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신 주님 (왕상19:1-14)
본문
사람은 소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가져야만 속이 시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소유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소유하시기를 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성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소유가 많아도 관계가 좋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소유로 점철된 부모 자식의 관계는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을 저지릅니다. 로울 하우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귀중한 선물은 관계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무시한 채 소유를 우선으로 하려고 하는 인간의 심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파괴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셨습니다.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수시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교제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 대화의 창구를 열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는 스스로 신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유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셔서 인간과 교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루어진 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단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멀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돌에 묶어 돌고 있는 돌맹이가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본문은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멜산 상에서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의 기도 싸움에서 승리한 엘리야, 그 결과로 모든 죄악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울러 하늘을 향해 기도하므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없어 매말랐던 대지에 비를 뿌리는 능력을 행했던 엘리야가 낙심에 빠져서 스스로 죽기를 간구할 때에 찾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제 실의에 빠져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낙심하고 포기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신 하나님”이란 제목 하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피차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 낙심에 빠진 엘리야 사람마다 낙심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어려운 일 때문에, 혹은 답답함 때문에, 혹은 소망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업무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혹은 길이 험하고 위태로워서, 혹은 실패 때문에, 혹은 질병 때문에 낙심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알만 사쿨은 진노의 밤이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말하기를 인간은 차라리 신이 되든가 돌맹이가 되었으면 불안이 없었을 것인데 신도 아니요 돌맹이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불안이 있고 권태가 있고 피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빌린다면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도 아니요 돌맹이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주변에 주어진 환경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변의 환경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설정해 놓은 기준치보다 주변의 환경이 더 높으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낙심하는 기준치가 다릅니다. 전에는 선풍기 한 대만 있어도 만족하던 것이 주변이 에어컽디셔너로 가득차게 되므로 선풍기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실망을 하게 됩니다. 환경을 보는 인간은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 낙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낙심에 빠졌습니다. 엘리야의 낙심은
첫째로 고독 때문에 온 것이었습니다. 고독은 무서운 병입니다. 고독이 어디서 옵니까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상에서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기도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불을 내리는 쾌거를 이루면서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도는 3년 6개월의 가뭄을 해결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의 난리를 겪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때에 엘리야의 기도가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이런 큰 능력을 행한 후에 오히려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승리하였지만 누구도 그 승리에 동참하지를 않았기 대문입니다. 엘리야의 생각으로는 신앙의 승리가 있은 후라면 적어도 수 많은 백성들이 따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동참하여야 할 것이지만 사람들은 엘리야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면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줄 알았는데 어느 누구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각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그 아픈 마음을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마음을 나누면서 속에 담긴 얘기라도 나누면 시원하겠지만 누구도 엘리야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고독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인정을 받으면 피곤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칭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악의 무리들의 고함만 무성하게 들렸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서도 예수님을 죽이려던 무리들과도 같았습니다. 엘리야는 실로 고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혼자 남은 세상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세상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더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했는데 엘리야는 혼자 있기 때문에 더 괴로움이 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고독은 교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기 독선에 빠진 자는 교만한 자요 그런 자는 고독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던 마르다는 자기는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왜 준비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불평을 하였습니다.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헌신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떠나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대사를 행한 후에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엘리야의 생명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3절에 보면 엘리야는 생명을 위하여 도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세벨은 죽이려 하고 엘리야는 더 살기를 원해서 도망을 했습니다.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백성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자신을 갖지 못한 것은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건지려 하는 자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리가 잠깐 사라진 듯합니다. 사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를 원했다면 사자를 미리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자를 미리 보낸 이유는 엘리야에게 겁을 주어 그 곳에서 쫓아내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소식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850명이나 되는 우상의 선지자를 죽인 그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은 과거에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그 열정적 믿음이 온데 간데 없이 도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세벨의 공격과 위협 앞에서 그는 철저하게 무력하여졌는데 바로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히 11:38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때리면 때릴수록 더 강해지고 죽이면 더 강해지는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지만 목숨을 아끼는 자는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세번째
의 이유는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 능력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단 말입니까 대사를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엘리야도 인간이기에 그런 마음이 잠시 생겼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0절과 14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자기의 열심이 특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을 다분히 보여줍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누구나 이런 실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수고하였는데 결과가 이렇게 밖에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분명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에 빠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부분 실망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불평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실망의 원인은 바로 찾아 오셔서 함께하시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낙심의 결과 사람들은 낙심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난다든지, 불신자 같으면 술, 마약, 폭력등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기도피입니다. 낙심에 빠진 엘리야는 하나님을 떠난다든지 인간의 몸을 학대하는 것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도 그렇게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우선 광야로 도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죽기를 구했습니다. 민족적 죄와 싸울 지혜와 용기를 구할 마음이 그에게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흔들리고 용기가 사라지면 이렇게 죽음으로 모든 일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살은 죄악일 뿐만 아니라 비겁한 일입니다. 자살할 용기로 살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는 말은 3절에 목숨을 위하여 도망했다는 말과 대조가 됩니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는 것은 다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데려가 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피곤하고 늙고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갈멜산 사건으로 인해 자기의 기대가 충족하지 않은 세상에 더 이상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은 이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생의 바퀴를 더욱 더 힘들게 돌아가도록 만들 뿐입니다. 죽기를 자처하는 엘리야는 급기야 잠을 청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영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나서서 일하지 않고 도망하여 잠을 잤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요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육신적으로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아합의 수레 앞에서 28Km를 뛰었고 곧이어서 광야로 들어갔고 금식으로 인해서 육신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한 실망과 울분 속에서 터져나온 울음 후에 이루어진 낙심의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일해서 무엇하나 싶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잤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포자기의 잠이었습니다. 이런 때에는 아무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외적인 어떤 공격보다, 몸에 생긴 어떤 질병보다 더 무선운 병입니다. 낙심은 인류 최대의 병입니다. 폴 마이어 박사가 이런 연구를 한적이 있습니다. 어항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막아서 한 쪽에는 금붕어를 놓고 다른 한 쪽에는 메기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 먹으려고 금붕어를 향해서 급하게 공격을 하다가 가운데 막혀 있는 유리에 부딪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하는 동안 한 번은 가운데 막혀 있는 유리를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 먹으려고 쏜살 같이 달려가다가 유리가 있었던 자리에서 그만 딱 멈추더니다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사람은 몇 번은 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몇 번의 실패가 있으면 그 다음은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젊어서의 실패 후에는 다시 도전을 하지만 나이가 든 후에 실패하면 다시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는 인류 최대의 병입니다. 엘리야는 포기의 잠을 청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가지 구하지 않고 주저 앉지 않았습니까 실망의 잠을 자고 있지나 않습니까 봉사하다가 실망의 잠을 자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나셔서 주님을 찾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괴로움과 실망과 낙심에 빠져 있을 때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그대로 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 그의 백성이 마지막 구석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직전에 구해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서 건져주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간은 그 순간이 더 고달플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해가 뜨기 직전이 제일 어둡고,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려운 때임을 명심하여야 그 고비에 쓰러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여호와의 산으로 부르십니다(11절). 엘리야로 하여금 여호와의 산에 섰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세워놓고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후에 지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불을 보여주십니다. 강한 하나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속삭이십니다. 낙심에 처해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은 꾸중이 섞여 있는 말입니다. 책임을 추궁하시는 하나님의 엄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 할 네가 어찌 여기에 도망하여 있느냐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부드러운 속삭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지진 중에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불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불의 역사를 체험하고, 소나기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도 안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큰 것만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미하고 조용하게 들리는 음성도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 역사와 소나기의 역사 후에도 엘리야는 낙심에 빠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세미한 음성 후에 엘리야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큰 것만을 구하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큰 일이나 있어야 하나님의 일로 생각을 합니다. 책임을 맡은 자들도 큰 일이나 주어야 열심을 냅니다. 작은 일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도 불과 같이 소나기와 같이 내려야만 응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은 부분에 세미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은 큰 것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았을 때 그는 무슨 큰 일이 주어질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고작 그에게 주어진 일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시시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부하가 하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주인이여 이보다 더 큰 일을 시켰으면 행하지 않으셨겠나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일을 중히 여깁니다. 만약에 나아만이 큰 일만 중히 여겼다면 그는 큰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일을 중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신 하나님은 이제 엘리야의 넉두리를 들어주십니다.채찍으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와 같이 풍랑으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낙심한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넉두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것 같으나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야의 아픔을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말을 다 들으신 후에 위로해 주십니다. 18절에 보면 7천을 남겨 놓았다고 말씀하시므로 엘리야가 전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시면서 엘리야로 하여금 힘을 내도록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씀으로 엘리야의 피곤을 위로해 주십니다. 약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고독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피곤하고 지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 것은 항상 찾아오셔서 위로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심령마다 찾아오셔서 우리로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위로하신 하나님은 이제 엘리야에게 필요한 떡과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5절로 7절을 보면 엘리야는 그 떡을 먹고 40일 40야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호렙산까지 약 320Km를 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피곤할 때 영원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말씀을 먹으면 영적으로 소생하여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넉근히 지날 수 있을줄로 믿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이르기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슬퍼 눈물 흘리고 있습니까 낙심하는 심령마다 주의 말씀의 떡을 먹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환경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엘리야는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고독을 이기는 비결,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찾아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마다 승리할줄로 믿습니다.
3. 사명을 주신 하나님 찾아오신 하나님은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공급해주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면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면 엘리사가 죽인다고 앞으로 될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경 속에 처해 있는 그의 백성을 구하신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수 많은 핍박과 매맞음이 있은 후에 곧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새로운 사역지를 주셨던 것을 사도행전 23장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참 평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역경 속이지만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15절의 말씀에 보면 “네 길을 돌이켜”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일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경은 무엇이며 이 역경 속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은 어떠합니까 그 환경에서 내가 설정해 놓은 기준점은 어디쯤 됩니까 혹시 그 환경 때문에 실망하며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범죄로 낙심하고 환경에 낙심하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낙심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7천을 남겨놓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천군천사를 예비해 놓으시고 계십니다. 낙심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하나님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결론은 하나님만이 내리십니다. 내 환경을 내가 결론 내리지 맙시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해결해 줄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환경을 정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셨습니다. 인간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수시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교제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스스로 대화의 창구를 열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다른 종교는 스스로 신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유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오셔서 인간과 교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좋은 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 이루어진 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단절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멀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돌에 묶어 돌고 있는 돌맹이가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본문은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멜산 상에서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의 기도 싸움에서 승리한 엘리야, 그 결과로 모든 죄악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울러 하늘을 향해 기도하므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없어 매말랐던 대지에 비를 뿌리는 능력을 행했던 엘리야가 낙심에 빠져서 스스로 죽기를 간구할 때에 찾아 오신 하나님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이제 실의에 빠져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낙심하고 포기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찾아오신 하나님”이란 제목 하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 피차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 낙심에 빠진 엘리야 사람마다 낙심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 어려운 일 때문에, 혹은 답답함 때문에, 혹은 소망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혹은 업무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혹은 길이 험하고 위태로워서, 혹은 실패 때문에, 혹은 질병 때문에 낙심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극작가 알만 사쿨은 진노의 밤이라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말하기를 인간은 차라리 신이 되든가 돌맹이가 되었으면 불안이 없었을 것인데 신도 아니요 돌맹이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불안이 있고 권태가 있고 피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빌린다면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신도 아니요 돌맹이도 아닌 인간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주변에 주어진 환경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변의 환경을 돌아보면서 자기가 설정해 놓은 기준치보다 주변의 환경이 더 높으면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낙심하는 기준치가 다릅니다. 전에는 선풍기 한 대만 있어도 만족하던 것이 주변이 에어컽디셔너로 가득차게 되므로 선풍기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실망을 하게 됩니다. 환경을 보는 인간은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 낙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도 낙심에 빠졌습니다. 엘리야의 낙심은
첫째로 고독 때문에 온 것이었습니다. 고독은 무서운 병입니다. 고독이 어디서 옵니까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상에서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기도의 싸움을 하였습니다. 거기서 불을 내리는 쾌거를 이루면서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도는 3년 6개월의 가뭄을 해결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의 난리를 겪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때에 엘리야의 기도가 있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이런 큰 능력을 행한 후에 오히려 낙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승리하였지만 누구도 그 승리에 동참하지를 않았기 대문입니다. 엘리야의 생각으로는 신앙의 승리가 있은 후라면 적어도 수 많은 백성들이 따르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동참하여야 할 것이지만 사람들은 엘리야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면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께 돌아와 찬송과 영광을 돌릴줄 알았는데 어느 누구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각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한편 엘리야는 그 아픈 마음을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마음을 나누면서 속에 담긴 얘기라도 나누면 시원하겠지만 누구도 엘리야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고독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인정을 받으면 피곤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는 칭찬은 고사하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악의 무리들의 고함만 무성하게 들렸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서도 예수님을 죽이려던 무리들과도 같았습니다. 엘리야는 실로 고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혼자 남은 세상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세상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더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했는데 엘리야는 혼자 있기 때문에 더 괴로움이 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고독은 교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기 독선에 빠진 자는 교만한 자요 그런 자는 고독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던 마르다는 자기는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왜 준비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불평을 하였습니다.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헌신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떠나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대사를 행한 후에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은 엘리야의 생명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3절에 보면 엘리야는 생명을 위하여 도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세벨은 죽이려 하고 엘리야는 더 살기를 원해서 도망을 했습니다.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백성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자신을 갖지 못한 것은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건지려 하는 자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리가 잠깐 사라진 듯합니다. 사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기를 원했다면 사자를 미리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자를 미리 보낸 이유는 엘리야에게 겁을 주어 그 곳에서 쫓아내게 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소식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850명이나 되는 우상의 선지자를 죽인 그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은 과거에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그 열정적 믿음이 온데 간데 없이 도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세벨의 공격과 위협 앞에서 그는 철저하게 무력하여졌는데 바로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히 11:38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때리면 때릴수록 더 강해지고 죽이면 더 강해지는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지만 목숨을 아끼는 자는 패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세번째
의 이유는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런 능력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단 말입니까 대사를 이루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엘리야도 인간이기에 그런 마음이 잠시 생겼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0절과 14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아뢰기를 자기의 열심이 특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모습을 다분히 보여줍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면 누구나 이런 실망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수고하였는데 결과가 이렇게 밖에 없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분명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믿음의 사람 엘리야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에 빠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부분 실망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불평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실망의 원인은 바로 찾아 오셔서 함께하시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낙심의 결과 사람들은 낙심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난다든지, 불신자 같으면 술, 마약, 폭력등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기도피입니다. 낙심에 빠진 엘리야는 하나님을 떠난다든지 인간의 몸을 학대하는 것으로 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도 그렇게 좋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우선 광야로 도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죽기를 구했습니다. 민족적 죄와 싸울 지혜와 용기를 구할 마음이 그에게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흔들리고 용기가 사라지면 이렇게 죽음으로 모든 일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자살은 죄악일 뿐만 아니라 비겁한 일입니다. 자살할 용기로 살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는 말은 3절에 목숨을 위하여 도망했다는 말과 대조가 됩니다. 그가 죽기를 원했다는 것은 다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데려가 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피곤하고 늙고 지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갈멜산 사건으로 인해 자기의 기대가 충족하지 않은 세상에 더 이상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은 이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생의 바퀴를 더욱 더 힘들게 돌아가도록 만들 뿐입니다. 죽기를 자처하는 엘리야는 급기야 잠을 청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이 영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나서서 일하지 않고 도망하여 잠을 잤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요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육신적으로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아합의 수레 앞에서 28Km를 뛰었고 곧이어서 광야로 들어갔고 금식으로 인해서 육신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잠을 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대한 실망과 울분 속에서 터져나온 울음 후에 이루어진 낙심의 잠을 잤습니다. 이렇게 일해서 무엇하나 싶었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을 잤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포자기의 잠이었습니다. 이런 때에는 아무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외적인 어떤 공격보다, 몸에 생긴 어떤 질병보다 더 무선운 병입니다. 낙심은 인류 최대의 병입니다. 폴 마이어 박사가 이런 연구를 한적이 있습니다. 어항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막아서 한 쪽에는 금붕어를 놓고 다른 한 쪽에는 메기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 먹으려고 금붕어를 향해서 급하게 공격을 하다가 가운데 막혀 있는 유리에 부딪쳐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하는 동안 한 번은 가운데 막혀 있는 유리를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메기가 금붕어를 잡아 먹으려고 쏜살 같이 달려가다가 유리가 있었던 자리에서 그만 딱 멈추더니다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사람은 몇 번은 도전을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지는 못합니다. 몇 번의 실패가 있으면 그 다음은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젊어서의 실패 후에는 다시 도전을 하지만 나이가 든 후에 실패하면 다시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는 인류 최대의 병입니다. 엘리야는 포기의 잠을 청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가지 구하지 않고 주저 앉지 않았습니까 실망의 잠을 자고 있지나 않습니까 봉사하다가 실망의 잠을 자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나셔서 주님을 찾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괴로움과 실망과 낙심에 빠져 있을 때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이 그대로 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때에 따라서 그의 백성이 마지막 구석에 몰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직전에 구해주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 속에서 건져주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인간은 그 순간이 더 고달플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해가 뜨기 직전이 제일 어둡고,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춥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려운 때임을 명심하여야 그 고비에 쓰러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여호와의 산으로 부르십니다(11절). 엘리야로 하여금 여호와의 산에 섰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세워놓고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후에 지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불을 보여주십니다. 강한 하나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에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속삭이십니다. 낙심에 처해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이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은 꾸중이 섞여 있는 말입니다. 책임을 추궁하시는 하나님의 엄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백성을 위해서 일해야 할 네가 어찌 여기에 도망하여 있느냐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부드러운 속삭임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지진 중에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불 가운데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엘리야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불의 역사를 체험하고, 소나기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도 안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큰 것만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미하고 조용하게 들리는 음성도 귀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 역사와 소나기의 역사 후에도 엘리야는 낙심에 빠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세미한 음성 후에 엘리야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나 큰 것만을 구하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큰 일이나 있어야 하나님의 일로 생각을 합니다. 책임을 맡은 자들도 큰 일이나 주어야 열심을 냅니다. 작은 일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도 불과 같이 소나기와 같이 내려야만 응답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은 부분에 세미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만은 큰 것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았을 때 그는 무슨 큰 일이 주어질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고작 그에게 주어진 일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을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시시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부하가 하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주인이여 이보다 더 큰 일을 시켰으면 행하지 않으셨겠나이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일을 중히 여깁니다. 만약에 나아만이 큰 일만 중히 여겼다면 그는 큰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작은 일을 중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신 하나님은 이제 엘리야의 넉두리를 들어주십니다.채찍으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와 같이 풍랑으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낙심한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리야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넉두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것 같으나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야의 아픔을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말을 다 들으신 후에 위로해 주십니다. 18절에 보면 7천을 남겨 놓았다고 말씀하시므로 엘리야가 전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시면서 엘리야로 하여금 힘을 내도록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부드럽고 사랑스런 말씀으로 엘리야의 피곤을 위로해 주십니다. 약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고독한 마음을 위로하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피곤하고 지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말 것은 항상 찾아오셔서 위로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심령마다 찾아오셔서 우리로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위로하신 하나님은 이제 엘리야에게 필요한 떡과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5절로 7절을 보면 엘리야는 그 떡을 먹고 40일 40야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호렙산까지 약 320Km를 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피곤할 때 영원한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말씀을 먹으면 영적으로 소생하여 이 광야 같은 세상을 넉근히 지날 수 있을줄로 믿습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이르기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슬퍼 눈물 흘리고 있습니까 낙심하는 심령마다 주의 말씀의 떡을 먹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환경을 극복하는 힘이 됩니다. 엘리야는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낙심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고독을 이기는 비결, 시험을 이기는 비결은 찾아오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마다 승리할줄로 믿습니다.
3. 사명을 주신 하나님 찾아오신 하나님은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공급해주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면 예후가 죽이고 예후의 칼을 피하면 엘리사가 죽인다고 앞으로 될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경 속에 처해 있는 그의 백성을 구하신 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수 많은 핍박과 매맞음이 있은 후에 곧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새로운 사역지를 주셨던 것을 사도행전 23장 2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참 평강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역경 속이지만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십니다. 15절의 말씀에 보면 “네 길을 돌이켜”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일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서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경은 무엇이며 이 역경 속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은 어떠합니까 그 환경에서 내가 설정해 놓은 기준점은 어디쯤 됩니까 혹시 그 환경 때문에 실망하며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하나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범죄로 낙심하고 환경에 낙심하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낙심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엘리야의 시대에 7천을 남겨놓으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천군천사를 예비해 놓으시고 계십니다. 낙심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 하나님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결론은 하나님만이 내리십니다. 내 환경을 내가 결론 내리지 맙시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해결해 줄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환경을 정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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