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굶주린 인생을 사는가? (왕상17:8-16,갈1:11-24,눅7:11-17)
본문
어느 나라보다 자존심이 강한 국가가 북한이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기본적인 국가 이념 외에, 주체 사상이라 고 하는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외세를 배격한 채 자기 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나라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문을 닫아걸고 살 필요는 없을텐데도, 문을 꼭꼭 잠가 놓은 채 자기 나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라고 떠들어 왔습니다. 사실 정말 잘 살고 있다면, 아 무 거리낌없이 나라 전체를 공개하고 자랑할 법한데, 다른 나라 사람들 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랑만 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북한의 실상이 이번에 온 세상에 밝 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나 하는 것이 이번 쌀 지원 요청에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챙피하겠스리, 그렇게도 자기들이 욕을 해대는 일본에 손을 벌리고, 태국과 에집트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태국과 에집트로부터는 거절당 했습니다. 장삿속이 뻔한 일본만은 간사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도와주 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는 빌어먹을지언정, 같은 동족인 남한엔 손을 벌 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지간히도 급했던지, 급기야는 우리 정부에도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여러 말들이 있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무조건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얻어먹는 주제에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생산지 표시가 안 된 부대 자루에 쌀을 담아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 쌀 원조 건은 글자 그대로 동포애로 시작해서 동포애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도움 받는 쪽의 태도가 어쩌니 저쩌니 하지도 말 고, 과연 쌀이 제대로 북한 주민에게 전달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의심 하거나 따지지 말고 그냥 제공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굶주리고 있으면, 그 자존심이 많은 나라가 철전지 원수라고 하는 남한 당국에 쌀을 보내 달라고 했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와줄 형편이 되어서 도와주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움을 받는 자의 태도를 논하기 이전에, 과연 도움을 주는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도움 받는 태도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인지는 상대가 정할 일이고, 우리는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일본이야 장사 속으로는 하는 짓이니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보겠지 만, 우리는 동포애라고 하는 대의 명분(大義名分)이 있는데, 무슨 이유와 조건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인 열왕기 상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이웃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좀더 새롭게 가 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 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보이는 물질 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 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내 형편과 상대의 태도가 어떠하냐고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돕는데 있어서는
ㄱ.도움을 받는 상대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고 어떤 형편에 있느 냐
ㄴ.내가 이웃을 도와줄 만큼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ㄷ.도움을 받은 다음에는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혹시 계속 도움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도움을 받고 나서 원망이나 욕 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런 문제 가지고 걱정해서도 안된다고 하는 것을, 오늘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도와줄 마음입니다. 요컨대 도움 받는 사람의 여건이 그다지 까다로울 것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무슨 도울 일이 있으면 너무나 까다로운 조건들을 상대방에게 마음속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그러한 모든 조건들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일 에 있어서 아무 장애가 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찾아간 사르밧 과부의 집은 엘리야를 도와줄 만한 아무 여 건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ㄱ.과부의 집이라고 했으니, 실질적으로 가정 경제를 담당해야 가장이 없었습니다.
ㄴ.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돈 많은 과부도 아니었습니다. 남아 있는 재산이라곤 한 움큼의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ㄷ.그래서 과부와 그 아들은, 지금 남아 있는 식량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은 다음 죽으려고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입장입니다.
ㄹ.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물질적이고 심적인 여 유가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ㅁ.그들이 만일 엘리야에게 도와 수 있는 게 있다면, '지금 누굴 약올 리느냐'고 욕을 퍼부으면서 부지깽이로 매 세례를 베푸는 일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도움을 베풀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그처럼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엘리야가 전해 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까지라도 아끼지 말고 음식을 만들어 오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식량 걱정을 조금도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비가 다시 내릴 때까지 이 집에는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준다는 것 이었습니다. 아무런 보증이 없는 이 약속의 말씀 한 마디만 믿고, 그 과부는 자신 들이 마지막으로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엘리야에게 제공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열왕기상 17장 15절의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밝히고 있을 따름입니다.
ㄱ.사르밧 과부는 이때부터 엘리야의 말대로 따랐다. ㄴ그러자 세 사람이 매일 충분히 먹고살게 되었다. 다른 부차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사르밧 과부는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은 약속대 로 이루어 주셨다는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웃을 돕는데, 다른 이유나 조건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1.그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교훈 이 더 있습니다.
ㄱ.도움 받는 자와 도움을 주는 자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도대체 이 웃을 돕지 못할 무슨 이유를 어떻게 댈 수 있을까요
ㄴ.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믿느냐 아니 믿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ㄷ.연민의 정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 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과부를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르밧 과부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이해하고 있거 나 갖추고 있는지요
1지금 우리는 주의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의 일이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욕을 하거나 미워하고, 모함을 하며 질투를 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돌아보아, 도와주고 보살펴 주며 격려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일이란, 외롭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 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2우리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희생정신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잘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보다는, 너무 냉정하게 비판하는 일을 먼저 합니다. 비록 게을러서 굶주리고 있더라 도,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고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게으르다는 성품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나의 마음을 뭉개 버리거나 완악해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희생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이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 지 않습니까 여유가 있어서 돕는 것은 희생이 아니고 자선입니다. 희생 이란, 도울 수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 웃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선도 귀하게 여기지만,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희생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행동은 그래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많은 식 량이 있어서 엘리야를 도왔다고 한다면,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기사 도와줄 형편인데도 돕지 않았다면 죄악이지요. 그러나 나는 제대 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보고 왜 돕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더 큰 죄 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판단 기준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내 판단 기준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물질이 있으면서도 남을 돕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돕고 안 돕는 일은 사람의 일이지만,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우리는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기보다는, 쓸데없는 관심과 잔소리로 어려운 이웃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 일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웃을 도왔습니다. 특히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웃을 돕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 어린 관심이나 애정이 담기지 않은 잔소리는,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행위입니다. 정말 이웃을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봐야 할 것 이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일 일 것입니다. 제발 입으로 돕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2.우리 가운데 계셔서 직접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속에서만 찾더라도
ㄱ.우선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셔서 그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ㄴ.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주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공급했던 것입니다.
ㄷ.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많은 병자 를 치료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을 향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잘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야단치거나 심판하실 일도 많을 텐테, 인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참으시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도와주시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누누이 고 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된 자를 돌아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세 본문 중 두 본문이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실질적으로 고아는 누구이고 과부는 누구이겠습 니까 그리고 나그네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아버 지를 모르는 사람이 고아요, 신랑 예수를 맞이했다가 잃어버린 자가 과 부요, 주님 곁을 떠나 방황하는 심령이 나그네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지 모 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영적인 소외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1우선 하나님 말씀을 잘 배우는 일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가뭄이라는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농토에 관 개 시설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시집을 다시 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일부러 가난해지려고 노력한 결과, 저토록 굶주려서 구걸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한 노릇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방법이 잘못된 것도 사실 이지만, 그보다 더욱 잘못된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김일성이를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행복하게 살길을 도모하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던가요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녀 돈을 버는 것 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더욱 열심히 배우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만, 복되게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 장 15절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 고 하면 서, 디도서 3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미련했고 순종할 줄 몰랐고 자주 잘못된 길로 빠졌고 온갖 욕정 과 쾌락의 종이 되었고 악과 시기로 세월을 보냈고 남에게 증오를 받았 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 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TV 100 시간을 보는 것보다 10분 동안 성경 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2말씀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아무리 긍휼이 많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낯선 남자인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했을까요 말씀 순종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없는 말씀 순종이란 허구에 불 과합니다. 희생이 없이 하는 말은 빈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희생 을 내세우는 것도 우습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희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 성령님 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희생 뒤에는 기쁨이 있 지만, 그릇된 희생 뒤에는 원망과 후회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3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내것입니까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고난 후 소득을 따져 볼 때에,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던데, 과연 내가 가졌다고 하는 것 중에서 순수하게 내 것이란 얼마나 될까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쓸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명령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할지라도,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도와주고도 욕을 얻어먹는데, 그것은 공치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여의주〉라고 하는 잡지 6월호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남을 끌어내 리려 하면 자기도 내려가야 하고 남을 끌어 올리려 하면 자기도 올라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도움을 주게 되면 자신도 도움을 받게 되거니 와,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되면 자신도 괴로힘을 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딴엔 옳은 일인 줄 알고 하는 일이었으나 사람을 괴 롭히고 있던 큰 자 사울이, 작은 자 바울로 변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움의 사람이 되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무슨 큰 자가 되어 뽐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은 자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 인생은 굶주린 삶을 살지 아니하고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뺏으려 하면 뺏기고 도우려 하면 도움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잘 깨달아, 아무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도와 가며 사는 저 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북한의 실상이 이번에 온 세상에 밝 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였나 하는 것이 이번 쌀 지원 요청에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챙피하겠스리, 그렇게도 자기들이 욕을 해대는 일본에 손을 벌리고, 태국과 에집트에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태국과 에집트로부터는 거절당 했습니다. 장삿속이 뻔한 일본만은 간사스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도와주 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는 빌어먹을지언정, 같은 동족인 남한엔 손을 벌 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지간히도 급했던지, 급기야는 우리 정부에도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여러 말들이 있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무조건 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얻어먹는 주제에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생산지 표시가 안 된 부대 자루에 쌀을 담아 보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번 쌀 원조 건은 글자 그대로 동포애로 시작해서 동포애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도움 받는 쪽의 태도가 어쩌니 저쩌니 하지도 말 고, 과연 쌀이 제대로 북한 주민에게 전달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의심 하거나 따지지 말고 그냥 제공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얼마나 굶주리고 있으면, 그 자존심이 많은 나라가 철전지 원수라고 하는 남한 당국에 쌀을 보내 달라고 했겠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와줄 형편이 되어서 도와주는 것만으로 만족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도움을 받는 자의 태도를 논하기 이전에, 과연 도움을 주는 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도움 받는 태도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인지는 상대가 정할 일이고, 우리는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일본이야 장사 속으로는 하는 짓이니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 보겠지 만, 우리는 동포애라고 하는 대의 명분(大義名分)이 있는데, 무슨 이유와 조건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 말씀인 열왕기 상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이웃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좀더 새롭게 가 져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 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보이는 물질 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 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내 형편과 상대의 태도가 어떠하냐고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돕는데 있어서는
ㄱ.도움을 받는 상대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고 어떤 형편에 있느 냐
ㄴ.내가 이웃을 도와줄 만큼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ㄷ.도움을 받은 다음에는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혹시 계속 도움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도움을 받고 나서 원망이나 욕 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런 문제 가지고 걱정해서도 안된다고 하는 것을, 오늘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도와줄 마음입니다. 요컨대 도움 받는 사람의 여건이 그다지 까다로울 것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안고 있는 우리가, 무슨 도울 일이 있으면 너무나 까다로운 조건들을 상대방에게 마음속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그러한 모든 조건들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일 에 있어서 아무 장애가 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찾아간 사르밧 과부의 집은 엘리야를 도와줄 만한 아무 여 건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ㄱ.과부의 집이라고 했으니, 실질적으로 가정 경제를 담당해야 가장이 없었습니다.
ㄴ.그렇다고 해서, 흔히 말하는 돈 많은 과부도 아니었습니다. 남아 있는 재산이라곤 한 움큼의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뿐이었습니다.
ㄷ.그래서 과부와 그 아들은, 지금 남아 있는 식량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은 다음 죽으려고 하는,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입장입니다.
ㄹ.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물질적이고 심적인 여 유가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ㅁ.그들이 만일 엘리야에게 도와 수 있는 게 있다면, '지금 누굴 약올 리느냐'고 욕을 퍼부으면서 부지깽이로 매 세례를 베푸는 일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도움을 베풀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그처럼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엘리야가 전해 준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까지라도 아끼지 말고 음식을 만들어 오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식량 걱정을 조금도 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비가 다시 내릴 때까지 이 집에는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준다는 것 이었습니다. 아무런 보증이 없는 이 약속의 말씀 한 마디만 믿고, 그 과부는 자신 들이 마지막으로 먹으려고 했던 음식을 엘리야에게 제공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열왕기상 17장 15절의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밝히고 있을 따름입니다.
ㄱ.사르밧 과부는 이때부터 엘리야의 말대로 따랐다. ㄴ그러자 세 사람이 매일 충분히 먹고살게 되었다. 다른 부차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사르밧 과부는 말씀을 따랐고 하나님은 약속대 로 이루어 주셨다는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웃을 돕는데, 다른 이유나 조건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1.그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교훈 이 더 있습니다.
ㄱ.도움 받는 자와 도움을 주는 자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이웃을 도울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가 도대체 이 웃을 돕지 못할 무슨 이유를 어떻게 댈 수 있을까요
ㄴ.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믿느냐 아니 믿느냐 하는 믿음의 문제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ㄷ.연민의 정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 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과부를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르밧 과부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이해하고 있거 나 갖추고 있는지요
1지금 우리는 주의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의 일이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욕을 하거나 미워하고, 모함을 하며 질투를 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남의 어려운 형편을 돌아보아, 도와주고 보살펴 주며 격려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일이란, 외롭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 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2우리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희생정신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잘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보다는, 너무 냉정하게 비판하는 일을 먼저 합니다. 비록 게을러서 굶주리고 있더라 도, 게으르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고 그런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게으르다는 성품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나의 마음을 뭉개 버리거나 완악해 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희생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이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 지 않습니까 여유가 있어서 돕는 것은 희생이 아니고 자선입니다. 희생 이란, 도울 수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 웃을 돕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자선도 귀하게 여기지만,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희생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행동은 그래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가 만약 많은 식 량이 있어서 엘리야를 도왔다고 한다면, 이야기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하기사 도와줄 형편인데도 돕지 않았다면 죄악이지요. 그러나 나는 제대 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보고 왜 돕지 않느냐고 하는 것은 더 큰 죄 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시는 판단 기준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내 판단 기준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물질이 있으면서도 남을 돕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돕고 안 돕는 일은 사람의 일이지만,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우리는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기보다는, 쓸데없는 관심과 잔소리로 어려운 이웃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때가 많습니다. 주의 일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웃을 도왔습니다. 특히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웃을 돕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 어린 관심이나 애정이 담기지 않은 잔소리는,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해치는 행위입니다. 정말 이웃을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봐야 할 것 이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히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가장 현명한 일 일 것입니다. 제발 입으로 돕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2.우리 가운데 계셔서 직접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속에서만 찾더라도
ㄱ.우선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셔서 그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ㄴ.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주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생명의 양식인 복음을 공급했던 것입니다.
ㄷ.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셔서 많은 병자 를 치료하셨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인간을 향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잘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야단치거나 심판하실 일도 많을 텐테, 인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참으시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도와주시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소외된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누누이 고 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된 자를 돌아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세 본문 중 두 본문이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실질적으로 고아는 누구이고 과부는 누구이겠습 니까 그리고 나그네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아버 지를 모르는 사람이 고아요, 신랑 예수를 맞이했다가 잃어버린 자가 과 부요, 주님 곁을 떠나 방황하는 심령이 나그네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일이 급선무가 아닐지 모 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영적인 소외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어려운 일 당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1우선 하나님 말씀을 잘 배우는 일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가뭄이라는 재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농토에 관 개 시설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시집을 다시 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일부러 가난해지려고 노력한 결과, 저토록 굶주려서 구걸을 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한 노릇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방법이 잘못된 것도 사실 이지만, 그보다 더욱 잘못된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 김일성이를 우상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행복하게 살길을 도모하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던가요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녀 돈을 버는 것 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더욱 열심히 배우고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야만, 복되게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 장 15절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 고 하면 서, 디도서 3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미련했고 순종할 줄 몰랐고 자주 잘못된 길로 빠졌고 온갖 욕정 과 쾌락의 종이 되었고 악과 시기로 세월을 보냈고 남에게 증오를 받았 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 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TV 100 시간을 보는 것보다 10분 동안 성경 보는 것이 더 현명한 일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2말씀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아무리 긍휼이 많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낯선 남자인 엘리야에게 음식을 제공했을까요 말씀 순종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이 없는 말씀 순종이란 허구에 불 과합니다. 희생이 없이 하는 말은 빈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희생 을 내세우는 것도 우습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희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 성령님 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어야 합니다. 진정한 희생 뒤에는 기쁨이 있 지만, 그릇된 희생 뒤에는 원망과 후회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3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내것입니까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한 일입니까 농사를 짓고난 후 소득을 따져 볼 때에,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던데, 과연 내가 가졌다고 하는 것 중에서 순수하게 내 것이란 얼마나 될까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것을 빌려 쓸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명령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할지라도,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도와주고도 욕을 얻어먹는데, 그것은 공치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여의주〉라고 하는 잡지 6월호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남을 끌어내 리려 하면 자기도 내려가야 하고 남을 끌어 올리려 하면 자기도 올라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하게 도움을 주게 되면 자신도 도움을 받게 되거니 와, 다른 사람을 괴롭히게 되면 자신도 괴로힘을 당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딴엔 옳은 일인 줄 알고 하는 일이었으나 사람을 괴 롭히고 있던 큰 자 사울이, 작은 자 바울로 변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움의 사람이 되었던 일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무슨 큰 자가 되어 뽐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작은 자가 되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 인생은 굶주린 삶을 살지 아니하고 풍성한 복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뺏으려 하면 뺏기고 도우려 하면 도움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잘 깨달아, 아무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도와 가며 사는 저 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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