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투쟁 (롬7:14-25)
본문
어떤 분들은 예수 믿고 나서 고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저 전에는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는 데, 예수 믿고 나서 갈등만 늘었 다는 겁니다. 나쁜 겁니까 아닙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죽었던 감각이 되살아 나는 겁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 나는 겁니다. 썩은 다리를 꼬집으면 감각이 없지요. 그러나 새 살이 돋아 감각 이 돌아 오면 감각을 느낍니다. 축하할 일이지요. 예수를 믿고 찾아오는 생활의 갈등은 죽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살아 나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갈등이 생기면 아- 내가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고민이 늘어난다고 내 인생 손해구나 이렇게 생각 하기 보다, 내 생명이 풍부해 지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일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갈등은 계속 됩니다. 햇빛에 먼지가 드러 나듯이 밝게 드러나면 오물과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옛사람을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를 가진자는 갈등하지요.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부터 갈등과 몸부림은 시작됩니다. 갈매기 죠나단은 썩은 고 기를 먹지 않는 대신 높은 창공에 도전하는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창공의 목표를 설정하고 부터는 고단하고 피나는 몸부림은 시작 되는 것입니다. 또 더 높은 산정을 향하는 자는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8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을 등반할 때면 5천미터가 고비라고 합니다. 산소결필증에 고산병에 격심한 기후변화 까지 만나면 대개 여기서 하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이처럼 더 높은 산에 도전하는 사람은 더 격렬한 갈등을 격게 됩니다. 더 거룩한 지대을 향해 가는 사람은 더 큰 갈등과 씨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도 말씀에 더 예민한 사람은 더 큰 갈등 에 휩쌓이게 됩니다.
1. 거룩한 몸부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롭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거룩한 자입니까 세상과 율법 은 행동의 결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동기와 자세로 거 룩을 판별합니다. 기독교에서 의인은 완성된 자가 아닙니다. 단지 방향을 전환한 자를 의인이라 부릅니다. 과거에는 태양을 등지고 있었지만 이제 태양을 향해 돌아선 자 이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태양에 가까 이 다가간 사람 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도상(途 上)에 있는 자를 의인이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말하자면 거룩을 향해 가고 있는 자입니다. 거룩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어요. 이 것을 오늘 롬마서 7장은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롬마서 7장의 실패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얻는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인은 몸부림 치는 자입니다. 의인은 행 위의 비교우위적 선행자가 아닙니다.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거룩을 향해 피나는 몸부림을 계속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 하면 패륜아나 악질 처럼 생각하는 데, 아 닙니다. 세리보다 바리세인의 행동이 더 악질일리는 없지요. 분 리주의자란는 뜻을 가진 바리세인들,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당 시의 바리세인들은 유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자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꾸짖은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회개를 향한 몸부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놓고 비교적 의롭다고 자부하며 고개를 들고 다녔어요. 몸부림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세인 보다 얼굴 조차 못들고 깨끗해 지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세리가 하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몸부림이 의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행위가 의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죄를 깊이 뉘우치고 거룩을 향한 몸부 림을 계속하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절절히 필요로 하 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력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전혀 없고 주님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필요로 하는 자는 복음의 필요도 느끼는 겁니다. 그러기에 거룩을 향해 발버둥 치는 그 몸부림만으로도 의롭습니다. 이 몸부림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인(義認)입니다. 인간은 누구 도 하나님 앞에 절대 거룩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에 거룩을 향한 몸부림을 게을리해도 좋은 완벽한 인간이란 세상 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쉽지 않는 사람, 그의 용서가 절절히 필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능력도 필요없 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필요없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면 그래요.
둘째 아들은 두 번 몸 부림을 쳤습니다. 한번은 욕망을 향한 몸부림이지요. 재산의 절 반 분깃을 달라고 하면서 먼먼 땅에 가서 허랑방탕할 욕망입니다. 또한번은 거룩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 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 당치 못하겠나이다. "(눅15:18) 죄를 얻고 아들이 아닌 머슴이 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이것은 거 룩을 향한 회개의 몸부림입니다. 욕망의 몸부림은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거룩을 향한 몸부림은 용서와 의로움을 덧입기에 충분하 고도 남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바로 용서가 아닙니까 금가락지를 끼우고 끌어안고 '머슴이 무에냐 잃어버 린 아들을 되찾은게지'하는 것이 바로 의롭다는 게 아닙니까
2. 거룩한 투쟁을 선포하라 거룩한 갈등은 물론 자연스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해 돌아선 자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냥 두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 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18-19) 육체의 법과 성령님의 법, 육체의 소욕과 성령님의 소욕, 선과 악, 이 두 가지가 치열한 싸움을 하는 상태에서 그냥 두면 행할 수 없습니다. 원하기는 하지만 백전백패해서 원치 아니한 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르고 살 때는 아예 절망이라는 걸 몰랐는 데 알면서도 실 패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좌절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좌절 이 깊어지면 자기 혐오가 됩니다. 자기혐오가 깊어지면 체념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면 이제 패배구조는 정착하게 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피곤과 무력감에 빠진 구제불능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래서 우리는 투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지와 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울 것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에 관한 것이라 하 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이요, 그것은 은혜요, 성령님인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1-12) 이것은 어느정도 투쟁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알콜중독이나 도박 등으로 가정파탄에 이른 사람들을 보면 어떻 게 할까 절망감이 앞섭니다. 제일 난감한 것 중의 하나는 당사자 가 투쟁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능력은 그 다음 문제라 하더라도 전혀 습관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어요. 즉 치료를 시작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성이 있는 데 말이지요. 시작만 한다면 확률은 80% 이상으로 높아질 수도 있는 데 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시작을 하지 않는 거예 요. 그러니 캄캄절벽이지요. 투쟁의 선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알콜 중독자나 도박에 빠진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악에의 고질병이 없습니까 나에게는 거룩한 습관을 끝내 안착 시키지 못하는 실패 구조는 없습니까 사소한 말씀의 실천에도 백전백패하는 분야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실패 구조는 아는 것 만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투쟁을 선포하고 투쟁의 구체적인 행동 개시를 해야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말이지요. 그러데 사실 거룩한 투쟁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큰 싸움에 덤벼드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 입니다. 토요일 밤에는 한 시간 일찍 자기, 주일 아침 30분 일찍 일어나기, 경건의 시간 2분 갖기, 수많은 교통법규 중에서 정지 선 지키기, 거지 보면 무조건 100원주기 뭐 이런 것들입니다. 능 히 할 수 있고 시작하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작은 투쟁부터 거룩한 습관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2월 첫 주부터 제자 훈련반을 시작 합니다만, 지극히 사소한 것과의 전투를 치 를 것입니다. 전면전도 아니고 국지전도 아닙니다. 다만 실험전 입니다. 보초 끼리 싸우는 정도의 거죠. 어떤 분은 금슬이 좋아 서 부부가 성경 한 권을 같이 쓴다고 합디다만, 자기 성경 갖기 를 권장할 겁니다. 찬양집 갖기, 경건노트 갖기, 뭐 주로 이렇게 가지고 다니기 훈련부터 합니다. 쓰는 훈련은 훨씬 뒤에 일어날 것입니다. 일단 가지고 다니다 보면 쓰는 훈련은 훨씬 쉽게 이뤄 질 것입니다. 쓰는 훈련이 이뤄지면 습관으로 정착 되는 것은 아 주 쉬운 일입니다. 습관이 반복 되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든 역사에 대한 실천이든 모든 말씀의 실천은 단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의 전투를 선포하고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에게 아주 서서히 이뤄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3. 싸움을 지속하라 또 중요한 것은 지속하는 것입니다. 한 번 쯤 도전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 보지 않는 사람도 없 습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습관으로 정착될 때 까지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지 속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지속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것이 성령님충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 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영에 거하는 것, 성령님이 지속적으로 거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거룩한 투쟁을 지속하는 것 이것이 승 리의 비결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계속 도우시고 응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우리 자신이 중단하지 않는 이상 성령님은 우리를 응원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 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義認化(Justification)가 된 다음에 聖化(Sanctification)가 이뤄 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변해가는 경로입니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해지는 몸부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의로워진자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성화가 저절로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 게 된 자는 거룩해 져야 한다는 명령의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이 끝나는 순간 까지 지속됩니다. 왜 그렇까요 영화(榮 化, Glorification)는 이 땅 나라에서는 달성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가서야 죄의 가능성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어야만 완전이 거룩하고 완전히 영 화로운 몸으로 덛입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불완전하고 나약한 몸 으로 사는 이 땅에서는 거룩함의 투쟁만있을 뿐입니다. 죄의 가 능성 아래 노출되어 사는 우리는 거룩한 투쟁으로 성화의 전진을 이룰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룩함을 향한 투쟁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진 척이 빠르느냐 느리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멈추지만 않 으면 됩니다. 멈추지만 않으면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물론 기반은 복음이요. 능력은 성령님입니다.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제 한 해 동안 자신과의 싸움 거룩한 투쟁에 나서는 여러분에게 이런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기를 바라겠습니다.
1. 거룩한 몸부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롭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거룩한 자입니까 세상과 율법 은 행동의 결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동기와 자세로 거 룩을 판별합니다. 기독교에서 의인은 완성된 자가 아닙니다. 단지 방향을 전환한 자를 의인이라 부릅니다. 과거에는 태양을 등지고 있었지만 이제 태양을 향해 돌아선 자 이 사람을 의인이라 합니다. 태양에 가까 이 다가간 사람 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닙니다. 도상(途 上)에 있는 자를 의인이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말하자면 거룩을 향해 가고 있는 자입니다. 거룩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한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없어요. 이 것을 오늘 롬마서 7장은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롬마서 7장의 실패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얻는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인은 몸부림 치는 자입니다. 의인은 행 위의 비교우위적 선행자가 아닙니다. 죄인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거룩을 향해 피나는 몸부림을 계속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 하면 패륜아나 악질 처럼 생각하는 데, 아 닙니다. 세리보다 바리세인의 행동이 더 악질일리는 없지요. 분 리주의자란는 뜻을 가진 바리세인들,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는 당 시의 바리세인들은 유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사는 자들이 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꾸짖은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회개를 향한 몸부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세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놓고 비교적 의롭다고 자부하며 고개를 들고 다녔어요. 몸부림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세인 보다 얼굴 조차 못들고 깨끗해 지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세리가 하늘 나라에 더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몸부림이 의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겁니다. 행위가 의로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죄를 깊이 뉘우치고 거룩을 향한 몸부 림을 계속하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절절히 필요로 하 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력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전혀 없고 주님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필요로 하는 자는 복음의 필요도 느끼는 겁니다. 그러기에 거룩을 향해 발버둥 치는 그 몸부림만으로도 의롭습니다. 이 몸부림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인(義認)입니다. 인간은 누구 도 하나님 앞에 절대 거룩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에 거룩을 향한 몸부림을 게을리해도 좋은 완벽한 인간이란 세상 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쉽지 않는 사람, 그의 용서가 절절히 필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능력도 필요없 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도 필요없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면 그래요.
둘째 아들은 두 번 몸 부림을 쳤습니다. 한번은 욕망을 향한 몸부림이지요. 재산의 절 반 분깃을 달라고 하면서 먼먼 땅에 가서 허랑방탕할 욕망입니다. 또한번은 거룩을 향한 몸부림입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 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 당치 못하겠나이다. "(눅15:18) 죄를 얻고 아들이 아닌 머슴이 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이것은 거 룩을 향한 회개의 몸부림입니다. 욕망의 몸부림은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거룩을 향한 몸부림은 용서와 의로움을 덧입기에 충분하 고도 남습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바로 용서가 아닙니까 금가락지를 끼우고 끌어안고 '머슴이 무에냐 잃어버 린 아들을 되찾은게지'하는 것이 바로 의롭다는 게 아닙니까
2. 거룩한 투쟁을 선포하라 거룩한 갈등은 물론 자연스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해 돌아선 자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냥 두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 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18-19) 육체의 법과 성령님의 법, 육체의 소욕과 성령님의 소욕, 선과 악, 이 두 가지가 치열한 싸움을 하는 상태에서 그냥 두면 행할 수 없습니다. 원하기는 하지만 백전백패해서 원치 아니한 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르고 살 때는 아예 절망이라는 걸 몰랐는 데 알면서도 실 패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좌절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좌절 이 깊어지면 자기 혐오가 됩니다. 자기혐오가 깊어지면 체념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면 이제 패배구조는 정착하게 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피곤과 무력감에 빠진 구제불능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래서 우리는 투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지와 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영적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싸울 것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요, 영에 관한 것이라 하 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이요, 그것은 은혜요, 성령님인 것입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6:11-12) 이것은 어느정도 투쟁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알콜중독이나 도박 등으로 가정파탄에 이른 사람들을 보면 어떻 게 할까 절망감이 앞섭니다. 제일 난감한 것 중의 하나는 당사자 가 투쟁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능력은 그 다음 문제라 하더라도 전혀 습관을 바꾸려는 의지가 없어요. 즉 치료를 시작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성이 있는 데 말이지요. 시작만 한다면 확률은 80% 이상으로 높아질 수도 있는 데 말이지요.
그런데 도대체 시작을 하지 않는 거예 요. 그러니 캄캄절벽이지요. 투쟁의 선포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알콜 중독자나 도박에 빠진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악에의 고질병이 없습니까 나에게는 거룩한 습관을 끝내 안착 시키지 못하는 실패 구조는 없습니까 사소한 말씀의 실천에도 백전백패하는 분야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실패 구조는 아는 것 만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투쟁을 선포하고 투쟁의 구체적인 행동 개시를 해야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고서 말이지요. 그러데 사실 거룩한 투쟁은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큰 싸움에 덤벼드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 입니다. 토요일 밤에는 한 시간 일찍 자기, 주일 아침 30분 일찍 일어나기, 경건의 시간 2분 갖기, 수많은 교통법규 중에서 정지 선 지키기, 거지 보면 무조건 100원주기 뭐 이런 것들입니다. 능 히 할 수 있고 시작하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는 작은 투쟁부터 거룩한 습관을 실천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2월 첫 주부터 제자 훈련반을 시작 합니다만, 지극히 사소한 것과의 전투를 치 를 것입니다. 전면전도 아니고 국지전도 아닙니다. 다만 실험전 입니다. 보초 끼리 싸우는 정도의 거죠. 어떤 분은 금슬이 좋아 서 부부가 성경 한 권을 같이 쓴다고 합디다만, 자기 성경 갖기 를 권장할 겁니다. 찬양집 갖기, 경건노트 갖기, 뭐 주로 이렇게 가지고 다니기 훈련부터 합니다. 쓰는 훈련은 훨씬 뒤에 일어날 것입니다. 일단 가지고 다니다 보면 쓰는 훈련은 훨씬 쉽게 이뤄 질 것입니다. 쓰는 훈련이 이뤄지면 습관으로 정착 되는 것은 아 주 쉬운 일입니다. 습관이 반복 되면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든 역사에 대한 실천이든 모든 말씀의 실천은 단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의 전투를 선포하고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에게 아주 서서히 이뤄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3. 싸움을 지속하라 또 중요한 것은 지속하는 것입니다. 한 번 쯤 도전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 보지 않는 사람도 없 습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습관으로 정착될 때 까지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지 속하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지속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 이것이 성령님충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 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영에 거하는 것, 성령님이 지속적으로 거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거룩한 투쟁을 지속하는 것 이것이 승 리의 비결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계속 도우시고 응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을 우리 자신이 중단하지 않는 이상 성령님은 우리를 응원하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 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8:26) 義認化(Justification)가 된 다음에 聖化(Sanctification)가 이뤄 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변해가는 경로입니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해지는 몸부림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의로워진자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성화가 저절로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 게 된 자는 거룩해 져야 한다는 명령의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이 끝나는 순간 까지 지속됩니다. 왜 그렇까요 영화(榮 化, Glorification)는 이 땅 나라에서는 달성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가서야 죄의 가능성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어야만 완전이 거룩하고 완전히 영 화로운 몸으로 덛입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불완전하고 나약한 몸 으로 사는 이 땅에서는 거룩함의 투쟁만있을 뿐입니다. 죄의 가 능성 아래 노출되어 사는 우리는 거룩한 투쟁으로 성화의 전진을 이룰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룩함을 향한 투쟁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진 척이 빠르느냐 느리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멈추지만 않 으면 됩니다. 멈추지만 않으면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로마서 8장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 물론 기반은 복음이요. 능력은 성령님입니다. 근거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제 한 해 동안 자신과의 싸움 거룩한 투쟁에 나서는 여러분에게 이런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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