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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를 날리라 (호1:2-20)

본문

1.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품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한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명 령을 받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해서 세 자녀 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들 이름은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사랑을 받지 못하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묵과하지 않고 징계하고 심판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품행이 좋 지 못하고 음란한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고멜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그 음란한 여인의 죄를 용서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음란하여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하라는 것은 바 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버릴애야 버릴 수 없고,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뼈 아픈 사랑'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이러한 고멜과 결혼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참 종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멜과 비극 적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체험토록 했던 것입니다. 호세아 의 이와같은 비극적 사랑의 결혼은 선지자에게 짊어지운 하나의 십자가 였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아픈 사랑'의 메 시지를 몸소 증거해야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류를 향하신 '아픈 사랑'의 표현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 구약성경 아가서는 성도를 가리켜 백합 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백합화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상징합니다. 다시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 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통해 고멜과 같이 더러워진 우리가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사랑 을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앙안에 있 기만 하면 제 아무리 고멜같은 사람일지라도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멜같은 이스라엘에게 선언하신 복된 말씀은, 내가 네 죄악을 용서한다거나 너를 아내로 다시 받아 들인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보다 더 은혜스러운 말씀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은총과 긍휼히 여겨 진실함으로 너에게 장가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하면 누구든지 과거의 모든 것은 온전히 잊어 버리고 오직 '새로운 혼인'을 선 포하신 것입니다. "(호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 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호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 "내가 네게 장가들리라"는 것은 허물 없는 순결한 처녀와의 혼 인을 의미하는 것이지 가출하여 탕녀가 되어버린 아내를 다시 받아들인 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백합화같이 순결하고 아 름다운 처녀로 삼아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 든지 예수를 믿기만하면 그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든지 불문하고 백 합화같이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로 삼아 "새 언약"(혼인)으로 백년가약(百 年佳約), 아니 영원한 가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작곡가 멘델스존의 가문에 전해 내려온 사랑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멘 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곱사등이었습니다. 한 여자를 짝사랑하였으나 워낙 미녀여서 자기 같은 곱사의 사랑을 수락할리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함부르그의 부유한 실업가의 딸 이었으므로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용기를 내어 이 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 등을 곱사등으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과, 당신의 걱정과 고독과, 당신의 아픔 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대신 짊어지겠다, 책임지겠다는 이 말에 처녀는 몹시 감동되어 몇 달 후에는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그 손과 발의 못자국, 옆구리의 창자국에는 여러분의 한숨과 눈물, 걱정과 고독, 아픔과 가시를 예수께서 짊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에게 삶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시 면 그 가시나무 대신에 잣나무가 나게 하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숱한 가시덤불에 찔리고 찢어지며 짓밟혀 볼 품없는 들꽃 인생일지라도 예수 앞에 나오기만하면 그를 백합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도 가시 덤불 세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삶의 향기를 잃어버리신 여러분, 예수 앞 에 나와 백합화 향기나는 신부로 새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55: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 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 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가시들을 예수께서 그 손과 발에 받으시고 여러분을 신부로 맞아들이실 것입니다. 육체의 고통 중에 영혼의 유익을 주지않는 고통은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앞 에 나오시면 인생에 있어 가시는 한 개 한 개가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 입니다.
2.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백합화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들에게 본문은 그 백합화 향기를 날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에서 "북풍"은 찬바람을, "남풍"은 온화하 고 따뜻한 바람을 말합니다. 북풍과 남풍,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교차 로 불 때 동산의 나무가 성장하고 열매가 풍성히 맺는 것입니다. 성도의 보다 더 풍요로운 삶, 그리고 성숙된 삶을 위해서는 남풍만이 아니라 북 풍이 교대로 불어와야 되듯이 연단의 시련과 사랑의 은총이 교대로 베풀 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은총으로 아름답고 순결한 백합화가 되어진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 어야 합니다. 그 백합화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 이 바로 북풍과 남풍입니다. 쓸모없고 오히려 해를 주는 가시나무 가운데 서 핀 백합화가 그 가시에 찔려 찢기면서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날려 향기가 멀리 멀리 퍼져 가는 것입니다. 콜린 맥킬러스라는 호주의 여류작가 소설 <가시나무 새>가 있습니다. 여기 <가시나무 새>는 보통 새와는 다릅니다. 보통 새들은 알에서 깨어 나는 순간부터 꽃이나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푸른 숲을 찾아다닙니다. 거기에 편한 둥지를 틀고 삽니다. 그러나 <가시나무 새>들은 꽃나무나 푸 른 나무가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황량한 벌판의 가시나무만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제일 뾰족하고 억센 가시나무를 찾아서 자신의 심장을 그 가 시에 찔려 죽는다는 겁니다. 아주 팔자가 사납고 비극적인 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새이기도 합니다. 심장을 가시나무에 찔릴 때, 그 고통 속에서 <가시나무 새>는 비로소 우는 것입니다. 그 울음소리는 보통 새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고통 속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영혼, 그 아름다움, 생의 절정에서 울려나 오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먹을 것이 찾아 시끄럽게 떠드는 참새가 아니 라 <가시나무 새>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 새>가 되어 가시나무가 많은 광야같은 세상으로 날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시나무를 두려워하지 말 고 그 고통 속에서만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를 부르 시기 바랍니다. 지금껏 어떤 여인이나 연인, 신부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 다운 생의 노래, 사랑의 노래를 창조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인간들을 향해 최후에 쏟아놓으신 주님의 말씀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아무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모든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심장에서 울려나오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입니다. 자신 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행7:59)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 서 하고 (행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던 스데반의 기도는 가시나무에 찔리면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린 백합화 향기였으며, 사울이라 하는 청년을 바울 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창조적인 사랑의 노래였습니다. 내 살이 찔리고 내 가슴이 찔여도 그 가시가 사랑을 위한다면, 그 가시가 구원을 위하고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그 가시관을 쓸 수 있어야 백합화같은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야위어 가는 사람과 못 자국의 상징>이라는 글에 이 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대로 옮겨싣는 것이니 타종교인들은 오해없으시기 를 바랍니다. 언젠가 경주의 석굴암을 구경하던 미국인 관광객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 부처님은 파란 눈으로 보아도 과연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 비의 극치를 나타낸 '기적의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 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닙니다. 무엄하게도 말 입니다.
금발의 한 여 인은 부처님의 엉덩이 쪽을 손가락질하면서 킬킬거 리고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투 패트!"(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투 패트! 지금도 나는 그때의 충격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 것이야말로 일종의 컬처 쇼크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과 비교해 보면 불상은 살이 너무 찐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연화대에 앉아 계신 부처님을 십자가에 매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나는 예수의 모습이 머리 속에 찍혀 있습니다. 뚱뚱한 예수, 배가 나온 예수, 체중이 레슬러처럼 1백 킬로그램이 되는 예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 보듯이, 미켈란젤 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습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사랑은 자비와 또 다른 것입니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 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 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횝싸이게 됩니다. 그것은 편안함보다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입니다.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초상집을 잠 시 들여다보십시오. 제일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시에 그 고인을 가장 많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거꾸로 아무 고통이나 슬픔도 없이 부의 봉투를 내던지고 돌아가는 사람은, 그 고인과 이해 관계로 사귀었을 지언정 사랑으로 만난 적은 없었던 사람일 것입니다. 거듭거듭 말합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적도 없고, 교회에서 연보 돈을 바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손바닥의 못 자국을 보였습니다. 고통의 못 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손바닥에 찍힌 그러한 못 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옆구리에 창 자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의 것 보다는 작고 희미할망정,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의 상흔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마굿간에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선택한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편안한 삶, 살쪄 가는 삶, 부유한 삶을 원한다면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편안히 살 기 위해, 고통을 덜기 위해 온갖 도구와 여러 기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증권 시장에 모여드는 사람처럼 이익을 얻기 위해 목이 쉬도록 외쳐댑니다. 이러한 문명 속에서는 누구도 고통이나 슬픔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편한 잠을 위해서는 불행한 이웃을 향해서 모른다고 고개 를 내젓습니다. 어두운 감방이나 병실에 있는 사람들의 그 얼굴을 모른다 고 합니다. 공장에서, 탄광에서, 바닷 속 밑바닥에서 일하다가 지쳐 버린 사람들을 향해서 눈을 감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합니다우리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그 못 자국을 보여 주는 것으 로만 서로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마저 코 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 를 가르쳐 준 그분이 이따금 예고 없이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머 리맡에 나타나 야위신 손을 내밀 때, 당신은 '도마'처럼 그분의 아픈 못자 국을 만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는 그들을 모른다."고 부정할 때, 높은 베개를 베고 코를 골고 있을 때, 당신만은 눈을 뜨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아파해야 합니다. 예수믿는 성도는 호세아가 그의 비극적이고 고통스런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가슴, 아픈 사랑을 체험했듯이 아파 해야만 합니다. 성도는 그 사랑의 고통을 통해 이 시대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아픈 가슴을 이해하고 그 아픈 가슴을 싸매며 치료해주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최고의 사랑, 최고의 사랑의 노래인 우리 교회 2+1000복음화(민족복음화 + 세계복음화) 운동은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여주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할 수 있는 사랑의 운동이어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못자국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증명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손과 발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아파하고 고통당하는 우리의 이웃들은 여러분의 못 박힌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달라고 소리없이 절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화(史話)에 미얀마에 초창기 선교사로 갔던 저드슨 목사 의 일화입니다. 미얀마에 도착하여 왕에게 기독교 선교의 신청서를 냈습니다. 불교국가로서 타종교의 선교활동은 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습니다. 왕은 저드슨 목사의 손을 보고 "그런 손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내 백성이 듣지 않을거요. 먼저 내 백성의 손과 비슷해지시오." 저드슨 목사는 일체의 선교활동을 중단하고 농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원주민처 럼 심한 농사일에 2년을 종사했습니다. 그의 손이 농부의 손과 같이 거칠 어진 뒤에 선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때 저드슨 목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드슨 목사를 통해 불교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미얀마인이 그의 평생에 5만명에 달했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찢긴 한 사람의 아픔을 통해 무려 5만명의 생명을 구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눈 먼자를 위한 진흙묻은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문둥병자를 껴안은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십자가에 못박혀 찢겨진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내 허물을 가리워 주신 손이요, 내 죄 때문에 내대신 형벌을 받으신 손, 돌아 온 탕자를 무조건 껴안으시고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손 입니다. 백합화같으신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찬바람, 북풍이 불어온다해 도, 그래서 가시나무에 찔려 그 꽃잎이 찢겨진다해도 그것이 오히려 백합 화 향기를 멀리 멀리 퍼트리게 하시는 이웃 사랑을 이룩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믿으시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백합화 향 기는 그 꽃잎이 가시에 찔려 찢겨질 때 그 진한 향기가 진동하며, 때 마 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실려 사방에 향기를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3. 호세아는 범죄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의 새 희망은 나라를 개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소망을 둔다면 정치 경제사회의 구조 개혁이 아 니라 무엇보다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있습니다. 아무리 구조 개혁이 이루어진다해도 하나님께서 이 나라 백성을 향해,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며 등을 돌리시고 흩으신다면 모든 것이 허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같은 나라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인 것입니다.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 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사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 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사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 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지금 이 시대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 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 인 이 나라 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긍휼로 "짜며 싸매며", 성령님의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먹을 찾아 다니며 시끄럽게 쏘 다니는 참새나, 꿀을 따기 위해 이 꽃 저 꽃을 찾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개젓는 벌새 가 되지 마시고, 가시나무 가시에 찔릴지라도 가시에 찔려 아파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가시나무 새>가 되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시고, 가시에 찔린 백합화가 되어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과 남풍에 향기를 실어 멀리 멀리 날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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