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사울왕의 죽음 (삼상31:1-13)

본문

우리는 지난 주에 사무엘상 31장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직분을 받고 그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어떤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는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또한 사울왕을 통해 우리 교회의 모습을 조명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과 능력들을 가지고 자만할 때 그리고 자기 만족 속에 빠져 있을 때 교회는 이미 죽어가고 있고 결과적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음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서 한 절 한 절 속에 있는 내용들을 함께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31장의 배경은 이미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블레셋의 공격 앞에 이스라엘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과 그 가문이 완전히 다 진멸을 당했고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군대가 블레셋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패전을 접한 모든 성읍 사람들은 다 도망을 쳤고 그래서 많은 성읍들이 블레셋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와 같은 상황 가운데 사울의 시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발견이 되어서 갈갈이 찢겨져 그들의 승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체를 성벽에다 못으로 박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이렇게 우리 손에 죽임을 당했노라고 승전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우리는 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의해 처참하게 패망 당하는가,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니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앞에서 도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보아 산에서 엎드려져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할 때 30장에 나왔던 다윗의 모습과 한번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0장에 보면 다윗과 그를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은 아말렉의 기습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공격을 받는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준비하고 전쟁을 합니다. 진영을 갖추고 전장에 나가서 싸우다 패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의 부름을 받아 아기스한테 갔다 오는 동안에 아말렉이 쳐들어 와 싹 잡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 같이 공격을 받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다윗이 당한 공격이 더 비극적이에요. 손 한번 못 써보고 처자식과 재산을 다 빼앗긴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울 기력이 없을 만큼 울었다고 3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습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해 볼 때 그 나타난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다윗은 완전히 회복을 합니다. 가서 다 찾아오고 잃었던 처자식과 재산보다도 더 많이 갖고 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비록 똑 같이 공격을 당하고, 오히려 다윗이 더 야비한 공격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다윗은 주께로 돌아섭니다.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 차이입니다. 다윗이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다가도 그 슬픔과 좌절 속에 자기를 묻어버리지 않고 그 슬픔과 좌절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울왕은 이 좌절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울왕은 계속적으로 기회를 얻고 있지만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그는 멸망으로 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도 사울왕도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방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기스에게 가서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청했을 때,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가운데 살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하고 살려 했을 때, 그도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고 했지요. 사울왕도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 대로 왕권을 휘두르고 자기 능력과 권세만을 믿고 살 때에 블레셋의 공격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을 치매.” 왜 칩니까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보호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렇게 공격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윗이 왜 공격을 받습니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어려움을 당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교회가 왜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만큼 어려움을 당합니까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교회가 불이 나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다른 곳은 불이 날지라도 교회가 왜 불이 나느냐” 여러분,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이 다 당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렇게 당합니까 거기엔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데 하나님이 심심해서 건드려보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왜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에 의해 비극적인 패전을 맛보는가 그동안 사무엘상을 통해 사울왕의 전적을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기회와 수많은 권면이 주어지지만 그는 끝내 돌이키질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은 이방인의 손에 삼킴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징계와 채찍을 드십니다.
그런데 그 징계와 채찍을 누구를 통해서 드시느냐 하면 이방인을 통해 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망신을 당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공격을 받아서 패전으로 기울어질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복해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계속 강조된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시려고 작정하실 때까지는 수많은 기회를 주셨죠.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실수를 합니까 몇 번이나 거역을 합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돌이키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아말렉이 쳐들어 와서 자기가 없는 사이에 사랑하는 처자식을 다 잡아갔을 때 실컷 울다가 깨닫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아기스에게 왔다가 이렇게 당하는구나”고 깨닫고는, 바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바로 추격하지 않고 “하나님, 제가 따라가야 됩니까, 가지 말아야 됩니까 그리고 따라가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그 절박한 순간에 그는 묻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그는 하나도 잃지 않고 다 회복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집 대로 방법 대로 살아갈 때에 잘되다가 안 될 때, 그때 어떻게 해보려고 몸부림치며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고 조용히 한번 무릎을 꿇어보십시오. 급하고 절망적일수록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어찌해야 되겠습니까”하고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울의 모습을 보면 ”사울이 패전하매 활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울왕이 전쟁터에 나가면서 상당히 권위주의로 나갑니다. 무얼 보고 아느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사울은 전쟁터에 나가면서 왕관까지 쓰고 나갔습니다. 그러니 블레셋 사람들이 전략을 세우길, 졸병들은 건드릴 필요도 없이 저 왕관 쓴 왕과 그 아들들을 집중공격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모든 전력을 다해 그곳을 집중공격하니까 사울왕은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을 칩니다. 왕이 도망을 치니 나머지 군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사무엘하 1장에 보면 아말렉 소년이 사울왕의 왕관을 갖고 와서 내가 죽였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기록이 나옵니다만, 왕관까지 쓰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사울왕이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사울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중상을 입고 도망치다 생각하니 이젠 희망이 없어요. 이스라엘 군대는 패전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도망칠 기력도 없고 자기를 보호하는 경호대원도 전위병도 몇명 남아있지 않아요. 자기 생명도 가능성이 없고 전쟁도 가능성이 없고 그래서 생각하기를 “이제 내가 이대로 가다가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겠구나”하고, 옆에 있는 경호원에게 “네가 나를 죽여라. 적군에게 죽느니 네가 나를 죽여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이 경호원이 왕을 죽인다는 것이 두려워서 망설이니까 자기가 칼을 세워 놓고 그 위에 엎어져 자살을 하고 맙니다. 그 곁에 있던 경호원이 자기가 섬기는 왕이 죽으니까 자기도 똑 같은 방법으로 자결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사나이다운 모습으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성경에서는 죄인의 모습, 추하고 악한 인간의 모습으로 기록을 합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느냐 사울왕을 보세요.
사울왕을 하나님이 죽이는 데 있어서도 방법이 여러가지 있었겠지요. 화살에 맞아 그냥 죽을 수도 있고 적군의 단칼에 죽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것도 참으로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지막 순간, 육체의 생명이 사라지는 순간이라도 “주여, 내 일생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내 일생 하나님 앞에 불충하고 살았습니다. 내 육신 이제 죽습니다. 하오나 하나님, 내 영혼을 구해주옵소서.”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할 때 우편의 강도처럼 “주여 내 일생 강도질하고 살다가 마지막 사형으로 죽임을 당하나, 주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하고 기도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 아니겠습니까 화살에 맞아 생명이 꺼져가는 그 순간 사울왕이 할 수 있었던 기도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내 일생을 내 고집 내 방법, 교만으로 살다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여, 육신은 죽지만 내 영혼을 거두어 주소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건만 사울왕은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체면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적군의 손에 죽었다고 하면 후대에 역사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그런 꼴 당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 아니었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종종 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을 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시험에 들고 문제가 생겨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 아주 타락해 버리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평생 시험들어 타락했던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주의 종을 불러서는 “목사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면서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비록 일생 동안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그 영혼을 부탁하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비록 아버지 곁을 떠나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와 같은 아들일지라도 그저 그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맨발로 쫓아나가서 그 아들을 부둥켜 안고 데리고 들어와서 잔치를 베풀고 자식으로서의 권한과 자격을 다시 부여하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불순종하고 패역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매맞는 자리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 순간이라도 회개하는 우리를 기쁘게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나님 앞에 못 내어 놓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 난 이런 죄를 지어서 도저히 회개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갈 자격이 없습니다. 내 입을 벌려 ‘아버지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할 정도의 그런 죄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말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그분이 용서 못할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 사이에는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 안 되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용서해 주시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울왕처럼 패역해서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그때라도 “아버지여 나를 용서하소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것이 또한 주의 은혜라는 것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2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에게 중상을 입혀 결국은 죽게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여전도회원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공격합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를 쓰러뜨리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대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탄은 오늘도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교회를 공격합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이 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들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사탄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공격하는 데 있어서도 전략이 있습니다. 아말렉은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주 집중적으로 사울왕과 그 아들들을 공격했습니다. 오늘도 사탄이 여러분들의 가정을 공격할 때 집중적으로 누구를 공격하는가 보세요. 이것은 물어 보나 마나 뻔한 겁니다. 그리고 또 이 강성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려고 몸부림칠 때, 하나님의 뜻 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칠 때 이 교회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사탄이 누구를 더 집중적으로 공격합니까 목사가 당하는 것이 더 치명적임을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어떻게 라도 이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먼저 이 철호 목사를 집중공격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사탄은 갖은 방법으로 목사를 화나게 하고자 성도들을 통해서 마음 아픈 이야기를 자꾸 들려줍니다. 그러면 설교시간에 그 감정이 섞여서 나가요.
설교에 쓴물이 나가는 거에요. 그러니 주일날 시원한 생수를 마셔야 할 여러분이 쓴물을 마시니 기분이 어때요 기분이 언짢아지지요. 그래서 설교 듣다가 생각하지요. “목사가 또 때리는구나. 나 들으라고 하는구나.” 사실 나 들으라고 하는 것은 은혜인데, 그러나 목사가 감정이 개입되어 설교할 때 당하는 여러분의 상처와 그렇지 않고 목사가 감정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하나님 말씀 대로 증거할 때 여러분이 당하는 상처와는 분명히 다르지요. 그러면 교인들이 시험들어요. 교회 분위기가 꼭 흉가집 같이 살벌하고 교인들끼리도 서로 삐쭉빼쭉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들을 교회가 도저히 해낼 수 없어요. 사명이 모두 뒷전으로 밀려나는 거지요. 목사 하나 쓰러지면 교인들은 다 뿔뿔히 흩어지는 것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만 됩니다. 이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이 정말 저를 잘 지켜주셔야 됩니다. 저 하나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가 사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이 바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는 길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가장 하나만 쓰러지면 그 가정은 파탄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전도회원 여러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이 오늘도 바로 여러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남전도회원 여러분들은 날마다 깨어서 기도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도 보면 남전도회원들이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무시고 계시고, 여전도회원들도 보면 함께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가정에 문제가 많아질 수 밖에요. 지금 사탄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까 남자분들은 깨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8절에 “남자들이여 너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부인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복과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믿음의 가정이 되기 위해서 남자들이 손을 들고 기도해야 되는 거에요. 그리고 부인들은 남편들이 그렇게 하도록 옆에서 잘 도와드려야 합니다. 은혜 좀 받고 기도하려고 하면 옆에서 소방수 노릇해서 남편들 신앙을 그만 죽여 놓고 말아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은혜를 주셔서 신앙생활 좀 제대로 하려고 하면 갖은 말로 시험들게 하고 엉뚱한 짓 해서 실족시켜 놓고 나서는 눈물은 또 혼자 흘려요.
여러분, 잘 보셔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탄이 우리 가정에서 누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는가 가장을 잘 감싸줘야 합니다. 그러니 들어서 유익하지 못하며 신경써야 될 말은 들려 줄 필요 없어요. 집안 이야기, 재정문제, 교회 이야기, 마구 들려주면, 피곤해서 들어온 남편에게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 그 남편이 교회 나가고 싶은 마음 생기겠어요 남편이 기도할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줘야 그 가정이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신실한 가정이 되지 않겠어요 오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될 것은 사울왕의 패전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향입니다. 사울왕이 패전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과 또 이스라엘 군사들이 도망쳤다는 소문이 퍼지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성읍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성읍들에 거하게 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의 실패는 모두의 실패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교회에서 목사가 실패하면 그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고, 또 가정에서 가장이 실패하면 그 영향은 모든 식구들에게 미치게 됩니다. 남편이 타락하고 범죄하고 불순종하면 그 영향이 그 가정에 다 돌아갑니다. 본문에 기록된 요나단의 죽음을 보십시오. 요나단은 신실한 아들이었고 깨어있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잘못되어 나갈 때 눈물로 간곡히 아버지를 붙잡으려 노력했던 아들이에요.
그런데 오늘 같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요나단이 죄가 있어 죽음을 당하는 게 아니에요. 그 부모의 실패가 자식들에게까지 실패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아들 요나단이 죽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따랐던 많은 백성들까지도 죽게 되었고, 그리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도망쳐서 자기들의 본거지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맡은 자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각 구역에서는 구역장과 인도자들과 권찰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구역에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들이 실패하며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 영향이 많은 성도들에게 미쳐서 교회가 황무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직분자들이 실패하므로 나타나는 결과가 곧 연약한 성도들의 시험입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신앙의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연약한 자를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겠다. 연약한 자를 위해서 내가 믿음과 순종과 능력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내가 절제하겠다.” 사울왕이 죽임을 당하는 것, 그것이 그냥 혼자만의 일로 끝난다면 별 문제가 없어요. 오늘 목사, 장로, 집사, 구역장, 인도자들이 자기의 신앙생활가지고 갈등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영향력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점에 있어 조심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직분 감당 못하며 살고 있을 때에 그 실패의 결과가 나와 내 가정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비극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직분자로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나의 신앙생활이 주변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는지, 나 때문에 저들이 신앙에 타격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자신은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시키는 자는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닷물 속에 잠기는 게 낫다”고 했어요.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 생명을 실족시키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 건지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은 주일을 온전히 지키라고 했으면 온전히 지켜야지요. 그것 하나 순종 못하면서 앞으로 무엇을 순종하겠습니까 거짓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내나름 대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다고, 신앙생활 잘한다고 만족하거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분명히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여러분, 사랑한다면 행동이 나옵니다. 표현이 있습니다. 전부 다 자신의 임의 대로, 편한 대로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직분자들은 더욱더 겸손해야 합니다. 각 기관 회장님들 한 기관을 1년 동안 맡았으니 그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겠습니까 어찌 깨어서 기도하지 않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회장님들, 철야기도에 얼굴 한번 구경하기 힘든다면 이것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직분 맡은 사울왕의 패전이 이스라엘 전체에 비극을 맛보게 했던 것처럼, 오늘 이 교회에서 목사가 쓰러지면 우리 교회 전체가 마음으로 상처를 받는 것처럼 직분자들이 실패하면 그 직분자들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아픔을 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3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