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묻어둔 질문 (호1:1-2:1)
본문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삶을 살아갑니다. 한 뼘 남짓한 작은 가슴이지만 이 속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땅을 살면서 경험한 희로애락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가슴을 열어 젖히면 몇 권의 책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사연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연들 중에는 우리들을 유쾌하게 하고 즐거워하게 했던 것들도 있지만 우리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던 그런 일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잘 정돈이 된 체로 다듬어지고 포장이 되어 들어 있는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채 정리도 되지 않은 체 쑤셔 박혀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다 깨끗이 치료된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체로 피고름을 흘리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슴속에 사랑하는 님을 묻어두고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먼저간 아들을 묻어두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어머니가 하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놈아 내가 너를 키우느라 내 가슴에 얼마나 많은 피멍이 들었는 줄 아느냐 내 이 가슴을 열고 보여줄 수 만 있다면 보여주고 싶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열고 볼 수 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그 속에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사연 저런 사연들을 지금까지 우리들의 가슴에 묻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수많은 사연들을 우리들의 가슴에 묻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수많은 사연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 아무런 사연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호세아를 기록한 저자 역시 가슴속에 수많은 것들을 묻어둔 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호세아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역사적인 배경 호세아는 본문에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을 1절에서 이렇게 밝혀 놓고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시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들입니까 하나는 유다의 시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 이스라엘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이 대한민국에서 1994년을 살아가고 있지만 남쪽 시대가 있고 북쪽 시대가 있는 것처럼 호세아가 살던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가 나뉘어지면 수많은 사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연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우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나라도 이렇게 나라가 나뉘어진 연고로 기구한 사연들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많은 것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비밀 스런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 사는 것이지요.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도 이렇게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사는 시대였습니다. 바로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 듯 보면 1절에는 별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여러 왕들의 이름밖에는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왕들의 이름 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감추어져 있는지 아십니까 한 왕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된 왕들의 이름만큼이나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많은 일들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어느 시대였을까요 호세아는 일반적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하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할 때 남 유다의 왕들은 누구였겠습니까 예, 오늘 본문은 웃시야의 시대서부터 히스기야 시대까지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북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을까요
오늘 본문은 단순히 여로보암이 왕이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7명의 왕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등장을 하지만 6개월만에 살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도 한 달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되어버립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의 신하 베가에 의해 2년만에 살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 베가 역시 호세아에게 살해되고 호세아의 통치 시절 그만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포로로 잡혀가버리고 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흔히 왕이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7번이나 역사가 뒤바뀌는 그런 시대였던 것입니다.
즉, 나라가 7번이나 뒤집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얼마전 이렇게 나라가 뒤집어 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5 공화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역사는 뒤바껴졌고 나라는 뒤집어 졌습니다.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곳곳에 당시의 상처들이 아물지 않고 있음을 우리들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나라가 뒤집히고 역사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두게 되는데 7번 씩이나 나라가 뒤집혔다면 그 시대가 어떠했겠습니까 당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호세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바로 이런 기구한 시대를 살아갔던 호세아를 대변해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 왕들의 이름처럼 보이지만 이 격동기를 살아야만 했던 호세아에게 있어서는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평안할 수록 가슴에 담겨지는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지만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가슴에 담겨지는 이야기들은 암울한 것들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1절의 말씀을 대하면서 호세아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들을 묻고
그런데 문제는 그의 가슴에 이런 시대적인 문제들만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야먄 했던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시대적인 일이야 그저 시대를 잘 못 타고났으니까 정도로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개인적인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았던 개인적인 문제들은 무엇이었을까요 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비로소 라는 말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처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하시니라 라고 기록될 것들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처음 이야기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처음 호세아게 한 말씀이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뇨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했을 때 호세아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호세아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고 맙니다. 사실 선지서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욜 1:1-2]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인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또 요나서의 처음을 보십시다.” [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또 미가서를 보십시다. [미 1:1-2]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됩니까 그렇지요. 말씀을 전할 상대가 나오고 또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할 것인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의 대부분의 선지서들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호세아서도 이렇게 시작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족속들을 쳐서 외쳐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예, 가라는 것은 나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한 아내를 취하고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뇨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런 이야기를 듣는 호세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가요 차라리 요나에게 처럼 먼 타국 땅에 가서 이러저러하게 말씀을 외치라면 할 수 있겠습니다. 차라리 이런 말씀이라면 제가 순종을 하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음란한 여인을 취하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브에리 역시 선지자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의 가문은 선지자의 가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고 법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요구는 이런 모든 것들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호세아가 이런 여인과 결혼을 한다면 호세아의 가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신이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다른 가족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은 음행한 여인과 가까이 하는 것은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여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어떻게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성스러운 사역을 방해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습니다. 저도 종종 이런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나는 내 가정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자녀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을 꾸려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에게는 출발부터 뒤엉킨체 시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음란한 아들을 취하라 문제는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아내만 취하라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 이 말은 사본에 따라 달리 쓰여집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음란한 자식을 취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경학자들은 호세아의 세 자녀는 어쩌면 호세아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 아니 첫째는 호세아의 자녀일 수 있지만 둘째 셋째는 호세아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밀 때는 행복한 꿈을 꿉니다. 불행을 꿈꾸면서 결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요구는 결혼을 하지 말라는 독신의 요구보다 더 엄청난 요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요구는 성경에 호세아 이외의 사람에게는 한번도 요구되어진 적이 없는 그런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요구는 힘들고 어려운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이런 명령을 하시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아니 이 나라가 행음을 한 것과 음란한 아내 음란한 자식을 취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야 호세아서 전체를 다 읽고 그 의미는 이러저러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이 말을 듣는 호세아에게 이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요구를 받고 있는 호세아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마 그의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수많은 질문들이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호세아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호세아의 반응 3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예, “이에” 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어떤 뜻을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본문 어디에도 호세아가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왜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없을까요 그는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것이다고요.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요구 앞에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질문들이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수많은 질문들을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라고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호세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요구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아들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호세아 처럼 이런 환경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하나님과 쟁론을 벌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호세아는 어떻게 합니까 질문을 던집니까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질문을 던졌었습니까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까요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순종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순종하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뭔가 계획이 계시겠지 지금 나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뜻하시는 것이 계셔서 하시는 일이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해시키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라가면 이해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시면서 많은 질문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서 계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따라가십시오. 그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이해되고 고개가 끄덕여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요구라 하더라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해시키시면서 선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3절을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
3절에서 동사들을 한 번 찾아보십시오. 가서 취하였더니 낳으매 이것들이 동사입니다. 그러면 2절의 하나님의 명령을 한 번 보십시오. 자 여기서 동사는 어떤 것들입니까 “가서 취하여 낳으라” 입니다. 어떻습니까 호세아서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질문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이렇게 따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였다. 4절을 계속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 얼마의 세월이 지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5절을 보십시다. 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무엇이라 말하지요 예, 또 이름을 짖되 “로루하마라 지어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또 8,9절을 보십시다. 또다시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다. 어떻게 지어줍니까 예, 로암미라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 아이를 낳을 때마다 이름들을 지어주십니다. 어쩌면 이 모습을 보시면서 이렇게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호세아가 정말 사랑을 듬뿍 받네 하나님이 애들 이름도 다 지어주시고 나도 그런 축복을 받아 봤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이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 이스르엘이라는 말은 흩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또, 로루하마라는 말은 긍휼을 받지 못한자란 뜻을 지닙니다.
또, 로암미란 말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흩어버리고 사랑도 받지 못하고 내 백성도 아니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이름들은 사실 저주에 가까운 이름인 것입니다. 대개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좀 신중해 집니다. 저도 저희 집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몇 일씩 고민을 했습니다. 의미 있고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짖기 위해서 입니다. 호세아의 마음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음란한 자식이였다 할지라도 아이들의 장래는 좀 의미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짖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저주에 가까운 이름을 짖도록 말씀하십니다. 만약 제가 저희집 아이들의 이름을 황미련 황등신 이렇게 지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제 아이들도 놀림이 되지만 저도 역시 놀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아 제게 이름을 좀 지어달라고 하셔서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김바보, 김바보”이렇게 지었다 해 보십시다. 아마 화를 내고 따지실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저도 호세아 처럼 이런 요구를 받는다면 하나님께 따지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호세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묵묵히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름을 짖게 하셨을 까요
4절을 보십시다. “.” 또, 6절을 다시 보십시다. “” 그리고 9절을 보십시다. “.” 자 이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의 어떤 의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이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저들의 장래를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첫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짖고 나서 사람들은 놀렸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왜 저렇게 짖지. 또 어떤 사람은 이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설명을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예후의 집을 멸망하게 하고 흩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이름을 지으라 하셨다고요. 처음에 그 이유를 듣는 사람들은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얼마 못 가서 예후의 사대 손인 스가랴가 살롬에 의해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또, 호세아는요 그렇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이름들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름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고 결국은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의 멧세지들이 살아서 저들에게 증거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호세아는 아 그렇군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멧세지를 바로 제 아이들을 통해서 전하시기를 원하셨군요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두번째 이름과 함께 설명되어지는 이야기를 보십시다. 이스라엘 족속은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유다는 긍휼히 여기며 칼이나 말로 저들을 구원치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시겠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 못 가서 실현됩니다. 앗수르의 185000의 군사들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나가셔서 저들을 멋지게 구원하십니다.
이 때의 장면을 왕하 19:35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5000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다 송장이 되었더라” 여러분 이 소식을 전해 듣는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호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알고난 뒤에 이 세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섬짓한 생각이 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시면서 그것들을 설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모든 질문들을 접어 두십시다. 우리의 가슴에 묻어 두십시다. 그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하실 것입니다. 민족을 향한 질문
그렇다면 호세아의 질문은 여기서 끝났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흩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 앞에서 호세아가 느끼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갖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좋습니다. 제 가정을 이런 일에 모델로 사용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흩으시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면 이 민족은 어떻게 되나요 하는 의문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했던 호세아가 자신의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무감각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는 또다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질문 역시 기록하고있지 않습니다. 역시 가슴에 묻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11절을 읽습니다. “.”
어떤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측량할 수 없이 많아지는 때가 이를 것이라 말합니다. 또 흩어졌던 백성들이 한 두목을 세우고 모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이 되면 이름도 바뀝니다. 1절을 보십시다. 암미라고 합니다.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루하마라 말합니다. 긍휼하심을 입은자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 때가 되면 서로를 향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자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슴에 질문을 묻어두고 묵묵히 하나님을 쫓는 호세아에게 많은 것들을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호세아처럼 이해되지 않는 여러 일들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시겠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이런 사연 저런 사연들을 지금까지 우리들의 가슴에 묻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수많은 사연들을 우리들의 가슴에 묻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수많은 사연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 아무런 사연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부터 살펴보려고 하는 호세아를 기록한 저자 역시 가슴속에 수많은 것들을 묻어둔 체 삶을 살아야만 했던 사람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하여 호세아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역사적인 배경 호세아는 본문에서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을 1절에서 이렇게 밝혀 놓고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시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들입니까 하나는 유다의 시대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북 이스라엘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들이 대한민국에서 1994년을 살아가고 있지만 남쪽 시대가 있고 북쪽 시대가 있는 것처럼 호세아가 살던 당시에도 그러했습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나라가 나뉘어지면 수많은 사연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연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우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우리 나라도 이렇게 나라가 나뉘어진 연고로 기구한 사연들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많은 것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갑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비밀 스런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 사는 것이지요.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도 이렇게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안고 사는 시대였습니다. 바로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 듯 보면 1절에는 별 다른 이야기들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여러 왕들의 이름밖에는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왕들의 이름 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감추어져 있는지 아십니까 한 왕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마다 정책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여기 기록된 왕들의 이름만큼이나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많은 일들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어느 시대였을까요 호세아는 일반적으로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하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할 때 남 유다의 왕들은 누구였겠습니까 예, 오늘 본문은 웃시야의 시대서부터 히스기야 시대까지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북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였을까요
오늘 본문은 단순히 여로보암이 왕이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7명의 왕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등장을 하지만 6개월만에 살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도 한 달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되어버립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의 신하 베가에 의해 2년만에 살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 베가 역시 호세아에게 살해되고 호세아의 통치 시절 그만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포로로 잡혀가버리고 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흔히 왕이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7번이나 역사가 뒤바뀌는 그런 시대였던 것입니다.
즉, 나라가 7번이나 뒤집어졌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얼마전 이렇게 나라가 뒤집어 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 5 공화국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역사는 뒤바껴졌고 나라는 뒤집어 졌습니다.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곳곳에 당시의 상처들이 아물지 않고 있음을 우리들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나라가 뒤집히고 역사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두게 되는데 7번 씩이나 나라가 뒤집혔다면 그 시대가 어떠했겠습니까 당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호세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바로 이런 기구한 시대를 살아갔던 호세아를 대변해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는 왕들의 이름처럼 보이지만 이 격동기를 살아야만 했던 호세아에게 있어서는 많은 것들을 생각게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평안할 수록 가슴에 담겨지는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이 지만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가슴에 담겨지는 이야기들은 암울한 것들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오늘 1절의 말씀을 대하면서 호세아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을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들을 묻고
그런데 문제는 그의 가슴에 이런 시대적인 문제들만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야먄 했던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시대적인 일이야 그저 시대를 잘 못 타고났으니까 정도로 생각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개인적인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았던 개인적인 문제들은 무엇이었을까요 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비로소 라는 말이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처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하시니라 라고 기록될 것들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처음 이야기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처음 호세아게 한 말씀이 음란한 여인을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뇨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시작했을 때 호세아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호세아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고 맙니다. 사실 선지서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욜 1:1-2]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인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또 요나서의 처음을 보십시다.” [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또 미가서를 보십시다. [미 1:1-2]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나서 곧바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됩니까 그렇지요. 말씀을 전할 상대가 나오고 또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할 것인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의 대부분의 선지서들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호세아서도 이렇게 시작을 했어야만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 족속들을 쳐서 외쳐라”
그런데 오늘 본문은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예, 가라는 것은 나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한 아내를 취하고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뇨 질문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런 이야기를 듣는 호세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가요 차라리 요나에게 처럼 먼 타국 땅에 가서 이러저러하게 말씀을 외치라면 할 수 있겠습니다. 차라리 이런 말씀이라면 제가 순종을 하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음란한 여인을 취하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브에리 역시 선지자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의 가문은 선지자의 가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고 법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요구는 이런 모든 것들을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호세아가 이런 여인과 결혼을 한다면 호세아의 가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자신이야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다른 가족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은 음행한 여인과 가까이 하는 것은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여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어떻게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성스러운 사역을 방해할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습니다. 저도 종종 이런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나는 내 가정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자녀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가정을 꾸려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에게는 출발부터 뒤엉킨체 시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호세아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음란한 아들을 취하라 문제는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아내만 취하라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 이 말은 사본에 따라 달리 쓰여집니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이 음란한 자식을 취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경학자들은 호세아의 세 자녀는 어쩌면 호세아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 아니 첫째는 호세아의 자녀일 수 있지만 둘째 셋째는 호세아의 자녀가 아닐 것이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밀 때는 행복한 꿈을 꿉니다. 불행을 꿈꾸면서 결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출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요구는 결혼을 하지 말라는 독신의 요구보다 더 엄청난 요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요구는 성경에 호세아 이외의 사람에게는 한번도 요구되어진 적이 없는 그런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이 요구는 힘들고 어려운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것은 이런 명령을 하시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아니 이 나라가 행음을 한 것과 음란한 아내 음란한 자식을 취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야 호세아서 전체를 다 읽고 그 의미는 이러저러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이 말을 듣는 호세아에게 이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런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요구를 받고 있는 호세아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마 그의 머리 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수많은 질문들이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호세아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요 호세아의 반응 3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예, “이에” 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어떤 뜻을 지닙니까 그렇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을 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본문 어디에도 호세아가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왜 질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없을까요 그는 너무나 믿음이 좋아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것이다고요. 즉,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요구 앞에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질문들이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 수많은 질문들을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라고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호세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요구하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의 아들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또, 호세아 처럼 이런 환경을 요구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실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하나님과 쟁론을 벌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호세아는 어떻게 합니까 질문을 던집니까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질문을 던졌었습니까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들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을 까요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순종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순종하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뭔가 계획이 계시겠지 지금 나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뜻하시는 것이 계셔서 하시는 일이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해시키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라가면 이해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시면서 많은 질문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서 계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따라가십시오. 그분이 요구하시는 대로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이해되고 고개가 끄덕여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요구라 하더라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이해시키시면서 선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3절을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
3절에서 동사들을 한 번 찾아보십시오. 가서 취하였더니 낳으매 이것들이 동사입니다. 그러면 2절의 하나님의 명령을 한 번 보십시오. 자 여기서 동사는 어떤 것들입니까 “가서 취하여 낳으라” 입니다. 어떻습니까 호세아서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수많은 질문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따라야 할 본입니다. 이렇게 따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의 이름을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였다. 4절을 계속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 얼마의 세월이 지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예,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5절을 보십시다. 또 얼마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무엇이라 말하지요 예, 또 이름을 짖되 “로루하마라 지어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또 8,9절을 보십시다. 또다시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어김없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다. 어떻게 지어줍니까 예, 로암미라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 아이를 낳을 때마다 이름들을 지어주십니다. 어쩌면 이 모습을 보시면서 이렇게 여러분들은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야 호세아가 정말 사랑을 듬뿍 받네 하나님이 애들 이름도 다 지어주시고 나도 그런 축복을 받아 봤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 이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 이스르엘이라는 말은 흩을 것이다는 말입니다. 또, 로루하마라는 말은 긍휼을 받지 못한자란 뜻을 지닙니다.
또, 로암미란 말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흩어버리고 사랑도 받지 못하고 내 백성도 아니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이름들은 사실 저주에 가까운 이름인 것입니다. 대개 아이를 낳으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좀 신중해 집니다. 저도 저희 집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몇 일씩 고민을 했습니다. 의미 있고 부르기 좋은 이름을 짖기 위해서 입니다. 호세아의 마음도 마찬가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음란한 자식이였다 할지라도 아이들의 장래는 좀 의미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짖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저주에 가까운 이름을 짖도록 말씀하십니다. 만약 제가 저희집 아이들의 이름을 황미련 황등신 이렇게 지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제 아이들도 놀림이 되지만 저도 역시 놀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아이를 낳아 제게 이름을 좀 지어달라고 하셔서 제가 아이들의 이름을 “김바보, 김바보”이렇게 지었다 해 보십시다. 아마 화를 내고 따지실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저도 호세아 처럼 이런 요구를 받는다면 하나님께 따지고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호세아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묵묵히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이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이름을 짖게 하셨을 까요
4절을 보십시다. “.” 또, 6절을 다시 보십시다. “” 그리고 9절을 보십시다. “.” 자 이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의 어떤 의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이름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를 예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저들의 장래를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첫아이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짖고 나서 사람들은 놀렸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름을 왜 저렇게 짖지. 또 어떤 사람은 이 이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설명을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예후의 집을 멸망하게 하고 흩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이름을 지으라 하셨다고요. 처음에 그 이유를 듣는 사람들은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얼마 못 가서 예후의 사대 손인 스가랴가 살롬에 의해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또, 호세아는요 그렇습니다. 다른 아이들의 이름들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두번째 이름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고 결국은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저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의 멧세지들이 살아서 저들에게 증거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호세아는 아 그렇군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멧세지를 바로 제 아이들을 통해서 전하시기를 원하셨군요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두번째 이름과 함께 설명되어지는 이야기를 보십시다. 이스라엘 족속은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유다는 긍휼히 여기며 칼이나 말로 저들을 구원치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시겠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 못 가서 실현됩니다. 앗수르의 185000의 군사들이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나가셔서 저들을 멋지게 구원하십니다.
이 때의 장면을 왕하 19:35절은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185000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다 송장이 되었더라” 여러분 이 소식을 전해 듣는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호세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알고난 뒤에 이 세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섬짓한 생각이 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지라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시면서 그것들을 설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모든 질문들을 접어 두십시다. 우리의 가슴에 묻어 두십시다. 그리고 묵묵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하실 것입니다. 민족을 향한 질문
그렇다면 호세아의 질문은 여기서 끝났던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렇게 흩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이 사실 앞에서 호세아가 느끼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갖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좋습니다. 제 가정을 이런 일에 모델로 사용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흩으시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는다면 이 민족은 어떻게 되나요 하는 의문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했던 호세아가 자신의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무감각할 리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는 또다시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런 질문 역시 기록하고있지 않습니다. 역시 가슴에 묻어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겼던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11절을 읽습니다. “.”
어떤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측량할 수 없이 많아지는 때가 이를 것이라 말합니다. 또 흩어졌던 백성들이 한 두목을 세우고 모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이 되면 이름도 바뀝니다. 1절을 보십시다. 암미라고 합니다. 내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루하마라 말합니다. 긍휼하심을 입은자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 때가 되면 서로를 향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자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가슴에 질문을 묻어두고 묵묵히 하나님을 쫓는 호세아에게 많은 것들을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호세아처럼 이해되지 않는 여러 일들을 가슴에 묻고 묵묵히 하나님께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시겠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에 누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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