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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정치의 매력 (삼상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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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말콤 머그리지(Malcolm Muggerige)는 백성들이 무정부 상태나 독재 정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좌파’ 독재든, ‘우파’ 독재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든 ‘법과 질서’가 있다는 사실은 없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하라!’ 혹은 ‘저것을 하라!’고 지시해 줄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생활의 안정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독재 정치가 사회의 무정부 상태와 혼란을 몰아내 줄 것처럼 보일 때에는 그런 독재 정치도 쌍수를 들고 환영합니다.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조약’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로 인해 고통 당하던 독일은 나찌즘과 아돌프 히틀러를 환영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찌즘은 비록 유대인과 동성연애자, 기탄 없이 말하는 성직자들을 박해하고 학살했지만, 사회 안정과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무신론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은 “죽느니 차라리 빨갱이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기주의와 생존은 원칙 포기의 강력한 동기들입니다. 어느 정도 질서 잡힌 세상에서 살기 위해 독일인들은 쉽사리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으며 나치 국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나쁜 것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매도하던 자유 사상가들이 공산주의를 세계의 불평등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상으로 환영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20세기 초엽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 당시 캔터베리의 학생감이었던 휄렛 존슨(Hewlett Johnson, 빨갱이 학생감이라는 별명이 붙음)같이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스탈린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선언하곤 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인류사에 거듭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재자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사시 시대의 이스라엘 상황은 무정부적이었습니다. (삿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경건한 사사들이 있을 때에는 그 땅이 태평 성대를 누렸습니다. 기드온이 사시로 있을 때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었지만, 그가 세습 군주제를 하나님의 통치에 유해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거부했다는 사실도 의미 심장합니다(삿8:23). 이러한 사실은 왕정에 대한 열망이 히브리 공화국 제도 및 사사들과 제사장들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에 사람들이 싫증을 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사실상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소리(8:1-9). 세습 군주제에 대한 갈망이 선지자 사무엘 자신에 의해 자극되었다는 사실은 슬픈 역설입니다. 늙은 나이에 그는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시로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사사 왕조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선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부당한 절차도 묵과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했으며 “이(利)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8:1-3). 가장 착한 사람이 가장 악한 아들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의 전임자 엘리와 타락한 그의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라마에 있는 사무엘 앞에 모여 왕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8:4-5). 그들은 백성 전체를 대표했음이 분명합니다(참조, 8:7), 그들은 온 백성이 변화를 바란다는 것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1. 장로들의 논거는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 논거는 사무엘이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논거는 그의 아들들이 그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8:5). 그들은 정치 권력의 계승을 염려했음이 분명합니다. 사무엘이 영원히 살수는 없을 것이며, 요엘과 아비야가 정부를 떠맡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염려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의 요구를 생각할 때, 하나님이나 그의 약속을 고려했다는 암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해진 그 어떤 불명예보다도 그들의 세속적인 이익의 손상을 더 못 견뎌했다. …그들이 왕을 요구한 데에는 더 적절한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불만족과 변화에의 충동, 그리고 외적 화려함에 대한 열망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억제되지 않을 경우, 그것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왕을 따를 것이다. 어떤 변화도 그런 마음 상태를 치유할 수 없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현재 상태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불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어떤 변화도 그런 마음 상태를 치유할 수 없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현재 상태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불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주는 위안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이런 이유를 대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결론은 그들의 생각이 세속적이었음을 확증해 줍니다. “열 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8:5). 이것은 신명기에 주어진 왕의 법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17:14-20), 하나님의 대답은 왕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신명기 17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은 그것이 그렇지 않음을 암시하며, 그들의 동기에 심각한 의문을 던집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의 나이가 많고 아들들이 악하다는 문제의 논리적인 해결책으로서 왕을 임명할 것을 제안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여호와를 향하여 장차 경건한 사사들을 세워 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기존의 신정 국가 통치 체제를 이제는 허락하지 않기로 하셨나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왕권 수립을 요구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요구를 자극한 것은 신앙적인 언어로 위장되고 세속적인 지혜의 독이 섞인 변화에의 끝없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열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다른 국가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효과적으로 조직된 현대적인 국가가 아닌가 그들은 그들의 왕에 의해 훌륭하게 인도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하나님의 국가이므로) 멋진 민족적인 삶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 이방 민족들을 전부 능가해야 하지 않을까
2. 사무엘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삼상8: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우리는 사무엘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상황에서 거부감을 느끼리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셈입니다1 그러나 이 선지자는 뛰어난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개인 감정보다 더 심오한 문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것은 우리가 도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예를 제공해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몸이 달아 있음을 사무엘은 알았고, 그들의 왕을 임명해 달라는 그들의 요는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의 반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곧 임했습니다(8:7-9)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엄숙하고도 유익한 대답이었습니다1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주된 요소들이 있습니다. 먼저,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8:7).
둘째,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못하게 함이니라.”(8:7)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후로 그들이 늘 행해 온 일일뿐이었습니다(8:8). 물론 이 말씀이 개인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사무엘에게 위로가 되었지만, 훨씬 더 심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을 허용하셨을 때,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승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마치 백성의 소리가 사실상 하나님의 목소리라도 되듯이 백성의 듯에 순순히 따르는 민주주의자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에 대해 하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즉, 그는 사무엘에게 (삼상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도록 허용하셨듯이, 이스라엘에도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목적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즉, 겸손케 하는 교훈을 주고 더 나아가서 그릇된 꿈의 재에서 참된 축복을 끄집어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8:1-018) 선지자 사무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들은 “왕을 구하는 백성”으로 지칭되었습니다(8:10). 고든(R . P. Gordon)은 여기에는 히브리 독자들이 놓쳐 버릴 수 없는 말의 유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구하는”(히브리어 SO,미alim 소알림)이라는 말은 사울(saul)-요청 받은 자) 왕의 이름의 어근으로 추정되는 사알(saal)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입니다.(8:11-17) 그들은 곧 그런 종류의 억압들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곳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 고대 근동에 있는 왕국들의 유명한 관습들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금 요구하고 잇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결국 왕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7장). 게다가 그는 이 일을 실현하는 것이 자기 뜻이라는 사실도 강조했습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왕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그러나 그 대가를 생각해 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그 대가는 엄청날 것입니다. 왕이 국가에 어느 정도나 유익을 가져다 줄지 몰라도, 그가 가져가는 것이 더 많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왕은 그들의 아들들과 딸들과 포도원, 그리고 그들의 곡식과 하인과 목축을 취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 자신도 취할 것입니다. 그들은 독재 군주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후에 판명되었듯이,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분열될 것임을 예고해 준 것은 바로 그런 노예 상태였습니다.(왕상12:1-20).
2.
둘째,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이것을 문서화하는 데 동의하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이 내린 결정의 악한 결과들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삼상8:18)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치 아니하시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고의로 무시하는 일의 결과를 진술하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갈 때, 응답된 기도의 위로를 몰수당하고 오직 죄의 악한 열매에만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케이크를 소유하거나 먹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배신을 눈감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행동 과정을 성찰할 때, 이 엄숙한 경고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며 돌아온 탕자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도 회개하고 새로운 믿음으로 다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전에는 영혼의 공허함이 있을 수 있고, 천국이 그들의 기도에 대한 가짜 응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너희에게 왕을 주고(8:19-22) 하나님의 명령과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했습니다. 그들에게 왕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1 그래서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엘은 여호와를 향해 다시 그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전의 말(8:7)을 반영하는 말로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에 왕을 임명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8:22).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루비콘 강을 건너 그들의 민족적인 삶을 영원히 뒤바꾸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군주정은 하나님의 백성의 후속사에 길고도 슬픈 그림자를 드리워 놓았습니다. 삼백 년이 지난 후,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이 제도에 대한 명패를 쓰시게 됩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호13:11).
그런데 그들이 원했던 왕은 나쁜 왕이었습니다. 결국 왕들은 그들을 실망시키고, 그들의 제거는 이 민족의 불사른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왕정, 특히 다윗의 인격 안에서의 왕정은 다른 왕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시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 시요, 주 중의 주이십니다. 그는 가지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는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구속자이십니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습니다. 그는 죄와 그 결과의 짐들을 씻어 버리십니다. 그는 회개와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맙시다. 그의 계시된 뜻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의 길처럼 매력적이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더 아름답고 시간과 영원의 시험을 견뎌 낼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삶, 즉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이런 일로 염려하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를 매일 돌보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은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는 부활의 권세와 영광으로 다스리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를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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