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부활 (롬8:16-25)
본문
영국 성공회의 어떤 주교는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이 아니고 영적인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럴 듯하기도 하고 신령하게 들리기도 합니다.더구나 주교가 하는 말 이니 권위있게 들립니다. 이 주교형제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과학주의입니다. 즉 오관으로 확인되지 않은 이 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철학이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처녀가 잉태한다든가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면 권위있는 신학자나 목사 중에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 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 장 22절 에 서 희랍사람들은 세상지혜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학문의 권위나 총교지도자의 권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영과 육체를 구분하는 이원론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둘째 이유는 언젠가 모르에 우리 생각에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윈 것.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습 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영혼은 좋고 육체는 나쁘다.그러니 영적인 것은 장려해야 되고 육적인 것.물질적인 것은 관심이 없 거나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자면 은사에 있어서 방언이나 치유. 예언 같은 은사는 영적 은사로 귀하게 여기고 봉 사나 설거지하는 은사는 낮은 것으로 보는 태도가 있습니다. 사 회에서도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에 가치를 더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만들어준 육체는 아름답고 완전한 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난 후에 보기에 좋 았더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 고 동시에 다른 모든 피조물도 변질되고 썩어 없어지게 된 겁니다. 이 비참한 현실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 우리의 현재 고난을 말했고 19절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17절 후반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을 분담하면 로 마의 성도들도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그리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정신적인 것 뿐이었습니까아니지요. 육체를 포함한 모든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우리는 몸 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신음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뿐 아니라 그들의 관리하에 있는 모든 피조 물도 신음한다고 22절에 말합니다. 그러면서 19절에는 피조물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그때에만 그 들이 부패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동 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1절).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계-개나 소. 말과 고양이,지저귀는 새들. 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도 우리와 같이 병들어 시들어가는 것을 봅니다.그러나 그들도 죽음 과 부패에서 벗어날 때가 올 것입니다.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부 활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으로 만일 예수님이 십자에서 돌아가신 후 영만 다시 사셨다면 그런 예수를 믿는 우리도 장차 부활할 때 몸은 아주 없어진 상태에서 영만 귀신처럼 훨훨 날아다니지 않겠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우스운 광경입니까
그렇다면 부활한 우리 때문에 영광스 런 자유를 누릴 피조물도 형체없이 그들의 혼만 살아 남지 않 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3절의 우리몸의 구속 이란 분명 히 뼈와 살이 있는 몸을 뜻합니다. 지금 이 몸은 병들고 결국 썩 어 없어지지만 이 몸이 구속될 때에는 썩지 않는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43 절에 의하면 부활할 몸은 영적인 몸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형체 가 없는 몸이라는 뜻이 아니고49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즉 예수님의 형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지만 부활 후 의 예수님의 몸은 변한 몸이었습니다. 물론 손에 못자국과 옆구 리에 창 찔린 흔적이 있었고 음식도 잡수시고 뼈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장사한 지 사 흘만에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셨는데 그때 방의 문 들은 모두 잠겨져 있었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0:19).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 후에 나타나신 것을 종합해 보면 부활 전 의 몸과 후의 몸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이 있음을 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활한 몸은 썩지 않고 소모되지 않는 몸이 고. 의사가필요없고 변소가 필요없는 새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4 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밀을 말하테니 들으시오. 우리는 전부 자고 있지 않 고 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릴 때 눈 깜빡할 사이에 변할 겁니다. 과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사람은 썩지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변 할 겁니다. 썩어질 것은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혀야겠고 죽을 몸 은 죽지 않을 몸으로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죽음은 새생명에 집어 삼킨 바 되고 하나님이 승리한다 라는 말이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 안에서 구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 고난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은 아프고 비참한 사건이니까요.부활이 있어야 죽음에 의미가 있습니다. 내일이 있 기 때문에 오늘밤이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다 시 사신 적이 없다면 우리도 다시 살지 못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죄는 아직 남아 있을 거라구요.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로마성도들이 고난 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난의 필연성올 말한 다음 위로와 경고를 하려는것입니다. 8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그리스도 의 고난을 분담하지 않고는 그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고난 후에 영광올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법칙이요하나님이 이 법칙을 구원의 계획 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이 진리를 로마 성도들 에게 적용하면서 상처없는 훈장은없다 라고합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러면 예수의 고난을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서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 재판을 받습니다. 위해서 구원하러온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받습니다. 평상시 에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다 달아납니다. 떡을 배불리 얼어 먹고 기적을 보고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그를 십자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합니다. 이제 그는 반나체로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힘니다. 그리고는 광 야에 세워진 구리뱀같이 세워집니다.거기서 숨 거두실 때까지 세 시간을 매달려 고생합니다. 몸무게때문에 못박힌 손이 늘어 져 아픔니다. 가슴에 압박이 와서 숨이 막힙니다.다리를 펴서 가 슴을 펴려고 하니까 못박힌 발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픕니다. 그 것뿐이 아닙니다.밑에서 조롱하는 말이 들림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자기나 구원해보라고.
그런데 로마군인 이 와서 창으로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거기서 피와 물이 쏟아 져 나옵니다. 주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 까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죄없으 신 분이 남의 죄를 져야했던 정신적 고통입니다. 물론 인간이 예수를 심판한 죄목은 있지요. 하나님을 모욕한 참람죄였습니다. 자기가 유대의 왕이란 사실을 시인한 죄였지요. 그러나 주님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마가가 10장 45절 에 썹듯이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섬기시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 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은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가는 것 쯤이야 그렇게 힘들었겠습니까 라고요.아닙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히브리서12 장2 절에 보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하실 분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부활과 승천의 기쁨을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고 그 수치를 극복하 셨다. 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평가절하하지 맙시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구원의 은혜 를 값싸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죄를 가볍게 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어렵게, 어렵게 십자가를 견디셨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쓰러질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주님의 당하신 고통 중에 가장 큰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혀 당하는 고통도 컷 지만. 그리고 죄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처형당하는 괴로움과 수치도 컸지만 무엇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버 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일곱번이나 퍼부은적이 있습니다. 마 태복음23장에서 그들의 일곱 가지 죄에 대하여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저주의 나무에 매달림니다. 어 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누워서 침뱉으신격입니까 이사야는 오래전에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 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 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가 찔 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 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성도 여러분,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한몸에 지시고 아버 지의 저주의 화살을 맞으셨습니다.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겨버리 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아픔을 아시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흘 리시며 자신과 싸웠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리고 세상의 죄를 향한 아버지의 채찍이 십자가에 내려칠 때 예수님의 고통은 극치에 달합니다. 그때에 아들은 부르짖습니다. 나 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왜 버림을 받고 있는가를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고통의 절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다시 말해서 우리 죄가 이만큼 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모르십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보십시오.그 고통 을 느껴보십시오.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동정은 하 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값싼 눈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붉은가를 알고 통회하는 눈물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금년 고난주간 동안에는 우리들의 죄를 똑바 로 봅시다. 십자가를 통해서 말입니다. 올바로 진단받지 못한 병은 그릇된 처방올 가져올 뿐입니다. 회개를 옳바로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붉은 죄를 눈보다 회게 씻어 주십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죄의 척도가 되지만 죄의 해결책도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생각속에 들어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 안일주의 입 니까 노력 없는 한탕주의입니까 통회없는 용서입니까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믿습니까. 그래서 큰 교회에 나갑니까 고통 없는 삶 을 추구하십니까 그래서 병 있는 자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봅니 까.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설교를 좋아하십니까주일,교회에 한번 나가 준다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혹은 세상의 권세는 맛보았으니 또는 세상의 권세를 못 가져봤으니 교회안에서 권세 를 갖기 위해서 헌금 많이바치고 집사나 장로직을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돈 을 모아 소위 성전건축하기에 급급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내가 모두 반성해보고 회개해야 될 문제입니다.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 이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회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느지.눈을 크 게 뜨고 봅시다. 한국의 개혁은 교회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나 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만을 얼으려는 도적의 심보를 회개 해야 합니다.이 회개운동이 없이는 참된 개혁이 있을 수 없고 하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세계복음화의 기회도 놓칠 겁니다. 18 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당시 로마에서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성도 들의 고난은 장차 예수님이 주실 영광을 생각하면 비교도 안된다 고 위로합니다.히브리서 12장 2 절에서 예수님도 사홀 후에 일어 날 부활과 승천의 기쁨을 바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셨다 고 합니다.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승리주의에 대한 경고
셋째로 사도바울은 고난과 영광과의 관계에서 소위 승리주의 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승리주의는 영광을 이 세상에서 맛보아야 겠다는 욕심입니다.고린도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었듯이 로마성도 들에게도 승리주의의 유혹에 빠질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사도는 아직은 영광이 안왔다는 것입니다.주님이 아직 안 오셨기 때문입니다.주님이 오실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권면의 말씀은 빨리 빨리를 원하는 우리들로서는 받 아들이기 힘듭니다. 교회안에서도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하나님 께 부르짖고 당장에 사업을 축복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도 강하지만 참고 기다리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주권과 시간을 믿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시한부 말세론이 성하게 됩니다.백성들기 이 런 약점을 이용하여 거짓 선지자가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떠들 썩하게 만듭니다.승리주의는 세상철학과도 일맥 상통합니다.적극 적 사고방식이라든가 병들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보자라는 건강주 의와 같은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을버리 십시오.23절에 성령님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라 하더라도 아직은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그리고 우리 몸의 완전 구속을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25 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오 실 때 완전하게 부활한 소망을 가지고 끊기있게 기다린다고 합니다. 죄와 아픈 몸을 가지고 신음하며 사는 우리는,주여. 어서 오시 옵소서 라는 기도와 함께 삼일 동안 지옥에 가 계셨지만 거기서 도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의 의 길을 가야 합니다.
첫째 이유는 과학주의입니다. 즉 오관으로 확인되지 않은 이 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철학이지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처녀가 잉태한다든가 부활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면 권위있는 신학자나 목사 중에도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 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 장 22절 에 서 희랍사람들은 세상지혜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학문의 권위나 총교지도자의 권위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영과 육체를 구분하는 이원론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둘째 이유는 언젠가 모르에 우리 생각에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윈 것.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습 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영혼은 좋고 육체는 나쁘다.그러니 영적인 것은 장려해야 되고 육적인 것.물질적인 것은 관심이 없 거나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예를 들자면 은사에 있어서 방언이나 치유. 예언 같은 은사는 영적 은사로 귀하게 여기고 봉 사나 설거지하는 은사는 낮은 것으로 보는 태도가 있습니다. 사 회에서도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에 가치를 더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만들어준 육체는 아름답고 완전한 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난 후에 보기에 좋 았더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 고 동시에 다른 모든 피조물도 변질되고 썩어 없어지게 된 겁니다. 이 비참한 현실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 우리의 현재 고난을 말했고 19절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17절 후반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을 분담하면 로 마의 성도들도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그리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정신적인 것 뿐이었습니까아니지요. 육체를 포함한 모든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우리는 몸 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신음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뿐 아니라 그들의 관리하에 있는 모든 피조 물도 신음한다고 22절에 말합니다. 그러면서 19절에는 피조물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그때에만 그 들이 부패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동 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1절). 이 세상의 모든 자연계-개나 소. 말과 고양이,지저귀는 새들. 푸른 나무와 아름다운 꽃들-도 우리와 같이 병들어 시들어가는 것을 봅니다.그러나 그들도 죽음 과 부패에서 벗어날 때가 올 것입니다.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부 활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으로 만일 예수님이 십자에서 돌아가신 후 영만 다시 사셨다면 그런 예수를 믿는 우리도 장차 부활할 때 몸은 아주 없어진 상태에서 영만 귀신처럼 훨훨 날아다니지 않겠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우스운 광경입니까
그렇다면 부활한 우리 때문에 영광스 런 자유를 누릴 피조물도 형체없이 그들의 혼만 살아 남지 않 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3절의 우리몸의 구속 이란 분명 히 뼈와 살이 있는 몸을 뜻합니다. 지금 이 몸은 병들고 결국 썩 어 없어지지만 이 몸이 구속될 때에는 썩지 않는 영광의 몸으로 변한다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43 절에 의하면 부활할 몸은 영적인 몸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형체 가 없는 몸이라는 뜻이 아니고49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즉 예수님의 형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지만 부활 후 의 예수님의 몸은 변한 몸이었습니다. 물론 손에 못자국과 옆구 리에 창 찔린 흔적이 있었고 음식도 잡수시고 뼈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장사한 지 사 흘만에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홀연히 나타나셨는데 그때 방의 문 들은 모두 잠겨져 있었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20:19).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 후에 나타나신 것을 종합해 보면 부활 전 의 몸과 후의 몸이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이 있음을 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활한 몸은 썩지 않고 소모되지 않는 몸이 고. 의사가필요없고 변소가 필요없는 새 몸을 가지고 부활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1-54 절까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밀을 말하테니 들으시오. 우리는 전부 자고 있지 않 고 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릴 때 눈 깜빡할 사이에 변할 겁니다. 과나팔소리가 날 때 죽은 사람은 썩지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변 할 겁니다. 썩어질 것은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혀야겠고 죽을 몸 은 죽지 않을 몸으로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죽음은 새생명에 집어 삼킨 바 되고 하나님이 승리한다 라는 말이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 안에서 구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연성 고난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은 아프고 비참한 사건이니까요.부활이 있어야 죽음에 의미가 있습니다. 내일이 있 기 때문에 오늘밤이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다 시 사신 적이 없다면 우리도 다시 살지 못하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의 죄는 아직 남아 있을 거라구요.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로마성도들이 고난 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난의 필연성올 말한 다음 위로와 경고를 하려는것입니다. 8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는그리스도 의 고난을 분담하지 않고는 그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고난 후에 영광올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법칙이요하나님이 이 법칙을 구원의 계획 에 적용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제 이 진리를 로마 성도들 에게 적용하면서 상처없는 훈장은없다 라고합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러면 예수의 고난을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 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서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 재판을 받습니다. 위해서 구원하러온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받습니다. 평상시 에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다 달아납니다. 떡을 배불리 얼어 먹고 기적을 보고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그를 십자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합니다. 이제 그는 반나체로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힘니다. 그리고는 광 야에 세워진 구리뱀같이 세워집니다.거기서 숨 거두실 때까지 세 시간을 매달려 고생합니다. 몸무게때문에 못박힌 손이 늘어 져 아픔니다. 가슴에 압박이 와서 숨이 막힙니다.다리를 펴서 가 슴을 펴려고 하니까 못박힌 발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픕니다. 그 것뿐이 아닙니다.밑에서 조롱하는 말이 들림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기서 내려와 자기나 구원해보라고.
그런데 로마군인 이 와서 창으로 옆구리를 쿡 찌릅니다. 거기서 피와 물이 쏟아 져 나옵니다. 주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 까 그러나 육체의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죄없으 신 분이 남의 죄를 져야했던 정신적 고통입니다. 물론 인간이 예수를 심판한 죄목은 있지요. 하나님을 모욕한 참람죄였습니다. 자기가 유대의 왕이란 사실을 시인한 죄였지요. 그러나 주님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마가가 10장 45절 에 썹듯이 그는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섬기시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셨 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은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에 가는 것 쯤이야 그렇게 힘들었겠습니까 라고요.아닙니다.십자가를 지는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히브리서12 장2 절에 보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하실 분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부활과 승천의 기쁨을 생각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고 그 수치를 극복하 셨다. 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평가절하하지 맙시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구원의 은혜 를 값싸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의 죄를 가볍게 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어렵게, 어렵게 십자가를 견디셨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쓰러질 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주님의 당하신 고통 중에 가장 큰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혀 당하는 고통도 컷 지만. 그리고 죄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처형당하는 괴로움과 수치도 컸지만 무엇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버 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서기관 과 바리새인들에게 저주를 일곱번이나 퍼부은적이 있습니다. 마 태복음23장에서 그들의 일곱 가지 죄에 대하여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저주의 나무에 매달림니다. 어 찌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누워서 침뱉으신격입니까 이사야는 오래전에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 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 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가 찔 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 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성도 여러분,예수님은 여러분과 저의 죄를 한몸에 지시고 아버 지의 저주의 화살을 맞으셨습니다.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겨버리 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아픔을 아시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흘 리시며 자신과 싸웠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리고 세상의 죄를 향한 아버지의 채찍이 십자가에 내려칠 때 예수님의 고통은 극치에 달합니다. 그때에 아들은 부르짖습니다. 나 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왜 버림을 받고 있는가를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는 고통의 절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다시 말해서 우리 죄가 이만큼 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모르십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보십시오.그 고통 을 느껴보십시오.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십시오. 그러나 동정은 하 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값싼 눈물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붉은가를 알고 통회하는 눈물을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금년 고난주간 동안에는 우리들의 죄를 똑바 로 봅시다. 십자가를 통해서 말입니다. 올바로 진단받지 못한 병은 그릇된 처방올 가져올 뿐입니다. 회개를 옳바로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붉은 죄를 눈보다 회게 씻어 주십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죄의 척도가 되지만 죄의 해결책도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생각속에 들어 있는 죄가 무엇입니까 . 안일주의 입 니까 노력 없는 한탕주의입니까 통회없는 용서입니까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믿습니까. 그래서 큰 교회에 나갑니까 고통 없는 삶 을 추구하십니까 그래서 병 있는 자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봅니 까.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설교를 좋아하십니까주일,교회에 한번 나가 준다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혹은 세상의 권세는 맛보았으니 또는 세상의 권세를 못 가져봤으니 교회안에서 권세 를 갖기 위해서 헌금 많이바치고 집사나 장로직을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돈 을 모아 소위 성전건축하기에 급급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내가 모두 반성해보고 회개해야 될 문제입니다.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 이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회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느지.눈을 크 게 뜨고 봅시다. 한국의 개혁은 교회내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나 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영광만을 얼으려는 도적의 심보를 회개 해야 합니다.이 회개운동이 없이는 참된 개혁이 있을 수 없고 하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세계복음화의 기회도 놓칠 겁니다. 18 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당시 로마에서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성도 들의 고난은 장차 예수님이 주실 영광을 생각하면 비교도 안된다 고 위로합니다.히브리서 12장 2 절에서 예수님도 사홀 후에 일어 날 부활과 승천의 기쁨을 바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셨다 고 합니다.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승리주의에 대한 경고
셋째로 사도바울은 고난과 영광과의 관계에서 소위 승리주의 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승리주의는 영광을 이 세상에서 맛보아야 겠다는 욕심입니다.고린도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었듯이 로마성도 들에게도 승리주의의 유혹에 빠질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바울사도는 아직은 영광이 안왔다는 것입니다.주님이 아직 안 오셨기 때문입니다.주님이 오실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권면의 말씀은 빨리 빨리를 원하는 우리들로서는 받 아들이기 힘듭니다. 교회안에서도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하나님 께 부르짖고 당장에 사업을 축복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는 본능도 강하지만 참고 기다리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도 회개해야 합니다.하나님의 주권과 시간을 믿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시한부 말세론이 성하게 됩니다.백성들기 이 런 약점을 이용하여 거짓 선지자가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을 떠들 썩하게 만듭니다.승리주의는 세상철학과도 일맥 상통합니다.적극 적 사고방식이라든가 병들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보자라는 건강주 의와 같은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을버리 십시오.23절에 성령님의 첫 열매를 가진 우리라 하더라도 아직은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합니다.그리고 우리 몸의 완전 구속을 고대하고 있다고 합니다.25 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오 실 때 완전하게 부활한 소망을 가지고 끊기있게 기다린다고 합니다. 죄와 아픈 몸을 가지고 신음하며 사는 우리는,주여. 어서 오시 옵소서 라는 기도와 함께 삼일 동안 지옥에 가 계셨지만 거기서 도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며 의 의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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