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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 (삼상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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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가들은 사업의 성패가 ‘선의’라고 일컬어지는 무형의 요소에 달려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그것이 그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심지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얼마나 쉽게 날아가 버릴 수 있는지도 잘 압니다. 애버딘(Aberdeen, 스코틀랜드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있어던 일입니다. 선의의 상실이 번창하는 사업을 망칠 수 있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티푸스가 돌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그 중 일부가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장티푸스 균이 큰 통에 든 콘비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내용물은 판매대에서 분할 판매되었습니다. 후일 문제의 깡통은 영국군 보급 창고에서 돈을 주고 산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보급품은 본래 아르헨티나에서 온 것으로, 그 곳에서는 이 깡통이 장티푸스 균에 오염된 것으로 판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슈퍼마켓에 대한 공신력의 상실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애버딘의 고객들은 그 슈퍼마켓을 기피했으며, 그런 운동은 그런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에게까지 번져 그 슈퍼마켓은 거래선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한 세대에 걸쳐 이룩한 신뢰가 단 한번의 실수로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성냥불 하나가 수천 그루나 되는 나무를 태워 버릴 수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큰 비극들이 사소하게 보이거나 그 순간에는 눈에 띄지 않던 단 한번의 행동을 통해 일어나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경험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약속에 따라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야베스 길르앗을 도와 적을 물리치는 일에 성공했으며(11:1-11).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갔습니다.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왕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의 통치는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왕위를 다른 사람 즉 “그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계승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13:14). 비록 사울이 약 40년간이나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는 사실상 무능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실 것으로 예견하신 전환점은 그가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단호히 거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잡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의 통치에 관한 이전의 약속은 영적인 타락의 형태로 용해되고 말았으며 그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백성의 민족적인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윗의 등극과 더불어 영적인 부흥의 빛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택하신 왕을 줄 것입니다(신17:14-20). 블레셋과의 전투(13:1-7) 1절은 사울의 등극에 관한 공식구입니다. 현존하는 히브리어 사본들에는 그의 나이와 통치 연한에 관한 언급이 빠져 있습니다. 히브리어 사본에는 사실상 사울이 왕위에 오를 때의 나이가 한 살이고, 2년간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번역본들은 빠진 부분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21절을 보면 그의 통치 연한이 40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70인역의 몇몇 사본들에는 등극할 때의 나이가 30세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나이는 다윗이 등극할 때의 나이에서 빌어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삼하5:4).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롤 결정했습니다. 그는 암몬족을 무찌른 데 고무되었던 것 같습니다.(11:11). 더 분명히 말해서 그는 새 군대의 진가를 발휘하고 싶었습니다.(13:2).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각 지파에서 소집한 시민들로 군대를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상비군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민병 대를 구성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였으며 “일 천은 요다단과 함께” 그 당시 베냐민 영토에서 게바성을 차지하고 있던 블레셋 수비대와 싸우도록 했습니다(13:2). 이것은 고전적인 ‘국경 분쟁’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즉, 국가를 통일하고 영토 확장을 꾀하기 위해 전쟁을 유발하는 오래된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1935년 이탈리아가 에디오피아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Wal-Wal 분쟁),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Marco Polo Bridge 분쟁), 그리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사울의 전략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목표물에 선제 공격을 가하면 백발 백중 성공입니다. 사울은 철천지 원수와의 총력전을 벌이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소집해야 할 구실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역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백성들은 길갈에 모이도록 소집되었습니다(13:3-4). 전쟁은 이토록 화려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만만하게 전쟁을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불가피한 희생을 예견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대대적인 병력을 몰고 믹마스에 있는 사울의 기지로 진격해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은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갔습니다(13:5-7). 그들은 완전히 수치를 당했던 것입니다. 공격 전을 벌임으로써 사울은 첫 번째 대규모 실책을 범했으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야기시켰습니다. 사울의 조급성(13:7-10) 사울은 ‘산 위로’ 가지 않은 군사들을 이끌고 길갈로 퇴각했습니다. 영감을 받은 사가는 엄숙한 표현으로 그들이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3:7). 사울은 그 곳에서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기다렸습니다.(13:8).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10:8절에 기록된 사무엘의 명령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은 11:14-15절에 기록된 길갈의 모임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경우에 대한 예언적인 언급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사울의 군사들은 도망을 쳐, 한 때 당당했던 군사들이 이제 단 하나의 보병 대대로 축소될 만큼 위축되었습니다(13:15). 사울이 그의 통치 기간 중에서 가장 큰 실책을 범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드릴 “번제와 화목 제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번제를 드렸”습니다(13:9). 이것은 그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협력하여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은 수많은 경우에 합법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만(삼하24:25, 왕상 3:4, 8:13). 사울은 그렇게 할 권세를 지니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명령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사무엘이올 때를 기다려야 했으나 급박한 상황과 참을성 없는 성격 때문에 성급히 굴었으며 선지자의 역할을 도용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큰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희생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진으로 들어 왔습니다(13:10). 결과들에 직면하여(13:11-22) 모든 사람이 사울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화를 내고, 선지자 사무엘도 화를 내었습니다. 물론 사울의 많은 신하들도 화를 내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의 왕국은 적에 의해 황폐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재앙에 그의 행동의 두 가지 결과들이 덧붙여졌습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적인 것이었습니다.
1. 사울은 왕조를 박탈당했습니다(13:11-15) 사무엘은 11시에 나타나서 사울의 어리석은 행위를 목격하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 노골적으로 물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13:11). 비록 사울의 응답이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납득할 만한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는 나타나지 않고, 군대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여호와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13:12). 이것은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며, 우리도 그날 오후 사울의 마음을 괴롭혔던 위기감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해명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경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엄중하게 사울을 꾸짖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행동을 어리석은 짓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명령을 위반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법과 이 사건이 기록된 상황에 관한 지식에 입각해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범죄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매우 가혹한 형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왕위를 그의 아들이 계승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 왕조나 사울 가문은 “영영히”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13:14). 그래서 사울 자신은 계속 왕위에 있겠지만, 자기 후손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6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길갈로 떠났습니다.
2.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점령을 당하여 비무장 지대가 되었습니다(13:16-22). 침략군들은 그 땅을 돌아다니면서 쇠로 된 기구들과 장비들의 제조를 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기를 지닐 수 없었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농기구를 구입하고 심지어 보습이나 삽을 가는 일조차도 정복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울이 벌인 사소한 전투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은 큰 희생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왜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을까요 이런 일은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현대인과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여기에 이 사건들로부터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습니다.
1. 성경 주석 가들에게 있어서 아마도 가장 분명하고난처한 사항은 그의 범죄에 비추어 볼 때, 그의 형벌이 너무 중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주석 가는 사무엘의 “가혹함과 타협 거부의 자세”를 어린 시절 실로 에서 겪었던 그의 “불행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본다면, 심리학이 하나님 말씀의 분명한 의미를 누르고 승리한 것이 됩니다. 7일의 기한은 사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으며, 케일(C.F.Keil)과 프란츠 델리치(Franz Delitzsch)가 지적하듯이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고 사울이 계속 제사를 드렸다면 그는 하나님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적과 싸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반역이었으므로 그에게 고지된 형벌은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이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을 꾸짖은 까닭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긴 이유는 사무엘의 불의한 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17세기에 매튜 포올(Mathew Poole)은 그 문제를 정확히 꼬집고, 하나님이 사울을 다루신 것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침묵시켰습니다. “사람들은 화난 하나님의 위엄이나 그 범죄의 극악한 본성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소하게 보이는 사울의 외적인 행동밖에는 보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가 얼마나 악한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의 양심의 빛을 얼마나 거스르고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의심했는지, 또한 하나님의 권위와 공의를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알고 계셨으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악한 많은 원리들과 마음의 동향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엄중한 말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 대한 가장 겸손하고 분별력 있는 주석은 지난 삼백 년간 복음을 설교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현대 학자들의 말을 침묵시키는 훌륭한 주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쉽게 판단하곤 합니까1 그러면 우리가 누구 관대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어 보며 우리가 무엇이관데 하나님의 태도에 결함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울의 죄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결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참조, 렘17:9). 성경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위반하는 것이 율법 전체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죄가 사소한 죄인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알고 계시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게다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지를 아는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편협한 실을 우리 영혼 주변에 두르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성장의 움직임들을 금하는 교묘한 함정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계속되는 적용점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된 말씀에 신실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멀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과 보람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신자를 시험하는 데 즉, 실족케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이 목적은 긍정적이고 구속적인 데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민감하거나 그것들에 대해 무서워할 때, 이 점을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시내산의 천둥과 하나님의 법의 위엄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결함들을 생각할 때 영적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미래의 어는 시점에 어떤 결정적인 죄에 대해 우리를 심판할 계획이시라는 사실을 두려워하도록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매우 예리하게;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의 부족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죄에 대한 예민함이 은혜의 역사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의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좌절의 원인이 아니며, 실망의 도구로 고안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공포심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딤후1:7).
3.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사울의 실패에 관한 이 슬픈 기사에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 관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사울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와 능력에 대해 계속 증거했습니다. 그가 고통스럽게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사랑의 부족이나 인내심의 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그에게 선을 베푸셨지만, 그는 두눈을 부릅뜨고 지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비극 위에 드리운 것은 구세주의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맞는 왕을 임명하셨다는 선언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이기 대문입니다.(13:14). 다윗은 자기 후손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복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정복하고 그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든 죄는 그의 완전한 희생 제사에 의해 씻겨졌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믿음을 지닌 우리는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회개하고 믿음의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을 남겨 두고(그것들을 십자가와 텅빈 무덤에 남겨 두고)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천국을 행해 달음질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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