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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만 살아야 할 성도 (합1: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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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12-605년 사이에 요시아가 왕으로 제위하고 있는 때에 주변 강대 국가인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위해서 곧 내려올 상황에 처해 있을 때였으며,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요시아 왕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려나 했는데, 요시아가 사망함으로 인해 개혁은 커녕 도리어 죄악된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 버렸습니다. 부패와 타락의 모습은 개혁되기 이전의 모습대로 되돌아가 죄에 대한 면역성이 더 강해져 이제는 죄를 지어도 죄인 줄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징계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스라엘보다 더 극악무도하고 패역한 나라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우리보다 더 악하고 패역한 나라를 통하여 치려고 하십니까 정말로 흉악스러운 바벨론을 통하여 우리를 치려고 하십니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말씀을 무시하므로 진노가 나타나는 것은 마땅하지만 왜 하필이면 바벨론을 사용하시는가 였습니다. 아무리 선민들이 악하다 해도 그래도 하나님의 선민인데, 바벨론 사람보다 더 악할까요 하는 질문을 하나님께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물음은 곧 우리들의 물음입니다. 성도라면 누구 나가 품을 수 있는 신앙에 대한 의문점들을 하박국은 직접 그 해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의인이 악인에게 고난을 받을 이유가 무엇입니까(1:12-17) 하나님은 의인들이 의인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연단이나, 훈련시키는 도구로 악인들을 허용하고 계십니다. 또 죄를 지어 타락했을 때에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이스라엘을 의인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악한 나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가 하나님은 선민들을 보호하시며 언제나 사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그런데 심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살고 죽는 것은 패역한 바벨론 사람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13에 “어찌하여 궤휼한 자를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려고 하시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보다 오히려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심판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보다 더 악한 자를 통하여 심판 받게 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는가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치 않고 진리의 길로 나오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백성들을 사용해서라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다른 민족들을 사용해서라도 징계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이제는 사사를 부르셔서 건져 주시고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한 나라가 존재하게 하시는 것은 선민을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1) 왜 이런 징계를 받게 될까요
1 말씀을 소유하고 있었으면서도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부르짖었던 요시아 왕은 이제 성전을 수리하고 회복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요시아 왕은 성전 수리를 책임졌던 대제사장 힐기야로 부터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다”(22:8)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성전에 율법책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이제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하니 그러면 그 동안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왕은 너무도 놀라고 두려워서 옷을 찢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 율법 책이 무엇이었을까요 왕하23:2에 보면 언약 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왕이 여호와의 전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신31:24-26에 보면 모세는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쓴 후 그 율법 책을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책은 어디에 있어야 했습니까 그 책은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곁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이 그 책이 있는 장소와 그 내용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이 율법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기도록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조차도 율법책의 내용은 커녕 율법책이 어디에 있는 줄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제사도 드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요시아 시대에 그 율법 책이 어디서 발견되었습니까 그 율법책이 이제서야 발견되어야 할만큼 새삼스러운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된 책을 여호와의 전에서 분실될 만큼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키지도 않았고,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냥 전통과 습관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할 일을 다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웅장한 성전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고 믿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죄와 징계의 메시지보다는 평안의 메시지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분실한 채, 말씀을 잃어버리고 전통과 습관과 자기 생각대로 따라갔던 백성들에게 희한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왕하23:4-6) 그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다. 또 하늘의 해,달,별들인 일월성신을 여호와의 전에서 섬겼다.
(7) 여호와의 전에 미동의 집이 있었다. 미동이란 남자 창기의 집인데, 남녀의 음행이 여호와의 전에서 자행되었다. (10) 자기 자녀를 불태움으로서 몰록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도 자행되었다. (24) 백성들은 마술적인 신비주의에 빠져 있었다. 신접한 자와 박수와 무당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8,9) 곳곳마다 산당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겼다. 이와 같은 일은 옛날 유다 백성들에게만 있는 일은 아니라, 어느 시대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을 때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일어났던 중세 시대에도, 우리가 사는 오늘날도 말씀을 잃어버리게 되면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신앙으로서 하나님을 섬겨 왔었고,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축복과 감정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잃어버린 시대의 특징은 성경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합리화와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이처럼 성경은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되지 않고(암8:11),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씀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말씀을 잃어버리면 쓸데없는 사상과 자유주의가 판을 치고, 율법주의, 형식주의, 신비주의가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이성으로 판단하거나 마술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박국서를 통해서 불의한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도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우주 만사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처해 있었으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영혼의 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언제나 빛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빛은 고사하고 깜깜한 어두운 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밤이란 침체기를 의미하며, 일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죽음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죽음이 온 이스라엘에게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번영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절망적이며, 자포자기하며 폐허가 된 영혼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꿈과 비전은 없어졌으며 이방인들과 같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에만 눈들이 밝아져서 흠모하고 소유하려고 노력을 하였으며, 정작 이루어야 할 영적인 삶과 교제는 멀리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시25:1) 다윗은 기도한 후에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보며 응답을 기다렸습니다.(시5:3) 우리 성도들도 먼저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면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마21:22,막11:24,요일5:14) 다윗과 같이 기도한 후 소망을 갖고 끈질기게 기다려야 합니다.(시62:5,130:5) 바울도 성도들에게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골4:2) 인내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내를 배워 가며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다리지 못한 사람은 응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떠나 악한 길로 갈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1:14에 “바다의 고기와 같이 주권자 없는 곤충과 같이”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초라하고 부끄러운 인간 이하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무기력하고 볼품없는 존재와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말씀을 떠나 다른 길로 갈 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정직하면 도리어 자기만 손해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회 전반에 걸쳐 불의 한 것이 만연해져 있으며 악인이 득세함에 맞서서 대항하면 손해를 보게 되고 도리어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불의한 자의 형통은 결코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그들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언젠가는 모든 사람을 선악간에 엄격하게 심판하시므로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으로 손해를 보고 무고한 고난을 당한다 하여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2. 악한 세대에서 의인이 존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2:1-4)
1) 의인은 악한 세대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마음이 의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의롭게 살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정직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져 가며, 언제나 공정한 판단에서 모든 일을 결정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속임수도, 모략과 술수도, 악한 꾀도, 자기의 잘못을 감추려는 변명도, 모두 거짓임이 판명이 나므로 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공정한 판단을 하려고 해도 변질된 인간의 판단은 어느 쪽이든 기울어지고 맙니다. 또 성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역사는 자신의 삶의 결과에서 나타납니다. 바벨론 나라의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들을 가져다가 쾌락을 즐기는 술잔으로 삼았습니다. 잔치를 벌이고 있던 그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씨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이를 번역하면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는 뜻이며,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뵈었다는 뜻이며, `우바르신'은
그러므로 이제 왕의 나라를 나누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주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벨사살 왕의 불의한 행동들은 잔치가 무르익어 그 잔치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죽고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회개하고 의인답게 살 것을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점점 죄악으로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들의 죄가 가장 깊어졌을 때에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이방 나라의 바벨론을 나라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성도가 죄와 불의한 것을 은밀한 가운데서 행할 때에 주의 종들을 통해서나 사람들을 통해서도 경고하십니다. 말씀으로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당장 심판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죄가 가장 심각하고 깊어졌을 때에 자신의 불의한 일들이 완성되어 가는 결과에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역사는 항상 결과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결과에서가 아니라 시작할 때에 돌아서야 하며, 시작도 하지 않는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의인은 악한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은혜롭게 이루어 가야 합니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자와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약속과 역사를 믿지 못합니다. 또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역사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불순종하므로 올바른 믿음도 갖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억지로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이 항상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 나갈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공정하면서도 은혜롭게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람은 자신을 앞장세우고 이름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합력 하여 선을 이룰 수는 없으나,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때 이룰 수 있습니다.
3) 의인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림은 곧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한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으나, 기다리는 과정에서 믿음이 약하여지자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의 아내의 말을 더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과 동침하여 결국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방법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사이를 불화 하게 만들고 선민의 가정에 수치를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대로 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자신의 뜻을 앞세우고 자신의 소견대로 행하며, 자신의 노력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앞장서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딜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길과는 다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은 우리의 결정과는 달라서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은혜로우시지만 때로는 공의로 판단하시기에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길과는 다르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순종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고 이 믿음은 기다림이란 인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이를 위하여서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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