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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고 사랑하고 (호14:4-9)

본문

시골 동네에 작은 초가집이 한 채 있었고 마당 한쪽에는 닭장이 있었습니다. 늦가을의 어느 날 주인이 일하러 들에 나간 사이 아궁이에서 일어난 불이 온 집에 옮겨 붙어 집이 모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만,닭장에 있던 닭들이 연기에 질식되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미 닭이 품고 있던 병아리 가운데 몇 마리가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어미 닭은 죽었지만 어미 닭이 품고 있던 병아리는 그 품속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미 닭의 새끼 보호 본능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그리고 누가 훈련시킨 것도 아닙니다.그것은 어미 닭이 지닌 새끼 보호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는 더합니다.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정성이나 희생에 비하면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의 효성이란 티끌만도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이건 사람이건 보호하고 지키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무제한적이며 끝도 다함도 없습니다. 우린 그 사실을 본문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고치고 사랑하고”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됩니다.
본문 4절은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새끼를 낳고 사람은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낳긴 했지만 키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고치고 사랑하고”라고 말합니다.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환자가 병원에 입원한 후 절차를 거쳐 대수술을 받았다고 합시다.수술이 끝나면 그를 회복실로 옮긴 후 일정 시간 동안 회복을 기다렸다가 병실로 옮기게 됩니다.병실로 옮긴 다음에는 주사를 놓고 투약을 하고 싸매고 치료하기를 다 낫게 될 때까지 계속합니다.
그런데 만일 수술실에서 수술이 끝났다고 해서 그 환자를 수술실에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그리고 그 환자를 병실로 옮기긴 했지만 치료를 계속하지 않고 팽개쳐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고치고 사랑하고”라는 말의 의미는 고쳐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랑을 쏟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슬과 같으리라는 말은 바로 고치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여기서 말하는 고친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영혼을 고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육체를 고쳐서 건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이고
셋째는,삶을 고쳐서 인격적이며 신앙적인 존재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패역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패역이란 배신과 불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병들고 육체적으로 병들고 인격적으로 병들게 된 원인이 배신과 불신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 패역마저도 고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사랑의 극치가 있습니다.그리고 인간의 감정과의 차이점이있습니다. 영혼을 고치고 육체를 고치고 삶을 고치시는 것은 전인격적인 구원,즉 전인적 구원과 치유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부분만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새롭게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패역”이란 나쁜 버릇입니다.그것을 고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이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2.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여기에는 “조건없이 기쁘게 사랑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없습니다.오히려 근심하시게 한 것뿐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그리고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 어떤 힘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죄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고 마귀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고 했습니다. 막는다고 막히고 끊는다고 끊기고 감정이 변했다고 걷어차 버리는 사랑은 통속적인 사랑일 수는 있어도 거룩한 사랑은 아닙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서로 뺨을 때리는 것이 인사법이라고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자기 귀를 잡아당기고 혓바닥을 길게 내미는 것이 친절의 표시라고 합니다. 통가인들은 머리를 맞대고 두 눈을 부라리며 위 아래로 굴리는 것이 인사 법이라고 합니다.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콧등을 서로 비벼 대는 것이 인사 법이라고 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 가운데는 인사로 뺨이나 발바닥을 핥거나 얼굴에 침을 뱉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즐거움과 반가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종족에 따라 각양 각색임을 알 수 있습니다.그러나 가장 멋진 친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는데도 사랑 받았을 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용서받았을 때, 고침받을 수 없는 사람이 고침받았을 때, 그리고 나를 사랑하고 고치시는 분이 웃으며 기쁨으로 조건 없이 그 일을 행하실 때 느끼는 기쁨이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강요된 웃음이나 친절은 진짜 웃음이나 친절이 아닙니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만 어느 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어느 가게에 강도가 들어가 주인을 협박하고 돈을 요구하려는 찰나 그 지역을 순찰하던 보안관이 그 가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당황한 강도가 순간적으로 빼들고 있던 권총을 겉옷 속에 감춘 채 집 주인을 향해 겨누며 허튼 수작 말고 자연스럽게 굴면서 웃고 말을 걸어서 보안관을 내보내라고 했습니다.보안관이 들어오자 강도가 겨누고 있는 권총을 의식한 주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는데,그 부자연스런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억지로 웃을 수가 있으며 억지로 사랑할 수가 있으며 억지로 즐거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문이 말하는 “즐거이 저희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발적인 사랑입니다.그리고 즐겁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3.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이슬은 아름답습니다.더욱이 아침 이슬에 햇빛이 비치게 되면 오색 찬란한 보석처럼 빛납니다. 이슬은 조용합니다.소나기도 시끄럽고 천둥 번개도 요란합니다만 이슬은 밤새 내려도 소리가 없습니다. 또 이슬은 식물을 성장시킵니다.골고루 침투하는 그 이슬 때문에 식물은 성장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합니다. 은혜의 이슬이 내 심령 속에 내리면 내 삶이 아름다워지고 부드러워집니다.떠들썩하고 불안정했던 나의 생활이 조용해집니다.그리고 나의 신앙이 쑥쑥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슬 같으리니"라고 하였다. 이슬은 비처럼 시원스럽지는 못하다. 어떤 면에서는 답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슬은 땅 속에 심겨진 씨앗을 싹트게 한다. 하지만 비는 오히려 땅을 굳게 한다. 그래서 씨가 싹을 트는데 도리어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넘치는 은혜를 약속해 주셨다.
4. 저희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백합화는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은혜속에 아름답게 자란다. 사랑스럽슴니다. 또한 향기가 진해 취하고 싶어집니다. 나 자신이 그 향기에 빠져들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는 이와 같이 백합화 같습니다. 예수의 향기를 맡으며 그 분의 향기에 다 젖으시길 빕니다. 백합화는 순결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남을 체험할 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순결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순결하지 못한 인생이 백합화같이 어떻게 피겠습니까 이것은 오직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5.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한대 지방의 나무에 비해 열대 지방의 나무는 키가 크고 줄기가 굵은 데 비해 뿌리가 약합니다. 습기가 많고 큰 바람이 적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바람에도 쉽게 넘어지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본래 백향목은 줄기가 곧고 하늘을 향해 쭉 뻗어 가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키가 큰 나무이기 때문에 뿌리가 약하면 쓰러지게 됩니다.그러나 뿌리가 깊이 박히면 쓰러질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향목을 심으실 뿐만 아니라 그 나무가 하늘로 치솟게 키우십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뿌리를 깊이 박게 해주십니다. 얼마나 자상한 섭리이며 배려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백향목은 곧 나요 여러분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고목처럼, 그 어떤 이유 때문에 인생의 현장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고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쓰러진다면 받침대라도 설치해서 떠받칠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갑자기 쓰러지면 속수 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쓰러지지 않도록 그 뿌리를 깊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뿌리가 든든한 나무!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5.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본문 5-8절을 살펴보면 “백합화같이 피겠고”,“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다”,“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푸른 잣나무 같으니”등의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백합화,백향목,감람나무,포도나무,잣나무 등은 당시 이스라엘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박히고,퍼지고,아름답고”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무들 가운데 감람나무와 포도나무와 잣나무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본문 8하반절은 그 나무들이 하나님 때문에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열매를 따게 된다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열매는 수고와 땀의 결과입니다. 농부는 열매 때문에 땀 흘려 일합니다.학생은 결과를 위해 밤 새워 공부합니다.사업가는 성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합니다.결국 열매 때문에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결론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고 사랑하시고 가꾸시고 꽃 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5:4에서 주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라고 하셨고,15:5에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네 삶과 수고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고치시고 사랑하시고 결론 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사랑을 오늘 저와 예배에 참예한 모든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이슬과 같은 은혜를 힙입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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