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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란 신앙의 방편일 뿐 (왕상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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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장점과 단점 어느 시대나 교회나 개인이나 가정이나 모든 면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단점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를 좋아하는데 자기는 단 점 보이기를 싫어합니다. 장점은 좀 멈추고 또 단점은 좀 기르고 이 렇게 해 가지고 장단점이 차차 맞아서, 계란 모양으로 기다랗게 되지 말고 공 모양으로 둥글게 구원을 이루어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진영은 감정을 아주 중하게 여기고, 또 어떤 진영은 논리를 중요시 하고, 또 어떤 진영은 행하는 것을 중요시 하고, 어떤 진영은 간판을 중요시 하는데 그것이 다 필요하기는 다 필요합니다. 필요하 나 그런 것을 잘 조절해 가지고 그것이 원만하게 둥글둥글하게 돼 나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것은 단점이 장점을 따라 가게 되고, 심판은 장점이 단 점을 따라서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은 장점이 단점 따라서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이 장점을 따라 자라가는데 도움을 입는 것도 있지만 잘못되면 장점만 위주가 되고 단점은 무시해서 어디 처박아 버리고 보기도 싫고 돌보지도 아니하고 버리니까 아주 그 면은 병신 이 되기 쉽습니다. 여러 가지 신앙 형태
1. 불파 요새 보면 불파라는 진영들이 있습니다. 또 눈감고 명상하여 지 시받는다는 지시파, 또 방언파, 방언파는 불파와 한 형제간입니다. 지시파는 단식하는 금식파와 또 가깝습니다. 금식도 좋은 것이고 또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도 없는 것은 아니고 불도 없는 것은 아니고 또 이런 기적도 없는 것은 아니고 다 좋은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그것도 불 파에 있는 것인데 그것도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심령이 가라앉아 가지고 있는 그 심령을 요동시키는 데 있어서는 사람들의 주관 행위로서 목표를 주기를 이런 이런 그런 형태의 방언이 되기 전에는 네가 믿음이 없는 것이고 성신의 은혜를 못 받은 것이니까 거기까지 되도록 노력하라 해서 그렇게까지 되도 록 노력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에서 그 심령이 좀 물씬물씬해지고 동해지는 일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방언을 하기까지가 문제 가 아니고 그 뒷처리가 문제입니다. 방언하는 사람들은 뒤에 잘못 하면 진리를 떠나서 순전히 주관 행위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2. 지식파 또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이 진리, 교리 신조라는 것은 다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공통성있게 된 그런 것들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데, 성경 말씀과 교리와 신조 이것을 주장하고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좋기는 좋은데 감정이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그런 노래가 있었습니다. 말라진 교리만 붙들고 있고 생명 된 신앙은 내 버렸다. 재건교회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신앙의 실상과 실상에 이르는 방편 오늘 찬송을 하는데 아주 어깨가 우쭐우쭐거립니다. 여러분들을 보니까 아주 어깨가 우쭐우쭐한데, 네 좋습니다. 그러나 그리 얼마 치우쳐 가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잘못하면 참 외식되기 쉽고 순전히 유흥의 도가 되기 쉽습니다, 유흥의 도. 그리되면 사람이 춤추고 이렇게 하는, 저 노라리 하는 데는 갈 수 없고 이러니까 기도회나 핑계 되어 한번 모아 가지고 흥풀이, 신명풀 이를 한번 하게 됩니다. 한번 하고 나면 시원해지니까 이제 또 가서 살림을 알뜰히 살고, 또 그다음에 마음이 답답하면 또한번 신명풀이 하고 이렇게 반복을 하게 됩니다. 다 폐단들입니다. 엘리야가 불 가운데서도 지진 가운데서도 폭풍 가운데서도 여호와 를 만나지 못했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에서 만났다는 것이 그거 성경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 지진, 폭풍같은 그런 것은 신앙의 본체나 실상이 아니라 실상을 찾아가기 위한 방편들일 뿐입니다. 그리기 때문에 방편으로 쓰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걸 방편으로 쓰지 아 니하고 그것이 신앙의 실상이 되어진다면 그거는 외식이요 껍데기요 거기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늘 어려운 환경을 연상하며 준비 우리 기독자들이 승리하고 또 면류관 얻는 것은, 열 처녀 비유에 도 보면 밤중에 그때에 신랑이 왔습니다.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의 전체에 대해서 주님 만나는 일, 또 승리를 보는 일 그런 것을 다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신앙의 승리는 밤중이라. 사람이 다 견디기 어렵고 피곤하고, 또 권태나고, 괴롭고, 어렵고, 참 답답한 그 런 모든 어려운 가운데 그때에 승리가 오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 환경이 정숙한 그 정숙한 환경 거기에서 은혜를 받 으면 그 은혜를 써 먹기는 언제 써 먹느냐 은혜받기에 정숙해서 아 주 고요하고 한적해서 은혜받기에 좋은 그 자리에서 받은 은혜를 써 먹고 결실하는 것은, 그 은혜를 나타내기 어렵고 그 은혜가 자기에 게 와서 역사하기 아주 어려운 그런 세상 강압 속에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환난이 오든지 승리하는 그런 기독자의 승리 역사할 때, 그 때는 예수 믿으라고 고함지를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수천 수만 명으로 모이는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배경 좋은 무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는 참 적적하고 고독하 고 모두가 다 쓸쓸하고 찬바람 부는 거기에서 다 승리를 일으킨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 은혜를 받든지 그 받은 은혜로 자기 미래를 두고 오늘 현실에서 고독의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 보아야 합니다. 고독 속에도 그 말씀을 새김질해 보고, 또 여러 가지 압력 속 에서도 그 새김질을 해보고, 또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말씀을 새김질 을 해보고 이렇게 연습을 해서 대적들이 표범 같고 곰발 같고 사자 같은 그런 맹수성을 가지고 아주 불미와 같아서 불미 속, 불속과 같 은 그런 혹독성을 가지는 그럴 때에 우리가 가서 승패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때도 좀 연상도 하고 명상도 하는 것을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는 기분좋고 흥분좋은 그런 것은 다 없어져 버렸 습니다. 찬송도 이렇게 아주 기분좋고 흥분있게 하려는 것은 아주 입문 중 의 입문입니다. 아주 초보의 입문이오. 거기에서 얻은 힘 가지고 언제든지 그런 장소에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 하리라고 생각 했다가는 판판이 다 실패되어집니다. 오직 진리만 붙들고 나갈 것 그러기에 우리가 이 집회에서 강사의 설교하는 설교를 듣고 거기 에서 어떤 감동이 됐든지 눈물을 흘렸던지 했더라도 그것을 보존하려 고 애쓰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 내놓고 다만 받은 진리 말씀만 가지고 자기가 갑니다. 진리 말씀을 가지고 분주한 데에서도 그 말씀을 자기가 고요히 명상을 하든지 차차 능숙하게 되면 눈을 뜨 고 생각하든지 그 진리의 말씀을 생각할 때에 그 진리 말씀을 생각하 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동의 역사가 진리 말씀을 생각하게 해서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자기는 한적을 만들 수가 있고 또 외로운 그런 가운데 서도 아주 평안하고 그렇게 참 하나님의 그 사랑의 품속에 있을 수가 있고, 아주 어떤 무서운 기압 속에, 또 어떤 난제를 만났을 때에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해서 그 명상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현실을 이기면 됐습니다. 또 이기면 또 그다음에 해서 이기고 이기고 해서 자기가 성경을 읽고 기억한 말씀이나 듣고 사람에게 배워서 기억한 말씀이나 그 말씀과 말씀 안에 있는 영감, 또 자기가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주님의 그 대속의 공로, 주님의 공로와 말씀과 또 영감 이 셋을 어디서든지 자기 현실에, 이런 현실 저런 현실을 만나게 되는데 현실 안에서 이 셋을 사모하고 이 셋을 사모하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모만 하면 그것이 문을 여는 것이요, 또 거기에 거리낀 것을 정리하는 것 이 문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되면 이 세가지 능력이 와서 그 현 실을 옳고 바르게 잘 해결해서, 참 그 현실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그 현실에는 마귀도 관련되어 있고 또 이 사람도 관련되어 있고 온 세상 들이 관련되어 있는데, 관련되어 있는 거기에서 이 셋을 자기가 영접 해서 이 셋의 증거하는 그 증거를 받아 그 힘으로 인해서 그 현실을 해결지워서 하는 그것이 우리가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실마다 그냥 지내 보내지 말고 현실에 이 셋을 새김질하 고 사모해 가지고 이 셋에게서 나온는 힘 그 힘을 가지고 그 현실에 관련된 모든 것에게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올바른 관계, 마귀에게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죄에 대해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에게 대 해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는 요 생활로 현실을 통과하게 하는 이런 것을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연습을 해 가지고 앞으로는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온 전교계가 다 달 려들어도 요 방편 가지고, 거기에서 나오는 힘을 가지고 모든 대외에 있는 것을 때릴 것은 때리고 안을 것은 안고 당길 걸 당기고 물리칠 것은 물리치고 끊을 것은 끊고 맺을 것은 맺고 모든 올바른 관계를 맺는 그 일을 다 숙달해서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작은 현실이 어디 있을까마는, 작은 현실이라 말은 평범한 현실이, 평소에 있는 평소적인 그런 평소의 현 실이 다 작은 현실이겠습니다.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명상하면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피공로가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인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먼저 와서, 피공로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에게 왔지마는 이제는 말씀 안에 예수님의 피공로도 있고 또 성령님의 감화도 있습니다. 이러니까 말씀을 새김질하면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환하게 밝아지 고 대속과 나와의 어떻게 관계가 맺어져 있는 그 관계를 자기가 새롭 게 깨닫게 되고 또 그럴 때에 성령님의 감동도 그 일을 보조해서 잘 돕 게 해주고 또 진리도 잘 돕게 이렇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과 진리는 예수님의 대속을 이렇게 증거해서 이렇게 잘 우리에게 보호해서 길러주고, 예수님의 대속은 또 성령님과 진리를 우리에게 소개해 가지 고 이렇게 연결을 바로 가지도록 그런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좀 한숙한, 좀 고요한 정숙한 그런 시기를 가 지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자들이 다 그것을 하고 싶어 원하지만 차 차 차차 자기가 커지고 해 놓은 일이 많고 이러면 자기가 정숙한 그 런 고요한 시간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어서 이 일에 분주하고 저 일에 분주해 가지고 이렇게 날뛰다 보면 껍데기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흥사 끝이 좋은 일이 없습니다. 부흥사 끝이 결과 가 좋은 일이 없고 부흥사 끝에는 반드시 패전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좀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 말씀 을 듣든지 읽든지 했으면 자기가 좀 새김질을 해서 마음 가운데 고요 히 묵상하고 명상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 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 그 사람에게 모든 일이 형통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해서 그 말씀을 새김질함으로,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 말씀을 명상함으로 인해서, 그 말씀을 명상함으 로 인해서 그 말씀이 점점, 차차 더 깨달아지고 더 느껴지고 심각해 지고 그 말씀과 자기와의 관계가 더 긴밀히 견고히 맺어지고 또 거기 에서 말씀으로 인한 소원이, 말씀의 소원이 자기 소원이 되어서 소원 이 차차 새로워지고 강해지고 거기에 대해서 말씀과 자기와 일치되는 그 역사를 할려고 할 때에 담력이 생겨지고 거기에서 용기가 생겨지 고 하는 그것이요 말세에 꼭 올바른 성신의 감동입니다.
올바른 성 신의 감동이오. 감동이 뜨겁다, 또 뭐 이렇다 저렇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너 무 심령이 가라앉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심령을 한번 좀 출렁거려 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암만 출렁거려 봤자 그 안에는 생 명은 없습니다. 암만 출렁거려 봤자 생명은 없습니다. 마구 뛰고 굴 리고 땀이 버쩍 나고 아무리 떠들어 봤자 그 안에는 생명은 없습니다. 또 앞으로 승리의 생활을 이루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미한 음성에서 여호와를 만났다고 그렇게 계시한 거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요히 자기가 묵상하고 또 묵상 할 때에 그 말씀이 내게 더 환하게 밝아지고 또 새로워지고 그 말씀 이 차차 그 범위가 넓어지고 그 말씀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해지고 또 그 말씀과 자기와 동행해서 일치되고저 하는 소원이 생겨지고 또 그 를 그렇게 단행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자기 속에서 나오고 하는 그것 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떠들고 나면 성신의 감화는 소멸 그 성신의 감화는 그만 나왔다가 한참 떠들고 나면 간 곳이 없습니다. 날아가 버리고 없어요. 아가서에 보면 그 사랑하는 자를 표현 하기를 노루와 사슴과 같다 이랬습니다. 노루와 사슴과 같 다 노루 사슴은 무슨 소리만 한 마디 들으면 껑충 뛰어 가지고 그 만 달음질 쳐 버리면 어디 가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당신 에게 조그만치라도 거리낌이 뭐 있으면 그만 당신과 우리와는 그 거 리가 심히 멀리 되는 그것을 아가서에 가리켜서 말씀해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용도목사님이,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를 못했는 데 책 써 놓은 것을 좀 보니까 그분이 그 면을 발견을 해서 했습디다. 그리고 또 유재헌목사님이라고 순교했습니다. 삼각산에 그 기도 원에 기거하다가 순교했는데 그 목사님이 그 신령한 데 대해서 발견 한 그런 것이 나타나 있고, 아주 위대한 교리 학자들도 주님의 신령 한 영면에 대해서는 깜깜하게 어두운 그런 학자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성령님의 은사가 곧 진리 은사요 진리 은사가 성령님의 은사인데, 이 서로 거리가 멀어 가지고 모순되어서 어떤 사람 은 교리와 신조로 치우쳐 있고 어떤 사람들은 영감 역사에 치우쳐 있 고 이래 가지고 이 모순의 폐단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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