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씨 (창5:1-32)
본문
창세기 5장은 세상의 창조, 그리고 노아 홍수가 있기 전의 일들을 종합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 자손의 계보 혹은 목록을 보게 되는 데 이 계보가 작성되어진 의도는 이렇게 생각되어집니다. 인류의 역사 가운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놀라웁게 보존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고 또한 교회의 씨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이 아담 자손의 목록은 기록 되어졌습니다. 이러한 소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자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오셨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오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1절>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처음 창조시의 아담과 하와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 후손인 나머지 모든 인류의 시작인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앞에서 이미 말했던 창조에 대한 일을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탁월함과 숭고한 성격을 한번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게 기억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시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인간을 복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인간들 하나 하나에게 도장을 찍듯이 표를 하여 심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공의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위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한 영광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관대하게 인간을 대접해 주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2절>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 부분은 결혼의 신성한 결합에 대하여 찬사를 하고 있으며, 남편과 아내가 결코 둘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한 것은 두 사람을 한 사람처럼 불러서 결혼이 이뤄진 이후에 남편과 아내는 마치 한 사람과 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그 당시의 부패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담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훼손되고 상실된 상태에서 죄악된 형상의 아들을 낳았음을 말해 줍니다. ‘셋’도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부정하게 출생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한 자로서 다른 자녀를 낳을 수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악된 자녀를 낳을 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육신에 의하여 셋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셋은 성령님의 은혜로 시로와졌습니다.
4,5절>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아담은 자기 생애동안 즉, 셋을 통하여 새롭게 주어진 많은 후손들과 함께 살았던 800여년 동안 계속해서 자기 후손들에게 자기의 삶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류와 창조된 세계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말들로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맨처음 하나님의 세계창조와 타락으로 발생한 형벌 등에 대하여 말하며 주의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은 후에도 남아있는 구원의 소망을 증거하면 모든 사람이 교훈을 받도록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도록 힘썼을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이 낙원에서 실제로 목격하고 체험했던 범죄와 형벌의 사실들을 증거하고 또한 뒤이어 내려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5절에 아담이 죽었더라고 기록한 다음에 많은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헛되게 선포된 것이 아님을 경고해 줍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자들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처절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며 그래서 죽음이 오게한 범죄가 얼마나 무섭고 처절한 것인가를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비참한 사실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죄로 말미암은 일생을 살아야 하는 형편, 그것도 죽음을 향하여 소망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하는 처참한 상황을 다시금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범죄한 아담 자손들의 목록들에서 계속하여 죽는 인간들의 형편을 기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범죄한 인간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형벌이 이루어지고 죽음을 당하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곧잘 건망증 증세를 나타내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형벌 가운데 살고 있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 자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환상 가운데서 살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죄와 그 형벌인 죽음의 무서움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하나님의 멧세지 입니다.
이제 21-24절에 기록된 에녹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에녹이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언급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함께 하심으로 구원자를 내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위한 조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려 가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가장 방탕한 시대에 범죄한 자의 후손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던 그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여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데려감을 입은 한 사람의 택한 백성에 대한 기록 입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늘로 데려감을 입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죽지 않고 멸절되지 않는 예가 분명히 보여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에녹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 하늘에 들림을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3:15절의 약속, 즉 뱀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았던 자들은 이 세상의 삶이 고통과 슬픔으로 종결되는 죽음으로 끝날 것이므로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았지만, 그 약속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이 에녹의 승천을 통하여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그들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간 에녹과 같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에녹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증거하기를(히11:5), 에녹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에녹이 이 세상에 살고있을 때에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세상과 구별시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승천했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할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에녹은 완전히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간 상태는 아닙니다.
에녹의 승천은 기쁨과 평온에 넘치는 것이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영광에 참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할 자들의 첫열매로 오시기 전에는, 더 나아가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려고 다시 오실 종말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에녹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예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현재의 비참한 생활에서 해방되는 데에 그칠 뿐입니다. 다음에 29절 이하에 나타난 노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말하기를 이름을 노아라 하리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습니다.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경건한 자손들은 그들의 주위에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악들이 어떻게 그들에게서 시작되었는지를 자기들 조상들로 부터 자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악으로 말미암은 자기들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불쾌감을 자극하고 있을 뿐인 것을(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할 뿐인 것을) 생각할 때 그저 근심에 싸인 한숨만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로이 일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므로 당시에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형벌의 삶이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악성이 날마다 증가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라멕과 함께 했던 경건한 자들은 아주 간절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멕은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어떤 희귀하고 비범한 구원을 베푸실 것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노아’라는 말 뜻은 ‘안식을 주다’라는 말과 ‘위로하다’라는 말을 합하여 만들어진 말로 볼 때, 라멕은 노아에게서 하나님의 위로 즉, 구원의 길을 바라 보았다고 생각 됩니다.
5장의 마지막은 노아의 세 아들의 출생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6장 이후의 기록들에서 하나님은 가기 구원의 길을 위하여 노아의 여덟 식구를 부르시고 보존(구원)하시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 창세기 5장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를(구속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내지 아니하셨다면, 그리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예비하시고 보존하심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약을 볼 때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도전받아야할 부분입니다. 그저 하나님 섬김으로 이 땅의 물질적인 복을 받는 곳에만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여 오기까지 얼마나 숱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받고 인내하여 왔는지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인류에게 내시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준비해 오셨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쉽게 아무렇게나 준비없이 올 수 없고 역시 아무 준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류 역사의 그 험난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오늘까지 일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항복을 하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지금의 시대 상황이나 에녹이 살던 시대 상황이나 그 입장은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 다 범죄한 자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가운데 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소수의 백성들은 그 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삽니다. 그것은 구원의 씨로 세움받은 자들의 공통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기 까지 일해 오시고 앞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시기 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구속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림이 합당합니다. 아멘.
그런데 이 적은 수효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놀라웁게 보존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고 또한 교회의 씨가 완전히 말살되지 않게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이 아담 자손의 목록은 기록 되어졌습니다. 이러한 소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자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오셨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 타락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오셨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1절>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처음 창조시의 아담과 하와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 후손인 나머지 모든 인류의 시작인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앞에서 이미 말했던 창조에 대한 일을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탁월함과 숭고한 성격을 한번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게 기억될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시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인간을 복주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인간들 하나 하나에게 도장을 찍듯이 표를 하여 심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공의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위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 보다 더한 영광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관대하게 인간을 대접해 주실 수는 없을 것입니다. 2절>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이 부분은 결혼의 신성한 결합에 대하여 찬사를 하고 있으며, 남편과 아내가 결코 둘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한 것은 두 사람을 한 사람처럼 불러서 결혼이 이뤄진 이후에 남편과 아내는 마치 한 사람과 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그 당시의 부패한 사람들 가운데서 아담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훼손되고 상실된 상태에서 죄악된 형상의 아들을 낳았음을 말해 줍니다. ‘셋’도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부정하게 출생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한 자로서 다른 자녀를 낳을 수가 없고 오직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악된 자녀를 낳을 수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육신에 의하여 셋은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셋은 성령님의 은혜로 시로와졌습니다.
4,5절>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아담은 자기 생애동안 즉, 셋을 통하여 새롭게 주어진 많은 후손들과 함께 살았던 800여년 동안 계속해서 자기 후손들에게 자기의 삶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류와 창조된 세계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말들로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맨처음 하나님의 세계창조와 타락으로 발생한 형벌 등에 대하여 말하며 주의를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은 후에도 남아있는 구원의 소망을 증거하면 모든 사람이 교훈을 받도록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도록 힘썼을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이 낙원에서 실제로 목격하고 체험했던 범죄와 형벌의 사실들을 증거하고 또한 뒤이어 내려진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5절에 아담이 죽었더라고 기록한 다음에 많은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에게 헛되게 선포된 것이 아님을 경고해 줍니다. 그래서 직접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자들 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무섭고 처절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며 그래서 죽음이 오게한 범죄가 얼마나 무섭고 처절한 것인가를 알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사실을 통하여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비참한 사실을 돌이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죄로 말미암은 일생을 살아야 하는 형편, 그것도 죽음을 향하여 소망 없는 생을 살아가야 하는 처참한 상황을 다시금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범죄한 아담 자손들의 목록들에서 계속하여 죽는 인간들의 형편을 기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범죄한 인간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형벌이 이루어지고 죽음을 당하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곧잘 건망증 증세를 나타내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형벌 가운데 살고 있음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 자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환상 가운데서 살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죄와 그 형벌인 죽음의 무서움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하나님의 멧세지 입니다.
이제 21-24절에 기록된 에녹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에녹이 특별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언급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함께 하심으로 구원자를 내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시기 위한 조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려 가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가장 방탕한 시대에 범죄한 자의 후손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던 그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여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데려감을 입은 한 사람의 택한 백성에 대한 기록 입니다. 그리고 에녹이 하늘로 데려감을 입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죽지 않고 멸절되지 않는 예가 분명히 보여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에녹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 하늘에 들림을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창3:15절의 약속, 즉 뱀을 이기고 승리하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았던 자들은 이 세상의 삶이 고통과 슬픔으로 종결되는 죽음으로 끝날 것이므로 아무 소망이 없이 살았지만, 그 약속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이 에녹의 승천을 통하여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그들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하늘로 데려간 에녹과 같이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었습니다. 이 에녹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증거하기를(히11:5), 에녹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에녹이 이 세상에 살고있을 때에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세상과 구별시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녹은 승천했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할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에녹은 완전히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들어간 상태는 아닙니다.
에녹의 승천은 기쁨과 평온에 넘치는 것이었지만 아직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영광에 참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할 자들의 첫열매로 오시기 전에는, 더 나아가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려고 다시 오실 종말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에녹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예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현재의 비참한 생활에서 해방되는 데에 그칠 뿐입니다. 다음에 29절 이하에 나타난 노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말하기를 이름을 노아라 하리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습니다.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경건한 자손들은 그들의 주위에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악들이 어떻게 그들에게서 시작되었는지를 자기들 조상들로 부터 자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악으로 말미암은 자기들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불쾌감을 자극하고 있을 뿐인 것을(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할 뿐인 것을) 생각할 때 그저 근심에 싸인 한숨만 나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로이 일하게 되었다고 표현하므로 당시에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형벌의 삶이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악성이 날마다 증가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생각하였습니다. 아마도 라멕과 함께 했던 경건한 자들은 아주 간절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멕은 자기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어떤 희귀하고 비범한 구원을 베푸실 것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노아’라는 말 뜻은 ‘안식을 주다’라는 말과 ‘위로하다’라는 말을 합하여 만들어진 말로 볼 때, 라멕은 노아에게서 하나님의 위로 즉, 구원의 길을 바라 보았다고 생각 됩니다.
5장의 마지막은 노아의 세 아들의 출생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6장 이후의 기록들에서 하나님은 가기 구원의 길을 위하여 노아의 여덟 식구를 부르시고 보존(구원)하시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 창세기 5장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를(구속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내지 아니하셨다면, 그리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예비하시고 보존하심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약을 볼 때 가장 절실하게 느끼고 도전받아야할 부분입니다. 그저 하나님 섬김으로 이 땅의 물질적인 복을 받는 곳에만 눈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임하여 오기까지 얼마나 숱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받고 인내하여 왔는지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인류에게 내시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고 준비해 오셨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쉽게 아무렇게나 준비없이 올 수 없고 역시 아무 준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류 역사의 그 험난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오늘까지 일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항복을 하지 않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지금의 시대 상황이나 에녹이 살던 시대 상황이나 그 입장은 마찬가지 입니다. 모두 다 범죄한 자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가운데 살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소수의 백성들은 그 때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며 소망으로 삽니다. 그것은 구원의 씨로 세움받은 자들의 공통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기 까지 일해 오시고 앞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시기 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구속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림이 합당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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