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임하는 지혜로운 자세 (롬4:19-22)
본문
단 한번 주어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깊이 묻지도 않고 근본적인 답을 얻지도 못한 채, 그럭저럭 생존만을 할 뿐이거나 아무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들에 주어진 생명을 다 쏟아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삶’이란 ‘살다’에서 온 말입니다. 삶은 사는 것이요, 살리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 죽어 가게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 거짓과 미움과 근심과 불안, 나태와 무위, 허무감 따위가 섞여 있거나,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면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가고 있거나 죽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기를 원합니다. 살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는 사람도, 잘못 살아가는데서 생긴 갈등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진 까닭으로 자기 본연의 욕구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 곧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절대의 욕구를 가지고 이토록 살고 싶어 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돌아보면 스스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참으로 드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고 살리는 일보다 죽고 죽이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어제와 오늘이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오늘 이 시간부터는 살기를 힘쓰고 살리기에 열심내는 우리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참 평안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한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 죽음의 그늘이 한 순간도 깃들이지 않는 생명 충만한 시간, 밝고 빛나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겠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1.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11:1-2)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우 소용없는 짓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모험에 가까운 사업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것은 그 던지는 것이 결코 허망한 어떤 물건이 아니라 다시 소생이 가능한 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그것은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을 지닌 그 어떤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 놓으면 필연코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사32:2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가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최종 결산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지기가 자기 직분을 빼앗기고난 다음을 생각하고 지혜를 짜내어 그가 청지기로 있는 동안에 재빨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많은 양을 후하게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인의 칭찬을 받게 된다는 비유입니다. (눅16:1-8)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낭비한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여 미리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칭찬한 것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잠11:18)했고,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2)고 했습니다. 마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삶이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물들을 많이 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내용들이 의와 공평과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것들로 구성되기를 바랍니다.
2.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 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11:3-5)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틀림없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전도자를 보십시요.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즉, 대수롭지 않은 날씨 변화때문에 씨앗의 파종을 미루는 자는 그 일을 올바로 끝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이러한 마음자세를 지닌다면 이는 곤란한 일입니다. 앞날의 불확실성과 예상되는 장애물 때문에 해야 할 일을 과감하게 하지 못하고 나약해져 있다면, 그 다음에 어떤 더 큰 일을 그에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상되는 박해와 어려움 때문에 우리 자신이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을 정당시한다든지, 신앙상 제반 활동들을 정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매이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9:62)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의 자세를 감안하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롬9:16)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너무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여기 전도서 기자가 언급한 내용처럼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를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를 인정하고, 오직 모든 일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을 되게 하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57:2에는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주어진 생활의 영역을 즐거워하며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전11:6-8) 실로 우리의 생은 여기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둘이 다 잘 될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항상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살다 보면 캄캄한 날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영역은 우리가 가진 신앙을 용납하고 이해할만큼 그리 너그러운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격려하기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공격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 시대는 자기 기준대로 공연히 이렇다, 저렇다고 평합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눅7:33-35) 그러기에 사람이 이런 말, 저런 말 다 들으면서 주어진 자리에 주저앉아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면, 그는 평생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참된 자기를 잃어버린 채 그저 사건에만 끌려다니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삶을 결코 그런 식으로 소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책임지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생을 남의 말 때문에 고심하며 낭비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보상만을 기억하고 즐거움으로 사역에 임합니다.
4. 믿음과 성령님으로 행하는 삶이라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가장 요긴하게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만은 꼭 받아야겠다고 간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언제나 구할 요긴한 것은 믿음과 성령님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님은 꼭 받아야만 합니다. 믿음과 성령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살아도 헛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세상 떠나실 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성령님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령님 받는 것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요 믿음을 가지는 길이 성령님을 받는 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의심하지 않는 것
(2) 강하고 담대한 것
(3) 행하는 것
(4) 승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좋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대로 믿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사실 믿음같이 막연한 것은 없습니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주소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할 때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말씀을 하신 그분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격과 성품과 그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여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엔 믿음의 대상이 될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믿을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신이십니다. 그의 인격과 품격은 완전 무결하고 진실 무망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행사는 그대로 믿어 조금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그대로 믿었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되리라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그대로 믿지 못하는 제자에 대해 탄식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요10:37-38)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14:11)고 합니다. 말씀대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살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는가 헤아려 보십시요. 이루어진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이제부터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도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믿음을 얻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세상은 실증주의 일변도입니다. 무슨 일이든 사실과 실증을 확인하고서야 사실을 사실대로 믿습니다. 확실한 물적 보장이 없이는 아무런 소망도 가지지 않습니다. 과학과 실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사람을 믿는 것이고,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것만을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절벽을 뚫을 수도 없고, 기어오를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절벽도 뚫을 수 있다. 절벽도 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믿는 자는 믿는대로 되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번 절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두 가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백세된 노인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낳는다고 할 때 낳을 줄을 믿었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을 잡아 제사드리라고 했을 때,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실 것을 믿었고,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극단에 서서 극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조금 나아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조금 더 좋아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이 바뀌고 전면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무에서 유가, 사망에서 생명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사람을 믿고 눈에 보이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궁극적 신앙, 근본적 신앙을 가집시다.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 믿음, 갈 바를 모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다음은 알고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될 줄 알면서 될 줄로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살, 사라는 90살이니 둘 다 산송장입니다. 사라는 경도가 끊어진 지 오래고, 그의 태는 죽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믿음을 견고하게 가졌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눈 딱감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바라기가 쉽습니다. 눈 앞에 일이 안되고 있는데 될 줄로 아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일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고 믿는 믿음’이 믿음의 가부(可否)를 결정지어 주고, ‘알고 믿는 믿음’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믿음을 견고케 해 줍니다. 믿음은 두 눈 딱 감고 물 속으로 뛰어 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물 속에 빠져들어 가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이 난국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하시는 가를 지켜 보아야 합니다. 이때, 현실만 바라보아도 안됩니다. 현실만 보면 의심만 생기고 불신이 더할 뿐입니다. 현실 속에 하나님의 손이, 주님의 발걸음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 갔습니다. 도중에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유는 풍랑만 보고 예수님은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심하면 주님의 손길도 더욱 신속히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풍랑 중에도 태연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참 믿음은 환경과 형편에 좌우되지 아니합니다. 절대로 환경과 형편이 믿음을 손상케 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보았다면 본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참 믿음을 가졌다면 환란과 핍박과 능욕속에 믿음은 더 자라고 견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현세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영원한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의 선각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그는 비록 그 주어진 시대의 환경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장래에 부딪쳐 올 사건을 미리 내다보기 때문에 그 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결코 주어진 순간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장래사를 바르게 예언해 준 결과로 옥에 갇히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는 수모를 당했습니다.(왕상22:27) 선지자 예레미야는 국가의 장래사를 염려하며, 그 백성이 행할 바 정로를 가르쳐 준 결과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고 굶주려 죽도록 버려졌습니다.(렘38:6-9) 선지자 에스겔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탄식해야 했고(겔21:6), 선지자 아모스는 제사장으로부터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암7:12-13)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삶에 임하는 지혜로운 자세를 가지고 장래사를 미리 내다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정로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바른길 가기를 충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될대로 되라지’, ‘결국 어찌 되겠지’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바는 모든 시대가 올바른 삶의 자세로 장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손에 맡기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눈 앞의 사실만 바라본 사람은 역사의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장래사를 가르쳐 주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창조 이래의 모든 과거를 교훈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삶에 임하는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생활의 영역에서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충만을 받으시고, 말씀대로 믿는 믿음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
그런데 절대의 욕구를 가지고 이토록 살고 싶어 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삶을 돌아보면 스스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이 참으로 드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살고 살리는 일보다 죽고 죽이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어제와 오늘이 아니었는지 돌아보고, 오늘 이 시간부터는 살기를 힘쓰고 살리기에 열심내는 우리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참 평안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만족한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 죽음의 그늘이 한 순간도 깃들이지 않는 생명 충만한 시간, 밝고 빛나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겠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삶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1.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전11:1-2)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매우 소용없는 짓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은 모험에 가까운 사업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것은 그 던지는 것이 결코 허망한 어떤 물건이 아니라 다시 소생이 가능한 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그것은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을 지닌 그 어떤 것입니다. 그렇게만 해 놓으면 필연코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사32:2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주인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가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최종 결산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지기가 자기 직분을 빼앗기고난 다음을 생각하고 지혜를 짜내어 그가 청지기로 있는 동안에 재빨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많은 양을 후하게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주인의 칭찬을 받게 된다는 비유입니다. (눅16:1-8) 이것은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낭비한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자기의 앞날을 생각하여 미리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의 자세를 칭찬한 것입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잠11:18)했고,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10:12)고 했습니다. 마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의 삶이 훗날에 거둘 수 있는 내용물들을 많이 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내용들이 의와 공평과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것들로 구성되기를 바랍니다.
2.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 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전11:3-5)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틀림없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기 전도자를 보십시요.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즉, 대수롭지 않은 날씨 변화때문에 씨앗의 파종을 미루는 자는 그 일을 올바로 끝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이 이러한 마음자세를 지닌다면 이는 곤란한 일입니다. 앞날의 불확실성과 예상되는 장애물 때문에 해야 할 일을 과감하게 하지 못하고 나약해져 있다면, 그 다음에 어떤 더 큰 일을 그에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상되는 박해와 어려움 때문에 우리 자신이 게으름에 빠져 있는 것을 정당시한다든지, 신앙상 제반 활동들을 정지해 버린다면,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매이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9:62)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성도들의 자세를 감안하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롬9:16)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너무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여기 전도서 기자가 언급한 내용처럼 바람의 길이 어떠한지,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 우리는 모를 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섭리를 인정하고, 오직 모든 일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을 되게 하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57:2에는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주어진 생활의 영역을 즐거워하며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 날을 생각할지로다 장래 일은 다 헛되도다 (전11:6-8) 실로 우리의 생은 여기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은 둘이 다 잘 될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항상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막상 살다 보면 캄캄한 날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영역은 우리가 가진 신앙을 용납하고 이해할만큼 그리 너그러운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을 격려하기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관찰하고 공격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 시대는 자기 기준대로 공연히 이렇다, 저렇다고 평합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 (눅7:33-35) 그러기에 사람이 이런 말, 저런 말 다 들으면서 주어진 자리에 주저앉아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면, 그는 평생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 속에 있는 참된 자기를 잃어버린 채 그저 사건에만 끌려다니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삶을 결코 그런 식으로 소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대를 이끌어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책임지는 태도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생을 남의 말 때문에 고심하며 낭비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보상만을 기억하고 즐거움으로 사역에 임합니다.
4. 믿음과 성령님으로 행하는 삶이라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가장 요긴하게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만은 꼭 받아야겠다고 간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언제나 구할 요긴한 것은 믿음과 성령님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님은 꼭 받아야만 합니다. 믿음과 성령님을 소유하지 못하면 살아도 헛 사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세상 떠나실 때 간곡히 부탁하신 말씀은 성령님을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령님 받는 것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요 믿음을 가지는 길이 성령님을 받는 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1)의심하지 않는 것
(2) 강하고 담대한 것
(3) 행하는 것
(4) 승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좋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씀대로 믿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사실 믿음같이 막연한 것은 없습니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주소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을 분명히 할 때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말은 말씀을 하신 그분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의 인격과 성품과 그의 존재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여튼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엔 믿음의 대상이 될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으로 믿을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신이십니다. 그의 인격과 품격은 완전 무결하고 진실 무망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행사는 그대로 믿어 조금도 잘못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될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그대로 믿었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되리라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그대로 믿지 못하는 제자에 대해 탄식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요10:37-38)고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14:11)고 합니다. 말씀대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살펴 보십시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는가 헤아려 보십시요. 이루어진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면, 이제부터는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도 이루어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면 믿음을 얻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세상은 실증주의 일변도입니다. 무슨 일이든 사실과 실증을 확인하고서야 사실을 사실대로 믿습니다. 확실한 물적 보장이 없이는 아무런 소망도 가지지 않습니다. 과학과 실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사람을 믿는 것이고, 사람의 손으로 가능한 것만을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절벽을 뚫을 수도 없고, 기어오를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절벽도 뚫을 수 있다. 절벽도 기어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믿는 자는 믿는대로 되고,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으므로 아무것도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번 절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그는 두 가지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심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백세된 노인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낳는다고 할 때 낳을 줄을 믿었고,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을 잡아 제사드리라고 했을 때, 이삭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아이를 살리실 것을 믿었고,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극단에 서서 극상의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조금 나아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조금 더 좋아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이 바뀌고 전면적으로 새롭게 될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무에서 유가, 사망에서 생명이 가능함을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사람을 믿고 눈에 보이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궁극적 신앙, 근본적 신앙을 가집시다.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 믿음, 갈 바를 모르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다음은 알고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 ‘안다’는 것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될 줄 알면서 될 줄로 아는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살, 사라는 90살이니 둘 다 산송장입니다. 사라는 경도가 끊어진 지 오래고, 그의 태는 죽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부 사이에 아이가 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도리어 믿음을 견고하게 가졌습니다. 차라리 모르면 눈 딱감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바라기가 쉽습니다. 눈 앞에 일이 안되고 있는데 될 줄로 아는 믿음은 큰 믿음입니다. 일이 성취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르고 믿는 믿음’이 믿음의 가부(可否)를 결정지어 주고, ‘알고 믿는 믿음’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믿음을 견고케 해 줍니다. 믿음은 두 눈 딱 감고 물 속으로 뛰어 들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닙니다. 두 눈 똑바로 뜨고 물 속에 빠져들어 가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이 난국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하시는 가를 지켜 보아야 합니다. 이때, 현실만 바라보아도 안됩니다. 현실만 보면 의심만 생기고 불신이 더할 뿐입니다. 현실 속에 하나님의 손이, 주님의 발걸음이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 갔습니다. 도중에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유는 풍랑만 보고 예수님은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풍랑이 심하면 주님의 손길도 더욱 신속히 움직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풍랑 중에도 태연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참 믿음은 환경과 형편에 좌우되지 아니합니다. 절대로 환경과 형편이 믿음을 손상케 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보았다면 본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참 믿음을 가졌다면 환란과 핍박과 능욕속에 믿음은 더 자라고 견고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삶은 현세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영원한 세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시대의 선각자는 외로운 법입니다. 그는 비록 그 주어진 시대의 환경속에서 살아가기는 하지만, 장래에 부딪쳐 올 사건을 미리 내다보기 때문에 그 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결코 주어진 순간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장래사를 바르게 예언해 준 결과로 옥에 갇히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는 수모를 당했습니다.(왕상22:27) 선지자 예레미야는 국가의 장래사를 염려하며, 그 백성이 행할 바 정로를 가르쳐 준 결과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고 굶주려 죽도록 버려졌습니다.(렘38:6-9) 선지자 에스겔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슬피 탄식해야 했고(겔21:6), 선지자 아모스는 제사장으로부터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암7:12-13)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삶에 임하는 지혜로운 자세를 가지고 장래사를 미리 내다보는 눈이 있는 사람은, 정로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바른길 가기를 충고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될대로 되라지’, ‘결국 어찌 되겠지’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바는 모든 시대가 올바른 삶의 자세로 장래를 내다보는 사람의 손에 맡기워졌다는 사실입니다. 눈 앞의 사실만 바라본 사람은 역사의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우리는 장래사를 가르쳐 주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창조 이래의 모든 과거를 교훈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훗날에 거둘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심는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삶에 임하는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생활의 영역에서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사역에 임하는 자세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충만을 받으시고, 말씀대로 믿는 믿음으로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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