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한 사람 (왕상19:1-8)
본문
열왕기상은 사무엘서의 속편으로 1장부터 11장에서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에 대한 사건을 기록했고 12장부터 22장에서는 왕국분열 이후의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17장부터 22장까지에서는 아합 왕의 죄악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서를 상고해 보면 솔로몬은 지혜가 많은 사람으로 유명했고, 아합왕은 이스라엘 왕 중 가장 악한 왕으로 성경의 많은 지면을 차지했습니다. 역사에는 종종 악명 높게 소문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선한 일에 소문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예로 솔로몬과 아합 왕, 모세와 바로 왕, 베드로와 네로 왕 등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기왕에 짧은 한평생 악명 높이 살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면 칭찬 듣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더 데레사 수녀의 경우를 봅시다. 18세부터 수녀의 길에 들어 한 평생을 빈민가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습니다. 데레사는 백주에도 도둑이 난무하며 살인이 벌어지고 많은 창기가 살고 있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한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제정한 '기쁨과 희망의 상'을 지난 9월 4일에 수상하고 그 상금인 10만 달러마저 빈민들에게 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삶입니까 히브리 사상가 힐렐은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첫째, 자기만 아는 짐승 같은 사람,
둘째, 자기 이웃을 아는 고등동물,
셋째,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분류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도 다양한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대조를 이루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합 왕과 이세벨, 그리고 엘리야입니다.
1. 아합 왕 아합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열왕기상 16장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9세기경에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의 왕위를 계승하여 22년간 사마리아에서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시돈 왕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혼인한 이스라엘의 제7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이세벨과 혼인한 후 이방문화를 이스라엘 왕조에 도입하였고 왕 자신은 물론 전국민을 바알 숭배자로 타락시킨 악명 높은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서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왕비 이세벨의 사주를 받아 전국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폐지하게 했고 많은 선지자를 죽이고 엘리야마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악한 사람은 악하게 살다가 악한 일을 하고 악하게 죽는 것이 상례입니다.
2. 이세벨 이세벨은 이방 아스다롯 제사장이요 시돈 왕인 엣바알의 딸로 아합왕의 아내가 된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그녀는 왕비가 된 후 시돈 사람의 우상을 이스라엘에 도입하여 온 국민으로 하여금 그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편을 조종하여 사마리아에 그 신당을 쌓게 하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했습니다(왕상 16:31-33).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왕상 18:4-13; 21:16-22). 이세벨이 행한 이와 같은 무서운 죄악 때문에 이세벨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고대로 이스르엘 성 곁에서 살해되었고(왕상 21:23; 왕하 9:7,30-37),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다시 이세벨의 몸의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왕상 21:19). 옛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곳에는 반드시 기쁨이 돌아오고, 악을 쌓은 곳에는 반드시 재앙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3. 엘리야 엘리야는 주전 9세기 중엽에 이스라엘 북왕국 길르앗 출신의 디셉 사람입니다(왕상 17:1). 근 세례 요한 처럼 몸에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살았습니다(왕하 1:8). 구약에서 그만큼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자이며, 마침내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착각하기까지 했습니다.
1)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신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하나님과 바알을 결코 양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력히 지적한 구약 정신사에 있어서 획기적 의의를 제시한 대선지자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백성들과 방백과 지도자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아세라 목상에게 입을 맞추고 절을 했지만, 엘리야는 최후의 일각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양심이며 동시에 내 영혼의 절개입니다. 온 세상 다 주님을 떠나도 서머나 교회와 같이 폴리갑과 같이 믿음을 지킵시다.
20세기 후반을 살면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말고 금력 앞에 입을 맞추지 말고, 세속적인 일에 추파를 던지며 살지 맙시다.
2) 엘리야는 기적의 사람이었습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엘리야가 체험한 영적 경험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선지자들이 체험할 수 없었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절하고 바알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국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강들이 마르고 인심도 강물처럼 마르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강물이 마르고 강물이 마르니 들풀이 말라 목축이 안되고, 전토가 말라 농사도 안되고, 농사를 못 지으니 인심이 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독심을 품고 엘리야를 더욱 심하게 박해하였고 엘리야는 그 박해를 피해 요단 동편 그릿 시냇가에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비를 거두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온 세계 도처에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3:8을 늘 암송하면서 하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신 주님! 하나님이 한 번 열어 주시면 닫을 이가 없는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미국이 오늘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미국에 경제학자가 없어서가 아니요 자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이 나라의 경제도 힘있게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뭄의 때에 기적적으로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법으로 엘리야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첫째,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셨습니다.
둘째,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공급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떡과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신 경우를 살펴봅시다. 동양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까마귀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왜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을 가져다 주셨습니까 아마 요단강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을 통해서 음식을 운반하게 했다면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다 먹어치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공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6에서는 사렙다 과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까마귀를 통해 그릿 시냇가에서 공급을 받았는데 이제는 너무 여러날 비가 오지 않아 그릿 시내 마저 마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식량도 다 떨어진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자기 먹을 것도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과부였습니다. 그 과부가 가진 것은 밀가루 통의 밀가루 한 웅큼입니다.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 모자(母子)는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마지막 끼니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런 과부를 찾아간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과 약한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고(막 12:42-44), 어린이의 보리떡으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베다니 시몬의 집에 자주 들리셨습니다. 산상보훈에서도 제일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본래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또 가난한 자를 택하사 부한 자를 넘어지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사 힘이 센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부자를 혐오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부자를 혐오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렙다 과부보다 부요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가운데서도 손 대접하기를 힘쓴 그 과부를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털어서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가 과부의 것을 먹었습니까 아니면 과부가 엘리야의 것을 먹었습니까 만약 과부가 엘리야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 과부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그 기나긴 3년 6개월의 흉년을 어떻게 보냈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결코 과부의 것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과부는 엘리야를 한번 대접하고서 그 기나긴 흉년을 공짜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마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0의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삽시다. 성경에는 주님을 한번 대접하고 복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창 18장), 소돔 땅의 롯(창 19장), 사렙다 과부(왕상 17장), 룻기의 효부 룻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룻은 시모 나오미를 잘 잘 봉양하여 다윗 왕가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지중에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떡과 물을 공급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그가 이세벨의 미움을 사서 멀리 광야로 도망가 그의 가련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뢸 때 천사가 나타나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였습니다(왕상 19:5). 천사가 어루만졌다는 것은 엘리야를 위로하였음을 뜻합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엘리야를 격려하고 그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먹으라”는 말씀은 영과 육신을 재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자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마시우게 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독교에서 숯불(불)이 주는 뜻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사야 6:6-7에서는 스랍 천사 중 하나가 핀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었습니다. 이는 입의 할례를 뜻합니다. 우리의 할례 받지 못한 부분, 즉 눈,입,코,손과 발,마음과 생각까지도 제단 숯불로 지져 태우고 구속(救續)의 향연을 즐기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엘리야는 천사가 주신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의지하였습니다(왕상 19:8). 이 거리는 40주 40야의 거리였습니다.
3) 엘리야는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엘리야의 능력의 기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왕상 17:17-24에서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기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4:25-26에의하면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보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앞에 두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를 살리셨습니다(왕상 17:21,22). 이에 과부는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는 고백으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해졌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과부는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기나긴 흉년 동안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물질적 보상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보상으로 두 아들을 살리는 생명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6:47과 요한복음 3:16의 말씀처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둘째, 왕상 18:30-40에는 갈멜산의 기도가 나와있습니다.
셋째, 왕상 18:41-46에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오기를 간구했던 기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4) 엘리야는 승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성경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처럼 어떤 때는 바알과도 대결했고 또 어떤 때는 애굽의 금 우상과도 대결했으며, 한 때는 마르크스주의와도 대결했고 그리고 지금은 세속주의 우상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대결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냐 아니면 너희들이 섬기는 바알신이 참 신이냐의 심각한 대결이었습니다. . 이 대결을 위해 엘리야는 몇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각각 갈멜산에 모이고, 각각 한 송아지의 각을 떠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각자의 신들을 불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우면 그 신이 참 신인 줄 알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은 이 제안을 수락하고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정오부터 저녁 소제 때까지 뛰고 부르짖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조롱하기를 “저는 신인즉 몽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고 그들의 종교 규례에 따라 피가 나기까지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을 다 자기 앞에 모으고 무너진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그는 지파의 수효대로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단 주위에 도랑을 쌓고 나무 위에 송아지 각을 떠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열 두통의 물을 나무와제물 위에 붓고, 물이 단 위로 두루 흘러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가 나아가서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함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원수들을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기손강 시내에 내려가 다 쳐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주시는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실례들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과 라반을 만났고(창29:10-13),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라반이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창30:30). 또한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셔서 양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의 수가 많아졌습니다(창 30:43).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 하였으나 하나님은 야곱을 하란의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창 31:7). 엘리야는 이런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들처럼 언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왜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목상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에 내려가서 다 죽였을까요 이것은 우상숭배는 모양이라도 없애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갈멜산은 하나의 관광지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성경적으로 생각해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빛내준 참으로 귀한 전승지입니다. 갈멜산의 불의 응답은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고(마 3:11),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눅 12:49). 또 요한계시록 4:5에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순절 날 요한의 다락방에도 성령님의 불이 임했습니다(행 2:2,3). 구약 시대에도 하늘로부터 몇 차례의 불이 임하는 실례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 제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웠습니다(대상 21:26).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마칠 때,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 임하여 오르난의 타작 마당의 제물을 사루었던 불은 회개 때 임했던 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요한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님의 불도 그들이 한자리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임한 성령님의 불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 임했던 불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할 때 임했습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성령님과 기쁨이 충만해서 찬미하며 기도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 제단에 임했던 불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할 때 임한 승리의 불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기도했을 때 그는 불의 응답을 받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역경 중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체험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역경 중에 계십니까 항상 엘리야같은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기만 아는 짐승 같은 사람,
둘째, 자기 이웃을 아는 고등동물,
셋째,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분류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도 다양한 종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대조를 이루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합 왕과 이세벨, 그리고 엘리야입니다.
1. 아합 왕 아합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열왕기상 16장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9세기경에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의 왕위를 계승하여 22년간 사마리아에서 왕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시돈 왕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던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혼인한 이스라엘의 제7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이세벨과 혼인한 후 이방문화를 이스라엘 왕조에 도입하였고 왕 자신은 물론 전국민을 바알 숭배자로 타락시킨 악명 높은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30절에서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왕비 이세벨의 사주를 받아 전국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를 폐지하게 했고 많은 선지자를 죽이고 엘리야마저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옛날부터 악한 사람은 악하게 살다가 악한 일을 하고 악하게 죽는 것이 상례입니다.
2. 이세벨 이세벨은 이방 아스다롯 제사장이요 시돈 왕인 엣바알의 딸로 아합왕의 아내가 된 열렬한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그녀는 왕비가 된 후 시돈 사람의 우상을 이스라엘에 도입하여 온 국민으로 하여금 그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편을 조종하여 사마리아에 그 신당을 쌓게 하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했습니다(왕상 16:31-33).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왕상 18:4-13; 21:16-22). 이세벨이 행한 이와 같은 무서운 죄악 때문에 이세벨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고대로 이스르엘 성 곁에서 살해되었고(왕상 21:23; 왕하 9:7,30-37),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다시 이세벨의 몸의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왕상 21:19). 옛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곳에는 반드시 기쁨이 돌아오고, 악을 쌓은 곳에는 반드시 재앙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3. 엘리야 엘리야는 주전 9세기 중엽에 이스라엘 북왕국 길르앗 출신의 디셉 사람입니다(왕상 17:1). 근 세례 요한 처럼 몸에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살았습니다(왕하 1:8). 구약에서 그만큼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구약 선지자의 대표자이며, 마침내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착각하기까지 했습니다.
1) 엘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신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하나님과 바알을 결코 양립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강력히 지적한 구약 정신사에 있어서 획기적 의의를 제시한 대선지자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백성들과 방백과 지도자들이 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아세라 목상에게 입을 맞추고 절을 했지만, 엘리야는 최후의 일각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양심이며 동시에 내 영혼의 절개입니다. 온 세상 다 주님을 떠나도 서머나 교회와 같이 폴리갑과 같이 믿음을 지킵시다.
20세기 후반을 살면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지 말고 금력 앞에 입을 맞추지 말고, 세속적인 일에 추파를 던지며 살지 맙시다.
2) 엘리야는 기적의 사람이었습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엘리야가 체험한 영적 경험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선지자들이 체험할 수 없었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절하고 바알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전국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강들이 마르고 인심도 강물처럼 마르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강물이 마르고 강물이 마르니 들풀이 말라 목축이 안되고, 전토가 말라 농사도 안되고, 농사를 못 지으니 인심이 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합은 독심을 품고 엘리야를 더욱 심하게 박해하였고 엘리야는 그 박해를 피해 요단 동편 그릿 시냇가에 은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비를 거두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온 세계 도처에서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3:8을 늘 암송하면서 하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신 주님! 하나님이 한 번 열어 주시면 닫을 이가 없는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미국이 오늘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미국에 경제학자가 없어서가 아니요 자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의 문을 열어 주실 때 이 나라의 경제도 힘있게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뭄의 때에 기적적으로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법으로 엘리야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첫째,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셨습니다.
둘째,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공급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떡과 물을 공급하셨습니다. 먼저, 까마귀를 통해 공급하신 경우를 살펴봅시다. 동양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까마귀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왜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을 가져다 주셨습니까 아마 요단강 주변에서는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람을 통해서 음식을 운반하게 했다면 그 사람이 그 음식을 다 먹어치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공급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26에서는 사렙다 과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까마귀를 통해 그릿 시냇가에서 공급을 받았는데 이제는 너무 여러날 비가 오지 않아 그릿 시내 마저 마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엘리야는 갈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식량도 다 떨어진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자기 먹을 것도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과부였습니다. 그 과부가 가진 것은 밀가루 통의 밀가루 한 웅큼입니다.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이제 그 모자(母子)는 나뭇가지를 주어다가 마지막 끼니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이런 과부를 찾아간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예수님도 가난한 사람과 약한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고(막 12:42-44), 어린이의 보리떡으로 5천명을 먹이셨으며, 베다니 시몬의 집에 자주 들리셨습니다. 산상보훈에서도 제일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본래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또 가난한 자를 택하사 부한 자를 넘어지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사 힘이 센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부자를 혐오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부자를 혐오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렙다 과부보다 부요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가운데서도 손 대접하기를 힘쓴 그 과부를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과부는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털어서 엘리야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엘리야가 과부의 것을 먹었습니까 아니면 과부가 엘리야의 것을 먹었습니까 만약 과부가 엘리야를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 과부는 어린 자식을 데리고 그 기나긴 3년 6개월의 흉년을 어떻게 보냈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결코 과부의 것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과부는 엘리야를 한번 대접하고서 그 기나긴 흉년을 공짜로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마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10의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삽시다. 성경에는 주님을 한번 대접하고 복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창 18장), 소돔 땅의 롯(창 19장), 사렙다 과부(왕상 17장), 룻기의 효부 룻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룻은 시모 나오미를 잘 잘 봉양하여 다윗 왕가의 증조모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지중에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은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떡과 물을 공급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은 엘리야의 고백입니다. 그가 이세벨의 미움을 사서 멀리 광야로 도망가 그의 가련한 처지를 하나님께 아뢸 때 천사가 나타나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였습니다(왕상 19:5). 천사가 어루만졌다는 것은 엘리야를 위로하였음을 뜻합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엘리야를 격려하고 그의 분발을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먹으라”는 말씀은 영과 육신을 재무장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자는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마시우게 했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독교에서 숯불(불)이 주는 뜻은 의미심장합니다. 이사야 6:6-7에서는 스랍 천사 중 하나가 핀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었습니다. 이는 입의 할례를 뜻합니다. 우리의 할례 받지 못한 부분, 즉 눈,입,코,손과 발,마음과 생각까지도 제단 숯불로 지져 태우고 구속(救續)의 향연을 즐기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엘리야는 천사가 주신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의지하였습니다(왕상 19:8). 이 거리는 40주 40야의 거리였습니다.
3) 엘리야는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엘리야의 능력의 기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왕상 17:17-24에서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기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4:25-26에의하면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보내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앞에 두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 아이를 살리셨습니다(왕상 17:21,22). 이에 과부는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는 고백으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해졌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과부는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기나긴 흉년 동안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물질적 보상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보상으로 두 아들을 살리는 생명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6:47과 요한복음 3:16의 말씀처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둘째, 왕상 18:30-40에는 갈멜산의 기도가 나와있습니다.
셋째, 왕상 18:41-46에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오기를 간구했던 기도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4) 엘리야는 승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결은 성경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처럼 어떤 때는 바알과도 대결했고 또 어떤 때는 애굽의 금 우상과도 대결했으며, 한 때는 마르크스주의와도 대결했고 그리고 지금은 세속주의 우상과 대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대결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냐 아니면 너희들이 섬기는 바알신이 참 신이냐의 심각한 대결이었습니다. . 이 대결을 위해 엘리야는 몇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각각 갈멜산에 모이고, 각각 한 송아지의 각을 떠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각자의 신들을 불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우면 그 신이 참 신인 줄 알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은 이 제안을 수락하고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정오부터 저녁 소제 때까지 뛰고 부르짖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조롱하기를 “저는 신인즉 몽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바알 선지자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짖고 그들의 종교 규례에 따라 피가 나기까지 자신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끝내 침묵을 지키고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을 다 자기 앞에 모으고 무너진 단을 수축하였습니다. 그는 지파의 수효대로 돌을 취하여 단을 쌓고 단 주위에 도랑을 쌓고 나무 위에 송아지 각을 떠서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 열 두통의 물을 나무와제물 위에 붓고, 물이 단 위로 두루 흘러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가 나아가서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함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이에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원수들을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기손강 시내에 내려가 다 쳐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주시는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실례들을 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야곱은 하란에서 라헬과 라반을 만났고(창29:10-13),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라반이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창30:30). 또한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셔서 양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의 수가 많아졌습니다(창 30:43).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 하였으나 하나님은 야곱을 하란의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창 31:7). 엘리야는 이런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들처럼 언약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 왜 바알의 선지자들과 아세라 목상의 선지자들을 기손 강에 내려가서 다 죽였을까요 이것은 우상숭배는 모양이라도 없애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갈멜산은 하나의 관광지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성경적으로 생각해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빛내준 참으로 귀한 전승지입니다. 갈멜산의 불의 응답은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고(마 3:11),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눅 12:49). 또 요한계시록 4:5에서는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순절 날 요한의 다락방에도 성령님의 불이 임했습니다(행 2:2,3). 구약 시대에도 하늘로부터 몇 차례의 불이 임하는 실례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 제를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웠습니다(대상 21:26). 솔로몬이 성전 봉헌 기도를 마칠 때,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에게 임하여 오르난의 타작 마당의 제물을 사루었던 불은 회개 때 임했던 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요한의 다락방에서의 오순절 성령님의 불도 그들이 한자리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임한 성령님의 불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 임했던 불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할 때 임했습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성령님과 기쁨이 충만해서 찬미하며 기도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 제단에 임했던 불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간구할 때 임한 승리의 불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기도했을 때 그는 불의 응답을 받았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역경 중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체험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역경 중에 계십니까 항상 엘리야같은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하고 승리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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