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롬9:1-33)
본문
서언 이제 지난 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것도 끊을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끊을 수 없고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결단코 결단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서 우리는 끊을 자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하시니 대적할 자가 없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인도 하시며, 아무도 송사하거나 정죄할 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큰 구원은 결코 내가 선택하였거나 나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구원과 버리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것이라면 멸망자들은 " 하나님께서 나를 멸망시키려로 작정하셨기에 내가 구원얻지 못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심판하시는가 " 하고 핑계할 수 있으며 "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이 아니냐 "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문제에 관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잘 들으셔서 큰 은혜를 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본론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가 자신에게 큰 근심이 되며, 끊임 없이 고통으로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1-3)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세서 끊어질지라도 차라리 내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는 굉장한 영적인 사랑이며, 진심의 고백이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다 죽이려고 하셨을 때 그 앞에서 " 하나님이여 어찌 이백성을 인도할 능이 없어 광야에서 죽이셨다고 하는 말을 열방으로 하게 하시려나이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로막고 중보의 기도를 함으로 들으심을 얻은 것과 같다. (민14:16)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셨고, 육신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혈통을 따라서 오셨음을 말한다.
(5) 이같이 이스라엘은 약속의 자손이요, 택하신 족속이 분명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택하신 족속이라 할찌라도 육신으로 택하심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다음에 있어서 언급한다. 오히려 택하심은 영적인 것이요, 인격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택하신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진노를 인해 멸망과 저주를 받은 자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는 서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육신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혈통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영적이요 인격적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주신 언약과 율법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신앙적인 고백을 분명히 한다.
(5) 그러나 이제 저들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므로서 그 언약을 거부한 자가 된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인격적인 자세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택하심은 단지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지 곧바로 약속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와 동일한 원리로 육신의 실패가 약속에서 완전히 제해졌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이요,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여러가지 성경의 예를 든다.
1. 바로 이것은 야곱과 에서의 예로서 바울은 언급한다. (6-13) /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지만은 다 이스라엘이 된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이스마엘 자손도 있고 광야의 이름없는 족속도 있다. 오직 약속을 따라 난 이삭 만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삭 한사람이 낳았으나 에서는 에돔족속이 되어버렸고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를 이룬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약속과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지 육신의 혈통이라고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야곱과 에서의 경우 분명히 장자는 에서였으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겠다." 고 하셨으며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이 둘이 태어나기 전에 즉 외적인 선과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11절의 말씀으로 설명한다. "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즉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잇게 된 것은 행위의 의나 육신의 모양을 따라 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말씀이다. 이제 택하심과 버려두심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분명해 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요, 가장 의로운 것임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성경 말씀은 더욱 더 심도있게 이어진다.(14-18)
2.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서. /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4) 우리처럼 권세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악을 행하고 불법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속성 의로우신 속성을 벗어나서 행하실 수 없다는 이 사실로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선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고 함으로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말씀하신다.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 고 함으로서 선악간에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했다. (17-18) 여기서 또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선한 작정이 하나님께 있음은 이해가 되는데 악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가져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성경을 이해한다면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강퍅케 하신다는 것은 신학용어로 허용작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로를 강퍅케 하신 사건 같은 것은. 바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일부러 강퍅케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강퍅한 것을 막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대로 내어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의 악은 막으셔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하나님을 불의하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16) 여기서 '달음박질 하는 자'와 '원하는 자' 라는 말은 사람의 모든 외적인 의도가 결코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엄격하게 말해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지는 못했다. 단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그같이 된것이다.
3. 이제 말씀은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 연결되어진다.(19-29) / 이 비유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주제는 먼저 " 토기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항거할 권리가 없고 토기장이는 그릇을 자기의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는 것이다. 또하나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그릇들 중에서 누구는 멸망을 위해 사용하고 누구는 구원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 모두 악한 그릇으로서 다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그 중에 얼마를 오래 참으사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면 이는 결코 비방거리가 아니요,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것 " 이다. 그리고 멸망할 그릇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사 그 멸망의 기한을 늦추셨다면 이역시 우리가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지은 자에게 나를 어떻게 이렇게 지었느뇨 말할 수 있느냐 ” 그럴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말씀이 본문 24-29절에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호세아의 글(24-26) / 24절에 영광을 받기로 예비된 그릇이 바로 예수 믿는 성도 즉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세아는 사랑의 선지자이다. 타락한 자신의 아내를 다시 쫓아가서 데려오고 데려오고 한다. 이는 율법을 초월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했다면 이는 열번 죽어도 부족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식을 낳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서 그 이름을 큰 딸은 " 로루하마(긍휼을 얻지 못하는 자)" 라고 했고 첫아들은 "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 형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 루하마(긍휼을 입은 자) , 암미(내 백성이다.) " 라고 칭했던 선지자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와같이 하신 의미는 본문 25-26절의 말씀 그대로이다. " 내가 내백성이 아닌자를 내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사람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과 감사거리라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붙드네." 하는 찬송가의 내용대로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의 마땅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이다.
2) 이사야의 예언(27-29) / 먼저 육신의 혈통의 유대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 중에 끝까지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겠다고 했다. (27-28) 여기서 남은 자란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 법도를 지켜 살아가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서 땅에서 필하시고 완성하신다고 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연합한 백성만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이다. 고로 구원은 전인격적인 것이지 결코 육신적 외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진정한 백성의 예배는 육신에 속한 예법의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에 속한 예배인 것이다. 두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그 남은 자는 육신의 의를 따라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남겨주신 백성임을 의미한다.(29 )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두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었더라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은혜이다. 마땅히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중에서 얼마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신 것이다. 마땅히 죄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씻음과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4. 하나님의 주권의 완전하심 / 이제 구원과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정하신 자만이 구원과 약속을 상속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버림을 받는다. 언뜻 생각하면 무척 독재자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 멸망할 자들 중에 몇을 구원하셨기에 그것은 분명히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니 멸망받을 자들 까지도 구원하시면 될 것이 아닌가 "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생각을 못하셨겠는가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과연 타락하여 못쓰게 된 우리의 양심과 의로움보다 못하시겠는가 그럴수는 없다. 여기에는 몇가지 전제해야 할 전제들이 있다. 그리고 이 전제들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의 무지한 머리로도 아하 합당하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은 선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사람들이 자신의 타락한 욕구와 지혜로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입을 놀려대는 것이다.
1)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도달할 만한 선을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의 의는 죄로 더러워진 옷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는 벗어버려야 할 가증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당연히 인간편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구원이 인간편에 있도록 하셨다면 아무도 구원 얻을 자가 없는 것이다. 우리 생각의 조금 더 선하고 덜 선하고는 공의로우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전혀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요, 절대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의가 충족이 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은 다 죄인으로서 결코 그 기준에 도달 할 자가 없고 다 더러워진 옷, 마땅히 갈아 입어야 할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멸망하에 있는 인간에게 구원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관하신다는 것은 복된 소식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있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으셨고 지으셨으므로 당연히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사랑하였고 에서는 자기의 백성이 아닌 고로 미워하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반론의 여지가 없다.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내자식을 내집에 데리고 사는데 누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단지 수렁에 빠진 자신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정결하고 보배로운 피로서 구속하시고 구원하심에 대하여 오히려 찬양을 돌릴 뿐인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서 한가지 파생될 수 있는 의문 그러면 하나님이 짓지 아니한 사람도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필요 없는 논쟁이요, 모세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과 같이 마귀의 혼란케하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마귀는 항상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고 했다.(유1:10)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한 비밀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육신 장막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그 날에 분명히 알게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마귀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고, 예수님을 무고히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8:44) 또한 렘31:27 에 보면 " 사람의 씨가 있고 짐승의 씨가 있다 ! " 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22 의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사망에 이른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지게 된다. 주님께서도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아무도 잃어 버리지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었다!(요17:12) " 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심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거나 불완전한 승리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그 행사도 역시 완전한 주권을 이루시는 것이다. 아멘!!
그러므로 마태복음 10:27과 눅 21:18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참새 한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고 머리카락 하나도 다칠 수 없는 것이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의 선하심에 있다.(시118:29) / 창세기 6장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세상은 그 마음 먹는 것이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항상 악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는 계획대로 하도록 세상을 내버려 둔다면 이 세상은 벌써 12번은 멸망했을 것이다. 노아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계획은 악과 파괴 그리고 저주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 기사를 본 자들이 누누히 고백하듯이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권대로 역사하신다 해서 불안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늘 범죄하고 주님을 배반하며,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거기 빠져 고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에게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그리하신 것같이 온 세상에도 그리하시다.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한 자에게는 그와같이 하시고 구원하실 자는 결단코 빠뜨리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온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의인 것이다. 지금은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로 인하여 그 주권의 영광이 다소 가리워져 있지만 영광의 그날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만입이 있다 하여도 다 찬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못마땅히 여기는 이유 /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선하고 의로운 포도원 주인에 대해서 사람들이 악하다고 폄론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주인의 선대를 받아 그의 포도원에서 일했던 자들이었다. 이때 포도원 주인의 그들에 관한 평가는 " 내가 선하므로 너희가 나를 악하다 하느냐(마20:15 ) " 였다. 저들의 악하다는 폄론, 그것은 저들이 불의하고 악하기 때문에 그같이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이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조금만 권세가 주어지면 그저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만 혈안인 타락하고 저속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같은 생각 자체가 자신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선하신 계획을 몰랐다고 핑계할 자가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 핑계한다면 그 핑계는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이 악함으로해서 일부러 가리웠다는 죄악의 고백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론
그러므로 분명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요, 타락한 인생과 세계에 소망이 되는 것이요, 참으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역하심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대로 "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그리고 이 찬송은 모든 감취었던 것들이 밝히 드러나는 영광의 그 날에 더욱 더 온전한 찬송으로 돌려질 것이다. 할렐루야 !! 이제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초남교회 성도들은 " 천지와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는 것같이 이제 주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대로 모든 의를 이루시옵소서 !! 이것이 합당하고 합당하고 합당하며,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십니다. " 하는 고백과 찬송을 돌리는 지혜로운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이 큰 구원은 결코 내가 선택하였거나 나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구원과 버리움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는 것이라면 멸망자들은 " 하나님께서 나를 멸망시키려로 작정하셨기에 내가 구원얻지 못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심판하시는가 " 하고 핑계할 수 있으며 "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이 아니냐 "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문제에 관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자세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잘 들으셔서 큰 은혜를 입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본론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가 자신에게 큰 근심이 되며, 끊임 없이 고통으로 남아 있음을 고백한다.(1-3)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차라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세서 끊어질지라도 차라리 내 동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는 굉장한 영적인 사랑이며, 진심의 고백이다. 마치 모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다 죽이려고 하셨을 때 그 앞에서 " 하나님이여 어찌 이백성을 인도할 능이 없어 광야에서 죽이셨다고 하는 말을 열방으로 하게 하시려나이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로막고 중보의 기도를 함으로 들으심을 얻은 것과 같다. (민14:16)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셨고, 육신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혈통을 따라서 오셨음을 말한다.
(5) 이같이 이스라엘은 약속의 자손이요, 택하신 족속이 분명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택하신 족속이라 할찌라도 육신으로 택하심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다음에 있어서 언급한다. 오히려 택하심은 영적인 것이요, 인격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택하신 백성이었으나 하나님의 진노를 인해 멸망과 저주를 받은 자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는 서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육신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이 혈통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영적이요 인격적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주신 언약과 율법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만물 위에 계셔서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신앙적인 고백을 분명히 한다.
(5) 그러나 이제 저들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찾아 오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므로서 그 언약을 거부한 자가 된것이다. 그리고 그 언약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인격적인 자세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택하심은 단지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을 뿐이지 곧바로 약속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바로 이와 동일한 원리로 육신의 실패가 약속에서 완전히 제해졌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적이요, 인격적인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여러가지 성경의 예를 든다.
1. 바로 이것은 야곱과 에서의 예로서 바울은 언급한다. (6-13) /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지만은 다 이스라엘이 된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이스마엘 자손도 있고 광야의 이름없는 족속도 있다. 오직 약속을 따라 난 이삭 만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삭 한사람이 낳았으나 에서는 에돔족속이 되어버렸고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를 이룬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약속과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이지 육신의 혈통이라고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제 야곱과 에서의 경우 분명히 장자는 에서였으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 큰자가 어린자를 섬기겠다." 고 하셨으며 "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이 둘이 태어나기 전에 즉 외적인 선과 악을 행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바울은 그 이유를 11절의 말씀으로 설명한다. "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즉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잇게 된 것은 행위의 의나 육신의 모양을 따라 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말씀이다. 이제 택하심과 버려두심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라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분명해 졌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요, 가장 의로운 것임을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성경 말씀은 더욱 더 심도있게 이어진다.(14-18)
2.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실 수 없다는 사실에서. /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4) 우리처럼 권세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악을 행하고 불법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속성 의로우신 속성을 벗어나서 행하실 수 없다는 이 사실로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선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고 함으로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말씀하신다.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 고 함으로서 선악간에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했다. (17-18) 여기서 또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선한 작정이 하나님께 있음은 이해가 되는데 악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가져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성경을 이해한다면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강퍅케 하신다는 것은 신학용어로 허용작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로를 강퍅케 하신 사건 같은 것은. 바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일부러 강퍅케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강퍅한 것을 막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대로 내어버려 두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택하신 백성의 악은 막으셔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하나님을 불의하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16) 여기서 '달음박질 하는 자'와 '원하는 자' 라는 말은 사람의 모든 외적인 의도가 결코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엄격하게 말해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에 합당하지는 못했다. 단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그같이 된것이다.
3. 이제 말씀은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 연결되어진다.(19-29) / 이 비유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주제는 먼저 " 토기 그릇은 토기장이에게 항거할 권리가 없고 토기장이는 그릇을 자기의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는 것이다. 또하나는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그릇들 중에서 누구는 멸망을 위해 사용하고 누구는 구원을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 모두 악한 그릇으로서 다 멸망을 받아야 하는데 그 중에 얼마를 오래 참으사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면 이는 결코 비방거리가 아니요,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것 " 이다. 그리고 멸망할 그릇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사 그 멸망의 기한을 늦추셨다면 이역시 우리가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지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지은 자에게 나를 어떻게 이렇게 지었느뇨 말할 수 있느냐 ” 그럴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관한 말씀이 본문 24-29절에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호세아의 글(24-26) / 24절에 영광을 받기로 예비된 그릇이 바로 예수 믿는 성도 즉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호세아는 사랑의 선지자이다. 타락한 자신의 아내를 다시 쫓아가서 데려오고 데려오고 한다. 이는 율법을 초월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했다면 이는 열번 죽어도 부족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여인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식을 낳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서 그 이름을 큰 딸은 " 로루하마(긍휼을 얻지 못하는 자)" 라고 했고 첫아들은 "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 형제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 루하마(긍휼을 입은 자) , 암미(내 백성이다.) " 라고 칭했던 선지자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와같이 하신 의미는 본문 25-26절의 말씀 그대로이다. " 내가 내백성이 아닌자를 내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이 말씀의 의미는 모든 사람 다시 말해서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택하심으로 당신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과 감사거리라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붙드네." 하는 찬송가의 내용대로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의 마땅한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이다.
2) 이사야의 예언(27-29) / 먼저 육신의 혈통의 유대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 중에 끝까지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겠다고 했다. (27-28) 여기서 남은 자란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 법도를 지켜 살아가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서 땅에서 필하시고 완성하신다고 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언약과 연합한 백성만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말이다. 고로 구원은 전인격적인 것이지 결코 육신적 외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진정한 백성의 예배는 육신에 속한 예법의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에 속한 예배인 것이다. 두번째 이사야의 예언은 그 남은 자는 육신의 의를 따라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로 남겨주신 백성임을 의미한다.(29 )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두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었더라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은혜이다. 마땅히 소돔과 고모라 같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중에서 얼마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주신 것이다. 마땅히 죄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씻음과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4. 하나님의 주권의 완전하심 / 이제 구원과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정하신 자만이 구원과 약속을 상속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버림을 받는다. 언뜻 생각하면 무척 독재자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 멸망할 자들 중에 몇을 구원하셨기에 그것은 분명히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니 멸망받을 자들 까지도 구원하시면 될 것이 아닌가 "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생각을 못하셨겠는가 하나님의 의와 계획이 과연 타락하여 못쓰게 된 우리의 양심과 의로움보다 못하시겠는가 그럴수는 없다. 여기에는 몇가지 전제해야 할 전제들이 있다. 그리고 이 전제들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의 무지한 머리로도 아하 합당하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은 선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사람들이 자신의 타락한 욕구와 지혜로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입을 놀려대는 것이다.
1)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표준에 도달할 만한 선을 행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의 의는 죄로 더러워진 옷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는 벗어버려야 할 가증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당연히 인간편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구원이 인간편에 있도록 하셨다면 아무도 구원 얻을 자가 없는 것이다. 우리 생각의 조금 더 선하고 덜 선하고는 공의로우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전혀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요, 절대적으로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의가 충족이 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은 다 죄인으로서 결코 그 기준에 도달 할 자가 없고 다 더러워진 옷, 마땅히 갈아 입어야 할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멸망하에 있는 인간에게 구원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관하신다는 것은 복된 소식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있다. /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으셨고 지으셨으므로 당연히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기에 사랑하였고 에서는 자기의 백성이 아닌 고로 미워하신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반론의 여지가 없다.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고 내자식을 내집에 데리고 사는데 누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단지 수렁에 빠진 자신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정결하고 보배로운 피로서 구속하시고 구원하심에 대하여 오히려 찬양을 돌릴 뿐인 것이다. 할렐루야!! 여기서 한가지 파생될 수 있는 의문 그러면 하나님이 짓지 아니한 사람도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필요 없는 논쟁이요, 모세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과 같이 마귀의 혼란케하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마귀는 항상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한다고 했다.(유1:10)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한 비밀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육신 장막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그 날에 분명히 알게 되어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마귀의 백성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것을 분명히 언급하였고, 예수님을 무고히 거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낳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8:44) 또한 렘31:27 에 보면 " 사람의 씨가 있고 짐승의 씨가 있다 ! " 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22 의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사망에 이른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지게 된다. 주님께서도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아무도 잃어 버리지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었다!(요17:12) " 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반드시 구원하심을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거나 불완전한 승리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그 행사도 역시 완전한 주권을 이루시는 것이다. 아멘!!
그러므로 마태복음 10:27과 눅 21:18의 말씀대로 주님의 뜻을 벗어나서는 참새 한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고 머리카락 하나도 다칠 수 없는 것이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의 선하심에 있다.(시118:29) / 창세기 6장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세상은 그 마음 먹는 것이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항상 악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서 나는 계획대로 하도록 세상을 내버려 둔다면 이 세상은 벌써 12번은 멸망했을 것이다. 노아 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계획은 악과 파괴 그리고 저주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을 아는 자와 그 기사를 본 자들이 누누히 고백하듯이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권대로 역사하신다 해서 불안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늘 범죄하고 주님을 배반하며,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거기 빠져 고통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에게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그리하신 것같이 온 세상에도 그리하시다. 지옥에 가는 것이 합당한 자에게는 그와같이 하시고 구원하실 자는 결단코 빠뜨리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온 세상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와 의인 것이다. 지금은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로 인하여 그 주권의 영광이 다소 가리워져 있지만 영광의 그날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만입이 있다 하여도 다 찬송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못마땅히 여기는 이유 /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선하고 의로운 포도원 주인에 대해서 사람들이 악하다고 폄론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주인의 선대를 받아 그의 포도원에서 일했던 자들이었다. 이때 포도원 주인의 그들에 관한 평가는 " 내가 선하므로 너희가 나를 악하다 하느냐(마20:15 ) " 였다. 저들의 악하다는 폄론, 그것은 저들이 불의하고 악하기 때문에 그같이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이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을. 조금만 권세가 주어지면 그저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만 혈안인 타락하고 저속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같은 생각 자체가 자신이 타락한 죄인이라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은혜와 선하신 계획을 몰랐다고 핑계할 자가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 핑계한다면 그 핑계는 오직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이 악함으로해서 일부러 가리웠다는 죄악의 고백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론
그러므로 분명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요, 타락한 인생과 세계에 소망이 되는 것이요, 참으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역하심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대로 "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그리고 이 찬송은 모든 감취었던 것들이 밝히 드러나는 영광의 그 날에 더욱 더 온전한 찬송으로 돌려질 것이다. 할렐루야 !! 이제 우리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택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초남교회 성도들은 " 천지와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는 것같이 이제 주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대로 모든 의를 이루시옵소서 !! 이것이 합당하고 합당하고 합당하며,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십니다. " 하는 고백과 찬송을 돌리는 지혜로운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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