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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륙번을 치라 (왕하13:14-25)

본문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주로 재미있는 교훈적 이야기를 해줍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흥부. 놀부이야기콩쥐 팥쥐 이야기개미와 배짱이토끼와 거북이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배우고 자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의 공통된 특징은 이야기 속에서 /서로 대조적인 두 인물들이 등장함으로써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에게 무엇이 좋고 그른지 비교하며 판단 하도록 해 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방법을 많이 쓰십니다. 성경속에서 서로 대조적인 두 인물을 비교해서 보여주는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두주전 이시간에는 아마샤왕과 웃시야왕을 서로 비교하면서 아마샤보다는 웃시야가 더 우리에게 소망스러운 사람임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여로보암왕과 사마리아의 늙은 선지자의 대조 비교를 살펴본바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성경에 나오는 또한가지의 대조 비교되는 두 인물의 모습을 살피면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두 인물은 유명한 선지자 엘리사와 그리고 그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입니다. 엘리사와 요아스. 훌륭히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였던 엘리사는 이제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병석에 누워있는 엘리사선지자를 찾아가서 문병을 하면서 죽어가는 엘리사를 보고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고 울부짖습니다.
정말로 엘리사는 나라와 민족구원을 위해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엘리사는 아람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할 때면 그의 능력의 영감으로 어느지역에서 아람 군대가 공격해 올 것인지를 미리서 알아맞춰서 이스라엘을 항상 아람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준 나라의 은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사 선지자가 이제 늙어서 죽게 되었으니 국방을 책임져야할 요아스왕으로서는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면서 엘리사의 병듦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자기 곁에서 슬퍼하는 요아스왕에게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십시오.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그런후에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에 안찰을 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손을 꼭쥐고 안수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능력을 전수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계속 말을 합니다. 동편 창을 여십시오. 그쪽으로 다시 말하면 아람나라가 있는 곳을 향해서 화살을 쏘십시오. 이 화살은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입니다. 그래서 왕은 쏘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말합니다. 왕께서는 아람사람을 진멸하도록 칠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제 엘리사는 한가지 시험을 합니다. 나머지 화살들을 손에 잡으십시오. 그것으로 땅을 치십시오 그러자 요아스왕은 한 번 두 번 세 번을 치고는 그쳤습니다. 아 그랬더니 엘리사가 막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왕이여 적어도 한 오륙번 정도는 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왕은 아람나라를 진멸하도록 치게 될 것을 왜 세 번만 쳤나이까
그러므로 왕은 이제 아람 군대를 세 번만 치게 될 것입니다. 세 번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못 이깁니다.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화살은 분명 여호와의 구원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친히 자기 능력의 손으로 왕에게 안찰기도까지 해 주었었습니다. 이제 요아스왕은 그 화살로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왕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세 번만 치고 그칠 것이 아니라 적어도 오륙번 이상, 아니 어쩌면 엘리사가 그만 치라고 말릴때까지 계속 간절한 마음으로 마치 아람 군대를 치듯이 땅을 내리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아스왕은 그저 형식적으로 소극적으로 세 번만 딱 딱 딱 치고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지적하면서 요아스왕의 큰 잘못으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요아스왕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입니까 땅을 치라고 해서 세 번 쳤는데 그것이 과연 오늘 성경이 지적할 정도로 큰 잘못입니까 살인을 했다던가, 아니면 도적질을 했다던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던가 이런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조금 소극적이었고 조금 더 열정적이지 못했고 조금 더 간절하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그렇게도 큰 죄인가 도대체 엘리사 자신은 지금 무엇 때문에 요아스왕을 이토록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기서 엘리사의 경우는 전에 어떠했는지 그 모습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의 바톤 체인지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왕하2: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왕하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왕하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거기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니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면서 외쳐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는 장면과 똑같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또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물을 친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원어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화살로 땅을 친다”라는 단어와 정확히 같습니다. 먼저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도 요단 강을 건널 때 자기의 능력의 겉옷으로 강물을 이리 저리 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요단 강을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이제 두 번째 그의 제자 엘리사는 승천하는 엘리야로부터 떨어진 능력의 겉옷을 주워서 이제 똑같이 요단 강물을 이리 저리 칩니다. 그랬더니 역시 요단 강물이 갈라져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세 번째 요아스왕에게 엘리사는 화살을 주면서 손으로 안찰해 주고 그 화살은 구원의 살이니 그것으로 아람을 진멸하도록 치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요아스는 그 화살을 가지고 땅을 치되 세 번 만이 아닌 적어도 오륙번 이상은 쳤어야 했었습니다. 마치 그전의 엘리야처럼 그리고 엘리사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능력의 겉옷으로 요단강물을 이리 저리 치면서 세 번만이 아니라 계속 요단강물을 치면서 완전히 건너갈 때까지 계속 힘있게 강물을 이리저리 계속해서 치면서 건너갔습니다. 한 세 번만 치고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전에 겉옷으로 요단 강을 건널 때 끝까지 다 건너도록 계속 쳤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왕에게 그렇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만 쳐가지고는 아람을 완전히 진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갈때에도 세 번만 쳐가지고는 요단강을 완전히 건너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 자신도 적어도 오륙번 이상은 쳐서 완전히 건넜는데 요아스는 소극적으로 세 번만 치고는 그만 두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엘리사가 안타깝고 분통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아람이 다 진멸되도록 치라고 방금전에 당부했는데도 요아스는 세 번만 치고는 곧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요아스의 소극적 행동에 나무라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이점에서 엘리사와 비교됩니다. 그는 엘리사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엘리사는 한마디로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에게는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열심히 없었습니다. 세 번정도 해보다가는 그만 두어버리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요아스를 나무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바로 이러한 두 사람을 대조해 보여 주면서 현대의 성도들이 요아스의 모습을 본받지 말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애틀란타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모든 국민들은 그 중계방송을 보면서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의 땀나는 노력과 간절함을 안방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선수에게 능력이 부족했다면 할수 없는 일이지만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도 본인이 열심히 뛰지를 아니해서 또는 최선을 다하지 아니해서 그만 지게된 경우라며는 정말로 안타깝기가 그지 없을 것입니다. 능력은 충분히 있는데도 자신의 열심이 부족해서 그리고 간절함이 부족해서 최선을 다해 보지도 못하고 떨어졌다면 그의 그러한 행동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바로 요아스의 경우입니다. 그에게 있는 능력은 엘리사를 통해서 주어진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과연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 사실을 믿고서 간절함으로 열심히 땅을 치는 행동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본문 열왕기하 13장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13장 20절입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 엘리사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후에 어떤 다른 사람의 시체를 그곳에 던졌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금방 죽은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삽입이 되어있습니다. 이 부분이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요 병든 엘리사가 안찰을 해 주었다고 혹 요아스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가 봅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 있는 능력은 비록 그가 죽었어도 그 능력이 그대로 있어서 죽은 자까지도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구절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이제 요아스에게 전수되어 있었는데 그 능력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간절함으로 요아스가 땅을 쳤더라면 하는 너무도 아쉬운 모습을 오늘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되지! 거짓말 하지 않고 , 마음을 비우고 , 욕심부리지 않고 , 착하게만 살면 되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선언은 다릅니다. 착하게 선하게 살 뿐 만 아니라 이러한 덕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분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내며 견뎌낼것 , 담대하게 나갈 것, 열심히 노력할 것, 죽도록 충성할 것 등의 덕목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왜 열심히 없었는가 왜 간절함이 없었는가 왜 열망이 없었는가 사실 정말로 착하고 선한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비로 인한 홍수로 저 경기도 북부지역 연천읍과 문산읍이 침수가 되어서 수만명의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부대에서도 많은 사고들이 발생해서 젊은 군인들이 흙더미에 깔려서 현재 35명이 죽고 아직도 많은 숫자가 실종되어 흙에 묻혀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보도되는 내용들을 보면 창군이래 최악의 참사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병사는 흙속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헤치고 나와서 살았는데 그가 하는 말이 흙에 묻힌채 옆에 깔려 있는 동료 병사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또 어떤 연천읍 시민은 30대여자가 은행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본 것이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자 이러한 상황속에서 인간이 해야할 가장큰 착한 일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을 구원해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구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해야하는 착한 일입니다. 나만 그저 거짓말 않고 ,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되지 하는 것이 최고의 착함과 최고의 선함이 아닙니다. 옆에서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선을 다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들이 인간이 하는 최고의 선한 일이요 최고로 착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마와 같은 사단의 권세아래서 죽어가고 있습니까 지금도 사단의 무서운 세력앞에 우리의 이웃들의 생명이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사단의 흙더미에 깔려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영적 상황속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착함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바로 이들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칭찬 들을 만 하고 가장 착한 일을 하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아스왕 그는 자기 백성들이 아람 군대에 의해 고난받고 점령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기 백성을 아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시키는 구원의 능력 구원의 화살이 주어졌을때에 최선을 다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가지고 아람을 치는 행동을 보여주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 세 번 치고는 그만 둡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것은 큰 죄입니다. 헬기를 보내주었으면 그것으로 두세명 구원하고는 그만두어야 합니까 포크레인을 보내주었으면 그것으로 두세번 흙을 파다가 그만 두어야 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오히려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데, 능력까지 주었는데, 열심내지 않고 간절함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차라리 큰 죄악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주신 달란트에 열심과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맡겨주신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일한 자에게 착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착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맡겨준 일과 능력을 가지고 열심히 간절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며 노력하는 것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 안하며 열심을 내지 않고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주님께서 뭐라고 표현을 하셨나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다 악한 사람이다 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심내서 일하는 것, 혼신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까지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가지고 열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면, 기도와 전도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구원의 화살까지도 주었는데도 그것가지고 사단권세를 깨뜨리고 떠내려 가는 자들을 힘써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악입니다. 바로 요아스가 이 때문에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요아스는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다. (왕하13:25)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점령되어 있는 오륙개 성읍을 다 아람 왕 벤하닷의 손으로부터 다 구원시킬 수도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습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은 사단 권세의 홍수에 떠 내려가는 이 세상의 뭇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조대장이십니다. 그분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셨는고 하니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실 정도로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단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엘리사의 능력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아람 군대를 진멸시킬수 있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우리도 사실 한 세 번정도까지만 해 보다가 포기하고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더 간절한 마음으로 인내를 가지고 해 보십시다. 한 오륙번 하면 완전히 요단강 건너가게 되고 , 아람군대 진멸해 잃어버린 성읍들을 다 회복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한 세 번정도에서 그만 포기한 적이 얼마나 많았었습니까 조금만 더 열심내면 됩니다. 우리에게 분명 하나님 주신 능력이 있음을 믿고서 간절함과 담대함을 가지고, 조금더 열심히 기도하고, 조금더 열심히 전도하고 , 조금더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해서 과연 요단강 다 건너가며 모든 성읍 회복되고 아람 진멸시키는 성도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듣고 하나님이 더 많은 일을 맡겨주시는 승리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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