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소떼를 보내는 마음 (삼상6:1-16)
본문
참으로 장관이었다. 2km 에 이르는 소떼의 긴 행렬이 군사분계선을 넘 어설 때, 우리는 고향의 의미와 민족화해의 참 뜻을 뜨거운 가슴으로 느 꼈다. 어떤 통일논리나 주장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민족화합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동화가 없고, 신화가 없고, 영웅이 없는 시대에 그 드라마 에는 동화가 있고, 신화가 있고, 영웅이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무한 한 활력이 있었다.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 싫어서 세번째 가출을 하며 아버지가 목숨처럼 아꼈던 소를 판돈 70원 을 몰래 들고 집을 나섰던 65년전의 한 소년이 그돈으로 소처럼 성실하 게 일해 이제 83세의 대기업의 총수가 됐고 "이제 한 마리 소를 천마리 소로 되갚기 위해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만든 농장에서 키운 소떼를 몰 고 고향 방문에 오른다"며 판문점에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가 왜 굳 이 판문점을 열고 고향길에 오르는지 그의 뚝심과 지혜가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금의환향은 농경사회의 심금을 울리는 효(孝)의 결정판이었다. 소 500마리가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가는 광경을 TV로 지켜보면서 감 개가 무량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저런 아이디어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 나 대단한 일이고 또 놀라운 일이다. 소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 무엇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동물이라'는 데 특징을 들 수 있다.
정말 그렇다. 가만 생각해 보면, '소는 철저히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태어나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이 다' 싶을 정도로 그 일생이 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바쳐지는 동물이다. 지금은 우리 농촌도 농업 기술이 상당히 발전해서 경우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 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소는 정말 필수 불가결한 동물이었다. 농촌에서 자라신 분들은 아주 잘 압니다만, 소가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논과 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싫 어 나르고 하는 일들이 모두가 다 소의 몫이다. 소가 없이는 절대로 힘 든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이제 더 이상 소에게 일을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면, 또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에는 도살장으로 보내 지고 죽어서 고기로 사람에게 제공된다. 껍질은 가죽으로 가공하여 신발 이나, 가죽 장갑 혹은 가죽옷으로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배설물은 또 어떻게 하느냐 그것만은 쓸모가 없어서 버리느냐 천만의 말씀이지요 거름과 비료로 사용된다. 요즘에 특히 인기가 있는 유기농 농사에 이 소 의 배설물은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료가 된다. 자 그러고 보면, 소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동물이다. 100% 다 중요하고. 100%다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한 동물이다. 농경사회였던 이 땅에서 살아서는 양식생산의 절대적 노동력을, 죽어서는 자신의 기름.내장.고기와 가죽에 이르기까지 머리에서 꼬리끝까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주고 가는 존재였다.
궁핍한 시대에는 자식의 학자금 마련에 쓰이는 등한 집안의 재산 1 호이기도 했다. 본 말씀의 장은 사사시대의 끝 무렵인 엘리와 사무엘의 시대를 배경으 로 이루어진 말씀이다. 본 말씀의 배경을 볼때 먼저 종교적으로는 거룩 하고 의로워야 할 대제사장인 엘리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량자(2:12-17)로 엘리는 성전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 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3:1)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는 영과 육이 혼탁하고 썩어진 시대였다(2:22-36).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데 계속 패하자-모세 광야의 승리를 기대하며-실로의 그룹사이에 계신 언약궤를 진중으로 옮기어서 결국 원수의 손에 빼앗기게 된다. 회개는 아니하고 법궤만 앞 세웠다가 삼만명이 전사하였다. 엘리의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 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더럽고 썩어 냄새나는 시대에 엘리와 그 가족은 버 리시고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그로 뜻을 세우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이 승리를 가져다 준 것으로 생각하고 법궤를 아스돗 다곤 신당에 다곤신의 발밑에다 가져다 두었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이 승리를 가져다 주었으므로 법궤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알고 다 곤을 영화롭게 해보겠다고 하나님의 법궤를 희생제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곤 신당에 재앙이 내려 다곤 신의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둥이만 남았다. 그리고 아스돗에 독종이 퍼지게되자 그들은 법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로 옮겼다. 그러나 그 성읍에도 죽음과 독종의 징벌이 내렸다. 결국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했다.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도 않은 젖나는 두 암소를 선택 하고 수레에 속건 제물로 금보물 상자를 싣고 법궤를 그 수레에 태우고 성읍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다섯을 만들어 하나님께 속건제로 드리고 새수레를 만들어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둘을 수레를 끌게 하고 그위에 법궤를 얹어 운반하는데 이스라엘 지경으로 향하여 벧세메스로 곧 바로 가면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연히 내린 재앙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전쟁을 사용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하나님의 언 약궤까지 동원했지만 도리어 언약궤 마져 빼앗기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승 기념물로 언약궤를 다곤의 당에 안치하여 다곤의 위력을 과시할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언약궤를 통하여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하여 블레셋을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신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언약궤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곤의 목이 부러지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이 퍼져 그들은 실망하고 도리어 언약궤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여러 장소로 옮겼지만 더욱 독종 은 퍼졌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언약궤를 원래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 자고 하였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아오고, 기럇여아림에 안치되어 다윗 시대까지 있게 된다. 본문에서 보면 두 암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두 마리가 뜻 을 합하여 벧세메스로 가서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번제로 희생이 된다. 왜 하나님은 선택된 이스라엘이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일하시지 않 고 미물인 두 암소를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을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미물인 소를 사용하고 계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속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1. 하나님은 세상을 구할 동역자를 찾고 계신다. 불레셋 나라의 소가 어찌 이 두 마리 뿐이겠습니까 수를 셀수 없는 많은 무리중에서 특별히 사명을 띄고 선택받은 소들이다. 여러분들도 이 소들과 같이 사명받은 성도다. 이 세상에, 아니 이 동리 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여러분들 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 소들과 같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섭리와 뜻이 계셔서 큰 사명을 띄고 부름받은 자들이다. 창18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에서 의인을 찾아 이 땅을멸 하시기를 원하시지 않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결국 소돔과 고 모라는 하나님과 일할 의인 10인이 없어 멸망을 당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위로 제사장에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당신 의 뜻에 합당한 자가 없기에 다른 방법을 택하신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금번 정주영회장의 방북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껴야 한다, 금번 방북한 소를 우리는 "통일 소"라고 부른다. 이땅의 통일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법궤는 제사장들의 어깨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런 법궤를 제사장이 없으면, 선지자나, 정치가나, 경제가 중에서 택하 실 수 있었겠지만 그리하지 아니하시고 미물인 두 암소를 선택하심은 자존하신 당신의 모습을 열방으로 알게 하시려는 것과 일꾼의 자격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열심있는 자가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람임을 암시해 주시고 계신다. 오늘날의 우리도 개인주의와 물질문명의 팽배속 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 뜻을 두고 자기를 깨끗케 하면 부족하고 연약하며 온전치 못한 자라 도 합당한 곳에 합당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고후 12:9).
1).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는 세상만사는 필연임을 보여 준다. 블레셋인들이 재앙을 만난것이 법궤 때문인가 아닌가 이것을 알기위 하여 새 수레를 만들고 젖나는 암소 둘을 선택하여 벧세메스로 보냈다. 만일에 벧세메스로 가면 필연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연으로 보겠다는 말 이다.
그런데 여기서 암소 둘은 말없이 대로로 벧세메스로갔다. 우연이 냐 필연이냐 오늘 우리는 이 땅의 분단이 우연이냐 필연이냐 라 고 하는 영양가 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어 보겠다고 허둥되어 보지만 가 장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결재에 의해서 움직인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 게 하겠느냐"(전7:13) 전도서 기자는 말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 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가 가라사대"(계3:7) 세상만사가 결코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필연이고 하나님 섭리다. 큰일 이든 작은일이든 만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된다. 금번 통일 소 의 방북도 그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지자
2).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희생을 보여준 거룩한 소였다. 이 소는 벧세메스 경내에 도착 했을때 그곳 사람들이 법궤를 찾는 기쁨 에서 끌고온 새 수레를 쪼개어 단을 쌓고 이 두마리 암소를 잡아 번제 물로 드리고 말았다. 칭찬도 없고 상급도 없이 법궤를 싣고온 여기 젖나는 두 암소는 마지막 희생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주를 위해사는 성도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지고 가오 리니. 부르는 찬송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후까지 살아가는,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가 되자. 북에 간 소들이 거기서 무 엇을 하게 될까를 모두들 궁금해 한다. 다음에 갈 500마리와 함께 동력 이 부족하다는 북한에서 농삿일을 돕는 일에 요긴하게 쓰이면서 그곳 동포들의 식량난을 해소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면 한다.
2. 하나님은 사랑으로 협력하는 동역자를 찾는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고, 젖나는 새끼를 둔 두암소가 수레를 끌고 한곳으 로 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새끼의 울음 소 리와 멍에로 인해 등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속에서 두 암소는 서로 하모 니를 이루며 한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꾼이라 자칭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큰일 을 자식때문에, 힘들어서, 능력에 없음으로, 건강 때문에 등 이유와 조건 을 붙인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사랑과 감사는 할줄 알면서도 생사의 기로 중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라 면 과연 어느 누가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암소가 협력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택된 암소가 자기의 동물성을 죽이고 협력하여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심, 소유욕, 동물성 등이 가득한 인간은 절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다. 죽음을 불사하고 협력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그 안에 내 동물성을 죽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 려 힘쓰고 노력한 자만이 사랑과 협력할 수 있다. 그리고 나그네 인생이 무엇임을 깨닫고 더 나은 영의 본향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원수와 이웃을 사랑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땅에 이룰 수 있는 자다. 한 가출 소년이 아버지의 소 판돈을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소를 보내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이길을 가는데 혼자는 어렵지만 둘이면 더욱 좋다. 전진하는데는 좌우로 치우 침이 없어야 한다. 롯의 처는 소돔성에 미련이 있어 뒤를 돌아보다 소 금 기둥이 되었다.
3. 모든 것을 버린 자를 찾습니다. 이 소는 벧세메스 경내에 도착 했을때 그곳 사람들이 법궤를 찾는 기쁨에서 끌고온 새 수레를 쪼개어 단을 쌓고 이 두마리 암소를 잡아 번 제물로 드리고 말았다. 법궤를 끌은 두 암소는 자식도 자신도 사랑할 줄 알고 살려는 기본적 인 동물성을 소유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자식은 물론 자신의 번제로 (삼상 6:14) 드렸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소유하게 된다. 이같은 모습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수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생육하였느니라"(히11:8-12). "아브라함은 현재 이루어진 말씀을 가진 것이아니요, 장래 이루어질 말씀을 듣고 모든 것 을 버리되 백세에 주신 아들까지"(창22),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말씀 에 순종했다. 그로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여기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는 지금 젖 먹이는 새끼 송아지가 있다. 어린 새끼를 버려두고 떠나는 어미소는 그래서 가면서 울었다.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다. 새끼를 떼어 놓고 떠나는 어미소의 아픔을 소개하 고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생은 고해라고 했듯이 죄악 세상에 살 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여기 벧세메스로 향해 가는 암소처럼 눈물겨 운 일들도 많고 고통스러운 일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난의 설움 질병 의 고통 가정적 시험 신앙적갈등 사업의 실패 수없이 찾아드는 쓰라림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없이 가야 할 길이다.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 울며가는 인생길이다. 그러나 주님 은 나홀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실줄 믿는다. 칭찬도 없고 상급도 없이 법궤를 싣고온 여기 젖나는 두 암소는 마지 막 희생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주를 위해사는 성도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지 고 가오리니. 부르는 찬송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 후까지 살아가는,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가 되자. 여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성도의 모형 을 찾아 본다.
본문 12절에 벧세메스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좌우로 치우 치지 아니했다고 했다. 옆길로 가지 않았다. 법궤를 끌은 두 암소는 자 식도 자신도 사랑할 줄 알고 살려는 기본적인 동물성을 소유한 짐승이 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자식은 물론 자신의 번제로 (삼상 6:14) 드렸을 때 자신의 온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소유하게 된다. 이같은 모습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 하고 나갔으며생육하였느니라"(히11:8-12). "아브라함은 현재 이루어진 말씀을 가진 것이 아니요, 장래 이루어질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되 백세에 주신 아들까지"(창22),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불레셋 들판은 재앙으로 페허가 되었으나 벳세메스 계곡은 황금들판이다. 물질적인 축복이었다. 법궤는 영적인 축복이다. 성물을 운반했던 수레는 다시는 세속적인 것을 싣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소는 번제물로 사용했다. 멍에를 층직하게 메고 갑시다. 생명을 위한 보조를 맞추고 갑시다. 목적지까지 가서 희생제물이 됩시다. 조그마한 탁구공이 미.중관계의 물꼬를 텄듯이 북행(北行)하는 소떼들 이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예부터 소라는 짐승만큼 사람한테 공헌해온 가축은 없을 게다. 살아서는 젖을 짜고, 농사를 짓고, 짐을 나르고, 수레를 끌고 있다. 궂고 힘든 온갖 일들을 도맡아하고 있다. 그렇게 말없이 봉사하고 있지만, 사람들 은 화가 나면 소들을 빗대 "소같이 미련한 놈" 이라며 욕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소는 심성이 착해 이를 들은 척도 않는다. 살아서만 그런 게 아니고, 죽어서는 사람을 위해 더욱 값진 일을 하 고 있다. 곧 떨어질 짚신 신지 말고 질긴 구두를 신으라고 가죽을 남기 고, 도장이나 장난감을 만들어 보라며 뿔을 남겨놓고 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은 시시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먹고 보신하라며 고기 를 푸짐하게 남겨준다. 특히 우리네 한국사람들한테는 꼬리, 사골, 족발 등 곰탕재료로 버릴 게 없다. 소는 이렇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한테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물론 옛날부터 그랬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악스럽고 몰인정하다해도 소한테만 은 눈 감지 않고 있다. 소가 살아있을 때 뭔가 대접하고 있다. 이것도 곰곰이 따져보면, 결국은 사람 자신을 위한 짓이다. 이를테면 철저한 노동력 착취를 위한 행위일 따름이다. 소는 가축 중에서도 가장 우직하고 듬직하지만 농가에선 식구들 다음 가는 준가족적인 존재이자 민족정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날까지 아무도 남북간의 담을 허무는 데에 소를 내세운 이가 없었고, 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소 판 돈을 밑천삼아 소처럼 일했던 그가 드디어 소떼를 앞세워 분단의 담장을 한 구석 헐면서 고향길에 나선 것이다.
반세기 동안 가족 이산의 상처, 실향의 상처, 좌우익 대립의 상처로 가 슴을 앓아온 사람이 아니라 한들 그 누가 아니 부럽고, 그 아니 설레고, 그 아니 따라나서고 싶었을 터인가. 소떼의 행진을 바라보며 차라리 소가 부럽다고 되뇌던 한 월남민의 탄식이 축사 (祝辭) 의 일절로 들린 것도 민족적인 축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 일 것이다. 이 소떼는 가서 저마다 새 임자를 만나고 그 임자의 재산목록 제1호 가 되어 혹은 쟁기를 끌고, 혹은 달구지를 끌게 될 것이다. 쟁기를 끄는 것은 씨앗을 심는 과정이고, 달구지를 끄는 것은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다. 무릇 느린 것이 소걸음이라지만 심고 거두는 것이 갈수록 눈에 보이 리라는 기대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떼는 농사의 역우 (役牛)가 아니라 통일의 역군 (役君) 들이다. 이 소떼는 또 '없는 집에 소 들어가는 것 같다' 고 일러왔던 궁색한 시 대의 속담을 하루아침에 멀리 좌천시켜 버렸다. 성질도 유순하고 질박하며 끈기가 있어 예전 우리민족의 심성과 꼭 닮 았다. 어린 시절 들판으로 소를 데리고 나가 동무삼아 놀면서 꼴을 먹이 던 추억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듯 소는 한식 구와 다름없어 생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말하자면 소는 오랫동안 우리 민중에게 가장 친화력이 강한 자연이자 고향이며 삶 그 자체와 같은 하 나의 원형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소가 이제는 민족분단선을 넘는 통일일꾼으로 나섰다. 2000년대를 목전에 둔 지금, 새로운 통일운동을 위하여 이소는 이 운동 의 첨병인 된 셈이다. "소"에 착안한 것은 정회장 개인의 인생역정상 필 연적이라 하겠지만 민족적 차원에서도 이처럼 절묘할 수가 없다. 소가 자동차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것은 꽉 막힌 것으로만 인식되던 판 문점의 한 모퉁이를 소떼가 지나갈 정도로 길이 넓어졌다는 것은 반가 운 일이 아닐수 없다. 고향은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 " 향수")이다.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고향은 "참하 꿈엔들 잊 힐리야"로 그리움에 젖는 정서적 공간이다. 고향에는 소가 있다. 농경민족인 한 민족에게 소는 소망이었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얼국백이 황소 "는 곧 농촌의 상징이다.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실은 채 북녘으로 향하는 소떼가 오늘 아침 판문점을 지난다.
분단 이후 48년만에 최초로 판문점 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소를 보내며 우리는 빌었다. 소들아 잘 가라. 북의 논밭을 갈면서 평화 의 씨앗을 키워다오. 서산농장이 그리울때면 남북 이산가족의 그리움을 헤아려 다오. 통일의 쟁기, 화해의 쟁기를 끌어 다오. 소들아 북에서 잘 지내거라. 우리는 "통일 소"가 판문점을 넘는 것을 보며 통일의 꿈을 꾸었다. 벧세 메스로 들어가는 소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독종과 어려움이 끝난 것으 로 생각했던 불레셋 사람들 처럼 우리는 금번 방북 소를 보내며 이제 이 땅에 어려움이 없고 통일 이루어지는 멋진 꿈을 꾼다. 우리들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소처럼 쓰임 받는 일군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궤를 찾는 기쁨을 준 것처럼 그리고 불레셋에 게는 어려움의 종식을 가져다 주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일꾼이 되자. 우리가 이땅의 통일을 위하여 희생하는 소가 되자.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시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는 찾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요, 도저히 저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할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자를 찾으신다. 내 모습 (자아를 판단하는 동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하지 마시고 죽기(신의성품)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동반자가 되 자. 불레셋 땅의 각종 재앙을 싣고 갔던 암소처럼 금번 방북하는 소들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염원인 통일을 이루는 초석이 되는 "통일 소"가 되기를 바란다. 그 암소들은 가던 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뒤돌아보고 후 회없이 오직 한길 벧세메스로 떠났다고 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이다.
정말 그렇다. 가만 생각해 보면, '소는 철저히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태어나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물이 다' 싶을 정도로 그 일생이 다 우리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바쳐지는 동물이다. 지금은 우리 농촌도 농업 기술이 상당히 발전해서 경우가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 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소는 정말 필수 불가결한 동물이었다. 농촌에서 자라신 분들은 아주 잘 압니다만, 소가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논과 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싫 어 나르고 하는 일들이 모두가 다 소의 몫이다. 소가 없이는 절대로 힘 든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이제 더 이상 소에게 일을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하면, 또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에는 도살장으로 보내 지고 죽어서 고기로 사람에게 제공된다. 껍질은 가죽으로 가공하여 신발 이나, 가죽 장갑 혹은 가죽옷으로 만들어진다. 마지막으로 배설물은 또 어떻게 하느냐 그것만은 쓸모가 없어서 버리느냐 천만의 말씀이지요 거름과 비료로 사용된다. 요즘에 특히 인기가 있는 유기농 농사에 이 소 의 배설물은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비료가 된다. 자 그러고 보면, 소는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동물이다. 100% 다 중요하고. 100%다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한 동물이다. 농경사회였던 이 땅에서 살아서는 양식생산의 절대적 노동력을, 죽어서는 자신의 기름.내장.고기와 가죽에 이르기까지 머리에서 꼬리끝까지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주고 가는 존재였다.
궁핍한 시대에는 자식의 학자금 마련에 쓰이는 등한 집안의 재산 1 호이기도 했다. 본 말씀의 장은 사사시대의 끝 무렵인 엘리와 사무엘의 시대를 배경으 로 이루어진 말씀이다. 본 말씀의 배경을 볼때 먼저 종교적으로는 거룩 하고 의로워야 할 대제사장인 엘리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량자(2:12-17)로 엘리는 성전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 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3:1) 형식과 의식만 남아 있는 영과 육이 혼탁하고 썩어진 시대였다(2:22-36).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데 계속 패하자-모세 광야의 승리를 기대하며-실로의 그룹사이에 계신 언약궤를 진중으로 옮기어서 결국 원수의 손에 빼앗기게 된다. 회개는 아니하고 법궤만 앞 세웠다가 삼만명이 전사하였다. 엘리의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 하였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더럽고 썩어 냄새나는 시대에 엘리와 그 가족은 버 리시고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그로 뜻을 세우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이 승리를 가져다 준 것으로 생각하고 법궤를 아스돗 다곤 신당에 다곤신의 발밑에다 가져다 두었다. 불레셋 사람들은 다곤신이 승리를 가져다 주었으므로 법궤를 하나의 전리품으로 알고 다 곤을 영화롭게 해보겠다고 하나님의 법궤를 희생제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다곤 신당에 재앙이 내려 다곤 신의 얼굴이 땅에 닿았고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둥이만 남았다. 그리고 아스돗에 독종이 퍼지게되자 그들은 법궤를 다곤 신당이 없는 가드로 옮겼다. 그러나 그 성읍에도 죽음과 독종의 징벌이 내렸다. 결국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했다.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도 않은 젖나는 두 암소를 선택 하고 수레에 속건 제물로 금보물 상자를 싣고 법궤를 그 수레에 태우고 성읍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다섯을 만들어 하나님께 속건제로 드리고 새수레를 만들어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둘을 수레를 끌게 하고 그위에 법궤를 얹어 운반하는데 이스라엘 지경으로 향하여 벧세메스로 곧 바로 가면 하나님께서 내린 재앙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연히 내린 재앙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전쟁을 사용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뜻대로 하나님의 언 약궤까지 동원했지만 도리어 언약궤 마져 빼앗기고 말았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승 기념물로 언약궤를 다곤의 당에 안치하여 다곤의 위력을 과시할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언약궤를 통하여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하여 블레셋을 사용하셨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신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언약궤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곤의 목이 부러지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이 퍼져 그들은 실망하고 도리어 언약궤로부터 멀어지기 위하여 여러 장소로 옮겼지만 더욱 독종 은 퍼졌고, 이로 인하여 그들은 언약궤를 원래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 자고 하였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돌아오고, 기럇여아림에 안치되어 다윗 시대까지 있게 된다. 본문에서 보면 두 암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두 마리가 뜻 을 합하여 벧세메스로 가서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번제로 희생이 된다. 왜 하나님은 선택된 이스라엘이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일하시지 않 고 미물인 두 암소를 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을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미물인 소를 사용하고 계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속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가
1. 하나님은 세상을 구할 동역자를 찾고 계신다. 불레셋 나라의 소가 어찌 이 두 마리 뿐이겠습니까 수를 셀수 없는 많은 무리중에서 특별히 사명을 띄고 선택받은 소들이다. 여러분들도 이 소들과 같이 사명받은 성도다. 이 세상에, 아니 이 동리 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여러분들 뿐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히 이 소들과 같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섭리와 뜻이 계셔서 큰 사명을 띄고 부름받은 자들이다. 창18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에서 의인을 찾아 이 땅을멸 하시기를 원하시지 않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결국 소돔과 고 모라는 하나님과 일할 의인 10인이 없어 멸망을 당한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위로 제사장에서부터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당신 의 뜻에 합당한 자가 없기에 다른 방법을 택하신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금번 정주영회장의 방북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껴야 한다, 금번 방북한 소를 우리는 "통일 소"라고 부른다. 이땅의 통일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법궤는 제사장들의 어깨로 이동해야만 한다. 그런 법궤를 제사장이 없으면, 선지자나, 정치가나, 경제가 중에서 택하 실 수 있었겠지만 그리하지 아니하시고 미물인 두 암소를 선택하심은 자존하신 당신의 모습을 열방으로 알게 하시려는 것과 일꾼의 자격이 규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열심있는 자가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람임을 암시해 주시고 계신다. 오늘날의 우리도 개인주의와 물질문명의 팽배속 에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 뜻을 두고 자기를 깨끗케 하면 부족하고 연약하며 온전치 못한 자라 도 합당한 곳에 합당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고후 12:9).
1).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암소는 세상만사는 필연임을 보여 준다. 블레셋인들이 재앙을 만난것이 법궤 때문인가 아닌가 이것을 알기위 하여 새 수레를 만들고 젖나는 암소 둘을 선택하여 벧세메스로 보냈다. 만일에 벧세메스로 가면 필연이요 그렇지 않으면 우연으로 보겠다는 말 이다.
그런데 여기서 암소 둘은 말없이 대로로 벧세메스로갔다. 우연이 냐 필연이냐 오늘 우리는 이 땅의 분단이 우연이냐 필연이냐 라 고 하는 영양가 없는 말장난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어 보겠다고 허둥되어 보지만 가 장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결재에 의해서 움직인다.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 게 하겠느냐"(전7:13) 전도서 기자는 말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 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 가 가라사대"(계3:7) 세상만사가 결코 우연은 없다. 모두가 필연이고 하나님 섭리다. 큰일 이든 작은일이든 만사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진행된다. 금번 통일 소 의 방북도 그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지자
2).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희생을 보여준 거룩한 소였다. 이 소는 벧세메스 경내에 도착 했을때 그곳 사람들이 법궤를 찾는 기쁨 에서 끌고온 새 수레를 쪼개어 단을 쌓고 이 두마리 암소를 잡아 번제 물로 드리고 말았다. 칭찬도 없고 상급도 없이 법궤를 싣고온 여기 젖나는 두 암소는 마지막 희생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주를 위해사는 성도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지고 가오 리니. 부르는 찬송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후까지 살아가는,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가 되자. 북에 간 소들이 거기서 무 엇을 하게 될까를 모두들 궁금해 한다. 다음에 갈 500마리와 함께 동력 이 부족하다는 북한에서 농삿일을 돕는 일에 요긴하게 쓰이면서 그곳 동포들의 식량난을 해소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면 한다.
2. 하나님은 사랑으로 협력하는 동역자를 찾는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고, 젖나는 새끼를 둔 두암소가 수레를 끌고 한곳으 로 향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새끼의 울음 소 리와 멍에로 인해 등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속에서 두 암소는 서로 하모 니를 이루며 한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일꾼이라 자칭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큰일 을 자식때문에, 힘들어서, 능력에 없음으로, 건강 때문에 등 이유와 조건 을 붙인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사랑과 감사는 할줄 알면서도 생사의 기로 중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라 면 과연 어느 누가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암소가 협력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택된 암소가 자기의 동물성을 죽이고 협력하여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심, 소유욕, 동물성 등이 가득한 인간은 절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다. 죽음을 불사하고 협력할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고 그 안에 내 동물성을 죽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 려 힘쓰고 노력한 자만이 사랑과 협력할 수 있다. 그리고 나그네 인생이 무엇임을 깨닫고 더 나은 영의 본향을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원수와 이웃을 사랑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땅에 이룰 수 있는 자다. 한 가출 소년이 아버지의 소 판돈을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소를 보내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이길을 가는데 혼자는 어렵지만 둘이면 더욱 좋다. 전진하는데는 좌우로 치우 침이 없어야 한다. 롯의 처는 소돔성에 미련이 있어 뒤를 돌아보다 소 금 기둥이 되었다.
3. 모든 것을 버린 자를 찾습니다. 이 소는 벧세메스 경내에 도착 했을때 그곳 사람들이 법궤를 찾는 기쁨에서 끌고온 새 수레를 쪼개어 단을 쌓고 이 두마리 암소를 잡아 번 제물로 드리고 말았다. 법궤를 끌은 두 암소는 자식도 자신도 사랑할 줄 알고 살려는 기본적 인 동물성을 소유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자식은 물론 자신의 번제로 (삼상 6:14) 드렸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소유하게 된다. 이같은 모습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수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생육하였느니라"(히11:8-12). "아브라함은 현재 이루어진 말씀을 가진 것이아니요, 장래 이루어질 말씀을 듣고 모든 것 을 버리되 백세에 주신 아들까지"(창22),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말씀 에 순종했다. 그로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여기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는 지금 젖 먹이는 새끼 송아지가 있다. 어린 새끼를 버려두고 떠나는 어미소는 그래서 가면서 울었다.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다. 새끼를 떼어 놓고 떠나는 어미소의 아픔을 소개하 고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생은 고해라고 했듯이 죄악 세상에 살 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여기 벧세메스로 향해 가는 암소처럼 눈물겨 운 일들도 많고 고통스러운 일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가난의 설움 질병 의 고통 가정적 시험 신앙적갈등 사업의 실패 수없이 찾아드는 쓰라림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없이 가야 할 길이다.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 울며가는 인생길이다. 그러나 주님 은 나홀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동행하여 주실줄 믿는다. 칭찬도 없고 상급도 없이 법궤를 싣고온 여기 젖나는 두 암소는 마지 막 희생을 당하고 만다. 이것이 주를 위해사는 성도의 최후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 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지 고 가오리니. 부르는 찬송처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 후까지 살아가는, 벧세메스로 향해가는 암소가 되자. 여기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킨 성도의 모형 을 찾아 본다.
본문 12절에 벧세메스로 향하여 대로로 가며 좌우로 치우 치지 아니했다고 했다. 옆길로 가지 않았다. 법궤를 끌은 두 암소는 자 식도 자신도 사랑할 줄 알고 살려는 기본적인 동물성을 소유한 짐승이 었다. 그러나 두 암소는 자식은 물론 자신의 번제로 (삼상 6:14) 드렸을 때 자신의 온전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궤를 소유하게 된다. 이같은 모습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 하고 나갔으며생육하였느니라"(히11:8-12). "아브라함은 현재 이루어진 말씀을 가진 것이 아니요, 장래 이루어질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되 백세에 주신 아들까지"(창22),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불레셋 들판은 재앙으로 페허가 되었으나 벳세메스 계곡은 황금들판이다. 물질적인 축복이었다. 법궤는 영적인 축복이다. 성물을 운반했던 수레는 다시는 세속적인 것을 싣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은 소는 번제물로 사용했다. 멍에를 층직하게 메고 갑시다. 생명을 위한 보조를 맞추고 갑시다. 목적지까지 가서 희생제물이 됩시다. 조그마한 탁구공이 미.중관계의 물꼬를 텄듯이 북행(北行)하는 소떼들 이 남북관계의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예부터 소라는 짐승만큼 사람한테 공헌해온 가축은 없을 게다. 살아서는 젖을 짜고, 농사를 짓고, 짐을 나르고, 수레를 끌고 있다. 궂고 힘든 온갖 일들을 도맡아하고 있다. 그렇게 말없이 봉사하고 있지만, 사람들 은 화가 나면 소들을 빗대 "소같이 미련한 놈" 이라며 욕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소는 심성이 착해 이를 들은 척도 않는다. 살아서만 그런 게 아니고, 죽어서는 사람을 위해 더욱 값진 일을 하 고 있다. 곧 떨어질 짚신 신지 말고 질긴 구두를 신으라고 가죽을 남기 고, 도장이나 장난감을 만들어 보라며 뿔을 남겨놓고 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은 시시하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먹고 보신하라며 고기 를 푸짐하게 남겨준다. 특히 우리네 한국사람들한테는 꼬리, 사골, 족발 등 곰탕재료로 버릴 게 없다. 소는 이렇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사람한테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물론 옛날부터 그랬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악스럽고 몰인정하다해도 소한테만 은 눈 감지 않고 있다. 소가 살아있을 때 뭔가 대접하고 있다. 이것도 곰곰이 따져보면, 결국은 사람 자신을 위한 짓이다. 이를테면 철저한 노동력 착취를 위한 행위일 따름이다. 소는 가축 중에서도 가장 우직하고 듬직하지만 농가에선 식구들 다음 가는 준가족적인 존재이자 민족정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날까지 아무도 남북간의 담을 허무는 데에 소를 내세운 이가 없었고, 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소 판 돈을 밑천삼아 소처럼 일했던 그가 드디어 소떼를 앞세워 분단의 담장을 한 구석 헐면서 고향길에 나선 것이다.
반세기 동안 가족 이산의 상처, 실향의 상처, 좌우익 대립의 상처로 가 슴을 앓아온 사람이 아니라 한들 그 누가 아니 부럽고, 그 아니 설레고, 그 아니 따라나서고 싶었을 터인가. 소떼의 행진을 바라보며 차라리 소가 부럽다고 되뇌던 한 월남민의 탄식이 축사 (祝辭) 의 일절로 들린 것도 민족적인 축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 일 것이다. 이 소떼는 가서 저마다 새 임자를 만나고 그 임자의 재산목록 제1호 가 되어 혹은 쟁기를 끌고, 혹은 달구지를 끌게 될 것이다. 쟁기를 끄는 것은 씨앗을 심는 과정이고, 달구지를 끄는 것은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다. 무릇 느린 것이 소걸음이라지만 심고 거두는 것이 갈수록 눈에 보이 리라는 기대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떼는 농사의 역우 (役牛)가 아니라 통일의 역군 (役君) 들이다. 이 소떼는 또 '없는 집에 소 들어가는 것 같다' 고 일러왔던 궁색한 시 대의 속담을 하루아침에 멀리 좌천시켜 버렸다. 성질도 유순하고 질박하며 끈기가 있어 예전 우리민족의 심성과 꼭 닮 았다. 어린 시절 들판으로 소를 데리고 나가 동무삼아 놀면서 꼴을 먹이 던 추억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듯 소는 한식 구와 다름없어 생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말하자면 소는 오랫동안 우리 민중에게 가장 친화력이 강한 자연이자 고향이며 삶 그 자체와 같은 하 나의 원형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소가 이제는 민족분단선을 넘는 통일일꾼으로 나섰다. 2000년대를 목전에 둔 지금, 새로운 통일운동을 위하여 이소는 이 운동 의 첨병인 된 셈이다. "소"에 착안한 것은 정회장 개인의 인생역정상 필 연적이라 하겠지만 민족적 차원에서도 이처럼 절묘할 수가 없다. 소가 자동차를 타고 휴전선을 넘어가는 것은 꽉 막힌 것으로만 인식되던 판 문점의 한 모퉁이를 소떼가 지나갈 정도로 길이 넓어졌다는 것은 반가 운 일이 아닐수 없다. 고향은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정지용 " 향수")이다.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고향은 "참하 꿈엔들 잊 힐리야"로 그리움에 젖는 정서적 공간이다. 고향에는 소가 있다. 농경민족인 한 민족에게 소는 소망이었다. 고향 하면 떠오르는 "얼국백이 황소 "는 곧 농촌의 상징이다.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실은 채 북녘으로 향하는 소떼가 오늘 아침 판문점을 지난다.
분단 이후 48년만에 최초로 판문점 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소를 보내며 우리는 빌었다. 소들아 잘 가라. 북의 논밭을 갈면서 평화 의 씨앗을 키워다오. 서산농장이 그리울때면 남북 이산가족의 그리움을 헤아려 다오. 통일의 쟁기, 화해의 쟁기를 끌어 다오. 소들아 북에서 잘 지내거라. 우리는 "통일 소"가 판문점을 넘는 것을 보며 통일의 꿈을 꾸었다. 벧세 메스로 들어가는 소를 바라보며 이제 모든 독종과 어려움이 끝난 것으 로 생각했던 불레셋 사람들 처럼 우리는 금번 방북 소를 보내며 이제 이 땅에 어려움이 없고 통일 이루어지는 멋진 꿈을 꾼다. 우리들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소처럼 쓰임 받는 일군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궤를 찾는 기쁨을 준 것처럼 그리고 불레셋에 게는 어려움의 종식을 가져다 주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일꾼이 되자. 우리가 이땅의 통일을 위하여 희생하는 소가 되자.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일꾼을 찾으시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는 찾고,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요, 도저히 저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할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자를 찾으신다. 내 모습 (자아를 판단하는 동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하지 마시고 죽기(신의성품)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동반자가 되 자. 불레셋 땅의 각종 재앙을 싣고 갔던 암소처럼 금번 방북하는 소들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염원인 통일을 이루는 초석이 되는 "통일 소"가 되기를 바란다. 그 암소들은 가던 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뒤돌아보고 후 회없이 오직 한길 벧세메스로 떠났다고 했다. 이것이 신앙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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