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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로 가는 길 (롬7:7-8:17)

본문

'성화'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피조물의 영적 성장을 이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는 영화에로의 바람이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였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은 개인과 역사의 신기원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형태, 혹은 내용은 비유적으로 말할 때 새로운 신분, 새로운 주종 관계, 새로운 혼인관계로 설명되었다. 모든 것이 바뀐 상태이다. 새 관계의 상태이다. 이제 이 부분에 와서 성화로 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옛 길(율법)은 불가능하다(7:7-25). 곧 성화로 가는 길은 옛 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옛 길이 무엇인가 옛 길은 율법이다. 옛 길로 행함 곧, 율법으로는 성화로 가는 길이 불가능하다. 왜 율법이 성화로 가는 길에 불가능한가
(1) 율법의 본질적인 사망성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적 기능은 죄를 알려주는 일이다. 7장 7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예를 들면 '탐심', '우상', '불효', '살인', '간음' 등의 죄는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되는 줄 몰랐다. 그러나 율법 계시의 조명 때문에 죄가 되는 줄을 알았다. 7장 8절에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다 고 하였다. 율법의 본질은 죄를 가리켜 줌에 있다. 그러면 죄를 가리켜 주는 율법은 왜 성화로 가는 길에 무능한가 율법이 사람을 데리고 가고자 하는 마지막 목적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성화의 길은 영화, 곧 영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하였다(롬8:2). 그러면 율법이 나쁘고 악한 것인가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7:7).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다고 하였다(7:12). 이유는 그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알려주어 죄의 값은 사망임을 알려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과 중대성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2) 율법의 본질적 무능성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알려주고,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 죄의 결과로 오는 사망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성화에로 가는 생명의 길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죄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 때문에 살아난 죄는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는가
1)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하였다. 7장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율법)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고 하였다. 영적인 표현이다. 사망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다. 캄캄한 장면이다.
2) 죄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7장 10절에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고 하였다. 그것은 율법이 죄를 알려주고, 죄의 결과는 사망이 그 종착역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3) 죄에 속히고 죽임이 되었다고 하였다. 7장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고 하였다. 죄가 바울을 속이고, 죄가 바울을 죽인다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뱀이 하와를 속이고 죽이게 한 것과 같은 성질의 내용이다(창3:1-5,고후11:3,딤전2:14).
4) 죄가 나를 드러내고 나를 죽게 만들었다고 하였다. 7장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라 고 하였다. 죄를 심히 죄가 되게 하는 이유는 사망을 가져와야 되기 때문이다. 5) 죄 아래로 팔려 버린다고 하였다. 7장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고 하였다. 돈에 팔려간 노예처럼 죄 아래로 팔려가 버렸다고 하였다. 죄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다(요8:34).
6)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된다고 하였다. 7장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그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함이라 16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 고 하였다. 이 말은 마치 노예가 팔려가서 주인에게 소속되면 자기의 자유 의사대로 못하고, 자기의 뜻과는 상관 없이 주인의 의향대로 행함과 같다는 말이다. 7) 그 죄가 내 속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7장 17절에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하였다. 죄가 바울 속에 자리를 잡고 기지를 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결정적인 고통이다.
그래서 18절에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7장 20절에도 내 속에 거하는 죄 라고 하였다. 죄가 속에 자리를 잡았다 함은 사망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8) 모순적 이율배반, 이중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였다. 7장 19절에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고 하였다. 7장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곧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함이라 고 하였다. 두 사람, 두 얼굴, 두 마음, 두 행동의 인격자로 만들어 버렸다. 9) 곤고한 사람을 만들어 버렸다. 7장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 내랴 고 하였다. 결국 율법이 사람을 데리고 가는 마지막 코스는 곤고요 사망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절망이요 캄캄함이다. 중대한 결론은 분명하다. 곧, 율법으로는 의에 이르거나. 변화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죄인이고, 죄인된 결과 사망에 이르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얻을 차비를 하게 한다. 그래서 율법을 가리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고 하였다(갈3:24).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몽학선생 노릇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원되고 의에 이르게 된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되는 죄는 나를 죽이고, 사망에 이르게 하고, 속이고, 죽임이 되게 하고, 죄가 죄되게 하고, 죄 아래 팔려가게 하고, 원치 않는 것, 곧 죄의 노예 생활을 하게 하고,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이중인격의 생활을 하게 하고, 내 속에 자리를 잡고 곤고하고 가련한 사망의 몸을 이루게 해버린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성화에 이를 길이 전혀 불가능하다. 율법은 성화로 가는 길의 파국이다. 율법이 지배하는 곳에는 죄가 왕성하다. 이유는 그 율법이 죄를 지적하고, 공개하고, 폭로하고, 사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 울어도 못하고, 힘으로도 못하고, 참아도 못한다고 하였다. 믿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은혜로만 성화의 길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성화로 가는 길에는 옛 길이 있다. 율법의 길이다. 절망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성화로 가는 길에는 불가능한 길이다. 율법의 본질적 사망성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적 무능성 때문이다.
(3)성화의 실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종 바울은 성화에 이르는 자기 모습을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서 밝히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성화의 실존이다.
1) 먼저 성화는 자신의 개인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곧 자기 개인의 믿음, 개인의 변화, 개인의 영화, 개인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바울은 교회의 믿음, 인류의 믿음을 말하고 있음이 아니고 자기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니고, '무리들'도 아니고, '인류'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고 '나 '자신이다. '내가' '나의' 등의 말이 거듭된다. 복수가 아니고 단수이다. 2인칭, 3인칭이 아니고 1인칭이다. 7장 9절에 나는 죽었다 , 11절에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고 하였다. 13절에 나를 죽게 만들었다 ,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 16절에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17절에 내 속에 거하는 죄 , 18절에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 , 19절에 내가 원하는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한다 , 20절에 내 속에 거하는 죄 니라, 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 23절에는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도다 .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 고 하였다. 성화는 개인 문제이다. 믿음도 개인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개개인을 독립체로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도 결국 개인의 문제이다. 성화도 개인의 문제이다. 개인과 개인주의는 크게 다르다. 기독교의 구원은 개인 구원이다. 사회 구원이나 민족 구원이 아니다. 개인의 구원이 사회로, 민족으로 확대되고, 확산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개인 문제임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2) 싸움하는 삶(성화적 투쟁)이다. 어떤 싸움인가
1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는 체험을 하는 자이다. 7장 9절에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고 하였다. 13절에 선한 그것(율법)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의 촛점은 율법의 요구대로 선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도록 하는 육체적 부패성 때문에 절망을 하는 자신임을 보여준다. 율법 앞에 죽는다 함은 율법의 요구대로 선을 행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오히려 그 결과 사망을 지불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자인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율법과의 싸움에서 여지 없이 참패를 당하고, 율법에 이끌려 가는 사망의 실존임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거스틴(Augustine)은 어쩔 수 없이 죄를 통회하면서 '주여 내 살을 베소서'라고 하였다. 성 버나드(St.Bernard)는 기도하기를 '주여 나에게 노하소서'라고 자기의 비참 앞에 절망하였다.
2 속의 투쟁, 내적 투쟁이다. 7장 16-17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않은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하였다. 20절에도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하였다. 성화의 삶은 투쟁의 삶이다. 그것은 외적 도덕주의, 형식주의, 의식주의보다 내적 양심주의에서부터 시작 되고 있다. 밖에 있는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대적, 죄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것 만큼 성화적 투쟁은 본질적이요, 심각하다.
3 이중 인격적 투쟁이다. 이중인격이란 말은 심리학에서 온 것이다. 곧,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둘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합적인 모습이 있음을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결코 좋은 말이나 아름다운 말은 아니다. 사람은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바울에게는 두 가지 모습의 얼굴이 혼선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19절에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고 하였다.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하였다.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함이라 고 하였다. 22-23절에는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은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고 있다 고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이중적 인격의 혼란에서 부르짖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하였다(7:24). 참으로 이상한 표현이다. 선한 바울과 함께 악한 바울이 있다. 그 곳엔 바울과 함께 육(肉) 사이에 바울이 있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바울과 함께 죄의 법을 따르는 바울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바울의 이중인격, 두 얼굴의 모습의 실존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첫째 뜻은 이것도 바울 자신일 수가 만무하다 이것은 바울 자신을 앞세우면서도 불신자를 상상하고 나타낸 말이라는 해석이다.
둘째 뜻은 바울 자신이 불신자로 있을 때 가진 고민의 상태를 회고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경의 표현은 과거형 동사가 아니고 현재형 동사이다. 세번째 해석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투쟁이라고 하였다. 죽은 송장은 싸움이 없다. 죽은 식물이나 동물 세계는 싸움이 없다. 투쟁은 생명 세계의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 이상에 이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과 반복과 질시에서 이런 싸움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 싸움은 너무나도 격렬하다. 심각하다. 그것은 인격이 분열에 이르는 죽음의 싸움이다. 예수 생명을 받은 이 후부터,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자리를 비워주어야 한다. 추방당해야 한다. 여기에 싸움이 일어난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하였다. 바울이 그러했고, 교부들이 그러하였고 어거스틴, 루터, 칼빈, 크롬웰, 역대의 모든 개혁자들이 처절한 자기 투쟁을 경험하였다. 이 싸움은 심중의 파란, 혼의 파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마구 휩쓸어 버리는 폭풍과도 같다. 이러한 심중의 파란, 혼의 파도, 영의 폭풍을 뼈저리게 느낀 바울은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처절한 생의 토로이다. 중생받은 양심만이 말할 수 있는 생명의 토로이다. 세상에 사는 모든 크리스챤들에겐 이런 이중 의식, 두 얼굴의 고민이 있다. 크리스챤들에게는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법을 기뻐하지 않는 면도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이 깨닫고 있다는 데서 크리스챤의 고민이 있고, 그 고민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챤들은 자기와 자기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빛과 어둠의 싸움이다. 영과 육의 싸움이다. 하늘과 땅의 싸움이다. 속사람과 겉사람의 싸움이다. 그 고통의 정도가 사망의 비참을 느끼는 정도라고 하였다. '이 사망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이 성화의 전투에서 나타낸 자기 고백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겠느냐고 화급한 구원을 요청하였다. 불행스럽게도 바울의 이 화급한 구원의 요청 앞에 아무도 통쾌한 대답을 가지고 좇아 올 자가 없었다. 마치 사도 요한이 저 밧모섬에서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받거나 읽거나 해석할 자가 없어 울어버린 고통과 같은 것이다(계5:)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헬라인의 문화도 아니었다. 유대인의 이적도 아니었다. 로마의 권력도 아니었다. 한 사람도 없었다. 전 우주에 한 사람도 없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모순과 고뇌, 부조리, 불안, 공포, 절망이 인생 모두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싸움 뿐이고, 싸울 따름이다.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거기에도 오직 나 만 있을 뿐이다. '사망의 실존'인 나만 있을 뿐이다. 아무도 있을 수 없다. 이 이중인격의 투쟁을 '하나의 나'로 '본래의 나'로 만들어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3) 성화의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7장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고 하였다. 인간이 죄로 비참하다는 사실을 불신 철학이나, 교육이나. 사상이나, 도덕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죄 문제의 고민을 해결함에 있어서는 기독교 뿐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통스러운 자기의 실존 앞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신다'는 사실 앞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받게 되었다.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에 자기는 물론 아니라고 하였다. 자신이 사망의 몸을 이룬 당사자가 아닌가 위대한 철학자도 아니다 사상가도 아니다. 정치가, 경제가, 도덕가도 아니다. 심리학도 아니다. 예술, 문학, 과학도 아니다.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두 가지 마음, 두 얼굴, 두 행동, 두 역사의 분열을 십자가로 치료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챤들이 체험하고 있는 사랑과 용서와 사죄와 축복이다. 무섭고 저주스러운 자기 모순의 실존을 가지고 예수 앞에 가서 문제를 해결함이 크리스챤의 행복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화적 투쟁이다. 절망에 이르는 투쟁이다. 이것은 패배의 눈물이 아니라, 승리의 개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망의 애정(애가)이 아니라, 소망의 함성이다. 사망의 몸에서 건져올 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믿게 된다. 자기 밖에서의 절망! 예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망! 이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받은 부활 소망의 개가이다.
둘째로, 새 길(성령님)이 있다 (8:1-17).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를 향하여 복음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들이나. 개선 장군들이 로마의 시민들에게 들려주는 정복의 기쁜 소식과는 달랐다. 그 복음은 능력이라 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그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였다.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그 복음을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소개하였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복음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이 복음의 부채를 갚기 위하여 로마로 가야 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로마서1장 전반의 서론이다. 그 복음은 죄인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죄인에게 필요한 복음이라고 하였다. 유대인도 죄인이고, 이방인도 죄인이고,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하였다(1:18-3:20). 죄인의 복음임을 소개하였다. 모든 죄인은 이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신칭의의 복음이라고 하였다(3:21-5:21). 이제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성장, 곧 성화의 복음을 소개하는 중에 있다(6:1-14). 성화의 형태는 새 주종 관계, 새 부부 관계와 같다고 하였다(6:12-7:6). 다시 바울은 성화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다. 성화에 이르는 길은 옛 길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옛 길 이 무엇인가 율법의 길이다. 율법의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이행득구 의 길이다.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율법의 본질적 무능성 때문이라고 하였다. 율법의 본질적 무능이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의 본질적 사망성이라고 하였다. 율법의 본질적 무능성 때문이라고 하였다. 율법이 죄를 알려주고, 죄의 결과인 사망을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성화와 영생의 길에는 무능하였다. 이제 성령님은 바울을 통하여 성화에 이르는 길을 알려 주고있다. 그것을 새 길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이 로마서 8장 1-17절 중에 기록되어 있다. 새 길은 옛 길의 반대이다. 옛 길 곧 율법의 길에서 전망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아우성 치던 성화의 실존을 느끼는 자만이 새 길에 이를 수 있다. 그 사람은 캄캄한 밤(옛 길,7장)을 지나 밝은 아침 곧 새 길에 들어갈 자이다(8장).
(1) 그 새 길이 무엇일까 그리스도 예수 안 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 이 말은 바울 신학의 열쇠와도 같다. 여기에 큰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성도라고도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이 신약 바울 서신에서 무려 164회나 나오고 있다. 에베소서 한 서신에만 30회 이상이나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바울의 '애용어' 아니 성령님께서 즐겨 쓰시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이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었인가
1)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별칭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이다. 혹은 '주 안에 있는 자'라고 하였다. 로마서 16장 7절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나 이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하였다. 로마서16장 11절에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는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로마서16장 8-9절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동역자'라고 하였다. 이는 복음 전도자를 의미했다. 빌립보 1장 1절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 경륜 가운데 뿌리 박고 나오는 선택론에 기초하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 경륜에 기초하고 있는 신분이다.
2) 새로운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 새로운 피조물의 관계이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하였다. 새로운 신생의 장소이다. ㉡ 새로운 주종의 관계이다(롬6:15-23). 사탄의 종, 율법의 종, 사망의 종에서 예수의 종, 의의 종, 영생의 종으로의 새 관계이다. ㉢ 새로운 부부 관계이다(롬7:1-6). 옛 남편, 율법 곧 사망과 이별하고, 새 남편 예수, 곧 영생과 결혼한 관계이다.
3)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결합(연합)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사랑하고, 예배한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뒤에서 보고 따르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옆에서 손을 잡고 동행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태도 물론 아니다. 그리스도를 멀리서 동경하면서 흠모하고, 사모하면서 그리워하는 정도도 아니다. 바로 이상적인 군신처럼, 이상적인 부부처럼, 이상적인 부자처럼, 그리스도의 마음과 우리 마음과의 일치, 목적과 목적의 일치, 혼과 혼의 일치, 생각과 생각의 일치, 기쁨과 기쁨의 일치를 뜻함이다. 그것은 마치 몸과 지체와의 관계와 같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같다. 그것은 생명적 교훈의 관계이다. 눈으로 보는 상태에서 더 들어가고, 귀로 듣는 상태에서 더 들어가고, 입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상태에서 더 들어가는 상태이다. 형상과 형상의 만남, 혼과 혼의 만남은 지고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영교의 최고봉이다. 바로 그는 주님 자신의 생명(피와 살)을 먹고 마시고 사는 자이다. 마치 야곱의 혼과 요셉의 혼이 일치하듯한 상태이다. 돌아온 탕자와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하는 아버지의 혼의 만남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 뿐아니라, 신자와 신자와의 관계도 그러해야 한다.
4) 극치로운 안식과 보호의 행복한 상태를 뜻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는, ㉠ 주님의 절대 보호 아래 있는 자이다. ㉡ 주님의 절대 사랑 안에 있는 자이다 ㉢ 주님의 절대 구원 안에 있는 자이다. ㉣ 주님 기업의 절대 보장을 받고 있는 자이다. ㉤ 영원한 임마누엘 은총에 있는 자이다. ㉥ 주님의 영원한 소유로 확보되어 있는 자이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고 하였고, 그 결과로 풍성한 과실이라고 하였다(15:4-7).
5)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임을 알려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거기에는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도 있다. 거기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거기에는 할례자도 있고 무할례자도 있다. 거기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다. 거기에는 고대인도 있고, 현대인도 있다. 거기에는 강자도 있고, 약자도 있다. 거기에는 백인도, 흑인도, 홍인종도 있다. 거기에는 동쪽도, 서쪽도, 남쪽도, 북쪽도 있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다. 연대(年代)의 다함이 없다. 인종의 장벽이 없다. 완전한 하나이다. 영원한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모두 하나이다.
6) 인류의 구속이 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신령한 복이 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우리로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결이다. 에베소서 1장 6절에 그의 은혜의 사랑 안에서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그리스도 안에 죄사함이 있다 고 하였다. 에베소서 1장 9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해 예정되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예정이 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그리스도 안에 통일이 있다 고 하였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그리스도 안에 기업이 있다 고 하였다. 에베소서 1장 12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었다 고 하였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구원의 복음을 듣게 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다 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나온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 바울은 주 예수 안에서 에베소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창조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만유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운동이 설계되고, 펼쳐지고(계시), 이루어지고(성취), 진행되고, 완성될 것이다(롬11:36). 7) 그리스도 안에 인류의 구속이 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 없느니라 고 하였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 (요3:36)고 하였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종교'이다. 로마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인을, 고린도전,후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성화를,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유를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기쁨을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일치(하나, 통일)를, 골로새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완전을, 데살로니가서(전,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광(소망)을 디모데서(전,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목양을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생을 가르치는 복음이다. 바로 성화로 가는 길의 출발 지점이 '그리스도 예수 안'이다. 헬라인의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알라(知己)는 것이다. 로마인의 종교는 자기를 다스리라는 것이다(법치). 중국인의 종교는 수양하라(修身齊家治國平天下). 파라문교는 자기 자신을 우주 안에 던지라(투사)이다. 회교(이슬람교)는 자기라는 마음을 극복하라(인내)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라'함이다. '성화로 가는 길'은 새 길에 있다고 한다. 그 새 길이 누구인가 어디인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무엇이 있기에 그 안에서만 성화가 가능한가 성경을 한개의 반지로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그 보석이고, 제 8장은 보석 중에 반짝이는 절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길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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