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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롬5:8-10)

본문

얼마 전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영국에서 온 사람이 김포에 내 렸다. 밤에 착륙을 하는데 그가 묻는다. "비행장 주위가 묘지입니까" 왜 냐고하니까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그러고 보니 온통 붉은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만 보여지는 특징이다. 언제부터 누가 시작했는지 모른다. 오직 교회에서만 붉은 네온 십자가를 붙이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기독교의 뺏지인가 귀신을 물리치는 부적인가 마음의 평안을 주는 마크인가 사람마다 의미가 다를지 모르나 십자가는 신자들에게는 엄청난 의미의 보물이다. 이 십자가 표지가 보물이 아니다. 그 의미가 보물이다. 그 가치를 안다면 세상의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나라 전역이 붉은 십자가로 덮혀도 좋다고 여길 것이다. 사실상 그 친구가 부끄러워하듯 십자가는 본래가 부끄러운 것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었다.
이 야만스러운 물건에는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쌓이고 쌓여 있었다. 거기에 못이 박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두는 것이다. 일주일 이상 모진 생명이 지 속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십자가는 저주의 무서운 나무였다. 일반 사형수는 목을 매거나 참수를 했다. 간단히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형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 사형수는 우선 채찍으로 거의 반 죽 도록 맞는다. 기운이 조금 회복되면 이제 상처로 찢긴 몸으로 자기가 매달 릴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한다. 형장에 오면 사형수는 완전히 나체가 된다. 그리고 산채로 손발에 굵은 못을 박는다. 그렇게 귀신으로 변해간다. 십자가는 이렇게 원한과 증오의 형틀이었다. 악한 인간은 죽어야 했다. 그것은 악의 댓가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을 죽이는 방 법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는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은 수치스러운 물건이었다. 만약 친척중에 누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하면 그 집안은 망한 것이었다. 더 이상 망신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는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벌을 자처 했던가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기분 이 아니다. 설교로 마음이 감동되었다해도 확실한 신앙은 가질 수 없다. 신자는 반드시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의미가 확 실하게 되면 될수록 신자의 능력도 함께 늘어가게 된다. 세상에서는 인간끼리 다른 인간에게 죄를 범할 때 벌을 가한다. 남에 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가에 따라서 죄의 크고 작음을 판가름한다. 그래서 감옥에도 가두고 벌금도 매긴다. 심지어는 사형도 시킨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러한 죄들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향해서 범한 죄 도 물론 죄다.
분명히 하나님의 두 돌판중 하나에 적혀 있다. 이 십계명을 적은 한 쪽 돌판은 인간에게 죄짓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부모, 이웃에게 어떻게 할지 말한다. 효도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 하면 않된다.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로 손해주지 말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간단한 명령이다. 이것을 범하는 것은 인간에게 향한 죄뿐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범죄도 된다. 더 무서운 것은 다른 쪽의 돌판이다. 아까 것은 여기 비하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하나님을 향한 명령이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섬기면 않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무서운 죄악이다.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망령되게 하면 않된다. 이런 계명을 범한다고 인간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출세에 지장 없다. 그러기에 별 관심이 없이 마구 범한다. 세상에서도 질서를 어기면 몰매를 가한다. 잠시 후면 사라질 그림자 같은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도 경찰이 있고 법관과 감옥이 있다. 개인적으 로도 자기에게 해를 준 사람을 무섭게 미워한다. 대부분 평생토록 미워하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을 괴롭히면 한이 남는다. 하물며 하나님을 향해서 지은 범죄야 말로 더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인간과도 원수가 되면 무서운 일인데 하나님과 원수되고 무슨 좋은 일을 바라랴!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당하는 것도 무서울진데 안 보이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초기의 부흥사들은 이 점을 지적했다. 세상의 무서운 일도 단지 영원한 고통의 그림자일뿐이다. 사람들은 저주에 대해 전혀 무방비이다.
건강 진단을 하고 몸조심한다 고 안 당하는건 절대로 아니다. 얼마 전 아주 젊은 사람이 40대 초에 위암 으로 죽었다. 다른 젊은 사람이 교통 사고로 죽었다. 여기저기서 죽음의 신음이 들린다. 저주의 바다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그러나 언젠간 반드시 나도 당한다. 좀 더 늙어 당해도 무서움은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그것이 내가 당할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이 죽었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약간의 시간 문제일뿐 사자가 들에서 짐승을 잡아먹듯, 저주는 인간에게 언제든지 닥친다. 돈이 좀 있고 권력이 있다고 예외는 아니다. 일 열심히 한다고 해결되는건 아니다. 술마시고 노래방가고 등산하고 좋은데간다고 안닥치는게 아니다. 이제 십자가를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가 당할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까지 당하지 않았어도 곧 당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 가 멸시와 천대를 당했다. 그가 매를 맞았다. 그가 벌겨벗겨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는 영원한 지옥으로 던져졌다.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그런 강도 로 임한다. 자신의 운명을 보는 인간은 그 무서움에 놀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도 가 난하기에 돈을 받고 벌을 대신 받아주는 것이다. 그러나 돈받고 대신 사형 당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평생을 대신 비참하게 살다가 배신을 당하고 다시 개망신을 당하면서 온 가문을 망치면서 형틀을 지고 걸을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질 존재는 영 없었다. 십자가는 보여준다. 죄악의 인간이 당할 것이 무엇인가를. 그것이 비 참할수록 인간이 운명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라. 죄값이다. 동시에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죄많은 인간들의 값을 치루어 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인간이 당할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졌다. 하나님의 원수에게 퍼부어질 무서운 형벌을 자기 몸에 받았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말한다. "지금 이 모든 것은 다 너를 위한 것이다. 너 대신 하는 것이다. 내가 네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었다. 무서운 지옥도 담당했다. 자 이제 이 선물을 네가 받겠느냐" 이제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의를 위해서 죄를 벌하심이 이제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무서운 형벌을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원수가 달려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문제 해결을 증명서이다. 거기 내 죄가 못박혀 있다. 거기 내 병이 내 가난이 나의 무서움이 죽음과 멸망이 못박혀 있다.
이 의미를 깊이 깨 달으라.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자신에게 말하라. "예수를 믿는 가 그러면 십자가의 의미를 믿으라. 네 약함이 여기 확실하게 죽었다." 우리가 훌륭해서 담당하셨는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좋은게 있고 아까 와서 그런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그런가 아니다. 그러면 앞으로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이다. 생각해 보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며 동시에 사랑을 증명해 준다. 생각해 보라. 나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주께서 다른 것들은 들 어주지 않겠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십자가는 우리의 기도의 확증이다. 아들의 생 명도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분이 다른 것은 안주겠냐는 확실한 선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원수인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되었다는 증거를 준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해결된 것이다. 하나님 께 대한 빚은 다 갚아졌다. 중세에 많은 수도사들은 사막에서 평생을 엎드 려 있었다. 죄를 참회하고 죄성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 결될 수 없는게 원수관계이다. 십자가를 보라. 거기서 화해가 이루어졌다. 사십일 금식을 안해도, 평생을 고행하며 엎드려 있지 않아도 일천번제 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삭이지 못한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장벽은 무너졌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 에 그의 가장 심오하고 깊은 거처에 그냥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 의 원수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십자가가 그렇게 했다. 십자가 사건 동안 온 우주는 무서운 전투에 말려들었다. 하늘의 모든 영들은 처참한 전투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 록,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사탄은 모든 힘을 다해 싸 웠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끊어졌을 때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벌을 완벽하 게 받아 버렸을 때, 마귀는 인간에게 더 이상 권리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말하라. "이제 내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받을 모든 벌은 끝났다. 이제 어떤 무서운 일도 나를 망하게 하 지 못한다. 가난이나, 병이나, 실수나, 약함이나 어떠한 죄까지도 나는 두 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옥에서 면제된 사람이다!" 마귀는 나의 부족을 계속 고발할 것이다. "너는 엉터리다. 기도가 부 족하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하나님이 너는 돌보지 않는다. 네 기도는 들어지지 않는다. 너는 잘 안될 것이다. 보라. 상황은 어렵고 세상은 악하다. 너는 절대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그 약함을 막아주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강함을 주기 때문이다. 311년 콘스탄틴은 막센티우스의 군대를 맞아 일사각오로 전투를 벌리 고 있었다. 이제 황제가 되느냐 아니면 역적으로 죽느냐의 기로였다.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군대는 열세였다. 자신이 없었다. 그때 하늘에 나타난 모양이 있었다. 십자가였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다. "이 표지로 이겨라." 그는 복종했다. 즉시 모든 깃발을 십자가로 바꾸었다. 무서운 전투였다. 그리고 상황은 알 수 없었다. 하루 온 종일을 싸운 뒤에 결과는 나타났다. 대승이었다. 막센티우스는 죽었다. 이리하여 새로 운 역사는 시작된다. 그 이후 로마군의 깃발과 유럽 사람들의 깃발은 십자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깃발이 능력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십자가를 보고 마귀가 도망하지는 않는다.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을 보고 도망한다. 십자가는 인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자 기의 것을 통해서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고 겸손하게 그 앞 에 엎드리라.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 을 헛된줄 알고 버리네." 찬송 그대로이다. 그 엄청난 희생과 사랑을 보면 서 이제 우리는 그 능력으로만 살것을 또 다시 다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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