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덮개 (창9:20-27)
본문
흔히 경제위기 시대로 불리우는 요즘 어렵지 않은 곳이 없고 어렵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다들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게 무엇일까 사랑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들 상호 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족 등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훈훈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려울 때 자칫 잘못하면 서로를 탓하고 불평 불만을 토로하다가 갈등과 불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민은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정치인은 경제인을, 경제인은 정치인을 탓하고 비난한다든지 .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탓하고 원망하고 . 이쯤 되면 정말 견디기 어렵죠.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힘든데,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곧 질식하고 말 겁니다. 최근의 통계 자료를 보니까 결혼은 줄고 이혼이 급증한다고 합니다. 또 소송 사건도 급증한다고 합니다.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결혼식은 미룬다니 이해가 갑니다. 반면 채무 문제로 인한 위장 이혼, 가정 불화로 정식 이혼이 빈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사람들 사이에 각종 분쟁과 갈등이 증폭되면서 소송 건수가 증가 일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단면입니다만,분명한 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 서 있고, 사는 게 아주 각박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때에 돈 몇 푼 생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우리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 한 마디, 그리고 훈훈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런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특성을 살펴보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곳마다 사랑의 온기가 가득하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과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다 행복해지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은 노아와 세 아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홍수 심판으로 노아의 8식구만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농사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수확했는데, 그만 포도주를 과음해서 만취해 버립니다. 노아 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추태를 부립니다. 수확의 기쁨에 그랬는지 모르나 분명한 실수요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들 중 함이 그 모습을 목격합니다. 22절.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떠벌입니다. '고하매' 이 말은 신나게 떠들어 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두 아들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23절. 옷(겉옷)을 집어 어깨에 멘 채 뒷걸음질 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비의 하체는 보지 않고 슬그머니 덮어 줍니다. 함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노아의 하체를 가리워 준 겉옷은 '사랑의 덮개'였던 것입니다. 그후 노아가 잠이 깬 후 정신을 차리고 그 모든 일을 파악한 후 세 아들의 미래를 각각 예언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부분을 보면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셈과 야벳의 미래는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그것은 노아의 감정 풀이가 아닌가 하고 .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가 비록 실수하고 범죄한 것은 사 실이지만 아마 술이 깬 후 회개했을 것이고, 평소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령님을 받고 그렇게 말한 겁니다. 노아 개인의 감정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부디 이 교훈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로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모든 사람은 허물많은 죄인입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창6:9 의인, 당세에 완전한 자(=성실한 자)였습니다. 더욱이 홍수를 대비해서 120년간 방주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물론 그들이 거부했지만) 심판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입니다.(벧후2:5) 그러나 그 역시 100%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노아도 그 정도인데 과연 누가 의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 죄인이란 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도 성경적으로 따져 보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1 행동의 죄,2 말의 죄,3 선한 일인 줄 알면서 하지 않은 죄(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하는 죄, 5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하나님을 등지고 살기 때문에 다른 죄를 범하게 됨. 즉 이것이 근본 죄) 등입니다. 예' 심리학자들-사람이 하루에 1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함. 선한 생각보다 악한 생각을 .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누누히 증거합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다 죄인이요, 미달 인생입니다. 겉보기에 그럴 듯 해도 . 50보 100보입니다. 예' 영국에서 있던 실화-장난 꾸러기 청년-저명 인사 20명에게 편지 "24시간 이내로 속히 피하십시오!" 그랬더니 한 명도 예외없이 도망갔다는 것 .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표시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
'2' 예수님은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속죄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실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가죽옷을 입혀주는 사건이 나옵니다.(창3:21) 사람이 죄를 범하면 수치를 느낍니다. 죄의식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 어떻게 됩니까 수치를 느끼고 무화과 나뭇닢으로 치마를 해 입습니다.(창3:7) 죄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옷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줍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어떤 과정이 전제됩니까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죄없이 . 여기서부터 '속죄의 사랑'이 죄를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 이스라엘에 속죄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여러 제사가 있지만 공통된 원리는 속죄 제사입니다. 레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 = 히브리어 '카파르' = 덮다) 그러나 불완전하죠.(히10:3-4)
3 예수님이 오셔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속죄의 완성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입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는 예수님 십자가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즉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끗이 잊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완전한 망각의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잘 잊다가도 정말 잊어버릴 대목에 가서는 아무리 잊어 버리려 해도 기억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잊으십니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면 모든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 "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살면서 지은 모든 죄, 우리의 모든 죄악된 생각, 말, 행동 등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디오로 찍어서 틀어 놓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남은 커녕 나 자신부터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닙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히 섭니까 그럼에두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담대히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속죄의 사랑 때문입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구원과 영생, 영혼의 평안과 기쁨)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3' 우리는 덮어 주는 속죄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의 실천할 사랑의 표준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특성이 있겠죠.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 희생하신 것 등 . 그러나 그 중에서 본문과 관련되며 가장 중요한 것은 허물과 죄악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함은 아비의 죄악과 수치를 보고 조롱하고 드러냅니다. 동네 방네 다니며 떠듭니다. 물론 노아가 잘못했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입니다.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죄하고 징벌할 권리가 없습니다. 혹 상위 권위를 가진 자라면 몰라도 .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향해 부분적인 책망과 징계를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고 역시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끼리, 혹은 자식이 상위 권위인 부모를 향해 정죄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입니다. 다행히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보호하고, 실수와 수치를 가리워 줍니다. 겉옷을 덮어줍니다. 그 옷은 '사랑의 덮개'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천할 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남을 위해 무엇을 베풀고 주는 것도 물론 사랑이고 중요합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때때로 잘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쉽습니다. 생색도 나고 . 그러나 기본적이면서도 우리의 실 생활, 인간 관계에서 힘든 것은 '덮어주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 가장 큰 힘이 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있는 곳곳에 사랑의 온기가 충만할 겁니다. 따뜻하고, 훈훈하고, . 그리고 이 사랑의 힘으로 자신감을 얻고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서로 잡아 먹으려고 으르렁 댑니다. 덮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들춰 내고, 비난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점점 살벌해지고 냉랭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만 덮어주는 사랑, 용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강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론 정말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주님께 받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힘으로 안 되기에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주셔서 가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예' 마18:21-35 임금에게 빚진 종-1만 달란트(6천억, cf. 1달란트=6천 데나리온) 불쌍해서 탕감해주었더니 돌아가다가 친구 만나 1백 데나리온(1백만원)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둠-임금이 그 소식 듣고 체포해 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에게 작은 용서의 사랑,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보면 가능해 집니다. 부족한 죄인의 모습 . 예' ‘나쁜 사람’만 사는 집-대식구인데 싸우지 않고 삼-이웃 집에서 그 비결을 물어 봄. 그랬더니 왈 "우리 집은 다 나쁜 사람만 살기에 .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잘못했다고 나서니까 ."
'3'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 가나안(함의 아들)은 가장 천한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흑인종인데, 그들은 한때 애굽, 바벨론 등을 세우고 세도를 부렸으나 결국은 후에 셈족(황인종), 야벳족(백인종)에게 정복당합니다. 헬라, 로마의 정복 등이 그것이죠. 그후 노예로 팔려다녔습니다.(물론 노예 장사한 자들도 잘못이지만 .)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지역은 식민지가 많습니다. 반면 셈은 26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 종교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 족속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큰 복입니다. 그리고 야벳은 27절. 창대-영토 확장 등으로 번영할 것이고,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복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등의 역사가 그 예입니다. 세 아들이 그 한 가지로 인해 후손들까지 복과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일이 아니라 그들 평소 마음가짐이요 태도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 사순절에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고 사랑의 덮개로 이웃을 덮어주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사랑이 온기로 충만하고, 셈과 야벳 같은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마침 아들 중 함이 그 모습을 목격합니다. 22절.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에 나가 떠벌입니다. '고하매' 이 말은 신나게 떠들어 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두 아들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23절. 옷(겉옷)을 집어 어깨에 멘 채 뒷걸음질 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비의 하체는 보지 않고 슬그머니 덮어 줍니다. 함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노아의 하체를 가리워 준 겉옷은 '사랑의 덮개'였던 것입니다. 그후 노아가 잠이 깬 후 정신을 차리고 그 모든 일을 파악한 후 세 아들의 미래를 각각 예언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부분을 보면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셈과 야벳의 미래는 축복하고 함은 저주하는데, 그것은 노아의 감정 풀이가 아닌가 하고 .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가 비록 실수하고 범죄한 것은 사 실이지만 아마 술이 깬 후 회개했을 것이고, 평소대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성령님을 받고 그렇게 말한 겁니다. 노아 개인의 감정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부디 이 교훈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로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모든 사람은 허물많은 죄인입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창6:9 의인, 당세에 완전한 자(=성실한 자)였습니다. 더욱이 홍수를 대비해서 120년간 방주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물론 그들이 거부했지만) 심판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한 사람입니다.(벧후2:5) 그러나 그 역시 100%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습니다. 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노아도 그 정도인데 과연 누가 의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혹 죄인이란 말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도 성경적으로 따져 보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1 행동의 죄,2 말의 죄,3 선한 일인 줄 알면서 하지 않은 죄(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4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하는 죄, 5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하나님을 등지고 살기 때문에 다른 죄를 범하게 됨. 즉 이것이 근본 죄) 등입니다. 예' 심리학자들-사람이 하루에 1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함. 선한 생각보다 악한 생각을 .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사는 것입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누누히 증거합니다. 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다 죄인이요, 미달 인생입니다. 겉보기에 그럴 듯 해도 . 50보 100보입니다. 예' 영국에서 있던 실화-장난 꾸러기 청년-저명 인사 20명에게 편지 "24시간 이내로 속히 피하십시오!" 그랬더니 한 명도 예외없이 도망갔다는 것 .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표시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
'2' 예수님은 그 피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속죄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실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가죽옷을 입혀주는 사건이 나옵니다.(창3:21) 사람이 죄를 범하면 수치를 느낍니다. 죄의식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 어떻게 됩니까 수치를 느끼고 무화과 나뭇닢으로 치마를 해 입습니다.(창3:7) 죄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옷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줍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어떤 과정이 전제됩니까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죄없이 . 여기서부터 '속죄의 사랑'이 죄를 덮어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 이스라엘에 속죄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여러 제사가 있지만 공통된 원리는 속죄 제사입니다. 레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 = 히브리어 '카파르' = 덮다) 그러나 불완전하죠.(히10:3-4)
3 예수님이 오셔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속죄의 완성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속죄를 위한 완전한 제물입니다. 구약의 속죄 제사는 예수님 십자가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즉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깨끗이 잊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완전한 망각의 능력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잘 잊다가도 정말 잊어버릴 대목에 가서는 아무리 잊어 버리려 해도 기억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히 잊으십니다. 덮어버렸기 때문에 .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면 모든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 "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살면서 지은 모든 죄, 우리의 모든 죄악된 생각, 말, 행동 등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비디오로 찍어서 틀어 놓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남은 커녕 나 자신부터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닙니까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감히 섭니까 그럼에두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담대히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속죄의 사랑 때문입니다. 시32: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구원과 영생, 영혼의 평안과 기쁨)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3' 우리는 덮어 주는 속죄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의 실천할 사랑의 표준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특성이 있겠죠.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 희생하신 것 등 . 그러나 그 중에서 본문과 관련되며 가장 중요한 것은 허물과 죄악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함은 아비의 죄악과 수치를 보고 조롱하고 드러냅니다. 동네 방네 다니며 떠듭니다. 물론 노아가 잘못했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입니다.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정죄하고 징벌할 권리가 없습니다. 혹 상위 권위를 가진 자라면 몰라도 .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을 향해 부분적인 책망과 징계를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제한적이고 역시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보통 사람끼리, 혹은 자식이 상위 권위인 부모를 향해 정죄하고 조롱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입니다. 다행히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보호하고, 실수와 수치를 가리워 줍니다. 겉옷을 덮어줍니다. 그 옷은 '사랑의 덮개'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실천할 사랑이 바로 이런 겁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남을 위해 무엇을 베풀고 주는 것도 물론 사랑이고 중요합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때때로 잘 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쉽습니다. 생색도 나고 . 그러나 기본적이면서도 우리의 실 생활, 인간 관계에서 힘든 것은 '덮어주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또 가장 큰 힘이 되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있는 곳곳에 사랑의 온기가 충만할 겁니다. 따뜻하고, 훈훈하고, . 그리고 이 사랑의 힘으로 자신감을 얻고 고난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서로 잡아 먹으려고 으르렁 댑니다. 덮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들춰 내고, 비난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점점 살벌해지고 냉랭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지만 덮어주는 사랑, 용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을 약하고 비겁한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강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론 정말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주님께 받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힘으로 안 되기에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주셔서 가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예' 마18:21-35 임금에게 빚진 종-1만 달란트(6천억, cf. 1달란트=6천 데나리온) 불쌍해서 탕감해주었더니 돌아가다가 친구 만나 1백 데나리온(1백만원)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둠-임금이 그 소식 듣고 체포해 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기에 이웃에게 작은 용서의 사랑,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모습을 보면 가능해 집니다. 부족한 죄인의 모습 . 예' ‘나쁜 사람’만 사는 집-대식구인데 싸우지 않고 삼-이웃 집에서 그 비결을 물어 봄. 그랬더니 왈 "우리 집은 다 나쁜 사람만 살기에 .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잘못했다고 나서니까 ."
'3'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함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5절. 가나안(함의 아들)은 가장 천한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흑인종인데, 그들은 한때 애굽, 바벨론 등을 세우고 세도를 부렸으나 결국은 후에 셈족(황인종), 야벳족(백인종)에게 정복당합니다. 헬라, 로마의 정복 등이 그것이죠. 그후 노예로 팔려다녔습니다.(물론 노예 장사한 자들도 잘못이지만 .) 오늘날까지도 아프리카 지역은 식민지가 많습니다. 반면 셈은 26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 종교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 족속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큰 복입니다. 그리고 야벳은 27절. 창대-영토 확장 등으로 번영할 것이고,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복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등의 역사가 그 예입니다. 세 아들이 그 한 가지로 인해 후손들까지 복과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일이 아니라 그들 평소 마음가짐이요 태도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 사순절에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고 사랑의 덮개로 이웃을 덮어주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사랑이 온기로 충만하고, 셈과 야벳 같은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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