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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궁한 까닭이 무엇이뇨 (학1:3-11)

본문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음미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평가되고 반성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이 말은 사람은 부단히 자기자신을 살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기 성찰과 자기 진단을 통해서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 놓은 '탈무드'에 보면 인간을 평가하는 세 가 지 기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란 히브리말로 '키소, 코소, 카소'입니다. 첫 번째 '키소'는 '돈을 넣는 주머니'를 뜻하는 말로 돈을 어떻게 벌고 쓰 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코소'는 '술잔' 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인생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즐기는 인생 인가', '어디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카소'는 '노여움'을 뜻하는 말로 인내력의 정도를 묻는 단어입니다. 얼마나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며 살았는가로 그 사람을 평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을 어떻게 쓰며, 무엇을 즐거워하며, 얼마나 자기 감정을 잘 조절하는가로 유대인들은 인생을 평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탈무드가 제시하는 세 가지 잣대로 오늘 우리 자신을 재어본다 면 과연 나의 인생, 나의 삶의 질은 어떠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잘 살고 있습니 까, 못살고 있습니까 풍성한 삶입니까, 빈궁한 삶입니까. 연2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위기 관리체제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단 한 줄로 요 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의 질을 곤두박질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 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빈궁한 삶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작년이 나 올해나 모든 것이 이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빈궁하게 하는 경제위기로부터 벗어 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어서 속히 경제위기를 탈출하여 풍성한 삶 의 질을 누리는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소망인 것입니다.
그럼 과연 이러한 빈궁한 삶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과연 오늘의 빈궁한 삶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나 풍부한 삶에로의 전환은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이 올 한 해 우리에게 주어진 국가 적, 사회적, 가정적, 개인적 과제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늘의 빈궁한 삶을 초래한 그 근본원인이 무엇 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잎사귀 말고, 가지 말고, 드러나 보이는 밑동 말고, 그 밑에 깊히 내리워져 있는 뿌리, 그 근본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대처와 처방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전 538년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던 유다 백성들은 파사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꿈에 그리던 고향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저들은 조국에 돌아오 자마자 성전 재건에 착수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에스라1:2절과 6:3절에서 보듯 이 성전 재건이 저들을 포로지에서 귀환시킨 고레스가 내린 주명령이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성전 건축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이웃 사마리아 사람들의 저항으로 결국에는 그 완성을 보 지 못하고 중단되고 맙니다. 그리고 1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은 백성들 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갑니다. 그러다 주전 520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학개 선지가 등장하여 유대 백성이 잊어버린 성전 재건의 본분을 일깨우기까지 성전은 지붕도 없이 폐허가 된 모습으로 흉물이 되어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드디어 학개 선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유다 백성 들에게 성전 재건을 외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학개의 선포는 곧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히고 맙니다. 백성들이 학개의 외침에 동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저항의 이유가 2절에 하나님의 간접화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 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저들은 '지금은 야웨의 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 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가 힘든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강 변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5절에서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찌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 또한 번 거듭 재촉하십니다. '너희 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돌아보아라.' 이 말씀은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스스로를 성찰해보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 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보라는 저들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학개는 성전을 건축 할 시기가 아니라고 말하는 백성들을 향해 4절에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 전 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이 구절 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때에 판벽한 '너희'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히브리 원문에는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가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롱조의 반문으로 폐허가 된 하나님의 성전에 무관심한 저들의 이기주의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무했습니다. 여기 황무란 '최악의 황폐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집은 판벽한 집이었습니다. 여기 '판벽'이란 '덮게', 곧 '지붕'을 말합니다. 예언자는 백성들의 지붕 덮힌 집과 지붕도 없이 폐허가 된 채 오래도록 방치되고 있는 하나님의 집을 대조합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집은 지붕 하나 없이 폐허된 채로 버려두고 자신들은 지붕이 덮힌 집에서 편안 히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옳은 태도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은 단순히 성전을 짓느냐 안짓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학개는 지금 유다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심각 한 징후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외심의 사라져감이 지금 두 가지 점 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 주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자기들의 집을 다시 짓기 위해 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집을 사고, 집을 꾸미고, 새 가구를 들이기 위해서 시간외 근무도 하고 철야 작업도 마다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여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삶의 의미와 구심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고의적으로 성전 건축을 미루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소홀히 여김 받는 성전과 더불어 하나님이 저 들의 삶과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저 들 삶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아니라 여백이요,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 였습니다. 그리고 이것과 밀접한 또 다른 문제는 백성들이 시대의 표징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 어떤 참회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욕심에 충혈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숨가쁘게 살았습니다. 그 상징이 바로 '황무한 하나님의 집'과 '판벽한 자신들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신앙적 경솔성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아넘길 성질의 것이 아 니었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을 자신들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행위가 바로 성전 건 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족할 것이고 그것을 당신께 대한 경외심으 로 인정하시겠다고 8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당시 백성들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저들이 과연 레바논의 백향목 과 잣나무로 대리석으로 그 옛날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을까요 당시 백성들은 대부분 극심한 빈곤을 겪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멈추고 살아온 16년 동안 손이 닳도록 애쓰고 노력했지만 모든 경제 생활은 아 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었지만 가뭄으 로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먹걸이 농사가 흉작이니 의식주 등의 기본적인 생존권 전체가 위협을 받았습니다. 6절은 그러한 저들의 당면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 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까요 이렇게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학개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찌니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생활 태도와 현재 처한 곤경의 관 계를 심사숙고하라는 촉구'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지금의 고난에 이르기까지 여태껏 살아온 나날들을 곰곰히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항로에서 암초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선 가던 길을 멈 추어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7: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 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학개 선지는 유다 백성들에게 숨 가쁜 현실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멈춤 표시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사고를 초래할 수밖 에 없습니다. 제 속도를 무시하고 교만과 욕심으로 과속질주를 멈추지 않아 수 많은 인명을 수장시킨 타이타닉의 침몰은 멈춤 없는 인생의 말로를 대변합니다. 고난은 인간에게 반성문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반성문을 쓰질 않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열정적 삶에도 불구하 고 공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당면한 지금의 냉엄한 현실은 하나님을 밀쳐놓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 했던 이기적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에 게 주어진 사명, 곧 성전 재건이라는 1차적 임무는 저버리고 자신의 일에만 몰 두했던 그 삶의 결과가 바로 경제 파국이라는 판결로 내려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경제 난국도 이 민족에게 국가적 반성문을 요구 하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경유착, 부정부 패, 부익부빈익빈, 과소비 등등 우리 민족이 걸어온 그릇된 삶의 자세를 멈추 어 성찰케 하고 새롭게 정립하게 하시는 정화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에 적절한 멈춤은 과거의 반성과 더불어 미래를 위한 충전의 기회이기도 한 것 입니다. 자,
그런데 9절에 보면 우리로 좀 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 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여기 '내가 불어 버렸느니 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불어버렸다는 겁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이 지금 어려운 지경에 처해 헐떡이며 사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이 가져가려하는 것들을 '훅-' 불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불어버렸다'는 표현은 우선 재물의 무상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훅-' 불면 한 순간에 날라지고 마는 검불 같은 것이고 겨와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검불 같은 것, 그러나 인간들이 혈안이 되어 붙잡으려 고 안간힘을 쓰는 그것들을 저들로부터 날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저들 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그러한 현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 생각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영적으로 매우 둔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 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우매한 백성들 을 향해 학개는 흉작과 심판 사이에 불가피한 관련이 있나 없나를 한 번 생각 해 보라고 5절과 9절에서 거듭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십니다. 먼저 9절에서 하나님은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연고뇨' '너희가 그토 록 얻으려 하는데도 얻지 못하고 붙잡으려 하는데도 붙잡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뇨' 그리고 당신 스스로 대답하십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내 집은 황 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여기 '자신의 집을 위 해 뛰어다닌다'는 회화적 표현은 자신이 거하는 집, 그리고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 자신의 재산이었던 것을 재획득하려고 찾으러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집의 내장과 외장을 꾸미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그랬기에 '하늘은 이슬 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 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 가 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예언자 학개나 유다 백성들 이 처해있는 상황은 동일합니다. 모두가 극심한 곤궁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해석하는 눈은 전혀 다릇습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곤궁이 꽉 들어찬 현 실 때문에 성전을 재건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는데 반해 예언자 학개는 성전 재건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오늘의 이러한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예언자는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뒤집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주장은 '우리의 현실이 지금 이러하니 성전 재건은 꿈도 못꾼다'이고, 예언자 학개는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성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때문이니 이제라도 성 전 재건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상반된 입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언자에게는 지나온 날에 대한 성찰이 있지만 백성들에게는 지나온 날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에게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보라'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신앙과 불신앙의 해석은 놀라울 정도로 정반대입니다. 현실이 곤궁하기에 성전 재건에 관심할 수 없다는 백성들의 주장과 오늘의 곤궁한 삶의 원인이 바로 성전 재건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는, 그러니 이제라 도 우리가 이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학개의 주장은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시간도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는 이 백성의 빗나간 열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삶의 관심이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변적인 것을 중심에 끌어들이고 정작 중심적인 것을 주변으로 밀치는 불신앙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전에 관한 무관 심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고난이 그들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로 지금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야웨 하나님께서 자신이 거하시는 성 전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백성들 앞에 심판자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현 상태를 묘사하는 '황무(荒蕪)'라는 단어와 하나님이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한재(旱災)'라는 단어의 히브리 어 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황무는 '하레브'요 한재는 '호레브'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황무'가 자기 스스로에게 한재를 자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본 연의 임무에 태만한 백성이 방치한 성전의 황무함이 결국 그들 자신에게도 메 아리가 되어 한재로 뒤덮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성전과 백성은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처한 상태가 곧 이 백성이 처해질 상태입니다. 성전을 황무한 상태로 방치함이 결국 자신들의 삶을 가뭄과 재앙으로 망치게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자신의 일에만 분주한 빗나간 열정적 삶은 아무런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별반 다를 바 없게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요구보다 자기의 요구를 앞세우고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아야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학개는 유다 백성에게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학개는 이러한 유다 백성에게 저들이 빈궁한 삶에서 풍성한 삶으로 전 환할 수 있는 새로운 행동을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야웨가 말하였느니라.' 이 학개의 권고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개는 저들에게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 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솔
로몬 성전의 기억을 한 번 더듬어보시기 바랍니다. 왕상 5:10절에 보면 과 거의 솔로몬 성전은 레바논의 아름드리 백향목과 잣나무들을 주 재목으로 사용 했었습니다. 그것을 요즈음에 비긴다면 가장 최고로 치는 이탈리아산 원목과 이탈리아산 대리석에 해당되는 것들입니다. 또한 그 성전은 외국의 전문 기술 자들이 총동원되어 건축된 것이었습니다. 왕상5:18절에 보면 '솔로몬의 건축자 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면에 최고의 것을 사용한 것이 제1성전,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학개를 무엇으로 성전을 지으라고 독려합니까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언급된 것은 레바논의 백향목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지으라고 학개는 권고합니다. 게다가 돌도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학개의 권고는 건축 전문가에게 한 것이 아니고 평범한 백성들 에게 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학개가 요구하는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이 하기 어려운 무리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근처 산에 올라가 평범한 나무로 성전을 지으라는 것은 즉 당신을 향한 최소한의 정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레바논 의 백향목이나 잣나무, 대리석으로 성전을 지을만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것을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을 핑계하며 주 어진 사명을 외면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할 수 있는 일, 가능한 일 을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두 가지 복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기뻐한다는 히브리어 '라짜'는 예 배 때 사용되는 전문 용어로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최고급으로 치장하지 않은 성전이라 할지라도 합법적인 성전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나는 나의 영광을 보이리라'입니다. 즉 당신의 임 재와 능력과 자비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2:9절의 구원과 번영, 2:19절의 복 그리고 2:22절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통해 저들 에게 이런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이 당신 백성들에게 복을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권고를 백성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작은 정성일지라도 그것이 진실될 때에 엄청난 축복을 불러오는 것 을 알기에 저들에게 복된 길을 열어주려고 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학개의 권면에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응답할까요 12절에 보면 '모 든 백성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기 '흥분시켰다'는 말은 직역하면 '영을 일깨우셨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이제 비로소 죽어있던 영이 되살아납니다. 퇴락한 영성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경을 깨닫고 예 언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마침내 성전 재건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올 한해를 풍성하게 사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을 경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내 소원보다 하나님의 소원을 앞세우고 사시기 를 바랍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 하면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입니다. 주 님은 우리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 처지에서 정성껏 당신을 섬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황무케 하면 우리의 삶도 황무 하게 되지만 우리가 그분을 윤택케 하면 우리의 삶도 윤택하게 되는 이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주님의 작은 종으로서 학개처럼 이 풍성한 삶의 길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유다 백성들처럼 청종하고 영의 일깨움을 받아 참으로 복된 한 해를 주 안에서 살아가시는 우리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빈궁함 속에 살면서도 그 빈궁함의 연고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쉬임 없이 자기 적 생을 살아가는 저희에게 오늘도 주님의 귀한 말씀을 허락하시니 감사를 드리옵니다. 저희에게 저희 삶의 문제의 뿌리를 찾는 지혜를 주옵시고 그 깨달음 속에 올바른 삶을 회복시켜 갈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이 한 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하시고 저희 영이 잠들지 않도록 인도하 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참으로 저희 삶을 풍성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 님의 뜻대로 풍성한 한 해를 살아가는 저희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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