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가 은총으로 (호2,14-17)
본문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 있을 때 어느 자객이 여왕을 암살하기 위해서 왕궁에 침입했다가 그만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범인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 이 범인이 “대단히 잘못했습니다.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용당해서 그만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은총을 베풀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여왕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를 살려준다면 너는 그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 그랬더니 이 범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건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 그 말에 여왕은 아무 조건 없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일생동안 은총을 베풀어 준 여왕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총이라는 말은 사실 여호와 하나님의 용어입니다. 사람에게는 은총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순전한 은총을 베풀 자격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은혜를 베풀때는 거기에 반드시 조건이 붙습니다. 조건이 없을지라도 마음으로 오래 기억하고 혹시 서운한 일이 있을 때는 배은망덕이니 하면서 서운해합니다. 그 범인의 말대로 조건이 붙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 그랫거 은총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용어입니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도 여러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처음에는 질투도 나타났습니다. 우상을 찾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질투가 진노로 변했습니다. 질투의 차원을 넘어서면 사랑은 미움과 질투가 섞인 진노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진노가 다시 은총으로 바뀌었습니다.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총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은총을 모르면 하나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런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꾸만 우상에게로 가지 못해 안달했습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상을 따라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모면서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의복을 다 빼앗겼다고 하셨습니다.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도 빼앗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이 백성들에게서 앞으로 즐겁고 평안하고 기쁜 날들을 모두 빼앗고 없애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백성에게 무슨 절기가 있고 명절이 있고 안식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상을 섬긴 날 수대로 벌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진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들고 사정없이 내리치시겠다고 하는 분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갑자기 그 진노의 먹구름은 사라지고 은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대기를 들고 내리치시려다가 잠시 멈추고 한번 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다시 한번 달래고 설득하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몇 가지 교육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1.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개유하시기 위해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셨ㅅ브니다. “개유”라는 말은 “타일러서 무지하고 막힌 마음을 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고집스럽고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달래서 마음을 고치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들고 내리치시려다가 생각해 보니 때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너무나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를 드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깨달아 알도록 타이르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다시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타이르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들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기천 들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집이나 교회를 떠나서 거친 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어떤 때는 집이나 교회보다도 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상해 있을 때, 그리고 앞길에 장애가 있고 큰 어려움이 있을 때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산으로 가서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산으로 가면 비록 잠자리는 불편하겠지만 마음껏 소리지르며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고 또 조용한 산속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시원해지고 깊은 깨달음이 주어지며 모든 것이 정돈됩니다. 사람은 때로 이렇게 산으로 가서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데리고 거친 들로 나가시겠다고 하신 이유는 그런 뜻입니다. 들로 나가 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생각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이끌고 들로 나가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위로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저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위로 한마디가 큰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학에서는 문제아를 치료할 때 환경을 바꾸어 주라고 권고합니다. 문제아는 혼내고 윽박지르고 야단을 치면 더 악화되고 더 탈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단만 칠 것이 아니고 먼저 환경을 새롭게 바꾸어 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마음이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매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우선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설득하면 들어야 합니다. 진지하게 호소하고 타이르면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호소하고 설득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고집 부리면서 거부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습니다. 얻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아픔이 주어지고 매가 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연속극을 보니까 엄마와 아이가 함게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아이를 때리는데 이 아이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그냥 앉아서 그 매를 다 맞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미니가“제발 좀 도망을 가든지 잘못했다고 빌든지 해라. 그래야 그만 때릴 것이 아니냐” 하며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매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때리고 싶어서 매를 든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니까 매를 든 것뿐입니다. 그러면 재빨리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명분이 생겨서 매를 놓게 되고 화를 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매를 들었는데도 이 아이가 잘못했다고 빌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매를 더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우매해서 그렇습니다. 고집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도 고집스러우면 미움을 받고 매를 더 맞는 법인데 하나님 앞에서 고집스러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매를 스스로 자청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집스럽고 무지한 백성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겠다고 했습니다. 들로 데리고 나가서 이 우매하고 고집스러운 백성들을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3. 선물을 주셨습니다. “(호2: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을 타이르실 뿐 아니라 선물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물인가 하면 포도원입니다. 아골 골짜기에 있는 포도원입니다. 아골 골짜기라는 말은 “슬픔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아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곳으로 데리고 가 돌을 던져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은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이후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아간이 죽기 전까지 그곳은 “풍요의 골짜기”였습니다. 아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골짜기가 아골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말을 들으면 그 슬픔의 골짜기를 예전처럼 풍요의 골짜기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그렇게 타일렀습니다. 얼마나 집요하십니까 그 타락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포기하고 버리시면 그만인데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죄인을 향한 무섭고 엄하신 얼굴입니다. 한번 막대기를 들면 피할 길이 없고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도망하여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집요하게 그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면 숨어지는 것입니까 요나가 도망가서 깊은 배 밑창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숨는다고 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곳까지 가셔서 깊이 숨어 있는 요나를 찾아내셨습니다. 숨어 있던 아담도 찾아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벌 주시려고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매를 드시고 책망하고 노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찾아내서는 물으십니다. 아담을 찾아내신 후에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그 열매를 따 먹었느냐 누가 너에게 그 열매를 따 먹으라 하더냐” 그 사유를 들으시고 나서 하나님은 그에게 매질을 하신 것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아담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반성하도록 시간을 주셨습니다. 요나에게도 물으셨습니다. “왜 도망갔느냐 니느웨 성에는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만 12만 명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망해서 죽어 가고 있는데 가기 싫다고 도망을 가면 어쩌자는 거냐” 니느웨로 가라. 가서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쳐라.“ 그때 요나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부하겠습니까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니느웨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호세아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교육 방법을 한마디로 표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6:1)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표현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냥 벌 주시고 매를 드시고 무서운 얼굴을 한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하나님은 또 마냥 사랑만 하고 인자하기만 한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때로 매를 드시고 벌을 주시고 진노하시는 양면성을 가지신 그런 하나님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한두 절 부르고 간주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의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동설한 때 보면 매일같이 추운 것이 아닙니다. 매섭게 춥다가도 중간중간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봄이 되었는데도 한겨울 날씨같이 매섭게 추운 날도 있습니다. 그래서 “2월에 장독깬다”는 말도 있습니다. 음력으로 2월이면 양력으로 3월입니다. 3월이면 완연한 봄날인데도 장독이 얼어서 깨질 정도로 추운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책망이 들어 있고 사랑도 들어 있습니다. 진노가 들어 있는가 하면 은총이 들어 있고 은총이 있는가 하면 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양면적인 성품으로 적절하게 인간을 훈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백성들을 포기해 버리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설득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모르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미국의 신학교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이 노 신학자는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깊으신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면 그것이 죄입니다. 오늘 이같이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보내 보십시오.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있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도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호세아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도 여러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처음에는 질투도 나타났습니다. 우상을 찾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질투가 진노로 변했습니다. 질투의 차원을 넘어서면 사랑은 미움과 질투가 섞인 진노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진노가 다시 은총으로 바뀌었습니다. 본문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총의 깊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은총을 모르면 하나님도 알 수가 없습니다. 모르면 오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그런 깊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꾸만 우상에게로 가지 못해 안달했습니다.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상을 따라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모면서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의복을 다 빼앗겼다고 하셨습니다.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도 빼앗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이 백성들에게서 앞으로 즐겁고 평안하고 기쁜 날들을 모두 빼앗고 없애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백성에게 무슨 절기가 있고 명절이 있고 안식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상을 섬긴 날 수대로 벌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진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들고 사정없이 내리치시겠다고 하는 분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갑자기 그 진노의 먹구름은 사라지고 은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막대기를 들고 내리치시려다가 잠시 멈추고 한번 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다시 한번 달래고 설득하시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몇 가지 교육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1.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개유하시기 위해 거친 들로 데리고 나가셨ㅅ브니다. “개유”라는 말은 “타일러서 무지하고 막힌 마음을 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고집스럽고 무지한 사람을 가르치고 달래서 마음을 고치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막대기를 들고 내리치시려다가 생각해 보니 때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너무나 무지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매를 드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깨달아 알도록 타이르는 것이 더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다시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타이르시고자 합니다. 그래서 들로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기천 들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집이나 교회를 떠나서 거친 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어떤 때는 집이나 교회보다도 산으로 가서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상해 있을 때, 그리고 앞길에 장애가 있고 큰 어려움이 있을 때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고 산으로 가서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산으로 가면 비록 잠자리는 불편하겠지만 마음껏 소리지르며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고 또 조용한 산속에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시원해지고 깊은 깨달음이 주어지며 모든 것이 정돈됩니다. 사람은 때로 이렇게 산으로 가서 기도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괴테는 “네 영혼이 피곤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을 데리고 거친 들로 나가시겠다고 하신 이유는 그런 뜻입니다. 들로 나가 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생각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이끌고 들로 나가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위로하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저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위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위로 한마디가 큰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학에서는 문제아를 치료할 때 환경을 바꾸어 주라고 권고합니다. 문제아는 혼내고 윽박지르고 야단을 치면 더 악화되고 더 탈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단만 칠 것이 아니고 먼저 환경을 새롭게 바꾸어 주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의 마음이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매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우선 성품이 좋아야 합니다. 설득하면 들어야 합니다. 진지하게 호소하고 타이르면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런데 호소하고 설득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끝까지 고집 부리면서 거부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습니다. 얻어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러면 아픔이 주어지고 매가 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연속극을 보니까 엄마와 아이가 함게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손에 막대기를 들고 아이를 때리는데 이 아이가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그냥 앉아서 그 매를 다 맞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미니가“제발 좀 도망을 가든지 잘못했다고 빌든지 해라. 그래야 그만 때릴 것이 아니냐” 하며 아이도 울고 엄마도 울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매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때리고 싶어서 매를 든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니까 매를 든 것뿐입니다. 그러면 재빨리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명분이 생겨서 매를 놓게 되고 화를 풀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매를 들었는데도 이 아이가 잘못했다고 빌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매를 더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우매해서 그렇습니다. 고집스러워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 앞에서도 고집스러우면 미움을 받고 매를 더 맞는 법인데 하나님 앞에서 고집스러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매를 스스로 자청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고집스럽고 무지한 백성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겠다고 했습니다. 들로 데리고 나가서 이 우매하고 고집스러운 백성들을 다시 한번 조용히 타이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피우면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3. 선물을 주셨습니다. “(호2: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백성들을 타이르실 뿐 아니라 선물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물인가 하면 포도원입니다. 아골 골짜기에 있는 포도원입니다. 아골 골짜기라는 말은 “슬픔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아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곳으로 데리고 가 돌을 던져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사람들은 돌무더기를 쌓아 놓았습니다. 이후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아간이 죽기 전까지 그곳은 “풍요의 골짜기”였습니다. 아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골짜기가 아골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말을 들으면 그 슬픔의 골짜기를 예전처럼 풍요의 골짜기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그렇게 타일렀습니다. 얼마나 집요하십니까 그 타락하고 무지한 백성들을 포기하고 버리시면 그만인데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설득하려고 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죄인을 향한 무섭고 엄하신 얼굴입니다. 한번 막대기를 들면 피할 길이 없고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도망하여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집요하게 그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면 숨어지는 것입니까 요나가 도망가서 깊은 배 밑창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숨는다고 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곳까지 가셔서 깊이 숨어 있는 요나를 찾아내셨습니다. 숨어 있던 아담도 찾아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벌 주시려고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집요하게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매를 드시고 책망하고 노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찾아내서는 물으십니다. 아담을 찾아내신 후에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그 열매를 따 먹었느냐 누가 너에게 그 열매를 따 먹으라 하더냐” 그 사유를 들으시고 나서 하나님은 그에게 매질을 하신 것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아담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반성하도록 시간을 주셨습니다. 요나에게도 물으셨습니다. “왜 도망갔느냐 니느웨 성에는 분별력이 없는 아이들만 12만 명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망해서 죽어 가고 있는데 가기 싫다고 도망을 가면 어쩌자는 거냐” 니느웨로 가라. 가서 심판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쳐라.“ 그때 요나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부하겠습니까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니느웨로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호세아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교육 방법을 한마디로 표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6:1)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잘 표현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냥 벌 주시고 매를 드시고 무서운 얼굴을 한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하나님은 또 마냥 사랑만 하고 인자하기만 한 그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때로 매를 드시고 벌을 주시고 진노하시는 양면성을 가지신 그런 하나님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한두 절 부르고 간주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마음의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동설한 때 보면 매일같이 추운 것이 아닙니다. 매섭게 춥다가도 중간중간 봄날같이 따뜻한 날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봄이 되었는데도 한겨울 날씨같이 매섭게 추운 날도 있습니다. 그래서 “2월에 장독깬다”는 말도 있습니다. 음력으로 2월이면 양력으로 3월입니다. 3월이면 완연한 봄날인데도 장독이 얼어서 깨질 정도로 추운 날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책망이 들어 있고 사랑도 들어 있습니다. 진노가 들어 있는가 하면 은총이 들어 있고 은총이 있는가 하면 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양면적인 성품으로 적절하게 인간을 훈련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백성들을 포기해 버리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설득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모르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미국의 신학교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이 노 신학자는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심오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깊으신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면 그것이 죄입니다. 오늘 이같이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보내 보십시오.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있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오늘도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깊으신 사랑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