 태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제는 끝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관계를 끊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배가 부르니까 관심이 없어져 버려서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오늘 현대인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육신의 세계에 머물러 살고 잇기 때문에 대부분 구원이나 은혜나 천국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관심입니다. 관심 없는 신앙은 이론에 불과합니다.
2. 배가 부르니까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호4:7) 저희는 번성할수록 죄를 짓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배가 부르니까 죄만 짓는다고 하면 그 부는 저주입니다. 부가 저주의 역할을 한다면 그 부가 무슨 축복입니까 사람은 가난이 축복인 사람이 있고 부가 축복인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가난이 축복일 때가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넉넉함은 없어도 그 삶이 활기가 있습니다. 삶에 신선함도 있습니다. 그때는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살고 살아 있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들이 가난했을 때 뜨거운 신앙이 있었고 기도의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부해지게 되면 그 신선하고 생동감있던 신앙들이 모두 느슨해집니다. 가난하다가 부해지면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하고 더 은혜 생활할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닙니다. 옛날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더 감하사고 더 영광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고 인간의 본능이 나타나는 지점입니다. 이 백성들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 자그마치 430년 동안 고난의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겨우 36년간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광복절만 되면 “아아 우리 잊으랴” 하고 그때를 잊지 못해서 뼈에 시기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백성들은 430년 동안이나 애를 낳을 권리마저도 빼앗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자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백성들이 이제 생활이 안정되고 삶이 부해지다 보니까 엉뚱한 짓을 저지릅니다. 우상을 섬기고 무당을 찾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이 당이 이렇게 탄식이 많고 눈물이 많고 배은망덕이 많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삶이 부해지고 안정되면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안저잉 때로 경계의 선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의가 이 지점에서 한눈을 팝니다. 다윗이 쫒겨다닐 때는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다닐 때 신앙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때 다윗은 참으로 강했습니다. 몸도 정신도 신앙도 그토록 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실수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언제 실수를 합니까 나라가 평안해지고 왕권이 강화되고 태평 성대를 누릴 때 그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때 다윗은 감히 낮잠을 즐깁니다. 방심합니다. 느슨해집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노아가 언제 실수합니까 노아는 세상이 악할 때 결사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타락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늘 긴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그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의인이라고 부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언제 실수를 합니까 세상에서 악이 다 물러가고 홍수가 모두 끝나고 포도 농사가 잘 되어서 대풍이 들었을 때, 생활은 안정되고 배는 부르고 긴장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는 포도주를 실컷 마시고 취합니다. 그리고 주정을 부립니다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추태를 부렸습니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는 긴장이 풀리니 노아가 방심을 합니다. 노아의 실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만 해도 노아답지 않은 실수인데 그보다 더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 모습을 아들이 보고 웃었다고 그만 그 아들을 저주해 버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주했습니다. 그것도 성자 같았던 노아가 홍수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들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때부터 그 아들은 검은 피부의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흑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천대를 받았습니까 비극이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우는 사자는 삼킬 자를 찾아서 헤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우는 사자는 무섭지 않습니다. 사탄이나 사자가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달려오면 사람들은 사전에 방어를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 때문에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진짜 무서운 사자는 웃으며 다가오는 사자입니다. 사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사탄은 웃으며 다가오는 사탄입니다. 그런 사탄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방심하고 안심하고 있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여름날 하루는 겨울날 열흘보다 더 많이 음식을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고생하고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갈 때는 대부분 긴장하면서 삽니다. 도전에 대비도 합니다. 그래서 그때는 비교적 실수가 적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형통하고 평안하고 배가 부르게 되면 방심합니다. 긴장을 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이 같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고난의 예수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환영받고 평안하고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고난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광의 예수만 올려다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모두 영광을 위해 합니다. 형통을 기원하고 출세를 구하고 고생 없이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식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는 영광의 예수이기 이전에 고난의 예수입니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 안에서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그 고난에 기쁨으로 의미 있게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영광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영광 지향적이 되면 마지막에는 가룟 유다같이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예수 사후 허탈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버린 제자들같이 되기 쉽습니다. 본문을 보면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죄를 짓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축복입니까 번성할수록 더 감사하고 더 감격해야 하는데 번성할수록 더 범죄하고 더 하나님과 사이가 멀어지고 더 외면하니 그게 무슨 축복이고 무슨 신앙입니까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배가 부르니까 회개도 없다는 것입니다. (호4:8) “그 마음에 죄악을 두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고는 양을 끌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가서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내 죄를 네게 덮어 씌우노니 나 대신 네가 죽어다오.” 그러고 나서 양을 잡아 제물로 바칩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대속이라고 합니다. 내 대신 죽어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에게 마땅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아야 하고 그 양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죄송해 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그런 제도를 만드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넌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양이 죽을 때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이를 칩니다. 그래도 양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죄는 자기가 짓고 죄 없는 양을 죽이면서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고기를 뜯어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한탄하십니다. “저희가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고로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여 갚으리라.” 하나님은 여기서 인간을 사랑하셨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한 것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정성 다해 길러 놓았는데 후에 그 자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나서 후회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까 “내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죄를 짓는도다. 그리고 배부르니까 회개도 하지 아니하는도다. 고로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고 갚으리라.” 후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느 어머니처럼 “나는 자식 낳은 것을 후회합니다.” 하는 그 심정이 본문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뜻을 되새기며 우리 자신을 돌아다 보는 생활입니다. 지금 이 순간 후회하시며 탄식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나 자신 속에서 느껴지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느끼며 사는 생활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