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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복 (호14:1-9)

본문

건강하고 건전한 나라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중심이 되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보면 그 나라를 건실하게 받쳐주는 중심 정신이 하나씩 있습니다. 그 정신이 건실하면 그 나라는 건강합니다. 만일 그 정신이 건실하지 못하고 오염되거나 쇠퇴하면 그 나라는몹시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중심 정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예를 들면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은 미국이 추구하는 가장 중심 되는 국가의 정신이고 이념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독재라든가 쿠태타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역사에도 없습니다. 미국을 건설한 정신이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나의 나라일지라도 독재하고 쿠테타를 일으키면 간섭을 합니다. 미국인들은 그만큼 자유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깁니다. 만일 미국에서 쿠테타가 일어나고 독재자가 나타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미국은 이미 정신적으로 깨져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미 자기를 상실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신이 그 나라의 중심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국이라는 나라는 신사도를 소중히 여깁니다. 이런 정신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대변혁이라든가 혁명 같은 정변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왕족들의 스캔들에 신물이 난 상태임에도 왕정 제도를 계속 존속시켜 가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나라들 같았으면 벌써 바뀌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영국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영국이 추구하는 하나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영국이 깨집니다.
그래서 영국민들은 이 신사도를 생명같이 여깁니다. 또 일본 사람들은 의리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일본 국민은 단결을 잘하고 잘 일치되어 살아갑니다. 일본이 이렇게 단결을 잘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신이 바로 의리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군국주의를 이룰 수 있었으며 무서운 응집력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정치에서 상하 관계에서 또 야쿠자 세계에서 이 의리라는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이 정신이 얼마나 잘 발휘되는가하면 단체를 위해서 한 사람쯤 희생되는 것은 미덕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는 때로 국가를 위해서 자살하고 단체를 위해서 자살하고 상사를 위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정신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도 소중한 정신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상하의 질서입니다. 장유유서입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입니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고 틀이고 규범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에 와서 이 정신도 많이 훼손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이 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소중한 중심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가하십니까 그것은 유일신관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중심 생활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고 민족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해석이 되질 않으며 뜻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정신입니다.
그런데도 호세아서를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이방 나라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들은 이미 자기를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존재 의미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나 민족이나 이렇게 가지고 있어야 할 정신을 버리게 되면 곧바로 혼돈이옵니다.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상실의 결과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이성을 잃고 방황하고 방탕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상실하면 그 시간부터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기 중심을 상실하게 되니까 방탕하게 되고 무질서해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모두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면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삼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이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방 나라를 동경하고 의지하면서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백성들이 온전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흔들리고 방종하고 무질서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이러다가 망하리라.” 이것이 호사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탄식이고 후회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때 호세아가 나섭니다. 하나님의 탄식을 듣고 호세아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호소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고집 부리지 말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에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가면 여호와께서 받아 주시리로다”하고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로 가되 “말씀을 가지고 가자(2절)”고 했습니다. 여기 말씀은 정신을 말하고 혼을 말하고 중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여호와께로 가되 “잃어버린 중심을 되찾아 가지고 가자” 그 말입니다. 신앙인은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내 마음에서 중심을 이루어 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지고 가자”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드리자(2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진정으로 회개하자”는 말입니다. 이 백성들이 그 동안 무분별하게 죄없는 양을 잡고 송아지를 잡아서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형식적인 제물을 바치지 말고 “입술로 드리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앗수르를 더 이상 의지하지 말자”(3절)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감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배후에 앗수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는 당시 최강국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면서 동맹을 맺었습니다. 앗수르는 그 대가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어도 앗수르가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 앗수르가 문제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앗수르는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하나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과감히 중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면 거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일이 아주 잘되거나 몸이 건강해졌거나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이 잘 안 될 때는 잘 믿다가도 일이 잘되면 신앙에서 멀어져 갑니다. 또 갑자기 돈을 많이 벌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만합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멀어져 갑니다. 이때 돈은 빽이고 배경이고 하나님이고 앗수르입니다. 또 병을 앓던 사람이 병이 나았을 때 신앙에서 떠나 갑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건강해져서 혼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때 건강이 앗수르입니다. 이 백성들은 도저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백성이었는데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앗수르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적들은 앗수르가 다 막아 줍니다. 앗수르와 맺은 동맹이 있는 한 걱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과감하게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때 호세아가 외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네 번째는 “말을 의지하지 말자(3절)” 고 했습니다. 말은 당시 군사 무기였습니다. 이 백성들이 앗수르로부터 말을 많이 수입했습니다. 그 말로 병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군사 훈련을 하느라 말을 타고 연습을 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병거를 보고 안심합니다. 이제는 이 병거들이 나라르 든든히 지켜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말을 타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우상을 버리자(3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입니다. 당시의 가장 큰 우상은 앗수르입니다. 이 백성들이 앗수르를 너무 의지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정신을 잃고 앗수르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호세아가 백성들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얼마나 실감나는 외침입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위기의 때를 만날 경우가 있습니다. 늘 평안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나 때로 위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누군가가 나서 주어야 합니다. 중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는 누군가 나서서 문제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중재자였고 선지자였고 백성들에게 살 길을 제시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몇 가지 용납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너희를 고치사 사랑하겠다(4절)”는 메시지입니다. 아주 소망적인 메시지입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환영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맞아들일 때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고치는 과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저를 씻으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상태인 아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씻으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씻긴 후에 “가락지를 끼워 주라”고 했습니다. 가락지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양자를 받아들일 때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아들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색옷을 입혀 주라”고 했습니다. 그냥 옷이 아닙니다. 채색옷입니다. 채색옷은 당시 로마에서는 나라에 공덕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선사하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를 정식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채색옷을 입혀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 주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신발이 없었습니다. 노예들은 맨발로 살았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집에 가면 아들이라 하지 말고 품꾼 중 하나로 일하게 해 달라고 하자.” 그리고 집으로 갑니다. 이 말은 신발을 신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맨발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에게 신발을 신겨주라고 했습니다. 탕자를 정식 아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용납입니다. 이 백성들이 타락하고 방탕했어도 돌아노다면 이렇게 탕자를 받아들이듯이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를 고치고 사랑하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슬 같고 백합같이 피어나게 하리라(5절)”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이나 백합니 그렇게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슬이나 백합은 얼마든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이슬이나 백합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곳은 사막 지대이기 때문에 물도 없습니다. 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이슬이 생명수입니다. 광야를 여행할 때는 밤에 밖에다 비닐을 깔아 놓고 잠을 잡니다. 그리고 밤 사이에 이슬이 내리면 아침에 그 이슬을 모아 물을 마시며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슬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장차 이 백성을 이 생명수와 같은 이슬처럼 하리라고 했습니다. 또 백합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백합꽃이 피었으니 그 꽃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앞으로 이 백성들로 하여그 이슬과 같이 또 백합과 같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망적이 약속입니까
그리고 세 번째는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를 내리게 할 것(5절)”이라고 했습니다. 백향목이라는 나무는 나무 중의 나무입니다. 단단하고 향이 있고 곧게 자라는 가장 좋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백향목은 벌레가 없고 뿌리가 깊이 박히기 때문에 바람에 뽑히거나 부러지는 일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이 나무로 성전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이 백성을 이 백향목처럼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백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흥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버선발로 뛰어나가 지금까지의 진노와 서운함을 순간적으로 녹여 버리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한 것도 잊은 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흥분한 탕자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속을 얼마나 썩였습니까 재산을 얼마나 탕진했으며 또 얼마나 방탕했습니까 그랬는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왔다고 송아지를 잡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야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성이고 마음이며 생각입니다. 9절에서 호세아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 말씀이 호세아서 전체의 결론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여러분, 사람들이 고을 말합니다만 복 중의 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지혜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외쳤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축복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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