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개척자 야베스 (대상4:9-10)
본문
오랜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네 천사가 다가와 한 마 디씩 물었답니다.
첫째 천사는 '어떤 방법으로 만드십니까',
둘째 천사는 '왜 만드십니까',
셋째 천사는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습니까',
넷째 천사는 '그 게 얼마입니까'.
첫째 천사는 과학자였고,
둘째 천사는 철학자,
셋째 천사는 박애주의자, 그리고
넷째 천사는 부동산업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 째 천사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경탄하는 눈으로 하나님이 만드 시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저 기뻐 찬미만 하고 있었는데 그 천사는 신비가였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 라질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숙명이 아니라 운 명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계속되는 족보 이야기 중간에 끼워져 있는 한 토막입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읽기 싫은 부분이 족보인데 그런 점에 서 이 이야기는 지루한 족보와 함께 곧잘 묻혀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족보만큼 재미없고 지겨운 것이 없습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 염없이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족보는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담아내는 한 가지 기록방식입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독특한 삶의 기록과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또한 족보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역대기 기자는 아홉 장에 걸친 긴 족보를 나열해 나가면서 그 중간에 약간의 해설을 덧붙여 야베스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베스, 상당히 낯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어느 곳에도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신비롭게도 느껴집니다.
야베스에 대한 정보 가 이곳 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더 그를 궁금하게 하고 신비롭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서 기자는 왜 야베스 라는 인물을 이 장대한 족보 이야기 속에서 특이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일 까.' 또 '그는 야베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어떤 관점에서 야베스의 생을 조명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살아온 삶을 단 두 절로 기록해 보라 고 한다면 무어라고 쓸 것입니까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그 생을 요약하겠습 니까. 그러니 오늘 이 두 절 속에 요약된 야베스라는 사람의 일생 속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최소한 50세까지는 살았던 인물로 추측됩니다. 그 50년 동안 무수 히 많은 일들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50년을 이 두 절 속에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아마 성서 기자는 이 두 절 속에 가 장 중요하다고 판단된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럼 그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아마 역대기 기자는 야베스에 관한 여러 가 지 자료들을 보면서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여러 천사들 처럼 그의 재산목록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학벌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업적 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가족사항을 기록할 것인가. 얼마나 심사숙고했을까 요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대할 때면 한 사람의 삶을 단 두절로 압축해서 그 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이 성서기자가 얼마나 고심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야베스가 누구인지를 함께 추적해 보십시다. 성서기자가 9절에서 야베스를 소개할 때 3인칭 남성단수동사를 사용했다는 점에 서 야베스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가 몇인지는 알 수 없는 그의 형제 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 가장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오른, 상당한 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출세해서 권세 있는 높은 자리에 오른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존귀한 자'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존경받는 인 물'이라는 뜻도 됩니다.
즉 야베스는 그의 많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출세한 사람, 또한 그러면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야베스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길래 그 형제 들보다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우리에게는 당연히 그런 궁금증이 동합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었기에, 무언가 대단한 삶을 산 사람 이었기에 그러한 평가가 따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야베스가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야베 스'라는 그의 이름에 얽힌 가슴 아픈 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어미 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아닌 그를 낳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겁니까 이것은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 지가 살아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 에 대해서 본문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탄생 이야기 에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야베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태어난 '유복자'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야베스, 곧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름을 지어주었 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짓는 법이 없습니다. 신중히 짓고, 가급적이 면 좋은 뜻을 담아 짓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수고와 고통'이라는 뜻의 야베스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낳은 어미의 고통이 깃들어 있겠고 특히 출산의 산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산모가 출산하러 방에 들어가 면서 댓돌에 놓인 신발을 한 번 더 보고 들어갔겠습니까 살아서 나올지 죽어 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출산은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베냐민의 어머 니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 극심한 산고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그녀가 죽어가면서 그 아이에게 붙인 이름이 베노니, 즉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나 중에 야곱이 그의 이름이 좋지 않다 싶어 베냐민이라고 고쳤습니다만은 이 야 베스의 어머니도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으며 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모든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 이름을 '야베스'라고 짓지는 않습니다. 야베스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박고통', 김산고', '이진통' 이런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베스라 이름붙인 것은 일반적인 산고와는 다른 산모가 죽느냐 아니면 아이가 죽느냐는 긴박한 상황에서 낳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더 기억해야할 것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 구절은 '내가 고통 중에서 너를 낳았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내가 고통 중 에 있는 너를 낳았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번역한 다면 '내가 고통 중에 있는 너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뜻입니다. 산모의 고통 과 신생아의 고통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 것입니다. 육체적 산고도 산고지만 아빠 없는 자식을 낳는 그 여 인의 심리적 아픔은 또 얼마였겠습니까 누구 하나 그녀의 수고를 위로해 주는 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이를 장차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 하는 까마득함 이 그녀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엄마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태 어나는 핏덩이에게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야베스가 어떤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남다른 산고를 산모가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고통 중에 태어나 고통 가운데 평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아무런 연고 없는 홀어머니 밑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신체적 중증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고통 중에 살아간 자가 바로 야베스입니다. '존귀한 자', 아니 었습니다. 야베스는 결코 존귀한 자로 태어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존귀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비천한 환경에서 고통이라는 자기 이름을 평생 의 멍에처럼 걸머지고 산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제 그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보십시다.
10절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 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내게 복에 복을 더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은 갑절의 복을 요 청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배나 더 되는 복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베스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두 배의 축복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역을 넓혀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영역을 넓혀달라는 것은 한계나 장애를 없 애달라는 뜻인데 이것은 야베스가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가 건강한 자처럼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이 기도에 서 우리는 삶에 지쳐 쓰러져 있는 야베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기진 맥진한 채 땅에 엎드러져서 간신히 얼굴을 추켜들고 하나님께 손을 뻗으며 도 와달라고 간청하는 야베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의 삶에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고 염려거리가 많고 어려운 일들 이 많았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베스의 기도를 풀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제겐 여러 가지 장애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 그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주소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주님이 저 를 도와주옵소서."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애끓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베스의 기도가 완결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뉘앙스가 전혀 살아있지 않은데 히브리 원문으 로 보면 그는 본 문장은 말도 못하고 조건절 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을텐데.' 어떻습니까 이러한 기도가 믿음이 없는 기도라고 여겨지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처철했는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말끝을 흐렸다고 해서 기도가 불분명해지거나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말끝을 흐렸기에 내심 그만큼 그 기도가 더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문장이 완결되었더라면 그 여운이 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맺힌 기도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만큼 여유롭다면 그것은 사치이거나 외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만 해 주신다면.'이라고 기도하는 사람 은 지금 그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는 엄청난 환 난 앞에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근심이 계속해서 그를 짓눌려 옵니다. 그러 니 거기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없애달라는 겁니다.
이렇게 야베스의 일생은 고통과 환난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존귀케 될 요 소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안좋은 일 투성이였고 견디기 어려운 환난의 연속이었고 짓누르는 근심거리 속에 한많은 일생을 살아가야 했던 야베 스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삶의 자리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해 주신다면'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며 살았던 위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인생,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도 움을 청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무 엇이었겠습니까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평생을 기도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야베스의 기도가 한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은 그렇다고 해서 야베 스가 한 번만 기도드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면 성서기자가 야베스가 했던 다른 일보다 기도한 것만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베스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한 일이 많았겠지만 그 모두가 그의 기도를 제치고 앞세울 만큼 뛰어 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 하면 생각나는 첫 번째 것이 기도라고 할만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 끊임없는 기도를 드렸던 야베스, 그 기도의 열매가 바로 오늘의 존귀한 삶으로 맺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우간다의 한 원주민이 선교사 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늘 조용한 장소를 택하여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그 장소를 찾자 어느덧 그 수풀 사이 로 길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수풀은 너무 빨리 자라기 때문에 만일 그가 하루라도 가지 않으면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풀은 금새금새 자 라 우거졌습니다. 그가 이틀을 가지 않으면 그 수풀은 더 높이 자라게 되고 만 일 그가 경건의 시간을 계속 빠뜨리면 그 길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 원주민의 영적 수준은 그가 매일 나아가는 길로 측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건의 길은 어떻습니까 그 길은 잘 나 있습니까 혹 길이 보일라 말라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지는 않았습니까 무엇에 그리도 분주해서 그 가장 중요한 길을 잃어버리고 사는 겁니까 그나마 내가 너무도 안일하게, 나태하게, 외식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이라도 있으십 니까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어서 그 길을 닦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존귀한 삶의 여부가 달려있습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해 주신다면. 복의 복을 더해주시고, 내 지경을 넓혀주시고, 주 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주시기만 하신다 면. 정녕 주님이 제게 그러신다면." 이렇게 염원하며 기도하는 야베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 로 하여금 .하게 해 주셨다'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실현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야베스가 그토록 염원한 것을 하나님이 직접 나셔서 모조리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야베스의 존귀한 생 이었습니다. 즉 전혀 존귀하지 않게 태어난 야베스가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들 을 수 있는 인생을 산 것은 바로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말 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야베스의 삶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야베스와 같은 처지에서 태어나 야베스와 같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생을 살았다면 과연 여러분은 오늘에 무엇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존귀한 자로서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폐인 이거나 절망 속에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야베스의 어린 시절은 고통이었고 그의 성장기는 환난과 근심의 연속이었지 만 그의 성년은 '존귀한 자'였습니다. 무엇이 그의 일생에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악한 삶의 현실 속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 기 생을 감당해갔던 그의 의지'였습니다. 그는 운명의 개척자로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갔던 것입니다. 요즈음 시중에 베스트 셀러
1, 2위를 오르내리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 와세대대 정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오토다케 히르타다가 쓴 '오체불만족'이 라는 책입니다. 그는 정상인이 아닌 중증 장애인입니다. 사지가 각각 10cm에 불과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신체를 '초개성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글씨를 뺨과 어깨 사이에 연필을 끼워 써내려 갑니다. 가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쪽을 어깨로 누른 채 얼굴을 돌려가며 종이를 자릅니다. 양쪽 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블하고, 겨드랑이로 철봉을 껴앉고 턱걸이를 합니다. 그는 그것을 '그만의 장기'라고 자랑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별명은 '휠체어의 왕자,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주눅들기는 커녕 골목대장 노릇을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사지가 없는 오토다케를 출산 후 한달 만에 처음 그를 본 그의 어머니가 그를 보고 한 말은 '아, 귀여워'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그의 존재를 알리려 일 부러 산책을 데리고 나갔고 그의 초등학교 은사였던 다카기 선생은 자원해서 4 년간 그의 담임을 맡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절대 오토다케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신 중의 병신인 오토다케는 정상인도 들어가기 힘든 와세대 대학생이 되 어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귀한 자로 평가받는 야베스, 그러나 그는 결코 존귀하게 태어난 자가 아니 었습니다. 그는 실로 고통 중에서 태어나 평생을 환난과 근심 속에서 고통스럽 게 산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열악한 자기 인생을 존귀한 인생으로 개 척해 나갔습니다. 결코 그는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이웃에 불평하며 산 못난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또 자랐지만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 승리자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야베스 앞에서 돌아보는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 유복자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중증 장애를 가진 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환난과 근심에 짓눌려 사는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의기소침하고 절망하십니까. 이 야베스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온갖 인생의 악조건을 다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존귀한 생을 일궈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 사는 우리도 이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소모적인 자기 신세 한 탄에 빠져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자기할 나름임을 이 야베스는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려면, 원망하려면 우리 주님처럼 불평거리, 원망거리가 많은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자기를 낮추어 오사 십자가에 죽 기까지 복종하신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 한 삶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 에게 가장 존귀히 여김받는 분이 되었다고 바울은 빌2:10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운명의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에 끌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뒤바꾸어놓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 인생 에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우리 운명은 바뀌어집니다. 이제 떨쳐 일어서십시다. 원망, 불평, 근심, 염려를 다 기도 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굴려가십시다. 그러면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을 추진시키는 연료가 되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바꾸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받는 실존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성서기자가 압축해서 소개하는 야베스의 삶을 음미해 보십시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 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 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은 인생들임에도 불평과 원망에 익숙한 삶 을 살아온 저희들이 이 시간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들을 깨닫는 은혜 를 주시고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많 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면서도 존귀한 삶을 이루기보다는 부끄럽고 의미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많은 저희들입니다. 야베스의 삶을 본받게 하사 참으로 저희 일생이 다하는 순간 '이는 실로 존귀한 삶을 살다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평을 듣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한 해의 절반을 접습니다. 새달엔 참으로 새로워진 변화된 심령으로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째 천사는 '어떤 방법으로 만드십니까',
둘째 천사는 '왜 만드십니까',
셋째 천사는 '제가 도와드릴 것은 없습니까',
넷째 천사는 '그 게 얼마입니까'.
첫째 천사는 과학자였고,
둘째 천사는 철학자,
셋째 천사는 박애주의자, 그리고
넷째 천사는 부동산업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 째 천사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경탄하는 눈으로 하나님이 만드 시는 세상을 바라보며 그저 기뻐 찬미만 하고 있었는데 그 천사는 신비가였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어떠한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달 라질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숙명이 아니라 운 명입니다. 오늘 본문은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계속되는 족보 이야기 중간에 끼워져 있는 한 토막입니다. 성경 가운데 가장 읽기 싫은 부분이 족보인데 그런 점에 서 이 이야기는 지루한 족보와 함께 곧잘 묻혀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족보만큼 재미없고 지겨운 것이 없습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 염없이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족보는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를 담아내는 한 가지 기록방식입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독특한 삶의 기록과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또한 족보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역대기 기자는 아홉 장에 걸친 긴 족보를 나열해 나가면서 그 중간에 약간의 해설을 덧붙여 야베스라는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베스, 상당히 낯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그 어느 곳에도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신비롭게도 느껴집니다.
야베스에 대한 정보 가 이곳 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더 그를 궁금하게 하고 신비롭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서 기자는 왜 야베스 라는 인물을 이 장대한 족보 이야기 속에서 특이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일 까.' 또 '그는 야베스에 대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어떤 관점에서 야베스의 생을 조명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살아온 삶을 단 두 절로 기록해 보라 고 한다면 무어라고 쓸 것입니까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그 생을 요약하겠습 니까. 그러니 오늘 이 두 절 속에 요약된 야베스라는 사람의 일생 속에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최소한 50세까지는 살았던 인물로 추측됩니다. 그 50년 동안 무수 히 많은 일들이 그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50년을 이 두 절 속에 담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아마 성서 기자는 이 두 절 속에 가 장 중요하다고 판단된 이야기를 담으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럼 그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아마 역대기 기자는 야베스에 관한 여러 가 지 자료들을 보면서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여러 천사들 처럼 그의 재산목록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학벌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업적 을 기록할 것인가, 그의 가족사항을 기록할 것인가. 얼마나 심사숙고했을까 요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대할 때면 한 사람의 삶을 단 두절로 압축해서 그 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이 성서기자가 얼마나 고심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야베스가 누구인지를 함께 추적해 보십시다. 성서기자가 9절에서 야베스를 소개할 때 3인칭 남성단수동사를 사용했다는 점에 서 야베스는 남자입니다.
그런데 그 야베스가 몇인지는 알 수 없는 그의 형제 들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 가장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 오른, 상당한 힘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하면 출세해서 권세 있는 높은 자리에 오른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존귀한 자'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존경받는 인 물'이라는 뜻도 됩니다.
즉 야베스는 그의 많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출세한 사람, 또한 그러면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야베스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길래 그 형제 들보다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우리에게는 당연히 그런 궁금증이 동합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었기에, 무언가 대단한 삶을 산 사람 이었기에 그러한 평가가 따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은 야베스가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야베 스'라는 그의 이름에 얽힌 가슴 아픈 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어미 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의 이름을 어머니가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아버지도 아닌 그를 낳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 겁니까 이것은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 지가 살아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아버지 에 대해서 본문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탄생 이야기 에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야베스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태어난 '유복자'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야베스, 곧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름을 지어주었 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을 때 그냥 짓는 법이 없습니다. 신중히 짓고, 가급적이 면 좋은 뜻을 담아 짓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수고와 고통'이라는 뜻의 야베스라는 이름을 그에게 붙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낳은 어미의 고통이 깃들어 있겠고 특히 출산의 산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오죽하면 산모가 출산하러 방에 들어가 면서 댓돌에 놓인 신발을 한 번 더 보고 들어갔겠습니까 살아서 나올지 죽어 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출산은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베냐민의 어머 니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 극심한 산고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그녀가 죽어가면서 그 아이에게 붙인 이름이 베노니, 즉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나 중에 야곱이 그의 이름이 좋지 않다 싶어 베냐민이라고 고쳤습니다만은 이 야 베스의 어머니도 바로 그러한 고통을 겪으며 이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모든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 이름을 '야베스'라고 짓지는 않습니다. 야베스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박고통', 김산고', '이진통' 이런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베스라 이름붙인 것은 일반적인 산고와는 다른 산모가 죽느냐 아니면 아이가 죽느냐는 긴박한 상황에서 낳은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더 기억해야할 것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는 이 구절은 '내가 고통 중에서 너를 낳았다'고 읽을 수도 있지만 '내가 고통 중 에 있는 너를 낳았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번역한 다면 '내가 고통 중에 있는 너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뜻입니다. 산모의 고통 과 신생아의 고통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 것입니다. 육체적 산고도 산고지만 아빠 없는 자식을 낳는 그 여 인의 심리적 아픔은 또 얼마였겠습니까 누구 하나 그녀의 수고를 위로해 주는 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이를 장차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 하는 까마득함 이 그녀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엄마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태 어나는 핏덩이에게도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야베스가 어떤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남다른 산고를 산모가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고통 중에 태어나 고통 가운데 평생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아무런 연고 없는 홀어머니 밑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신체적 중증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고통 중에 살아간 자가 바로 야베스입니다. '존귀한 자', 아니 었습니다. 야베스는 결코 존귀한 자로 태어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존귀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비천한 환경에서 고통이라는 자기 이름을 평생 의 멍에처럼 걸머지고 산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제 그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보십시다.
10절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 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기도 속에서 우리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을 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내게 복에 복을 더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은 갑절의 복을 요 청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배나 더 되는 복을 자기에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베스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의 두 배의 축복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영역을 넓혀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영역을 넓혀달라는 것은 한계나 장애를 없 애달라는 뜻인데 이것은 야베스가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가 건강한 자처럼 활동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간청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이 기도에 서 우리는 삶에 지쳐 쓰러져 있는 야베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기진 맥진한 채 땅에 엎드러져서 간신히 얼굴을 추켜들고 하나님께 손을 뻗으며 도 와달라고 간청하는 야베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의 삶에 얼마나 걱정거리가 많고 염려거리가 많고 어려운 일들 이 많았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베스의 기도를 풀어보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제겐 여러 가지 장애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님, 그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주소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주님이 저 를 도와주옵소서." 참으로 심금을 울리는 애끓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베스의 기도가 완결되지 않은 채 끝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뉘앙스가 전혀 살아있지 않은데 히브리 원문으 로 보면 그는 본 문장은 말도 못하고 조건절 만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해 주시기만 한다면.'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을텐데.' 어떻습니까 이러한 기도가 믿음이 없는 기도라고 여겨지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가 얼마나 처철했는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말끝을 흐렸다고 해서 기도가 불분명해지거나 강도가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말끝을 흐렸기에 내심 그만큼 그 기도가 더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문장이 완결되었더라면 그 여운이 덜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맺힌 기도가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만큼 여유롭다면 그것은 사치이거나 외식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처럼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만 해 주신다면.'이라고 기도하는 사람 은 지금 그것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그는 엄청난 환 난 앞에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근심이 계속해서 그를 짓눌려 옵니다. 그러 니 거기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없애달라는 겁니다.
이렇게 야베스의 일생은 고통과 환난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존귀케 될 요 소라고는 전혀 없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안좋은 일 투성이였고 견디기 어려운 환난의 연속이었고 짓누르는 근심거리 속에 한많은 일생을 살아가야 했던 야베 스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삶의 자리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해 주신다면'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며 살았던 위인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에는 너무도 버거운 인생,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도 움을 청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무 엇이었겠습니까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평생을 기도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야베스의 기도가 한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은 그렇다고 해서 야베 스가 한 번만 기도드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면 성서기자가 야베스가 했던 다른 일보다 기도한 것만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베스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가 한 일이 많았겠지만 그 모두가 그의 기도를 제치고 앞세울 만큼 뛰어 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 하면 생각나는 첫 번째 것이 기도라고 할만큼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 끊임없는 기도를 드렸던 야베스, 그 기도의 열매가 바로 오늘의 존귀한 삶으로 맺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입니까. 우간다의 한 원주민이 선교사 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늘 조용한 장소를 택하여 경건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그 장소를 찾자 어느덧 그 수풀 사이 로 길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수풀은 너무 빨리 자라기 때문에 만일 그가 하루라도 가지 않으면 길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수풀은 금새금새 자 라 우거졌습니다. 그가 이틀을 가지 않으면 그 수풀은 더 높이 자라게 되고 만 일 그가 경건의 시간을 계속 빠뜨리면 그 길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 원주민의 영적 수준은 그가 매일 나아가는 길로 측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경건의 길은 어떻습니까 그 길은 잘 나 있습니까 혹 길이 보일라 말라 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말지는 않았습니까 무엇에 그리도 분주해서 그 가장 중요한 길을 잃어버리고 사는 겁니까 그나마 내가 너무도 안일하게, 나태하게, 외식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자기반성이라도 있으십 니까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어서 그 길을 닦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존귀한 삶의 여부가 달려있습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해 주신다면. 복의 복을 더해주시고, 내 지경을 넓혀주시고, 주 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주시기만 하신다 면. 정녕 주님이 제게 그러신다면." 이렇게 염원하며 기도하는 야베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을 직역하면 "하나님이 . 로 하여금 .하게 해 주셨다'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실현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야베스가 그토록 염원한 것을 하나님이 직접 나셔서 모조리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야베스의 존귀한 생 이었습니다. 즉 전혀 존귀하지 않게 태어난 야베스가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들 을 수 있는 인생을 산 것은 바로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말 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야베스의 삶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야베스와 같은 처지에서 태어나 야베스와 같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생을 살았다면 과연 여러분은 오늘에 무엇이 되어 있으리라 생각되십니까 이렇게 존귀한 자로서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으리라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폐인 이거나 절망 속에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야베스의 어린 시절은 고통이었고 그의 성장기는 환난과 근심의 연속이었지 만 그의 성년은 '존귀한 자'였습니다. 무엇이 그의 일생에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악한 삶의 현실 속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 기 생을 감당해갔던 그의 의지'였습니다. 그는 운명의 개척자로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갔던 것입니다. 요즈음 시중에 베스트 셀러
1, 2위를 오르내리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일본 와세대대 정치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오토다케 히르타다가 쓴 '오체불만족'이 라는 책입니다. 그는 정상인이 아닌 중증 장애인입니다. 사지가 각각 10cm에 불과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신체를 '초개성적'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글씨를 뺨과 어깨 사이에 연필을 끼워 써내려 갑니다. 가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쪽을 어깨로 누른 채 얼굴을 돌려가며 종이를 자릅니다. 양쪽 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블하고, 겨드랑이로 철봉을 껴앉고 턱걸이를 합니다. 그는 그것을 '그만의 장기'라고 자랑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별명은 '휠체어의 왕자, 나폴레옹'이었습니다. 주눅들기는 커녕 골목대장 노릇을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사지가 없는 오토다케를 출산 후 한달 만에 처음 그를 본 그의 어머니가 그를 보고 한 말은 '아, 귀여워'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그의 존재를 알리려 일 부러 산책을 데리고 나갔고 그의 초등학교 은사였던 다카기 선생은 자원해서 4 년간 그의 담임을 맡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절대 오토다케의 일을 대신해 주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병신 중의 병신인 오토다케는 정상인도 들어가기 힘든 와세대 대학생이 되 어 자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귀한 자로 평가받는 야베스, 그러나 그는 결코 존귀하게 태어난 자가 아니 었습니다. 그는 실로 고통 중에서 태어나 평생을 환난과 근심 속에서 고통스럽 게 산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열악한 자기 인생을 존귀한 인생으로 개 척해 나갔습니다. 결코 그는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이웃에 불평하며 산 못난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또 자랐지만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간 승리자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야베스 앞에서 돌아보는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 유복자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중증 장애를 가진 이가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환난과 근심에 짓눌려 사는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의기소침하고 절망하십니까. 이 야베스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온갖 인생의 악조건을 다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지만 존귀한 생을 일궈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 사는 우리도 이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소모적인 자기 신세 한 탄에 빠져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자기할 나름임을 이 야베스는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려면, 원망하려면 우리 주님처럼 불평거리, 원망거리가 많은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자기를 낮추어 오사 십자가에 죽 기까지 복종하신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 한 삶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 에게 가장 존귀히 여김받는 분이 되었다고 바울은 빌2:10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운명의 개척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운명에 끌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운명을 뒤바꾸어놓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에 우리 인생 에 변화가 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우리 운명은 바뀌어집니다. 이제 떨쳐 일어서십시다. 원망, 불평, 근심, 염려를 다 기도 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굴려가십시다. 그러면 그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을 추진시키는 연료가 되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바꾸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 존귀한 자라는 평가를 받는 실존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성서기자가 압축해서 소개하는 야베스의 삶을 음미해 보십시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 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 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너무도 많은 은혜를 입고 사랑을 받은 인생들임에도 불평과 원망에 익숙한 삶 을 살아온 저희들이 이 시간 말씀을 되새기며 주님 앞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들을 깨닫는 은혜 를 주시고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많 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면서도 존귀한 삶을 이루기보다는 부끄럽고 의미없는 삶을 살아갈 때가 많은 저희들입니다. 야베스의 삶을 본받게 하사 참으로 저희 일생이 다하는 순간 '이는 실로 존귀한 삶을 살다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평을 듣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한 해의 절반을 접습니다. 새달엔 참으로 새로워진 변화된 심령으로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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