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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길로 간 사람들 (삼상2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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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상하는 사을왕조와 다윗왕조의 역사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사을 왕의 뒤를 이어 두번째 왕이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왕의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히 다루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은 성공한 실패자였습니다. 성경 인물연구가인 '허버트 로키어 (Herbert Lockyer)는 성경에 수록된 인물들 중에 사울만큼 출세할 기회를 많이 가진 사람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 기회를 놓치고 악용한 사람도 일찌기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 '기스'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2을 보면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산간지방에 살고 있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뽑힌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직후 그의 행적을 살펴 보면 하나님을 신앙했고, 겸손했고 바른 정치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무엘상 15:17을 보면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왕이 될 무렵만 해도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5:26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은 왕이 되기까지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만 그러나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1. 사무엘상 13:12을 보면 인내심이 없고 처사가 경샅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 당시 숙적이었던 불레셋이 쳐들어오자 당황한 나머지 왕 자신이 직접 번제를 주관하여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제사드리는 것은 사무엘의 소관이지 사울의 소관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13:13을 보면 이 사건을 '망령된 사건'이라 했고 그 결과 사울대신 왕이 될 사람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입이 무겁고 행실이 신증해야 합니다. 거짓말을 잘 해도 안되고 공적인 약속을 호떡 뒤집듯 뒤집어도 안됩니다
2. 사무엘상 15:9을 보면 아말렉 부족과의 전쟁에서 사을이 승리를 거두고난 후 빼앗은 전리품 가운데 좋은 것들을 자기 몫으로 챙겨 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욕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6:l0을 보면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나를 좇지 아니 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적절한 욕구는 목적성취의 동기로 작용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무절제한 것이 된다면 실패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식욕이 지나쳐 과식이 되면 위장병의 원인이 됩니다. 성욕이 지나쳐 방종과 타락으로 치닫는다면 패가망신의 원인이 됩니다. 명예욕이 지나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추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물욕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3. 사무엘상 18:8을 보면 질투심으로 이성을 잃은 사건이 있었 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출전한 다윗이 대승을 거두고 개선하고 돌아오자 예루살렘 여자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 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곧 사울과 다윗의 인기를 비교한 여론이기도 했습니다. 18:8을 보면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 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은 나라 밖에 무엇이냐'라며 그 날 이후로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다윗은 예루살렘 근교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에 블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울이 귀신들려 고통받고 있을 때 측근들이 다윗을 데려다가 수금을 연주케 함으로 사울을 괴롭히는 귀신을 내쫓 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사울은 다윗을 자기 곁에 두고 총애를 베플며 경호실장겸 비서실장을 시키며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천 만만' 사건이 후 사울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기고 죽일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질투심이나 살인 행 위는 악령인 사단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5:17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고 했고, 6:19-21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승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 이단. 투기, 슬취함. 방탕이라'고 했 습니다 성령님의 반대자는 악령입니다. 악령에 사로 잡히면 위에서 열거한 현상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거망동, 교만, 시기, 질투. 살의는 악령의 조종이었고 역 사였습니다.
4. 사무엘상 28:7을 보면 신접한 여자t무당를 찾아가 묻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불레셋이 쳐들어 오자 겁에 질띤 사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 변장까지 하고 여자무당을 찾아가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신앙의 이증성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계시록 22:15을 보면 '개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 들과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술객하는 여자를 직접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의 신앙은 편의주의, 적당주의. 타협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적당히 믿고 타협하고 편리하게 처신하는 것은 신앙인이 걸을 길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알은 타협이 안됩니다. 유일신앙과 우상승배는 조정이 안됩니다. 사울은 증심이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증요한 문제는 사무엘상 16:26에서 밝힌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왕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임받아 통치할 왕이 위임권자인 하나님을 등지 고 외면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사 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정사는 뒤로 제쳐 놓고 특공대를 조직해 다 윗을 추격하고 있던 어느날의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신복 아비새가 곤히 잠든 사울 곁에 잠입했습니다. 경호원이나 특공대도 모두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창을 든 아비새가 찔러 죽이자고 제안했지만 다윗은 가로 막았습니다. 그 이유가 사무엘상 26:9에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 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들어 억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라고 했고 11절을 보면'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라고 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사울이 기상천외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한테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고백 했습니다. 26:2l 이하에 그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범죄 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여러번 속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울 자신도 자기 마음과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악령이 사울의 마음을 장악하고 그를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든 악령이든 그 지배를 받게 되면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행 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층만히 받고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되면 성령님의 감동과 그 지 시를 따라 살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악령의 지시를 따라 살고 행동해 야 합니다. 문제는 그 결과입니다. 갈라디아 6:26을 보면 '우리가 성령님으로 살면 또한 성령님으로 행할 찌니'라고 했고 갈라디아 5:16을 보면 '너희는 성령님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살면 평안하고 안정되고 질서있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악령을 따라 살면 파괴적이고, 공격적이고, 전투적이고 불 신앙적인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유는 마귀는 그런 짓만 골라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26절 끝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 가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다음의 교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진정으로 사울을 용서하고 그 생명을 살려 주었습니다만 사 을은 그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울은 악령에 사로 잡혀 있었고 다윗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님의 역사가 있을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을 보면 '성령님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7.19을 보면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의 이름을 각각 따로 쓴 막대기를 하나로 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민족도, 국가도, 사람도 하나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진정한 하나, 만남, 화해는 십자가의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두 사람의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다윗은 자기 길로 사울은 자기 곳으로 헤어졌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신앙과 순종의 길로 갔고 사울은 왕궁으로 돌아간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따라 왕궁으로 갈 수도 없었고 사울이 다윗을 따라 다른 길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증요한 것은 사울이 자기 곳으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길'로 갔고 사울은 '곳'으로 갔습니다. 저는 길과 곳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길은 계속 갈 수 있는 곳이며 끝 없이 뻗어있는 것인데 반해 '곳'은 제한된 공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다가 정지하는 데가 '곳'입니다. 다윗의 길은 점점 형통해서 왕의 자리에 까지 뻗어났고 사울은 왕궁에서 정지된 채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을 살펴봅시다. 그날 밤 베드로도 만찬석을 떠나 밖으로 나갔고 유다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거기서 바로 예수를 팔아먹는 배 신의 장소로 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 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엔 여러갈래의 길이 켤쳐져 있습니다. 다윗의 길이 있고 사울의 길이 있습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습니다. 홍하는 길이 있고 쇠하는 길이 있습니다.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 있고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있고 악령이 이끄는 길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습니까 사울의 길이라면 지금 당장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다윗의 길이라면 좀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전진해야 합니다, 바른 길로 걸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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