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약 (창9:8-17)
본문
오늘 성경 말씀에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약 이라는 단어이며 이 말은 다른 말로 약속 또는 계약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언약의 종교라고 할 만큼 하나님과 우리 와의 관계는 언약을 묶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가리켜 구약이니, 신약이니 하는 말도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며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개인과 개인 또는 국가와 국가간에 여러가지의 계약이나 약속들이 있으며 인간의 삶은 그 약속들에 의해서 또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같은 약속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두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그러한 내용으로 계약이 이루어지는 평등한 계약과 또 하나는 마치 왕과 백성과의 계약처럼 일방적으로 힘이 있는 한 쪽에 의해 작성되어 약한 쪽은 그대로 따라만 가는 불평등한 계약으로 나뉘어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들은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도된 불평등한 계약이지만 그 내용이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유익을 목적으로 하는 일 방적인 계약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1.노아에게 축복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살기 좋은 지상 낙원인 에덴 동산에 서 맺으신 첫 언약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하다가 마침내 홍 수 심판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노아의 여덟 식구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 되었습니다. 국가를 세울 때 먼저 건국의 이념을 담은 법을 제정함과 같이 최초의 인류 역사인 아담때에도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셨던 것처럼, 홍수 심판 후 다시 시작되는 인류의 역사도 새로운 언약이 요구되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드린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 게 약속하신 몇가지 축복들이 있습니다.
1)생육하고 번성하라 홍수 심판으로 노아의 가족외에는 다 멸망을 다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창 9: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축복하심은 아담을 지으시고 하셨던 축복의 선언과 동일 한 것이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한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거슬로 올라가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단 한 가정인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의 성취였다면 노아의 가족은 그 때보다 더 많기 때문에 얼마든지 땅에 충만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지구상에 가득한 세계만민들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적인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 여 부에 좌우됨을 알아야 합니다.
2)너희를 무서워 하리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실 때 사실 인간의 수나 힘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절대 열세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난폭하며 무서운 독이나 나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인간을 공격한다면 인간은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9: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 웠음이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동물들이 인간을 무서워하도록 인간의 손에 붙여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3)동물은 너희 식물이 될지라 노아 홍수 이전에는 인간들이 채식 위주의 삶을 살았지만 노아 홍수 심판이후에 급 변한 지구의 생태적 변화 속에서 인간에게는 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함을 하나님은 아시고 (창9: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홍수 심판을 통해서 공허해 진 인간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자상한 배려와 위로와 앞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 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잘알 수 있습니다.
2. 계율 성경에 나타난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 임과 의무가 계율로 명시되어있어서 그것을 얼마나 잘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의 선 언 뒤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법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더불어 지켜야할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9:6)무 릇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 한 말씀처럼 짐승을 피채 먹지 말며 사람을 죽이 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흘려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하나님은 고기를 피채 먹지말며 또한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조차도 생명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치심입니다. 그 가운데 더욱 인간의 생명이 귀한 까닭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죽이는 일은 바로 그 인간 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서는 왕의 형상을 새겨 넣은 동전을 사용하였는데 만일 누구든 지 그 동전을찌그러 뜨리기만 하면 사형을 당하였는데 그것은 동전이 찌그러듦으로 말미암아 왕의 형상도 함께 찌그러들기 때문에 왕에 대한 불경죄가 된다고 하는 것 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북에서는 김일성의 얼굴이 새겨진 뱃지나 초상화를 사람들이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되어 갈 수록 황금만능주의의 만연과 더불어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어가 고 있는 현실은 마치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며 사람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 해하는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피조물이 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이 인간이 대접받는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진화된 동물이라면 인간의 가치는 그 효용성 면에서는 차이가 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짐승보다 절대적으로 존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생 명에 대한 존엄성은 말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회가 유물론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자비한 숙청과 계급 투쟁으로 인한 수많은 양민 학살입니다.
3.무지개 언약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홍수 심판을 경험한 노 아의 가족에게는 얼마든지 두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1)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이같은 노아에게 (창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 니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2) 그 약속은 흘러 지나가는 말로만의 약속이 아니라 (창9:16) 무지개가 구름 사 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 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는 말씀처럼 비가 올 때 흔히 볼 수 있는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의 증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역사가 시작되며 제2의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아와 그의 후 손들에게 살인을 금하시면서 더불어 다시는 인류를 홍수로 심판치 아니하시고 생육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 인 노아와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비가 올 때마다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으로 안 심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비록 긴 장마가 일고 비바람이 불지라도 무지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노아와 맺으신 무지개 언약은 과연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습니까 이미 말씀한 것처럼 세상의 계약은 쌍방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와같은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맺으신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처럼 무지개 언약을 맺으심으로 말미암아 인 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그같은 사랑을 약속 받은 인간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과 언약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홍수 심판 당시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 중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자손들도 역시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 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씀처럼 그 마음 의 계획이 악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120년 동 안이나 믿음을 지키며 의롭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노아, 그리고 방주안 에서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방주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노아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노아와는 아주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발견 하게 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무지개 언약으로 안심시켜 주신 후에 노아의 생활에서 나타난 영적인 해이함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다시는 홍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마음에 평화와 안심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나태해져서 (창9:21) 포도주 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지라 고 하신 말씀처럼 부끄러운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노아의 모습을 통해서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함을 받은 것은 선한 믿음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왜 다시는 홍수로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노아가 부패한 시대에서도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의인이었지만 그것도 하나님 의 은혜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성하고 깨어서 세속에 물들 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결코 과거 우리가 하나님을 잘믿고 충성했었다고 하는 과거의 경력이 나 현재의 열심만을 보고 아주 포기하고 우리를 멀리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에 언제든지 약해질 수 있고 식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잘알고 있기 때문에 물이 구비치는 계곡에서 고기가 뛰어 오르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곰처럼 우리의 허점 이 드러날 때까지 잠복 근무하고 있다가 약점이 보이면 그곳을 집중 공격하여 넘어 뜨린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처음서 부터 폭음을 한 것이 아니며 한잔 한잔 마시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포도주에 취하여 버리고 말았으며 그 후로는 체면을 잊고 추태를 보이는 데까지 이르고 만 것입니다. 술에 취한 부끄러운 모습을 함이 발견하게 되었을때 똑같은 노아의 아들이었으나 함은 (창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 게 고하매 라는 말씀처럼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정반대로 셈과 야벳은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 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웠습니다. 물론 잘못은 노아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함의 자손에게는 (창9:25) 이 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처 럼 저주가 임하였으나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셈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적 인 조상이 되는 반면에 야벳의 자손은 아주 큰나라를 이루고 물질적으로 번영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 (창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 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함에게 문제점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보고 그것을 덮으려고 하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었으나 셈과 야벳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아버지의 죄를 등뒤로 돌리고 보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과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잠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 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함의 죄는 자신의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어 조롱꺼 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 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처럼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3.새언약 노아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본질적으로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 니며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아니하면 타락한 인간 속에 내 재하고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날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말세에는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 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알면서 죄가 없이 깨끗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왜 그 말세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더 좋은 언약을 우리에게 맺어 주셨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실 때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 말씀하신 새 언약으로 예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하지 아니하는 구원에 대한 보증의 언약아래 우리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인 것 입니다. 새언약의 예수님은 무지개보다 더 안전한 십자가의 피로써 죄에 대한 죽음의 공포 에서 자유함을 주시는 언약의 증표로 삼아주셨습니다. 죄에 걸려 넘어지고 구원에 대한 확신 없어지고 죽음과 심판에 대한 불안함은 십자가아래에서 참 자유와 평안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낱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잘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더 가까와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 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세상의 어떤 폭풍우도 십자가 사랑안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의 성도들은 노아보다 더 좋은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무지개 언약을 세우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하지 못함을 다 아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셔서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함을 약속하신 새언약을 체결해 주 셨습니다. 결론 우리는 그처럼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에도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 며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자그만치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였던 노 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은채 골아 떨어져서 코를 골고 있는 추한 모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원죄가 얼마나 인류의 뼈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 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넘어지게 한 사단은 피곤을 모르는 자로 성도들이 지금 하나님을 잘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알아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약점만 보이면 누구룰 막론하고 기회를 노려 공격하여 넘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믿었던 것과 충성했던 것으로 자랑할 것이 못되며 항상 긴장하 고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인 경성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을 실족하게 만든 그 술은 오늘도 불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자들을 취하게 만들며 그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죄없는 아내를 학대하고 폭행하며, 음주 운 전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부도덕한 죄에 빠져 가정 파탄을 가져오고 인격적으로 자 제력을 잃어 체면을 손상케 만들기도 합니다, 만일 술이 우리의 육신을 유익하게 만들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우리 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태어 그것을 못하도록 막으실리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금하신 것들은 알고보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 니라 모두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안에는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노아처럼 구원의 체험을 가지고 있 으면서도 현재 술취한 노아처럼 어중간하게 세상 죄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또 하나는 과거에는 실수를 하였으나 현재는 그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되 어 보다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함과 같이 복받지 못할 사람과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셈과 같이 복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에 물이 아니라 불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1)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이 없이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며
2)구원받았다고 나태해지지 말고 깨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상 술에 취하지 말것이며
3)남의 허물을 가리우는 사랑의 사람들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1.노아에게 축복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살기 좋은 지상 낙원인 에덴 동산에 서 맺으신 첫 언약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으로 관용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범죄하다가 마침내 홍 수 심판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노아의 여덟 식구에 의해 인류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 되었습니다. 국가를 세울 때 먼저 건국의 이념을 담은 법을 제정함과 같이 최초의 인류 역사인 아담때에도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셨던 것처럼, 홍수 심판 후 다시 시작되는 인류의 역사도 새로운 언약이 요구되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드린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 게 약속하신 몇가지 축복들이 있습니다.
1)생육하고 번성하라 홍수 심판으로 노아의 가족외에는 다 멸망을 다하였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창 9: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축복하심은 아담을 지으시고 하셨던 축복의 선언과 동일 한 것이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한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거슬로 올라가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단 한 가정인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의 성취였다면 노아의 가족은 그 때보다 더 많기 때문에 얼마든지 땅에 충만할 수 있으며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지구상에 가득한 세계만민들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적인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 여 부에 좌우됨을 알아야 합니다.
2)너희를 무서워 하리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실 때 사실 인간의 수나 힘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절대 열세에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야생 동물들은 인간보다 힘이 세고난폭하며 무서운 독이나 나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인간을 공격한다면 인간은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9: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 웠음이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동물들이 인간을 무서워하도록 인간의 손에 붙여 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3)동물은 너희 식물이 될지라 노아 홍수 이전에는 인간들이 채식 위주의 삶을 살았지만 노아 홍수 심판이후에 급 변한 지구의 생태적 변화 속에서 인간에게는 더 많은 영양소가 필요함을 하나님은 아시고 (창9: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홍수 심판을 통해서 공허해 진 인간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자상한 배려와 위로와 앞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 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잘알 수 있습니다.
2. 계율 성경에 나타난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 임과 의무가 계율로 명시되어있어서 그것을 얼마나 잘 이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의 선 언 뒤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법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과 더불어 지켜야할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9:6)무 릇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 한 말씀처럼 짐승을 피채 먹지 말며 사람을 죽이 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흘려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신 하나님은 고기를 피채 먹지말며 또한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조차도 생명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는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치심입니다. 그 가운데 더욱 인간의 생명이 귀한 까닭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죽이는 일은 바로 그 인간 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서는 왕의 형상을 새겨 넣은 동전을 사용하였는데 만일 누구든 지 그 동전을찌그러 뜨리기만 하면 사형을 당하였는데 그것은 동전이 찌그러듦으로 말미암아 왕의 형상도 함께 찌그러들기 때문에 왕에 대한 불경죄가 된다고 하는 것 입니다. 아마도 지금 이북에서는 김일성의 얼굴이 새겨진 뱃지나 초상화를 사람들이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고 있을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되어 갈 수록 황금만능주의의 만연과 더불어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어가 고 있는 현실은 마치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며 사람이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 해하는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피조물이 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이 인간이 대접받는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이 진화된 동물이라면 인간의 가치는 그 효용성 면에서는 차이가 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짐승보다 절대적으로 존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생 명에 대한 존엄성은 말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회가 유물론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자비한 숙청과 계급 투쟁으로 인한 수많은 양민 학살입니다.
3.무지개 언약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홍수 심판을 경험한 노 아의 가족에게는 얼마든지 두려움을 가져다 줄 수 있었습니다.
1)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이같은 노아에게 (창9: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 니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2) 그 약속은 흘러 지나가는 말로만의 약속이 아니라 (창9:16) 무지개가 구름 사 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 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는 말씀처럼 비가 올 때 흔히 볼 수 있는 무지개를 통해서 언약의 증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새 역사가 시작되며 제2의 인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노아와 그의 후 손들에게 살인을 금하시면서 더불어 다시는 인류를 홍수로 심판치 아니하시고 생육 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 인 노아와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비가 올 때마다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으로 안 심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비록 긴 장마가 일고 비바람이 불지라도 무지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노아와 맺으신 무지개 언약은 과연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습니까 이미 말씀한 것처럼 세상의 계약은 쌍방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상호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와같은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맺으신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처럼 무지개 언약을 맺으심으로 말미암아 인 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그같은 사랑을 약속 받은 인간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과 언약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홍수 심판 당시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 중에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자손들도 역시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도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 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씀처럼 그 마음 의 계획이 악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오늘 성경이 그 사실을 잘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120년 동 안이나 믿음을 지키며 의롭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노아, 그리고 방주안 에서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방주에서 나온 후 제일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노아가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노아와는 아주 다른 실망스러운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발견 하게 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무지개 언약으로 안심시켜 주신 후에 노아의 생활에서 나타난 영적인 해이함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다시는 홍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마음에 평화와 안심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나태해져서 (창9:21) 포도주 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지라 고 하신 말씀처럼 부끄러운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노아의 모습을 통해서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함을 받은 것은 선한 믿음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왜 다시는 홍수로 심판을 하시지 않겠다는 무지개 언약을 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노아가 부패한 시대에서도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의인이었지만 그것도 하나님 의 은혜이기 때문에 겸손하게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성하고 깨어서 세속에 물들 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나가야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결코 과거 우리가 하나님을 잘믿고 충성했었다고 하는 과거의 경력이 나 현재의 열심만을 보고 아주 포기하고 우리를 멀리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에 언제든지 약해질 수 있고 식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잘알고 있기 때문에 물이 구비치는 계곡에서 고기가 뛰어 오르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리는 곰처럼 우리의 허점 이 드러날 때까지 잠복 근무하고 있다가 약점이 보이면 그곳을 집중 공격하여 넘어 뜨린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처음서 부터 폭음을 한 것이 아니며 한잔 한잔 마시다가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포도주에 취하여 버리고 말았으며 그 후로는 체면을 잊고 추태를 보이는 데까지 이르고 만 것입니다. 술에 취한 부끄러운 모습을 함이 발견하게 되었을때 똑같은 노아의 아들이었으나 함은 (창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 게 고하매 라는 말씀처럼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정반대로 셈과 야벳은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 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아버지의 허물을 가리웠습니다. 물론 잘못은 노아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함의 자손에게는 (창9:25) 이 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처 럼 저주가 임하였으나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셈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가 탄생하는 영적 인 조상이 되는 반면에 야벳의 자손은 아주 큰나라를 이루고 물질적으로 번영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 (창9: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9: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 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함에게 문제점은 자기 아버지의 죄를 보고 그것을 덮으려고 하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었으나 셈과 야벳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아버지의 죄를 등뒤로 돌리고 보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과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잠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 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함의 죄는 자신의 아버지의 허물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어 조롱꺼 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 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처럼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3.새언약 노아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본질적으로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 니며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아니하면 타락한 인간 속에 내 재하고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날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말세에는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 이라는 말씀을 우리는 잘알면서 죄가 없이 깨끗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왜 그 말세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더 좋은 언약을 우리에게 맺어 주셨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성찬을 나누실 때 (눅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고 말씀하신 새 언약으로 예수님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그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당하지 아니하는 구원에 대한 보증의 언약아래 우리가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인 것 입니다. 새언약의 예수님은 무지개보다 더 안전한 십자가의 피로써 죄에 대한 죽음의 공포 에서 자유함을 주시는 언약의 증표로 삼아주셨습니다. 죄에 걸려 넘어지고 구원에 대한 확신 없어지고 죽음과 심판에 대한 불안함은 십자가아래에서 참 자유와 평안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한낱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잘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십자가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더 가까와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 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세상의 어떤 폭풍우도 십자가 사랑안에서 우리를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의 성도들은 노아보다 더 좋은 언약 아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구원을 보장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무지개 언약을 세우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하지 못함을 다 아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어주셔서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함을 약속하신 새언약을 체결해 주 셨습니다. 결론 우리는 그처럼 죄악이 관영하던 시대에도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 며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자그만치 1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였던 노 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은채 골아 떨어져서 코를 골고 있는 추한 모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원죄가 얼마나 인류의 뼈속 깊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 가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을 넘어지게 한 사단은 피곤을 모르는 자로 성도들이 지금 하나님을 잘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 알아주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약점만 보이면 누구룰 막론하고 기회를 노려 공격하여 넘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잘믿었던 것과 충성했던 것으로 자랑할 것이 못되며 항상 긴장하 고 자신을 돌아보는 영적인 경성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을 실족하게 만든 그 술은 오늘도 불신자들은 물론 많은 신자들을 취하게 만들며 그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죄없는 아내를 학대하고 폭행하며, 음주 운 전으로 사고를 일으키고, 부도덕한 죄에 빠져 가정 파탄을 가져오고 인격적으로 자 제력을 잃어 체면을 손상케 만들기도 합니다, 만일 술이 우리의 육신을 유익하게 만들고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우리 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태어 그것을 못하도록 막으실리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금하신 것들은 알고보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 니라 모두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안에는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노아처럼 구원의 체험을 가지고 있 으면서도 현재 술취한 노아처럼 어중간하게 세상 죄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과 또 하나는 과거에는 실수를 하였으나 현재는 그 죄를 회개하고 정결케되 어 보다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가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함과 같이 복받지 못할 사람과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셈과 같이 복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에 물이 아니라 불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 그 날이 오기 전에 우리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1)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두려움이 없이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하며
2)구원받았다고 나태해지지 말고 깨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상 술에 취하지 말것이며
3)남의 허물을 가리우는 사랑의 사람들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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