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 가리기 (삼상3:1-14)
본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모세와 견줄만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모세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해방시키고 가나안까지 이끌었다면 사무엘은 가나안에 입성하여 체제도 없이 살아가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견고히 세운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의 어린 시절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비추어 줍니다. 이스라엘의 나라안팎 사정은 한마디로 암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토속우상신앙과 교묘하게 뒤섞여 사람들은 우상숭배로 돌아서거나,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버려두셨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떠나자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이웃나라의 압정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왕은 아직 없었고, 그나마 나라의 위기 때마다 나타나 민족을 구했던 사사마저도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라도 제구실을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을 성경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상3: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 루트를 통해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가려듣고 백성를 인도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의무는 제사장 엘리의 몫이었으나, 엘리는 이 사명을 감당할 그릇이 못되었던 것같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일에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성경은 불량자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2:12에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드릴 고기를 빼앗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엘리는 단호하게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엘리의 부정축재와 기준 없는 신앙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엘리는 얼마나 살이 쪘었는지 그가 최후를 맞을 때에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아들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저는 아직도 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얼마나 살이 쪘으면 의자에서 넘어졌는데 목이 부러졌을까 일부러 목이 부러지라고 의자에서 넘어진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일텐데. 민족의 영적 아버지인 엘리의 신앙형편이 이러했으니 나라꼴이 오죽했겠습니까 사무엘은 바로 이런 나라를 위해 믿음으로 일어나 일생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과 국가안보, 나라의 체제정비까지 책임졌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엘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후, 사무엘은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첫 번으로 한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대로 멀어진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불러 모아 실시한 금식 대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민족 바로 세우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가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살고 있던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시노릇을 했는데, 추수할 때쯤이면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해 가는 강도짓을 일삼아 왔습니다. 이 블레셋이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회개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왔습니다. 일부러 그 때를 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노렸습니다. 블레셋에 대항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의 기습인지라 앉아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때아닌 우뢰를 내리셔서 블레셋군을 어지럽혀 패주시키시고 맙니다. 이런 블레싯을 뒤쫒아 벧갈까지 추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당시의 승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 이후로 사무엘 생전엔 이방인의 압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주 있었습니다.
그 이후 사무엘은 자기 손으로 왕을 세워 나라의 체제정비까지 마쳐놓고는 성군 다윗에게 나라를 맡깁니다. 이렇게 꺼져가는 이스라엘에 생명의 호흡을 이어줬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실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을 고치기는 새로 만들기보다 어려운 법인데, 사무엘은 다 무너져가던 이스라엘을 바로 세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는가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된 신앙지도록 전수도 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물어봄직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해답은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보통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이”라 부를 때는 12세 이전의 나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 사무엘의 모습을 “아이 사무엘”이라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사무엘의 나이는 10-12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런 사무엘이 하루종일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전 안에 누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가 부르는 줄로 알았습니다. 달려갑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엘리가 대답합다. ‘나는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거라’ 머리를 갸우뚱하며 사무엘이 돌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벌떡 일어나 다시 엘리에게로 달려갑니다. “부르셨기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 ” “아니다. 부른 적 없으니다시 가서 자거라” 다시 돌아옵니다 왠만한 소리면 이젠 속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눕습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번엔 진짜라고 생각하며 엘리에게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제서야 둔한 엘리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깨닫고 이렇게 일어줍니다. ‘이번엔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이렇게 대답하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알겠느냐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음성이 들리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시는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문이 가는 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두 번씩이나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하지 못하자 이런 사무엘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상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니 여러분, 사무엘은 젖떼자마자 성전에 드려진 아이였습니다. 지금의 사무엘의 나이가 10살 전후인 것을 생각하면 10여년 가까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니요 게다가 요즘 아이들이 교회학교를 다니면서 10년을 지나는 것과는 질이 틀립니다. 요즘은 주일학교 교육이래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 주일에 한 번 교회 나와서 두세시간있으면 많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아이들 머리가 좋아져서인지 어른들보다 성경이야기에 대해서는 월등합니다. 허나 사무엘은 한두 시간 교육받고 집에 가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루의 눈을 뜨고 하루종인을 제사장의 시중을 들며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역사에 대하여, 듣고 듣고 또 듣고, 익히고 익히고 또 익히면서 살아온 세월이 10여년이란 얘기입니다. 아무리 아이라 해도 그 정도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빠삭하지 않겠습니까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런데 모르다니요 하나님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니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씀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있었으나 전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훤합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친밀한 대화는 경험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점이 바로 현대교인들의 맹점입니다. 봇물 같은 말씀의 홍수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서점에 들러 보십시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이 즐비합니다. 라디오 채널도 고정만 시키면 찬양과 간증, 설교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면 직접 말쓰을 듣는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이젠 케이블 TV도 생겨서 하루종일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 속에 빠져들 수 있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풍요로움 속에서 상대적으로 말씀 한마디 하나디에 마음의 귀를 쏟는 간절함이 무디어져서 입니까 그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사랑의 말씀을 들어도 맹숭맹숭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말씀에도 눈물샘이 마른지 오래입니다. 소망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자리한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걱정은 여전히 걱정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때론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꿈이 아니더라도, 환상이 없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가릴 수만 있다면, 들을 귀가 있다면 됩니다. 나의 삶속에서 “아 이거다! 이것이 나의 말씀이다!” 확신과 함께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연다면, 때론 기도 속에서도 아침햇살 받아 피어나는 자그마한 꽃 한 송이에서도, 내가 오늘 만날 사업상의 상대자에게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올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나의 말씀이요, 나를 살리는 힘이요, 미래를 여는 문입니다. 사무엘에게는 그 날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가려듣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엔 엘리집안의 미래를 말씀하셨지만, 차차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빚으실 때에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어떤 재능과 성품으로 만드셨는지, 그래서 난 평생을 무엇을 바로보고 걸어야 하는지 하는 자기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신의 됨됨이를 확연히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은 삶의 든든한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자신감과 의욕이 생기고, 방황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지나며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을 합니다. 이유야 이성친구, 성적, 외모 등등 여러 가지로 드러나지만, 사실 그 모든 갈등의 핵심은 자거정체를 찾지 못한 자아의 갈등이 문에입니다. 못생겼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유일한 모습을 찾은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럼 모습은 외모의 수려함보다 더 보기 좋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뚜렷한 아이들은 이성친구와의 결별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사치한 갈등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사람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물론 아픔이야 있겠지만, 더 잘 조화가 되는 사람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믿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갈 길이 뚜렷한 친구들은 성적의 결과보다는 공부하는 내용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입시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생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지식의 자료를 쌓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깊이가 있고, 흥미도 있으며, 타의에 의한 공부이기보다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입니다.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가리기를, 무엇보다도 그것부터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어단어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영어실력이야 잘해도 태평야밖에는 못 건너지만, 하나님 음성 가리기는 뛰어넘지 못하는 장벽이 없습니다. 수학공식이야 삶의 몇가지 문제를 풀어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음성 가리기는 못 풀어낼 삶의 문제들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 음성 가리기를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곳입니다. 요즘은 교회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보다는 믿음의 지체들이 하나로 이루어진 영적인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심하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인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라고도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의 중요성이 퇴색되어 우스운 건물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우리의 영혼의 보금자리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에 시무하던 교회의 학생회 부회장 아이가 신앙이 좋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꼭 교회에 들러서 기도를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기도도 인사치레의 기도가 아니고 열심 있는 기도를 드리더니, 몇 달 후에는 꽤 많은 아이들이 하교를 교회로 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학생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아이들의 학교성적도 향상됩니다. 언니들인 청년들도 하나씩 둘씩 출퇴근을 교회로 하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 자기 찾기를 하는 자녀들의 앞날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지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 하십시오.
2.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면서도 복권 사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복권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꼭 당첨될 것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복권에 목숨거는 사람은 바보죠. 그만큼 확률이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면 장땡이고, 안되면 그까짓것 하지”이런 마음으로 복권을 삽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리면서도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는 게 문젭니다. “들으실까, 뭐 들으시면 다행이고 안 들으시면 할 수 없지”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된 우리들의 푸념하는 소리까지 들으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복권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의지하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푸녀하는 소리까지도 들으십니다. 혹 생활이 너무 견디기 힘드어 아무 기도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성전에 끓어 엎디어 “음, 음” 신음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3. 주의 종의 말을 들으십시오. 엘리제사장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날라리 제사장”입니다. 덕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으며, 그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성전을 우습게 만든, 비난받아 마땅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그를 통해 사무엘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비록 주의 종이 자격이 현격하게 부족하다고 여겨지실지라도, 그 자격여하를 무론하고 주의 종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 종의 자격보다는 자신이 세우신 권위로 종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자격에 순종하지 마시고, 주의 종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주의 종으로서의 자격이 빵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 잠 많은 어린 시절에 곤하게 누웠다가 제사장께서 부르시는 줄 알고 자다가도 세 번씩이나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아무리 어리지만 성전 안에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은 눈치만 봐도 알 수 있었을텐데도, 하나님 안에서 엘리를 섬기는 사무엘의 마음자세는 전혀 신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무렝에게 엘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듣는 귀를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 들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상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이시대의 위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버려두셨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떠나자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이웃나라의 압정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왕은 아직 없었고, 그나마 나라의 위기 때마다 나타나 민족을 구했던 사사마저도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라도 제구실을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의 암울했던 상황을 성경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상3: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위로를 받고 새힘을 얻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 루트를 통해 말씀하셨고 지금도 계속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가려듣고 백성를 인도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의무는 제사장 엘리의 몫이었으나, 엘리는 이 사명을 감당할 그릇이 못되었던 것같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일에 기준이 없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을 성경은 불량자라고 낙인을 찍었습니다.
2:12에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드릴 고기를 빼앗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는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엘리는 단호하게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엘리의 부정축재와 기준 없는 신앙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고 책망하십니다. 엘리는 얼마나 살이 쪘었는지 그가 최후를 맞을 때에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아들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저는 아직도 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얼마나 살이 쪘으면 의자에서 넘어졌는데 목이 부러졌을까 일부러 목이 부러지라고 의자에서 넘어진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일텐데. 민족의 영적 아버지인 엘리의 신앙형편이 이러했으니 나라꼴이 오죽했겠습니까 사무엘은 바로 이런 나라를 위해 믿음으로 일어나 일생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앙과 국가안보, 나라의 체제정비까지 책임졌던 위대한 인물입니다. 엘리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후, 사무엘은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첫 번으로 한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대로 멀어진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불러 모아 실시한 금식 대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민족 바로 세우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가들로부터 끊임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살고 있던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시노릇을 했는데, 추수할 때쯤이면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해 가는 강도짓을 일삼아 왔습니다. 이 블레셋이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으고 회개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 왔습니다. 일부러 그 때를 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노렸습니다. 블레셋에 대항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의 기습인지라 앉아서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때아닌 우뢰를 내리셔서 블레셋군을 어지럽혀 패주시키시고 맙니다. 이런 블레싯을 뒤쫒아 벧갈까지 추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는데, 당시의 승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 이후로 사무엘 생전엔 이방인의 압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주 있었습니다.
그 이후 사무엘은 자기 손으로 왕을 세워 나라의 체제정비까지 마쳐놓고는 성군 다윗에게 나라를 맡깁니다. 이렇게 꺼져가는 이스라엘에 생명의 호흡을 이어줬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실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을 고치기는 새로 만들기보다 어려운 법인데, 사무엘은 다 무너져가던 이스라엘을 바로 세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사무엘이 어떻게 그런 놀라운 역사를 이룰 수 있었는가 열악한 환경과, 제대로 된 신앙지도록 전수도 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물어봄직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해답은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보통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이”라 부를 때는 12세 이전의 나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1절에 사무엘의 모습을 “아이 사무엘”이라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사무엘의 나이는 10-12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런 사무엘이 하루종일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전 안에 누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가 부르는 줄로 알았습니다. 달려갑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 엘리가 대답합다. ‘나는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거라’ 머리를 갸우뚱하며 사무엘이 돌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부르십니다. 벌떡 일어나 다시 엘리에게로 달려갑니다. “부르셨기로 제가 여기 있습니다. ” “아니다. 부른 적 없으니다시 가서 자거라” 다시 돌아옵니다 왠만한 소리면 이젠 속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눕습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번엔 진짜라고 생각하며 엘리에게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그제서야 둔한 엘리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깨닫고 이렇게 일어줍니다. ‘이번엔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이렇게 대답하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알겠느냐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음성이 들리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하시는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문이 가는 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두 번씩이나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하지 못하자 이런 사무엘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상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니 여러분, 사무엘은 젖떼자마자 성전에 드려진 아이였습니다. 지금의 사무엘의 나이가 10살 전후인 것을 생각하면 10여년 가까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니요 게다가 요즘 아이들이 교회학교를 다니면서 10년을 지나는 것과는 질이 틀립니다. 요즘은 주일학교 교육이래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 주일에 한 번 교회 나와서 두세시간있으면 많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아이들 머리가 좋아져서인지 어른들보다 성경이야기에 대해서는 월등합니다. 허나 사무엘은 한두 시간 교육받고 집에 가는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루의 눈을 뜨고 하루종인을 제사장의 시중을 들며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역사에 대하여, 듣고 듣고 또 듣고, 익히고 익히고 또 익히면서 살아온 세월이 10여년이란 얘기입니다. 아무리 아이라 해도 그 정도면 어느 정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빠삭하지 않겠습니까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런데 모르다니요 하나님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니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이 말씀은 사무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은 있었으나 전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훤합니다. 하지만 그분과의 친밀한 대화는 경험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점이 바로 현대교인들의 맹점입니다. 봇물 같은 말씀의 홍수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서점에 들러 보십시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집이 즐비합니다. 라디오 채널도 고정만 시키면 찬양과 간증, 설교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하면 직접 말쓰을 듣는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이젠 케이블 TV도 생겨서 하루종일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 속에 빠져들 수 있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풍요로움 속에서 상대적으로 말씀 한마디 하나디에 마음의 귀를 쏟는 간절함이 무디어져서 입니까 그 속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습니다. 사랑의 말씀을 들어도 맹숭맹숭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말씀에도 눈물샘이 마른지 오래입니다. 소망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에 자리한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걱정은 여전히 걱정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때론 꿈이나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꿈이 아니더라도, 환상이 없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가릴 수만 있다면, 들을 귀가 있다면 됩니다. 나의 삶속에서 “아 이거다! 이것이 나의 말씀이다!” 확신과 함께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연다면, 때론 기도 속에서도 아침햇살 받아 피어나는 자그마한 꽃 한 송이에서도, 내가 오늘 만날 사업상의 상대자에게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올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나의 말씀이요, 나를 살리는 힘이요, 미래를 여는 문입니다. 사무엘에게는 그 날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가려듣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엔 엘리집안의 미래를 말씀하셨지만, 차차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빚으실 때에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어떤 재능과 성품으로 만드셨는지, 그래서 난 평생을 무엇을 바로보고 걸어야 하는지 하는 자기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신의 됨됨이를 확연히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생을 통해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아는 것은 삶의 든든한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자신감과 의욕이 생기고, 방황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지나며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을 합니다. 이유야 이성친구, 성적, 외모 등등 여러 가지로 드러나지만, 사실 그 모든 갈등의 핵심은 자거정체를 찾지 못한 자아의 갈등이 문에입니다. 못생겼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주신 유일한 모습을 찾은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럼 모습은 외모의 수려함보다 더 보기 좋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가 뚜렷한 아이들은 이성친구와의 결별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사치한 갈등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사람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물론 아픔이야 있겠지만, 더 잘 조화가 되는 사람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믿습니다. 또 하나님 안에서 자기의 갈 길이 뚜렷한 친구들은 성적의 결과보다는 공부하는 내용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입시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생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지식의 자료를 쌓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깊이가 있고, 흥미도 있으며, 타의에 의한 공부이기보다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입니다.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가리기를, 무엇보다도 그것부터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어단어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영어실력이야 잘해도 태평야밖에는 못 건너지만, 하나님 음성 가리기는 뛰어넘지 못하는 장벽이 없습니다. 수학공식이야 삶의 몇가지 문제를 풀어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음성 가리기는 못 풀어낼 삶의 문제들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 음성 가리기를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께서 눈여겨 보시는 곳입니다. 요즘은 교회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보다는 믿음의 지체들이 하나로 이루어진 영적인 교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심하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인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라고도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래서 상대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의 중요성이 퇴색되어 우스운 건물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습니다. 적어도 교회는 우리의 영혼의 보금자리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시절에 시무하던 교회의 학생회 부회장 아이가 신앙이 좋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이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꼭 교회에 들러서 기도를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 기도도 인사치레의 기도가 아니고 열심 있는 기도를 드리더니, 몇 달 후에는 꽤 많은 아이들이 하교를 교회로 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학생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아이들의 학교성적도 향상됩니다. 언니들인 청년들도 하나씩 둘씩 출퇴근을 교회로 하더니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봤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진지한 대화 속에서 자기 찾기를 하는 자녀들의 앞날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지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하나님의 집을 가까이 하십시오.
2.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기도를 하면서도 복권 사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복권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꼭 당첨될 것이라고 믿고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복권에 목숨거는 사람은 바보죠. 그만큼 확률이 어렵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면 장땡이고, 안되면 그까짓것 하지”이런 마음으로 복권을 삽니다.
그런데 기도를 드리면서도 이런 마음으로 드린다는 게 문젭니다. “들으실까, 뭐 들으시면 다행이고 안 들으시면 할 수 없지”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된 우리들의 푸념하는 소리까지 들으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복권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의지하는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푸녀하는 소리까지도 들으십니다. 혹 생활이 너무 견디기 힘드어 아무 기도도 할 수 없어서 그저 성전에 끓어 엎디어 “음, 음” 신음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3. 주의 종의 말을 들으십시오. 엘리제사장을 한마디로 속되게 표현한다면 “날라리 제사장”입니다. 덕도 없었고, 능력도 없었으며, 그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성전을 우습게 만든, 비난받아 마땅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그를 통해 사무엘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비록 주의 종이 자격이 현격하게 부족하다고 여겨지실지라도, 그 자격여하를 무론하고 주의 종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 종의 자격보다는 자신이 세우신 권위로 종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자격에 순종하지 마시고, 주의 종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주의 종으로서의 자격이 빵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 잠 많은 어린 시절에 곤하게 누웠다가 제사장께서 부르시는 줄 알고 자다가도 세 번씩이나 달려가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아무리 어리지만 성전 안에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은 눈치만 봐도 알 수 있었을텐데도, 하나님 안에서 엘리를 섬기는 사무엘의 마음자세는 전혀 신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무렝에게 엘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듣는 귀를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 들으며 그 안에서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상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이시대의 위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