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질투 (호1:2-9)
본문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신은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처럼 소중하고 위대하고 깊이 있는 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예찬했고 노래했고 시로 표현했고 글로 칭송했습니다. 요즘 노래들을 들어 보십시오. 사랑 빼놓고는 노래가 되질 않습니다. 시집을 읽어 보십시오. 사랑 없는 시는 없습니다. 그만큼 사랑은 위대하고 소중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서도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1. 그것은 공적인 사랑입니다. 사적인 사랑은 이해 관계에 얽매일 수가 있고 한계가 있고 때로는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투기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분을 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무한한 책임이 따르는 깊이 있는 사랑입니다. 애국심을 보십시오. 말하자면 그것이 공적 사랑입니다.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어떤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라를 위해서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라가 유지되고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차원을 훨씬 넘는 사랑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정신입니까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이웃 제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한 아이는 걸리고 또한 아이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는 길바닥에 놓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만 데리고 도망을 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손을 잡았던 아이를 놓아두고 품에 안은 아이는 데리고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여인은 반대입니다. 결국 이 여인이 붙잡혔습니다. 붙잡아 놓고 물었습니다. “왜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버리고 도망갔느냐”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제가 품에 안고 가던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그리고 손을 잡은 아이는 제 형님의 아이입니다.
저는 제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제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무입니다.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제자식을 구원한다면 저는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이 나라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이 제나라 장수는 “노나라에 이런 의를 아는 여인이 있는 한 이 나라는 공격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 정신입니까 인간은 한편으로 보면 지극히 단세포적이고 이기적인 데가 있지만 또한편 이렇게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랑의 정신을 품고 살아가기만 하면 이렇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은 처절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하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시고 나서 백성들에게 “너희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눈물을 흘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조금 편안하면 이방 나라를 의지하고 이방신을 믿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옛날에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조금 안정되고 평안해지면 곧 그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로 질투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백성들은 그 사랑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꾸만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따라다니며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실 때 한심합니다. 답답합니다. 서운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합니다. 그 심정이 질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 하나님은 그 사랑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호세아를 부르십니다. 호세아를 불러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을 받은 호세아는 당시 창부였던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결혼해서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아주 단란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던 부인 고멜이 드디어 창부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 반반한 남자들만 있으며 정신을 잃고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외박을 하고 나중에는 먼곳으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이 기질이라는 것은 못 버립니다. 언제 다시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매치기들이 손을 씻었어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손이 자연스럽게 남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손목을 스스로 절단했다고 합니다. 이 기질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보통 때는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어느 기회가 되면 다시 되살아납니다. 이 고멜이라는 여인이 그랬습니다.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려 갔습니다. 호세아는 속이 상했습니다. 달래도 보았고 윽박질어도 보았고 집안에 가두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제 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호소하면 며칠 잠잠하다가 또 나갑니다. 그러면 빚을 얻어가지고 가서 속량해 옵니다. 그러면 얼마 있다가 다시 집을 나가 버립니다. 호세아는 밤이면 두 아이를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문간에 서서 집나간 아내를 기다립니다. 그날 밤은 달이 밝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달빛 아래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하게 보였겠습니까 설음이 복받쳐 올아왔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내가 괘씸해서 울었고 설움이 복받쳐서 울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이런 남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21세기가 되면 TV에 상품 광고가 아닌 남편이 아내를 찾는 광고가 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여자들이 어디를 가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이 맞은 남자와 멀리 도망가서 사는 여인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들이 애를 업고 하나는 손은 잡고 TV에 나와서 호세아처럼 “무조건 용서할테니 돌아와 줘요. 이 애들이 당신 보고 싶다고 울고있어요” 하고 호소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옆에서 소리내어 울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집 나간 아내를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내가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밤마다 문간에 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습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다리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나의 이 처지가 바로 하나님의 처지와 똑같구나, 지금 내 상한 심정이 곧 하나님의 심정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이 백성에게 얼마나 긍휼을 베풀어 주셨는가! 하나님은 이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선택받은 백성으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것만 이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 무당을 찾아가고 음란한 바알을 찾아가서 분향하고 아양을 떨지 아니했는가! 그때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얼마나 애원을 하셨는가 백성들의 발목을 붙잡고 달래 보기도 하고 노하기 때도 하시고 때로는 환란을 주기도 해보았지만 잠시 동안 돌아왔다가 또 나가는 백성들을 쳐다보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나의 이 상한 마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때 호세아는 비로소 하나님의 산하고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 길로 밖으로 나가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고 외쳐 댔습니다. 그러면서 호세아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창기와 결혼하라고 하신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육체적 음란에 빗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영적 음란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이 왜 우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보다 미신을 더 믿으려고 하는 속성을 창부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부에게는 사람을 유혹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란한 웃음입니다. 여러분, 창부의 웃음이 얼마나 요염합니까 그 웃음이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흐립니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그 웃음에 놀아나고 사죽을 못쓰지 않습니까 안토니오가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보고 반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코가 아니고 웃는 모습에 반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웃을 때는 입과 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는데 호색가 남성들이 그 앞에만 서면 몸이 녹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리즈 테일러라는 여배우 또한 사라들을 그렇게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가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그 여자 앞에 서기만 하면 그렇게 녹는다고 하는데 무슨 남자들이 그러냐고 비난을 했는데 그 사람이 어떤 기회에 그 여인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여인 앞에 서자마자 그만 온몸이 녹아져서 꼼짝을 못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이리 오라고 하니까 이 남자가 말 한마디 못하고 끌려가서 결혼을 했다고 하느데 일곱 번째 남편이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음녀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교태가 넘치는 웃음입니다. 두 번째는 눈입니다. 음녀는 웃음 이외에 눈이 또 문제입니다.
음녀들은 눈 속에 들어 있습니다. 눈 속에 교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사람들이 그 눈 속에 흐르는 음심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어 쉬어 가고 그렇게 한번 걸려 들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그런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뱀이 나타나면 약한 짐승들은 그 앞에서 정신을 잃고 만다고 합니다. 그 뱀이 독 있는 눈으로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해도 앞에 있는 동물을은 죽어 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음녀에게는 그런 무서운 눈이 있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의 뭇 남자들을 유혹해서 넘어뜨립니다. 세 번째는 음녀의 가슴입니다. 음녀는 사람을 가슴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바람기가 있는 여인들은 가슴이 깊게 패인 옷을 입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 모습에 그만 유혹을 받아 넘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취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약합니다. 이들은 물질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제력이 부족합니다. 분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면 주먹부터 나갑니다. 물질에는 깨끗한데 이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취약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 돈에도 깨끗하고 자제력도 있는데 이 사람은 이성에 아주 약합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취약점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바로 그 사람의 취약점을 이용합니다. 저 사람은 돈에 약하다 하면 돈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저 사람은 이성에 약하다 하면 이성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것은 국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남한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핵무기를 배치해 놓은 곳으로 침투하지 않습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곳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빙 돌아서 가장 취약한 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도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은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관문을 뚫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관문은 열쇠를 두 개, 세 개씩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들어오는가 하면 집 뒤쪽 아주 허술한 곳 창문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곳이 취약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사람들의 약점을 골라서 공격해 옵니다.
4. 하나님은 “(호2: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호2: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창부가 발견되면 동구 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돌부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그곳을 바로 아골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벌거벗겨서 광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고 물 한 방울이 없습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맹수들이 우굴거립니다. 사람을 벌거벗겨서 내보내면 굶어 죽거나 동물에 찢겨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백성들은 창부처럼 이방신과 우상에게 사죽을 못썼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음란한 여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 중에서도 바알신은 음란신입니다. 바알신전에 가면 하나님보다 짜릿하게 해주는 감각이 있습니다. 아치 음란한 여인같이 우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몸으로 접촉할 수 있는 쾌감이 있습니다. 또 그곳에 가면 감각적인 쾌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유치한지 모릅니다. 지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이고 쾌락적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우상에게 가서 쾌락을 탐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옛날 사람들만 그랬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그 옛날 점쟁이를 찾아가던 기질이 아직도 들어 있어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은근히 그 기질이 발동합니다. 가서 사주를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시집을 보내면 잘살 것인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며시 무당을 찾아가 사주를 보고 좋지 않다고 하면 불안해 하고 좋다고 하면 비로소 안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그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새벽에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복을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런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서도 더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1. 그것은 공적인 사랑입니다. 사적인 사랑은 이해 관계에 얽매일 수가 있고 한계가 있고 때로는 유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투기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분을 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사랑은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무한한 책임이 따르는 깊이 있는 사랑입니다. 애국심을 보십시오. 말하자면 그것이 공적 사랑입니다. 나라를 사랑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도, 어떤 명예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라를 위해서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라가 유지되고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적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개인의 차원을 훨씬 넘는 사랑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정신입니까 옛날 중국 춘추시대에 노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이웃 제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한 아이는 걸리고 또한 아이는 품에 안고 있던 아이는 길바닥에 놓고 손을 잡고 가던 아이만 데리고 도망을 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손을 잡았던 아이를 놓아두고 품에 안은 아이는 데리고 가는 것이 보통인데 이 여인은 반대입니다. 결국 이 여인이 붙잡혔습니다. 붙잡아 놓고 물었습니다. “왜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버리고 도망갔느냐” 그 여인이 대답합니다. “제가 품에 안고 가던 아이는 제 아이입니다. 그리고 손을 잡은 아이는 제 형님의 아이입니다.
저는 제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제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무입니다.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제자식을 구원한다면 저는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이 나라꼴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이 제나라 장수는 “노나라에 이런 의를 아는 여인이 있는 한 이 나라는 공격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 정신입니까 인간은 한편으로 보면 지극히 단세포적이고 이기적인 데가 있지만 또한편 이렇게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랑의 정신을 품고 살아가기만 하면 이렇게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은 처절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하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시고 나서 백성들에게 “너희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사랑했습니까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고 눈물을 흘리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도 조금 편안하면 이방 나라를 의지하고 이방신을 믿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보통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 옛날에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아쉬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만 조금 안정되고 평안해지면 곧 그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로 질투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도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백성들은 그 사랑을 모릅니다. 그리고 자꾸만 우상을 섬기고 이방신을 따라다니며 사랑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보실 때 한심합니다. 답답합니다. 서운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합니다. 그 심정이 질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 하나님은 그 사랑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호세아를 부르십니다. 호세아를 불러서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을 받은 호세아는 당시 창부였던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합니다. 결혼해서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아주 단란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던 부인 고멜이 드디어 창부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 반반한 남자들만 있으며 정신을 잃고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외박을 하고 나중에는 먼곳으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이 기질이라는 것은 못 버립니다. 언제 다시 되살아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매치기들이 손을 씻었어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손이 자연스럽게 남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손목을 스스로 절단했다고 합니다. 이 기질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보통 때는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어느 기회가 되면 다시 되살아납니다. 이 고멜이라는 여인이 그랬습니다. 옛날 버릇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려 갔습니다. 호세아는 속이 상했습니다. 달래도 보았고 윽박질어도 보았고 집안에 가두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제 발 좀 정신을 차리라”고 호소하면 며칠 잠잠하다가 또 나갑니다. 그러면 빚을 얻어가지고 가서 속량해 옵니다. 그러면 얼마 있다가 다시 집을 나가 버립니다. 호세아는 밤이면 두 아이를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대문간에 서서 집나간 아내를 기다립니다. 그날 밤은 달이 밝은 밤이었을 것입니다. 달빛 아래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하게 보였겠습니까 설음이 복받쳐 올아왔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심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내가 괘씸해서 울었고 설움이 복받쳐서 울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이런 남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21세기가 되면 TV에 상품 광고가 아닌 남편이 아내를 찾는 광고가 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여자들이 어디를 가도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눈이 맞은 남자와 멀리 도망가서 사는 여인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들이 애를 업고 하나는 손은 잡고 TV에 나와서 호세아처럼 “무조건 용서할테니 돌아와 줘요. 이 애들이 당신 보고 싶다고 울고있어요” 하고 호소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옆에서 소리내어 울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렇게 될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집 나간 아내를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내가 부정한 여인이었지만 제발 집으로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밤마다 문간에 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습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다리다가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지금 나의 이 처지가 바로 하나님의 처지와 똑같구나, 지금 내 상한 심정이 곧 하나님의 심정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이 백성에게 얼마나 긍휼을 베풀어 주셨는가! 하나님은 이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선택받은 백성으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것만 이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떠나 무당을 찾아가고 음란한 바알을 찾아가서 분향하고 아양을 떨지 아니했는가! 그때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얼마나 애원을 하셨는가 백성들의 발목을 붙잡고 달래 보기도 하고 노하기 때도 하시고 때로는 환란을 주기도 해보았지만 잠시 동안 돌아왔다가 또 나가는 백성들을 쳐다보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지금 나의 이 상한 마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때 호세아는 비로소 하나님의 산하고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 길로 밖으로 나가서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고 외쳐 댔습니다. 그러면서 호세아는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창기와 결혼하라고 하신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의 육체적 음란에 빗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영적 음란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이 왜 우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보다 미신을 더 믿으려고 하는 속성을 창부로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부에게는 사람을 유혹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음란한 웃음입니다. 여러분, 창부의 웃음이 얼마나 요염합니까 그 웃음이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흐립니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그 웃음에 놀아나고 사죽을 못쓰지 않습니까 안토니오가 클레오파트라의 코를 보고 반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코가 아니고 웃는 모습에 반했다고 합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웃을 때는 입과 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는데 호색가 남성들이 그 앞에만 서면 몸이 녹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리즈 테일러라는 여배우 또한 사라들을 그렇게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가 세상의 남자들이 모두 그 여자 앞에 서기만 하면 그렇게 녹는다고 하는데 무슨 남자들이 그러냐고 비난을 했는데 그 사람이 어떤 기회에 그 여인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여인 앞에 서자마자 그만 온몸이 녹아져서 꼼짝을 못하더랍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이리 오라고 하니까 이 남자가 말 한마디 못하고 끌려가서 결혼을 했다고 하느데 일곱 번째 남편이 그 사람이라고 합니다. 음녀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교태가 넘치는 웃음입니다. 두 번째는 눈입니다. 음녀는 웃음 이외에 눈이 또 문제입니다.
음녀들은 눈 속에 들어 있습니다. 눈 속에 교태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사람들이 그 눈 속에 흐르는 음심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어 쉬어 가고 그렇게 한번 걸려 들면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그런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뱀이 나타나면 약한 짐승들은 그 앞에서 정신을 잃고 만다고 합니다. 그 뱀이 독 있는 눈으로 한참 동안 쳐다보기만 해도 앞에 있는 동물을은 죽어 간다고 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음녀에게는 그런 무서운 눈이 있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의 뭇 남자들을 유혹해서 넘어뜨립니다. 세 번째는 음녀의 가슴입니다. 음녀는 사람을 가슴으로 유혹합니다. 그래서 바람기가 있는 여인들은 가슴이 깊게 패인 옷을 입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그 모습에 그만 유혹을 받아 넘어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취약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약합니다. 이들은 물질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제력이 부족합니다. 분을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면 주먹부터 나갑니다. 물질에는 깨끗한데 이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의 취약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성에 약합니다. 돈에도 깨끗하고 자제력도 있는데 이 사람은 이성에 아주 약합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취약점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바로 그 사람의 취약점을 이용합니다. 저 사람은 돈에 약하다 하면 돈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저 사람은 이성에 약하다 하면 이성 문제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이것은 국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남한의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핵무기를 배치해 놓은 곳으로 침투하지 않습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곳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빙 돌아서 가장 취약한 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도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은 정문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관문을 뚫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현관문은 열쇠를 두 개, 세 개씩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들어오는가 하면 집 뒤쪽 아주 허술한 곳 창문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곳이 취약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사람들의 약점을 골라서 공격해 옵니다.
4. 하나님은 “(호2: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호2: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 ”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창부가 발견되면 동구 밖으로 끌고가 돌로 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돌부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그곳을 바로 아골 골짜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벌거벗겨서 광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고 물 한 방울이 없습니다. 밤에는 춥고 낮에는 덥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맹수들이 우굴거립니다. 사람을 벌거벗겨서 내보내면 굶어 죽거나 동물에 찢겨서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백성들은 창부처럼 이방신과 우상에게 사죽을 못썼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음란한 여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호리는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상 중에서도 바알신은 음란신입니다. 바알신전에 가면 하나님보다 짜릿하게 해주는 감각이 있습니다. 아치 음란한 여인같이 우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몸으로 접촉할 수 있는 쾌감이 있습니다. 또 그곳에 가면 감각적인 쾌락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유치한지 모릅니다. 지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이고 쾌락적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우상에게 가서 쾌락을 탐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옛날 사람들만 그랬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그 옛날 점쟁이를 찾아가던 기질이 아직도 들어 있어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은근히 그 기질이 발동합니다. 가서 사주를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시집을 보내면 잘살 것인가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며시 무당을 찾아가 사주를 보고 좋지 않다고 하면 불안해 하고 좋다고 하면 비로소 안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유치합니까 그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새벽에 교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복을 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런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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