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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미래 (삼상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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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극심한 좌절과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극적으로 가장 큰 영적 축복으로 바뀌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탄식했습니다(그에게는 영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생각이 이토록 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습니다.”(눅18:13-14) 우리는 이 말이 죄짐에서 벗어난 영혼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새로운 노래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도 이런 일은 가끔 일어납니다. 건너야 할 강이 있고 견뎌야 할 시련이 있지만, 하나님은 비록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해도,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오리라고 우리에게 확신시키십니다(시30:5).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려운 때의 그림자나 개인적인 실패의 흐릿함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훨씬 더 달콤합니다. 그러나 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정반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으로 둘러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며 미래를 약속해 주신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의심이 생기고 미래가 걱정되며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과거에 우리를 향한 그의 은혜의 실제를 믿지 못하기라도 하듯이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갑작스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의 유형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또 천박한 감정적인 신앙 표출에 의해 그 동안 위장되어 왔던 회개하지 않은 죄라는 감정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것은 몸의 화학작용이나 신체적 피로와 같은 평범한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다윗의 경우가 그랬던 것으로 여겨지듯이, 그것은 마음을 짓누르며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로와 기쁨을 깨끗이 지워 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의 압박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꾸준히 간직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계속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0-21장에서, 사울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그의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라마에서 그의 영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심으로써, 19:23-24)그의 은총으로 다윗을 방패처럼 두르시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다윗이 사울의 악한 음모에 의해 꺾여 버릴 수는 없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것이 다윗을 소위 ‘영적인 가시’로부터 지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에게서 도망칠 때, 그는 다소간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영웅으로 부상하기까지 그의 일부였던 조용한 확신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이 기사는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말로 시작해서 그가 자발적으로 갓으로 망명했다는 말로 끝납니다. 그의 도피 과정에는 두 개의 국면이 있습니다. 첫 번째 국면은 그가 친구 요나단을 방문하여 나흘간 그와 함께 머문 일이고(20:1-42), 두 번째 국면은 그 무렵 실로 에서 놉으로 옮겨온 장막에서 시무 하던 제사장 아히멜렉을 방문한 일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20:1-42)
1. 첫째날-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음(20:1-23) 다윗은 사무엘의 곁을 떠나 요나단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가능하다면 그의 도움을 받아 사울과 화해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호소하듯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데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20:1). 이것은 어느 시대든 불의의 희생자들이 외치는 절규입니다. 합리적인 설명 비슷한 것만 들어도 박해 당하는 사람은 힘을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간과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까닭 없는 적의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에 대해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가 의심과 두려움에 떨며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다셨던 것을 보면, 그는 후일 노년기에 접어들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대 간직했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이 때는 아직 간직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3:5-6) 요나단의 대답은 다윗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가 최근에 바뀐 것을 그가 아직 몰랐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사울이 자기에게 알리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윗의 말을 믿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다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말이 절대로 옳다는 것을 맹세까지 해 가면서 다짐했습니다. (삼상20: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 ” 요나단은 다윗에게 무엇이든 필요한 일을 도와주겠다고 자신 있게 약속했습니다(20:2-4).
1) 다윗은 요나단에게 사울의 의도를 알아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20:5-11). 그 다음날 “월삭”이었습니다. 월삭은 매월 첫 번째 안식일에 거행되던 종교적 국민적인 축제였습니다(민10:10 ; 28:11-15 ; 왕하4:23 ; 사1:13 ; 암8:5). 그리고 다윗은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사울의 식탁에 앉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이 식사 때 자기가 자리에 없는 것을 알아채고 묻거든 자기를 위해 변명 좀 해 달라고 요나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가 제공한 구실은 다윗이 “온 가족을 위하여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20:6). 베들레헴으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구실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가 없는 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알기 위해 가까운 곳에 머물 작정이었습니다.
2)요나단은 세 가지로 응답했습니다(20:12-23)
첫째, 그는 다윗에게 사울의 의향을 솔직하게 전하여 사울이 그를 죽일 의향이 있을 경우,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20:12-13)
둘째,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을 멸하실 것임을 시인했습니다(20:13-17). 이 말에는 사울이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리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축복하는 방식을 보면 그의 확신의 근거, 따라서 그가 자기 아버지보다는 오히려 다윗에게 더 충성한 이유가 다윗이 진실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며, 사울의 후계자로 선택된 사람이라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 요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20:15). 다윗이 이에 동의하고 그들은 서로 엄숙한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 언약을 지켰으며, 그것은 참된 우정의 훌륭한 증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이 언약을 쉽게 위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의 다윗은 요나단의 세력 하에 있었고, 후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의 세력 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삼하9:1). 그러나 그들은 단 한번도 서로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셋째, 요나단은 화살을 쏘아서 남몰래 신호를 보내어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겠다는 실제적인 제안도 했습니다(20:18-23).
2. 둘째 날-아무 말도 하지 않음(20:24-26) 다윗이 월삭에 나타나지 않자, 사울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는 그가 참석하지 못한 데에는 어떤 의식적인 불결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3. 셋째날,-사울의 분노(20:27-34) 축제
둘째 날에 사울은 다윗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이 요구한 대로 대답하고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을 자기가 허락했다는 뜻으로 말하자, 사울은 요나단을 비난하면서 다윗을 사형에 처할 테니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윗과 우정이 돈독했던 요나단은 항의하면서 사울의 창을 요리조리 피하였습니다. 그는 이제사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식탁을 떠나 그날 하루종일 아버지의 죄를 슬퍼하면서 금식했습니다.
4. 넷째날-다윗의 도피(20:35-42) 다음 날 요나단은 합의된 절차에 따라 다윗에게 속히 피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요나단과 개인적으로 이별을 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언약을 갱신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이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울이 죽기 전에는 좋은 시절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으며, 이제 헤어지면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과 요나단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할 때까지 다윗은 사울의 진노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했습니다. 요나단은 성으로 돌아갔고, 다윗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갔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목적을 보증해 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진설병(21:1-9) 다윗이 그 다음에 멈춘 곳은 그 당시 실로 에서 놉으로 옮겨 온 장막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으므로, 장막에는 궤가 없었습니다. 놉의 대제사장은 제2차 아벡 전투 때 죽은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인 아히멜렉이었습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현관 계단에 나타난 것을 보고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다윗이 혼자 온 이유에 관한 그의 조심스런 질문은 일이 잘못된 줄 그가 알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 종자 없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의심이 어디에 있었던지 간에 왕의 일급 비밀 임무 수행 중이라는 다윗의 ‘신용을 가장한 사기’에 의해 그 의심은 풀렸습니다. 그가 자기 부하들이 후에 어떤 장소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21:2). 그는 대제사장에게 두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첫 번째 부탁은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21:3-6). 이미 입증된 바와 같이 그 곳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밖에 없었습니다(출25:30 ; 레24:5-9). 이 제사장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의식적으로 불결하지만 않다면 이것을 그에게 기꺼이 줄 생각이었습니다(출19:15 ; 레14:4). 진설병으로도 알려진 성별된 떡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에 있는 식탁에 놓인 열두 덩이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떡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아히멜렉이 이 떡을 다윗에게 줄 생각이었던 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양식 공급의 상징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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