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자가 가야할 길 (삼상6:10-16)
본문
옛날 홉니와 비느하스가 무조건 법궤만 메고가면 승리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법궤를 메고 블레셋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범죄한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 이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블레셋에게 패배를 당하고 법궤마저 빼앗겨 버렸 습니다. 블레셋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다곤신전에 비치해 두었는데 하루밤 자고 나니까 다곤신상의 머리가 부수어지고 손발이 부러져서 여호와의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독종이 블레셋진영에 만연하여 블레셋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간직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법궤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새수레를 만들어 거기에 법 궤를 싣고 또 독종을 상징하는 금쥐를 만들어서 예물과 함께 싣고 이스라엘땅인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게 했는데 암소 두마리가 그 새수레를 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법궤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두 마리의 암소는 직분자들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 교회 직분을 맡아 수고하실 임직자들을 임명하는데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임직자들이 나아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 두 마리의 암소는 젖먹는 송아지들을 떼어내 우리에 가두어둔채 수레 를 메고 벧세메스로 향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식에 대한 뜨거 운 애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모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보면 벧세메스로 향하던 두마리 암 소가 갈 때에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송아지들이 음메하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이 두마리 암소가 너무 가슴이 아파 울 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새끼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궤를 운반해가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인정에 끌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적에 너는 너의 본 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얼마나 피땀흘려 장만한 문전옥답인데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사랑하는 부 모 형제 친척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 사로잡 혔다면 결코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부르심을 입 을 때 엘리야에게 청컨대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요청했지만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다가 마음이 흔들릴까봐 허용 안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을 적에 배와 그물과 부모 형제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불효를 권장하지 않고 효를 권장하는 종교인데, 왜 부모형제를 떠나 주님을 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인정이나 애정을 버려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 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7절 이하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제일주의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주님을 섬길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한마리가 아니라 두마리가 힘을 합하여 끌었던 것 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데 교회 일은 혼자의 힘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앞에 서 끌면 뒤에서 밀어주고 서로 돕고 서로 받들어서 주님을 섬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마리의 소는 법궤를 메고갈 때 발걸음 맞추어서 나란히 갔습니다. 한마리의 소가 힘이 있다하여 혼자 메지도 않았고 한마리의 소가 발이 빠르다 하여 앞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인삼각(이인삼각)경기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인삼각경 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협동정신입니다. 두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정신이 하나가 되고 구호에 맞추어 발을 제대로 맞추어야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한사람이 잘 달린다하여 혼자서 달려가려다가는 한걸음도 달려갈 수 없고 쓰 러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인삼각 경기와 같은 협동정신으로 마음을 같이 해서 주님을 받들어 섬겨야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아말렉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세를 중심 하여 전군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해가 맞도 록 손을 들어 기도했으며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내려 가지 않도록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으므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출 17:12). 그리고 여호수아 장군은 목 숨을 내대고 진두지휘를 했으며 수많은 군인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목숨을 내대고 적과 더불어 싸웠기에 이스라엘군이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바벧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닥사스다 1세의 석방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와서 훼파된 예루살렘성을 재건할 때에도 대제사장을 중심하 여 모든 백성들이 합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산발랏 등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나 그럴수록 이스라엘백성들은 더욱 한덩어리가 되어 주의 일에 임했습니다.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병기를 잡고 방어를 하였으 며 일하는 사람들도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적의 공격을 대 비했던 것입니다(느 4:16-17). 빌립보서 2장 1절 이하에 보면 주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에게 권면 해주고 있는데,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 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고 하였습니다.
제직들과 모든 성도들은 서로 마음을 합 하여 협동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문으로 협동(협동)이라는 글자를 보면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화할 협 (협)자를 보면 열십자(십) 변에 힘력(력) 세개를 붙인 것인데, 위에 있는 힘 력 자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며 아래의 두개의 힘력 자는 사람의 힘을 의미하는 것 으로 생각해 십자가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사람들의 힘을 모아 주 의 일을 해야 된다는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또한가지 동(동)자를 보면 한 울 타리안에 한 일(일)자와 입 구(구)자를 썼는데 한 울타리안의 한 권속들이 한 입 으로 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앞세우고 위로부터 내려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힘을 합하고 교회 권속들이 한 입을 가지고 한 목소리를 발할 때 협동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오해하여 교회 안에도 여당 야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만 그것은 교회의 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리켜 십자가 군 병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군병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군대 생활을 하셔서 잘 알겠지만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령관과 참모들이 하 나가 되어야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만 사령관은 여당인데 참 모들은 야당이 되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 군대는 있으나마나 싸우나마나 싸 움터에 나가도 백전백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군병인 교회는 여당 과 야당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교역자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이 하나가 되어 한입으로 한 목소리를 발할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흥되고 성장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페르시아에 이상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숫놈은 왼쪽 날개밖에 없고 오른쪽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붙어 있고 암놈은 오른족 날개밖에 없고 왼쪽에는 고리같은 것 이 붙어있는데, 한마리로는 절대로 날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날아갈 때는 서로 갈 고리를 걸고 두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같이 협동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주님이 역사하시고 은헤를 주시고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 여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님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선지자와 교사, 부자와 가난한 사람, 귀족인 마나엔과 흑인인 시므온이 합심하여 금식기도하며 주님을 섬겨나갈 때 교회가 부흥되고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모든 제직들과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멍에를 메고 서로 협력하여 힘써 주님을 섬겨나갈 적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서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고 지교회도 세우고 선교에 힘쓸 수 있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갔습니다. 치우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스루인데,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좌우로 치우지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순종을 가리 키는 말입니다. 신명기 5장 32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 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도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 든지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들이 뒤에서 송아지 들이 젖을 달라고 울어대도 뒤돌아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 하여 앞만 보고 똑바로 간 것 같이 오늘 우리도 똑바로 달려가야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목표를 향해서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앞만보고 꾸준히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 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뒤에서 유혹의 손길을 편다 할지라도 뿌리쳐 버리고 앞 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우편에서는 황금만능주의, 세속주의, 쾌락주 의, 안일무사주의가 우리를 미혹하고 있으며, 좌편에서는 불신앙과 의심 마귀, 이단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오 직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귀기울여 순종하여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이하에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 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잡으 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로 섬기면 우리의 주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의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해주시고 영육간에 강건함을 주시고 모든 일 이 잘되고 자녀들이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 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장에 간 다고 하니까 어떤 머슴이 거름을 짊어지고 장에까지 따라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신앙생활이란 사람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교회가니까 나도 교회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성경에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헌금하니까 나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첫열매를 드리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헌물을 드리라, 감사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어떤 사람은 작정헌금 할 때 절대로 먼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이리저리 재보고 많지도 적지도 않게 드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세금일 뿐입니다. 만일 주부가 오랜만에 친정에 가려고 하는데 남편 이 교통비 얼마, 선물비 얼마, 과일값 얼마, 이렇게 계산해서 딱 맞게 준다면 신 이날 주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알에 물질을 드리는 것은 받은바 은혜가 감사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넘치도록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과 비교 하며 계산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리켜서 정경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는 카논, 곧은 지팡이, 척도, 표 준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곧은 척도가 되는 하나님의 잣대를 가지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 바라보지 말고 사람 따라가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며 말씀 앞에 아멘으로 순종하여 신앙생활을 올바로 해나갈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끝으로 법궤를 싣고간 암소들은 벧세메스에 이르렀을 때 번제물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직분이란 결코 명예직이나 권세직이 아니라 실제로 일하며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를 지고가는 봉사직입니다. 벧세메스로 갔던 암소가 송아지들을 떼어두고 법궤를 싣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가서 마침내 그 사명 을 다한 다음에 수레를 화목으로 삼고 자신은 제물이 되어져 살, 가죽, 뼈 하나 도 남김없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직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땀흘려 봉사하며 시간과 물질을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허럭하시면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딱 한번 죽는 것이 쉬운지 모르지만 날마다의 삶속에서 내가 죽고 희생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맡은 사명 잘 감당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속에 건강의 복과 형통한 복과 자손이 잘되는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임직자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정을 초월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의 일을 하십시다. 사람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굳게 서서 앞 으로 달려나가십시다. 직분이란 명예나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일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직분이니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바로 지고 끝까지 주의 뒤를 따라가므로 면류관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간직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법궤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돌려주기로 하였습니다. 새수레를 만들어 거기에 법 궤를 싣고 또 독종을 상징하는 금쥐를 만들어서 예물과 함께 싣고 이스라엘땅인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게 했는데 암소 두마리가 그 새수레를 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법궤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두 마리의 암소는 직분자들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새해 교회 직분을 맡아 수고하실 임직자들을 임명하는데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임직자들이 나아가야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 두 마리의 암소는 젖먹는 송아지들을 떼어내 우리에 가두어둔채 수레 를 메고 벧세메스로 향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식에 대한 뜨거 운 애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모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고 하였습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 보면 벧세메스로 향하던 두마리 암 소가 갈 때에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 송아지들이 음메하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이 두마리 암소가 너무 가슴이 아파 울 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새끼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궤를 운반해가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인정에 끌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적에 너는 너의 본 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얼마나 피땀흘려 장만한 문전옥답인데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사랑하는 부 모 형제 친척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 사로잡 혔다면 결코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부르심을 입 을 때 엘리야에게 청컨대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라고 요청했지만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다가 마음이 흔들릴까봐 허용 안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을 적에 배와 그물과 부모 형제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불효를 권장하지 않고 효를 권장하는 종교인데, 왜 부모형제를 떠나 주님을 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인정이나 애정을 버려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 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7절 이하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 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제일주의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주님을 섬길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한마리가 아니라 두마리가 힘을 합하여 끌었던 것 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데 교회 일은 혼자의 힘으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앞에 서 끌면 뒤에서 밀어주고 서로 돕고 서로 받들어서 주님을 섬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마리의 소는 법궤를 메고갈 때 발걸음 맞추어서 나란히 갔습니다. 한마리의 소가 힘이 있다하여 혼자 메지도 않았고 한마리의 소가 발이 빠르다 하여 앞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인삼각(이인삼각)경기하는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인삼각경 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협동정신입니다. 두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고 정신이 하나가 되고 구호에 맞추어 발을 제대로 맞추어야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한사람이 잘 달린다하여 혼자서 달려가려다가는 한걸음도 달려갈 수 없고 쓰 러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인삼각 경기와 같은 협동정신으로 마음을 같이 해서 주님을 받들어 섬겨야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군이 아말렉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세를 중심 하여 전군이 일심동체가 되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해가 맞도 록 손을 들어 기도했으며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내려 가지 않도록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으므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출 17:12). 그리고 여호수아 장군은 목 숨을 내대고 진두지휘를 했으며 수많은 군인들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목숨을 내대고 적과 더불어 싸웠기에 이스라엘군이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바벧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닥사스다 1세의 석방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와서 훼파된 예루살렘성을 재건할 때에도 대제사장을 중심하 여 모든 백성들이 합심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산발랏 등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으나 그럴수록 이스라엘백성들은 더욱 한덩어리가 되어 주의 일에 임했습니다.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병기를 잡고 방어를 하였으 며 일하는 사람들도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적의 공격을 대 비했던 것입니다(느 4:16-17). 빌립보서 2장 1절 이하에 보면 주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에게 권면 해주고 있는데,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 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고 하였습니다.
제직들과 모든 성도들은 서로 마음을 합 하여 협동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문으로 협동(협동)이라는 글자를 보면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화할 협 (협)자를 보면 열십자(십) 변에 힘력(력) 세개를 붙인 것인데, 위에 있는 힘 력 자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며 아래의 두개의 힘력 자는 사람의 힘을 의미하는 것 으로 생각해 십자가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사람들의 힘을 모아 주 의 일을 해야 된다는 뜻이 있는 줄로 압니다. 또한가지 동(동)자를 보면 한 울 타리안에 한 일(일)자와 입 구(구)자를 썼는데 한 울타리안의 한 권속들이 한 입 으로 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앞세우고 위로부터 내려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의 힘을 합하고 교회 권속들이 한 입을 가지고 한 목소리를 발할 때 협동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오해하여 교회 안에도 여당 야당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만 그것은 교회의 원리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리켜 십자가 군 병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사령관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군병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군대 생활을 하셔서 잘 알겠지만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령관과 참모들이 하 나가 되어야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만 사령관은 여당인데 참 모들은 야당이 되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 군대는 있으나마나 싸우나마나 싸 움터에 나가도 백전백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군병인 교회는 여당 과 야당이 따로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교역자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이 하나가 되어 한입으로 한 목소리를 발할때 그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흥되고 성장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페르시아에 이상한 새가 있다고 합니다. 숫놈은 왼쪽 날개밖에 없고 오른쪽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붙어 있고 암놈은 오른족 날개밖에 없고 왼쪽에는 고리같은 것 이 붙어있는데, 한마리로는 절대로 날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날아갈 때는 서로 갈 고리를 걸고 두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와같이 협동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주님이 역사하시고 은헤를 주시고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 여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님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선지자와 교사, 부자와 가난한 사람, 귀족인 마나엔과 흑인인 시므온이 합심하여 금식기도하며 주님을 섬겨나갈 때 교회가 부흥되고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모든 제직들과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멍에를 메고 서로 협력하여 힘써 주님을 섬겨나갈 적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서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고 지교회도 세우고 선교에 힘쓸 수 있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갔습니다. 치우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스루인데,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좌우로 치우지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한 순종을 가리 키는 말입니다. 신명기 5장 32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 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에도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 든지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벧세메스로 가는 소들이 뒤에서 송아지 들이 젖을 달라고 울어대도 뒤돌아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목적지를 향 하여 앞만 보고 똑바로 간 것 같이 오늘 우리도 똑바로 달려가야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목표를 향해서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앞만보고 꾸준히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 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뒤에서 유혹의 손길을 편다 할지라도 뿌리쳐 버리고 앞 만 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우편에서는 황금만능주의, 세속주의, 쾌락주 의, 안일무사주의가 우리를 미혹하고 있으며, 좌편에서는 불신앙과 의심 마귀, 이단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유혹을 뿌리쳐 버리고 오 직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귀기울여 순종하여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 이하에 사도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 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잡으 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을 바로 섬기면 우리의 주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의 가는 길을 형통하게 해주시고 영육간에 강건함을 주시고 모든 일 이 잘되고 자녀들이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 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장에 간 다고 하니까 어떤 머슴이 거름을 짊어지고 장에까지 따라갔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신앙생활이란 사람따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교회가니까 나도 교회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성경에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헌금하니까 나도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첫열매를 드리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헌물을 드리라, 감사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어떤 사람은 작정헌금 할 때 절대로 먼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이리저리 재보고 많지도 적지도 않게 드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세금일 뿐입니다. 만일 주부가 오랜만에 친정에 가려고 하는데 남편 이 교통비 얼마, 선물비 얼마, 과일값 얼마, 이렇게 계산해서 딱 맞게 준다면 신 이날 주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알에 물질을 드리는 것은 받은바 은혜가 감사해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넘치도록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과 비교 하며 계산하여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리켜서 정경이라고 하는데 헬라어로는 카논, 곧은 지팡이, 척도, 표 준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곧은 척도가 되는 하나님의 잣대를 가지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 바라보지 말고 사람 따라가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며 말씀 앞에 아멘으로 순종하여 신앙생활을 올바로 해나갈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끝으로 법궤를 싣고간 암소들은 벧세메스에 이르렀을 때 번제물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직분이란 결코 명예직이나 권세직이 아니라 실제로 일하며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를 지고가는 봉사직입니다. 벧세메스로 갔던 암소가 송아지들을 떼어두고 법궤를 싣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가서 마침내 그 사명 을 다한 다음에 수레를 화목으로 삼고 자신은 제물이 되어져 살, 가죽, 뼈 하나 도 남김없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직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땀흘려 봉사하며 시간과 물질을 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허럭하시면 순교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딱 한번 죽는 것이 쉬운지 모르지만 날마다의 삶속에서 내가 죽고 희생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맡은 사명 잘 감당하고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삶 속에 건강의 복과 형통한 복과 자손이 잘되는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임직자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인정을 초월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주의 일을 하십시다. 사람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에 굳게 서서 앞 으로 달려나가십시다. 직분이란 명예나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일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직분이니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바로 지고 끝까지 주의 뒤를 따라가므로 면류관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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