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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쓰임 받은 두 암소들 (삼상6:10-16)

본문

I.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 우리 사람은 이 세상에서 70년 내지 80년을 삽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70년 내지 80년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 니까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그 릇에 비유를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릇의 목적은 그 모양의 아름답고, 아름 답지 못한데 있지않습니다. 그 그릇이 금으로 만들었느냐, 아니면 흙으 로 만들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 그릇의 목적은 쓰임 받느냐, 쓰임 받 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2:20-21) 말씀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 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목적은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버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씀임 받느냐 못 받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쓰임 받지 못 하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쓰임 받지 못하면 불행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못했어도 쓰임 받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비록 부자집의 자녀라도 쓰임받지 못하면 불행한 자 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자녀라도 쓰임받으면 행복한 자입니다. 비록 군수집 딸이라도 오라는 직장도 없이 빈둥빈둥 놀면 불행한 자입니다. 그러나 군수집 식모의 딸이라도, 취직이 되어 우체국에 다니면 행복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목적을 하나님께 쓰임받는데 두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쾌락이나, 부나, 영화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쓰임 바든 데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목적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두어야 합니다. 이 인생의 목적을 분 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대학까지 나왔는데도 쓰임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국민학교도 못 나왔는데도 귀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지가 멀정하고, 신체가 튼튼한데도 쓰임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 손 이 없고, 한 발이 없는데도 쓰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동물인데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만물의 영장인데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인데도 하나님께 쓰 임 받지 못하는 자들은 비록 존귀에 처하나 멸망 받는 짐승만도 못한 자들 입니다.(시49:20)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오자, 모압 왕 발락은 당시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 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 보고 이스라엘을 저 주하러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 발락의 간청과 그가 주는 황금에 눈이 멀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서 그를 죽이려고 서 있었 습니다. 발람 선지자가 탄 나귀는 칼을 든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가지 않 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선지자는 그것도 모르고, 가지 않으려고 하는 나귀를 때렸습니다. 그때 나귀가 입을 열어서 발람 선지자를 꾸짖 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인데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동물인데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까요 새끼를 낳아서 쓰임 받을 수 없는 암소인데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오늘 본문의 두 암소들 통하 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이별의 고통을 감수한 소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약 4,00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어서 졌다고 생각을 하고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메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였지,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어서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가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언약궤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들의 신인 다곤의 당에 들어가 서 다곤의 곁에 두었습니다. 이때 부터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 있는 동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게 블 레셋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하게는 하셨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가는 블 레셋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무서운 벌 들을 내리셨습니다.
(1)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곤 신 옆에 둔 다음날 아 침에 가보니, 다곤 신이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곤 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또 가보니다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습니다.(삼상5:1-5)
(2) 하나님이 독종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 다 둔 아스돗 사람들을 쳤습니다.(삼항5:6)
(3)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 를 가드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에 내려서 사람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종이 나게 했습니다.(삼 상5:9)
(4) 그래서 이번에는 에그론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 갔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그론 사람들로 사망의 환난을 당하게 하고, 죽 지 않은 남은 자들에게는 독종이 나게 하셨습니다.(삼상5:11) 이렇게 언약궤가 7개월 동안 블레셋 땅에 있는 동안 큰 재앙이 그들에 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옮겨 가는 곳 마다 이런 재앙이 임하 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와서 그랬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언약궤를 본처로 돌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보내지 않고, 자기들의 죄를 사죄하는 뜻에서 속건제를 드려 서 보냈습니다. 속건제로는 블레셋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5개와 금쥐 5개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멍에를 아직 메어보지 않았고, 새깨를 낳아서 젖이 나는 암소 둘을 끌어다 가 수레를 메웠습니다. 그리고 그 송아지들은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이 두 암소는 새끼들을 버려두고 언약궤를 메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 두 암소는 젖이 불어서 자기 새끼들이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지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을 바라보면서 곧 바로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이 두 암소들은 자기 송아지들을 생각하면서 내내 울면서 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별의 고통을 감수한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큰 인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젖나는 암소는 자기의 새끼를 버릴 수 없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기 위하여, 정말로 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그 사랑스런 송아지들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 을 간 것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가장 귀한 것까지도 버릴 수 있는 자들을 쓰십니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을 위하여 버릴 수 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들어 쓰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은 것은 아브라함은 100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 로 드리라고 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낌 없이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그를 모리아 산에 가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를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버리라고 하시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자 중에 자기 아버지가 돌아간 자가 있 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 하게 허락해 주옵소서"(마8:22)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하셨읍니다.
또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별의 고통을 감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것을 버릴 수 없으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쓰임 받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장 즐기는 것 까 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즐기는 세상일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에는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 사랑하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 이 여기고 버렸습니다.(빌3:8) 심지어 사도 바울은 평생토록 장가도 가지 않고,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장가 가는 것 까지도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나의 가장 좋아하던 것, 나 의 가장 사랑하는 것도 배설물과 같이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는 것은 다시는 뒤를 돌아 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한번 버린 배설물을 아까워서, 미련이 있 어서 다시 돌아 보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시는 돌아 보기도 싫어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렇게 우리의 즐기던 것들을 아낌 없이,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잠을 버려야 합니다. 단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 제단을 쌓 아야 합니다.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는 쓰임 받을 수가 없 습니다. 죄악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던 것, 좋아하는 것도 버려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죄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악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젖먹이 자기 자식도 아낌 없이 버린 소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 사랑하는 자식도 아닌 죄 악을 아까와서 버리지 못한자면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있겠읍니 까 어떻게 그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20세기의 위인 중에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賀川風彦) 선생이 있다. 가가와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심각한 경험담을 싣고 있다.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 소년 시절부터 앓기 시작한 폐결핵이 심해져서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 그는 시골에서 살다가 15세가 되었을 때 동경에 올라와서 인쇄소 청소부로부터 시작하여 여러가지 노동에 종사하며 야학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사에게 받은 영향으로 교회에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였고, 그의 신앙은 무척 깊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고 한다. 가가와 선생은 병상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지금 희망이 끊어져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데 내가 믿는 하나님도 자살을 계획해 본 일이 있을까" 가가와 선생은 자신에게 향한 이런 질문 에 스스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끝까지 노력하는 하나님이며, 해야 할 모든 일을 성취 하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노력은 오직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가가와 선생은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되어 벌떡 일 어나 자기의 몇가지 세간을 달구지에 싣고 그 길로 니이가와 빈민굴로 들어 갔다. 가가와 선생은 빈민굴에 들어갈 때 자기의 일기에 이런 말을 기록 하였다. "나는 이제 죽었다. 이제부터 새롭게 사는 것이다. 죽음의 선을 건너서 영원한 삶을 시작한 것이다." 가가와 선생은 세상의 삶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 임 받았다. 세상에 사랑하던 것, 즐기던 것을 주님을 위하여 과감하게 버 린 자들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세상에는 쓰임받을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하여 여러분의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과 감하게, 미련 없이 버리시 바랍니다.
2. 백성의 고통을 짊어진 소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낼 때, 거저 보내지 않았읍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속건제는 당 시 땅을 오염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종이 나게 했던 쥐의 모양을 금으 로 만든 금쥐 5 마리와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린 독종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5 개의 금독종이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것들을 두 암소가 메고 있는 마치 위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두 암소가 그것을 싣고 블레셋 땅을 떠나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그 러자 블레셋 땅에 독종이 그쳤습니다. 이 두 암소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의 독종을 자기가 스스로 짊어졌읍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서 그 고통이 사라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의 고통을 짊어 지는 자들을 쓰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들어 쓰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고 가는 죄악의 무거운 짐을 대시 짊 어 지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를 범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이 죄악 으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무겁고 무서운 짐을 지고가야 하는 우리 인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이 대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29)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의 무섭고 무거운 죄짐을 대신 지고 가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구약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모세도 기꺼이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지고 갔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모세가 더디 내려오자,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서 아 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들을 인도 한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화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용서하시 지 않으려면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하고 간 청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는 천국에 가지 않고, 지옥에 가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민족의 고통을 자기의 생명 뿐만 아니라, 천국을 포기하고 지옥에 들어 갈 각오로 짊어지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민족의 지 도자로 들어 쓰셨습니다. 이런 자들이 참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라 오려는 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못하리라"(눅14:27)고 하셨읍니다. 예수님를 믿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 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고통 을 당하는 자들의 십자가를 우리가 대신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골고다라는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 고 갈때, 너무 힘이 없어 쓰러지고 쓰러지자, 지나가던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을 잡아서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남의 고통의 짐을 질 줄 아는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내 자신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교회 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런 자들을 하나님은 들어쓰십니다.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없 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빌리 그래햄의 전도 영화 중 한 영화에서 시오카리 패스(Shiokari Pass) 라는 젊은이인 기독교인이 영웅이 되었다. 그는 고향에 있는 약혼녀와 멀 리 떨어진 철도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서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 약혼녀와 결혼할 시간이 왔다. 그가 기차를 타고 고향을 가던 중 가파른 언덕을 오르던 기차가 갑자기 가파른 언덕 정상 바로 전에서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더니 멈춰섰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타고 있는 객차 앞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는 자기가 타 고 있는 객차가 앞에 있는 객차들과 분리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객차는 급한 경사를 따라 뒤로 내려가기 시작을 했다. 그는 철도회사에서 근무 했기 때문에, 그 기차는 얼마 내려가지 않아 급 커브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탈선할 것이고, 그러면 많은 사람이 희생 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핸드 브레이크로 객차를 정지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객차는 말 을 듣지 않았다. 그때 그는 갑자기 (요15:13)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말씀이 떠 올 랐다. 그는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철길로 뛰어 내려서 자기의 몸 으로 기차 바귀를 세웠다. 그의 몸은 산산히 찢어졌고, 그의 몸에 있는 찢어진 살과 부서진 뼈들이 내려가는 기차를 세웠다. 그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 이렇 게 남의 고통을 짊어질 줄 아는 자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의 나라의 십자가, 하나님의 교회의 십자가, 이 나라 이 민족의 십자가, 온 인류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소였습니다. 이 두 암소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자기 새끼들을 떼어 놓고, 이런 일을 했다고 그 소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가 끌고 온 수레의 나무를 패서는 그 소들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완전히 토 사구팽입니다. 이 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나르기 위하여 생이별의 고통을 당하였읍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젖먹이 자식을 과감히 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자식들이 생각이나도 뒤를 돌아 보지 않고, 내내 눈물을 흘리며 왔습니다. 그래서 눈이 퉁퉁 부 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들은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몸을 깨뜨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들과 같이 마지막까지 온전하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 리는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께 거 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 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욕망, 생활, 희망, 자존심 이 모든 것을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님만을 위 하여 사는 것입니다. 나의 꿈도, 나의 생활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 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으 것이 되는 것 이 바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회사를 위하여 희생을 하면, 회사가 들어 씁니다. 나를 위하여 희생 을 하면 나라가 들어 씁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을 하면 하나님이 들 어 쓰십니다. 이 세상은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희생하는 척해도, 그 것도 모르고 그들을 들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온전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하는 자들을 들어 쓰십니다.
전라북도 하리라고 하는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가 낡아서 지붕에서 물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 교회의 문 집사님이란 분이 교회를 새로 지는 사명을 다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결심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시 짓자고 하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 문집사님은 자기가 가졌던 논 3 마지기를 팔아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쯤 지었을 때 건축 비가 없어 중간에 중단하게 되었다. 문 집사님은 교회에 엎드려 기도하 다가 문득 며칠 전에 본 신문이 기억났다. 오즘은 과학이 발달해서 소경 도 다른 사람의 눈을 이식해 수술하면 볼 수 있다는 기사였다. 문집사님 은 왜 이 생각이 날까 하고 생각하다가 자기의 한쪽 눈을 빼어 팔아 교회 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전주 예수 병원으로 갔다. 전주 예수 병원에 가서 원장되는 선교사를 만나 사정을 얘기하자 그 선교사는 그 얘기에 감동 되어 미국의 교회들에게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했다. 미국의 교회들은 그 교회를 돕기 위해 건축 헌금을 모금하여 보내와, 그 교회를 아름답게 지 울 수 있었다. 문집사님은 눈을 빼지 않고도 교회를 지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논도 6 마지기나 사 주어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섬길 수 있게 되었 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눈을 제물로 드릴때 하나님은 그 문집사님을 사 용하셔서 교회를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자들을 택하여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죽으면 다 썩어서 흙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 을 위하여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은 그 썩어 흙이 될 수 밖에 없는 우리 몸 을 귀하게 사용하셔서 아름다움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썩으면 흙이 되고 마는 이 몸을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 제물로 드려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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