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안에서 하나이신 하나님 (잠8:22-31,롬5:1-5)
본문
성령님 강림 주일을 지내고 교회는 우리 구원의 큰 신비를 기념하는 삼위일체 주일을 지키게 된다. 아직도 많은 성도들이 삼위 일체의 신비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거나, 개념 적으로 이해하려다 보니 이 신비의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다. 몇 년전 어느 연속극의 삽입곡으로 들어갔던 "타타타" 라는 노래로 무명으로 있 던 가수가 일약 유명 가수로 탈바꿈을 했던 가수가 있었다. 그 `타타타'라는 노 랫말에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어떻게 알겠느냐'라는 내용이 있다. 가장 잘 알것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작 잘 모르고 있는 우리의 한계를 나타내는 노랫말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 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시는 성령님'을 한 분 하나님이라 고백하고 삼위일체의 신비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셨기 때문 이다. 우리들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성부 성자 성령님 각기 다른 위격이시지만 가장 완전한 사랑(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에 의하여 가장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삼위 일체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공동체의 신비이고, 부부의 관계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겠다. 뭐 '동상이몽'이니 '등 돌리면 남이니'하는 소리가 있긴 한다만, 그래도 '부부는 하 나(일심 동체)'라는 말을 전혀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바로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이미 구약성경 에 하나님께서는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9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들에서도 하나님 의 삼위 일체의 신비가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삼위 일체 신비, 즉 세위로 한분이시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 앙인이다.
신앙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 신비를 터득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안된다. 믿음의 삶 속에서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 이 신비에 대한 터득이 된다. 신앙의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과학적 실증과 철학적 논증에 따르는 것이라기 보다는 삶으로써 얻는 터득이다. 말하자면, 알 수 없으면서도 알고 사는 것이 신 앙 신비의 체험이자 터득이다. 불을 알고저 불을 만진다면 감각의 살을 태우고 말겠지만, 불에서 일정 거리에 물러 앉아 불을 좋아하는 자세로 불을 쬘 때 불이 따뜻함을 감지할수 있다. 직접 태양에 다가가서 온도계를 찔러볼수가 없기 때문에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다고 말하지 앉고 이 지구에 앉아서 간접적 측 정방법으로 태양의 온도를 알아내 보는 것이 타죽지 않을 과학자의 지혜로운 겸 손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을 하는 인간보다도 연약한 풀꽃이 태양의 열기가 얼마 나 위대한 것인지를 더 잘 터득한다. 차가운 흙속에 묻힌 꽃씨가 햇빛을 감사하 며 움터 올라 자신의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를 익혔을 때 그 꽃씨는 더도 덜도 아닌 충만으로 태양열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으로 체험한 태양이다.
그 생명의 태양체험을 '삶'이라고 하자. 그 삶은 땅을 떠나서 태양을 향해 솟구쳐 뿌리가 뽑힌 것이 아니다. 그러면 말라 죽는다.이렇듯 삶으로써 체험하라고 계시된(태양빛이 내리듯)그 신비가 삼위 일 체 신비이다. 당신의 말씀(능력)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흙에서 나온 몸에 당신 숨결(성령님)을 불어 넣으셨듯이, 죄악으로 죽어 흙 속에 묻히는 몸(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되불어 넣어 살려(부활시켜) 주시는, 사랑의 역동적 모습으로 당신 을 알려 주시는 신비가 태양같으신 그분의 삼위 일체 신비이다. 이것이 창조와 구원을 한 가지로 알아 듣도록 인간에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들어내시는 신비이다. 하나님을 뵙고는 이제 죽게 되었다던 이사야의 고백(이사6, 5)이 있었듯이, 하나님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 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분이시면서(딤전6, 16), "자비와 은총의 신"으로 우리를"용서해 주시는"(출애34, 6_7) 아버님이시기에"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 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생명을 얻게 하여 주신다"(요
3, 16). 그래서 오 신 외아드님(성자)께서 부르시던아바-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들도"아바-아 버지! "라고 부르도록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다. 가만히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항상 창조와 구원의 생명을 주시러 활동하시는분-성삼위의 하나님이시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하기에 오늘 삼위 일체 주일일수록 건성으 로 사도신경 외우지 말고 실감나게 신앙을 고백 해보자. 연약한 풀꽃처럼, 죄인 인 우리가 감히,태양을 체험하듯. ! 삼위일체란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닫기 어려운 하나님의 신비다. 그러나 삼위일체 란 표현은 이미 우리 삶 가운데서 일상화된 것이기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렴 풋하게나마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서로 각기 다른 인격체들이지만 서로 사랑하고 일치될 때 가정의 평화가 이룩된다는 사실에서 나누일 수 없는, 긴밀한,필요 불가결적으로 하나라는 가 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학생들의 경우 자신과 학업과 가정이 하나가 될 때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업의 경우 자본, 노동, 경영 등 세 요소가 균형있게 합쳐져 하나가 될 때 성공적일 수 있다. 이 모든 관계를 우리는 삼위일체로 표현한다. 삼위일체란 바로 하나님의 삶, 하나님의 업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들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다양한 정신적 기능이 있다. 이성, 의지, 감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적 작용의 다양성에서 아우구스띠누스는 삼위일체 교 리를 파악하는 어떤 계기를 포착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의 정신작용임에도 불구 하고 거기에는 다양한, 서로 분명히 다른 기능이 있음을 알고, 인간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고 깨닫을 수 있 었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시지만 사랑이시기에 그분은 늘 움직이시고 활동하 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 하늘과 땅,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고백한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님을 우리는 또한 고백한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분명 다른 위격임에도 한 분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우주만물을 흔히 음양의 법칙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우주만물, 삶의 원리를 모두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해석 하고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원의 세 단계(창조, 구원, 성화)는 우주만물의 완성법칙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태양의 비유를 통 해 이해하곤 했다. 하나의 태양에서 빛과 열 그리고 광선이 발해진다. 태양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짐작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자세를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초월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하며 무 한하신 그 하나님께서 내안에 내재하신다는 엄청난 신비 앞에 더욱 큰 경외심을 갖게 된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영원한 시간,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그러한 날, 그러 한 시간이다. 이 만남은 바로 우리의 기도, 예배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 지고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우리 삶의 활력이며, 하루하루를, 한 생애를 지켜주는 힘이며 원천이다. 구원의 모든 은총의 샘이 성삼위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 때 희미했던 삼위(창 세기 18장)를 예수님은 환히 밝혀 주셨다. 하지만 그 도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높고 깊고 넓고 큰 신비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때 마다 삼위 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흔히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밥 한술 떠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와 차에 시달려야 하고, 퇴근때도 만원 버스에 매달려 기진맥진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현대인은 이래저래 신경만 날카로와진다. 이런 때일 수록 경건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면 얼마나 큰위안과 힘이 되겠는가 기도는 반 드시 자리에 앉아 하라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는 가능하다. 잠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기도다. 어떤 병사 한 사람이 일선에서 어느 날 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새벽에 적지에 들게 되었다. 그는 목숨이 두려워 숲 속에 숨었는데 한낮이 되자 몹시 목이 말 랐다.
그런데 이때 마침 어떤 소녀가 큰 물병을 가지고 병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병사는 뛰어나가 총을 땅에 놓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들고는 물병을 가리 켰다. 소녀는 깜짝 놀라 엉겹결에 주여 했다. 이 군인도 맞 장구치듯 할렐루야 했다. 그러자소녀는 "우리는 형제죠!" 하며 물병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자가 아니라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교우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해는 매우 귀중한 지식이다. 자연과학이 발전할수록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된다.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 오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 모른다는 대답을 한다. 속시원하게 증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는 진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지능을 가 지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진실 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와 사실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도 우리들은 주로 사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와 사실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 도 우리들은 주로 사실만을 진짜인 양 받아들이고, 진리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하 려니 하고 지나간다. '결혼'을 사실로 보면, "나는 한 남자와 같이 살기 위해 혼인신고를 한 뒤 동 거하고 있다."가 된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 뜻을 펼 치시려 나에게 한 남자를 보내 주셔서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셨다."가 된다. 진리와 사실은 이만큼 차이가 난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 세 위로 계신다. 그러나 우리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는 추상적 존재로 받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식이나 과학 기술로 파악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크고 깊으며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여 알맞은 방법으로 당신을 알 려주셨다. 그 방법이 계시이다. 하나님은 계시로써 드러내셨다. 곧 신앙의 진리로 당신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음을 시사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증명되지 않는 분을 기술이나 지능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진리는 증명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과학적인 증명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신앙 안에서 접근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 면 정비 공장에서 고쳐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 들으려면 신앙의 길로 가야 한다. 저는 여러분을 신앙의 진리에로 초대하고 싶다. 초대된 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사랑과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갈 것이다. 아마 평생을 요하는 일이다. 성령님 강림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확장되어 갔다는 기쁜 소식을 접한 교회는 성령님 강림 주일을 기점으로 하여 주님의 부활시기를 마무리하고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이며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곧 삼위 일 체이신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의 찬송을 올려 보내야 할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 일체에 관한 교리는 사실상 우리 인간이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마지막 까지 밝혀낼 수도 없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일찍이 어느 신학자는 삼위 일체이 신 하나님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고백 하였다. " 하나님, 우리는 당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이해를 능가 하시고, 우리의 말도 뛰어 넘으십니다. 당신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 습니다. 그후로부터 우리는 당신을 증언하고, 전파하고 당신을 찬미합니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신 당신을 ! "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머리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것이 그 만큼 어 려운 일이라는 뜻이리라. 하물며 하나님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서 깊이 체험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유일하신 한 분이 세 위격으로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따지려 들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의 넓고 깊으신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성삼위는 서로 다르면서도 구별됨이 없 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되신다. 완전 무결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계 신다.
이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의 모델이다. 하나님은, 신체적으 로나 성격상 각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들도 주 님 안에서 형제적인 사랑으로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오늘 삼위 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나눔 먹고 산다는 것! 창조로부터 인류가 겪어온 가장 커다란 문제이다. 인간이 먹 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가 오랜 토론이 되어온 것처럼 먹는 것 만 큼 인류역사에 크게 작용한 것은 없었다. 그러기에 인류역사의 각 단락은 매순간 식량의 확보를 위해 계속된 투쟁과 전쟁, 암투와 담합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 혼 란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끊기지 않고 있다. 반면, 식량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야말로 인류문명을 오늘날까지키워나온 힘이며, 미래의 발전에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고 있다. 먹는 것이 우리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먹을 것을 주시는 분 으로 이야기한다.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단지 양식의 공급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린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명을 주시는 분, 살리시는 분으로 믿어왔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역시 인류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이 식량이 골고루 나누어지기를 원하셨다. 만나를 내릴 때, 많이 쌓아둔 사람은 하루가 지나 구더기가 끓고 썩는 식량을 보아야만 했다. 만나로 이야기되는 생명을 사람들은 골고루 나누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 많이 쌓기 위해서,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는 것이 오늘날의 생명이다.
인간의 장기가 돈을 주고 사고파는 상품이 될 정도로, 있는 사람은 있는 만큼을 누리고 없는 사람은 그 없는 만큼을 빼앗기는 것이 오늘의 생명이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을 어린아이 모래장난하듯이 이리저리 모욕하는 우리들에게 정말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다름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나 누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살을 떼어 주고 피를 나누어줄 테니 이제 혼자만 가지 지 말고 서로를 나누라고 말이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적어도 세례를 받은 사람 들끼리는 예수를 나누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돌이켜 볼 때 우리가 나눈 것이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빵을 나누고 먹고 포도주를 나눠 마셨지만 뭔 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자칫 우리가 나누어 온 것이 껍데기뿐인 예수를 나눌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속알맹이는 창고에 쌓아 놓고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독점하기에 스스로를 내어 놓은 그 몸을 교회의 이름으로 한번 더 독점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대단히 높은 자리에 위치한다. 아무리 봉사직 이라고 해도 현실은 군림하는 자이며 지도하는 자이다.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나누어준 그 몸을 모든 사람들이 공평 하게 나누지 않을 때 그 몸은 또한번 먹고도 죽어갈 빵이 된다. 그러기에 껍데 기다. 껍데기를 벗겨 속 깊은 알맹이를 내어놓을 때 예수가 원한, 생명이 나누어 지는 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같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분명해졌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안에 강한힘으로 작용하시고 협조자 로 계시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성부)의 사랑과 하나님이신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덕분으로 우리는 같 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우리안에 모시게 되었고 그분의 작용을 느낄 수 있게 되 었다. 흔히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밥 한술 떠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와 차에 시달려야 하고, 퇴근때도 만원 버스에 매달려 기진맥진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현대인은 이래저래 신경만 날카로와진다. 이런 때일수 록 경건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면 얼마나 큰위안과 힘이 되겠는가 기도는 반드 시 자리에 앉아 하라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는 가능하다. 잠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기도다. 우리는 전능자가 아니라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교우들은 이 미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해는 매우 귀중한 지식이다. 구원의 모든 은총의 샘이 성삼위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 때 희미했던 삼위 (창세기 18장)를 예수님은 환히 밝혀 주셨다. 하지만 그 도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높고 깊고 넓고 큰 신비에 속한다. 보잘것없고 흠투성이로 얼룩진 우리들을 향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신뢰를 두면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주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멀리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사랑의 신비를 배운다. 셋이 합하여 하나되는 신비는 모든 인간의 이해타산적인 방법을 뛰어 넘는다. 우리는 흔히 받을 것을 먼저 따진후 투자를 하거나 베푸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인 사람의 생활은 한없이 주는 삶 이 더없는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머리만 큰 인간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성부, 성자, 성신(=성령님)의 삼위일 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참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가 아버지(=성부)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먼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의 삶 안에 심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삶은 자신과 주위에 무엇인가 를 창조하는 생기를 일으키고 심어주어야 한다. 어느누구의 눈치나 분위기에 좌 우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을 '보기에 좋도록' 일구고 가꾸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 단의 의지가 필요하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도 이러한 과감한 용기를 스스 로 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리저리 분위기를 타고 끌려다니지 말고 참으로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웃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창조하는 삶'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우리와 우리 주 위에 임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성자)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먼저 참 인간이어야 한다.
아버지(=성부)의 뜻을 이 땅에 심은 아들을 따라 먼저 받은 대로 그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창조와 사랑 의 능력을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게 이 세상에 드러내 야 한다.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하여야 한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느낌으로 서 로가 서로에게 살 맛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목숨을 끊을 각오와 무덤을 팔 각 오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인정많고, 사랑많은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뜻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세주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들(=성자)을 닮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을 위 해 모든 것이 되신 아들의 모습은 이해타산적인 우리의 계산방법을 질책하고 위선적인 영웅주의의 삶을 탈피하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서 4,16)라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성부는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아버지시기에 우리를 구원하러 독생성자를 세상에 보내셨 고, 성자이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구속하려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셨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자께서우리에 게 오셨고(누가
1,35) 사랑이 우리 마음에 쏟아졌으며(로마 5,5) 우리의 마음 안에 거처하시면서(고전
3,16)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시고 덕을 닦게 해 주신다. 이렇게 성삼위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삼위일체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
1,26-27).
그러므로 성삼위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는 성삼 위의 사랑의 손길 안에 살아가야 하며, 성삼위가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 살아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요일서4,8) 라고 사도요한께서 말씀하셨듯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신비를 우리 자신이 생활로써 보여줄 때 비로소 체험적으로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인 것이다. 예수님꼐서도 계명으로 서로간의 사랑을 명하셨고, 또 서로 사랑할 때 당신의 제자임을 증거하게 될것이라고 하셨다(요한 13,34-35).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성부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도 불우한 이웃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 있다(마태 25,31).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된다. 사랑을 낳아주는 나, 사랑을 받아들이는 너,여기서 생겨나는 우리 라는 사랑의 관계 이것이 성삼위의 신비를 생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누구도 나를 몰라주고 관심밖에 두어도 하나님만은 나를 끝까지 아끼시고, 영원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연약한 풀꽃이 태양을 체험하듯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이해할수 없다.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수 있다면 그런 하나님 은 믿지 않겠다고 했다. 대조적으로 매우 비신앙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교회에 잘 다니고 큰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앉으시는 하나님을 믿 기가 어렵다고 하는 신자들이 있다.
그런 신자는 하나님을 부려 먹으려고 생각 하거나, 요모조모로 이해타산 따져서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대상쯤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는듯 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이것이 바 로창조가 아닌가 .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은 알게 말한다. 그 분은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 로 계시다. 사랑은 사랑받는 자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강생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할수록 배신당한 고통은 더 큰 법이다. 우리없이 못 사실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또 배반해도 그 분은 결코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부모 가 자녀에 대해 아내가 남편에 대해, 아무에게나 함부로 나쁘게 말하지 않는 이 상으로,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우리지만, 오히려 당신이 또 죽으려 하실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를 몰라주고 관심밖에 두어도 하나님만은 나를 끝까지 아끼시고, 영원 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님 각기 다른 위격이시지만 가장 완전한 사랑(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에 의하여 가장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삼위 일체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공동체의 신비이고, 부부의 관계 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겠다. 뭐 '동상이몽'이니 '등 돌리면 남이니'하는 소리가 있긴 한다만, 그래도 '부부는 하 나(일심 동체)'라는 말을 전혀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바로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이미 구약성경 에 하나님께서는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9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들에서도 하나님 의 삼위 일체의 신비가 어떤 것인가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삼위 일체 신비, 즉 세위로 한분이시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한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세례를 받은 신 앙인이다.
신앙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다 해서 이 신비를 터득하지 못하고 살아서는 안된다. 믿음의 삶 속에서 이 신비를 체험하는 것이 이 신비에 대한 터득이 된다. 신앙의 신비를 체험한다는 것은 과학적 실증과 철학적 논증에 따르는 것이라기 보다는 삶으로써 얻는 터득이다. 말하자면, 알 수 없으면서도 알고 사는 것이 신 앙 신비의 체험이자 터득이다. 불을 알고저 불을 만진다면 감각의 살을 태우고 말겠지만, 불에서 일정 거리에 물러 앉아 불을 좋아하는 자세로 불을 쬘 때 불이 따뜻함을 감지할수 있다. 직접 태양에 다가가서 온도계를 찔러볼수가 없기 때문에 태양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른다고 말하지 앉고 이 지구에 앉아서 간접적 측 정방법으로 태양의 온도를 알아내 보는 것이 타죽지 않을 과학자의 지혜로운 겸 손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을 하는 인간보다도 연약한 풀꽃이 태양의 열기가 얼마 나 위대한 것인지를 더 잘 터득한다. 차가운 흙속에 묻힌 꽃씨가 햇빛을 감사하 며 움터 올라 자신의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를 익혔을 때 그 꽃씨는 더도 덜도 아닌 충만으로 태양열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으로 체험한 태양이다.
그 생명의 태양체험을 '삶'이라고 하자. 그 삶은 땅을 떠나서 태양을 향해 솟구쳐 뿌리가 뽑힌 것이 아니다. 그러면 말라 죽는다.이렇듯 삶으로써 체험하라고 계시된(태양빛이 내리듯)그 신비가 삼위 일 체 신비이다. 당신의 말씀(능력)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흙에서 나온 몸에 당신 숨결(성령님)을 불어 넣으셨듯이, 죄악으로 죽어 흙 속에 묻히는 몸(인간)에게 당신의 숨결을 되불어 넣어 살려(부활시켜) 주시는, 사랑의 역동적 모습으로 당신 을 알려 주시는 신비가 태양같으신 그분의 삼위 일체 신비이다. 이것이 창조와 구원을 한 가지로 알아 듣도록 인간에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들어내시는 신비이다. 하나님을 뵙고는 이제 죽게 되었다던 이사야의 고백(이사6, 5)이 있었듯이, 하나님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 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분이시면서(딤전6, 16), "자비와 은총의 신"으로 우리를"용서해 주시는"(출애34, 6_7) 아버님이시기에"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 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생명을 얻게 하여 주신다"(요
3, 16). 그래서 오 신 외아드님(성자)께서 부르시던아바-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들도"아바-아 버지! "라고 부르도록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다. 가만히 계시지 않고 우리에게 항상 창조와 구원의 생명을 주시러 활동하시는분-성삼위의 하나님이시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하기에 오늘 삼위 일체 주일일수록 건성으 로 사도신경 외우지 말고 실감나게 신앙을 고백 해보자. 연약한 풀꽃처럼, 죄인 인 우리가 감히,태양을 체험하듯. ! 삼위일체란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깨닫기 어려운 하나님의 신비다. 그러나 삼위일체 란 표현은 이미 우리 삶 가운데서 일상화된 것이기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렴 풋하게나마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서로 각기 다른 인격체들이지만 서로 사랑하고 일치될 때 가정의 평화가 이룩된다는 사실에서 나누일 수 없는, 긴밀한,필요 불가결적으로 하나라는 가 정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학생들의 경우 자신과 학업과 가정이 하나가 될 때 훌륭한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업의 경우 자본, 노동, 경영 등 세 요소가 균형있게 합쳐져 하나가 될 때 성공적일 수 있다. 이 모든 관계를 우리는 삼위일체로 표현한다. 삼위일체란 바로 하나님의 삶, 하나님의 업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들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다양한 정신적 기능이 있다. 이성, 의지, 감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정신적 작용의 다양성에서 아우구스띠누스는 삼위일체 교 리를 파악하는 어떤 계기를 포착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의 정신작용임에도 불구 하고 거기에는 다양한, 서로 분명히 다른 기능이 있음을 알고, 인간에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하고 깨닫을 수 있 었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이시지만 사랑이시기에 그분은 늘 움직이시고 활동하 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다. 하늘과 땅,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는 고백한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주님을 우리는 또한 고백한다. 성부, 성자, 성령님은 분명 다른 위격임에도 한 분의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고백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우주만물을 흔히 음양의 법칙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서 우주만물, 삶의 원리를 모두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해석 하고 고백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원의 세 단계(창조, 구원, 성화)는 우주만물의 완성법칙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태양의 비유를 통 해 이해하곤 했다. 하나의 태양에서 빛과 열 그리고 광선이 발해진다. 태양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짐작했던 초대 교회 신자들의 자세를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초월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신비에 접하며 무 한하신 그 하나님께서 내안에 내재하신다는 엄청난 신비 앞에 더욱 큰 경외심을 갖게 된다.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 영원한 시간, 무한과 유한이 만나는 그러한 날, 그러 한 시간이다. 이 만남은 바로 우리의 기도, 예배안에서 지금 이 시간에 이루어 지고 있다. 이 만남이 바로 우리 삶의 활력이며, 하루하루를, 한 생애를 지켜주는 힘이며 원천이다. 구원의 모든 은총의 샘이 성삼위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 때 희미했던 삼위(창 세기 18장)를 예수님은 환히 밝혀 주셨다. 하지만 그 도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높고 깊고 넓고 큰 신비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때 마다 삼위 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흔히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밥 한술 떠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와 차에 시달려야 하고, 퇴근때도 만원 버스에 매달려 기진맥진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현대인은 이래저래 신경만 날카로와진다. 이런 때일 수록 경건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면 얼마나 큰위안과 힘이 되겠는가 기도는 반 드시 자리에 앉아 하라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는 가능하다. 잠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기도다. 어떤 병사 한 사람이 일선에서 어느 날 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새벽에 적지에 들게 되었다. 그는 목숨이 두려워 숲 속에 숨었는데 한낮이 되자 몹시 목이 말 랐다.
그런데 이때 마침 어떤 소녀가 큰 물병을 가지고 병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병사는 뛰어나가 총을 땅에 놓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들고는 물병을 가리 켰다. 소녀는 깜짝 놀라 엉겹결에 주여 했다. 이 군인도 맞 장구치듯 할렐루야 했다. 그러자소녀는 "우리는 형제죠!" 하며 물병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능자가 아니라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교우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해는 매우 귀중한 지식이다. 자연과학이 발전할수록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된다. 우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 오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 모른다는 대답을 한다. 속시원하게 증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는 진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지능을 가 지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증명할 수 있는 사실만을 진실 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와 사실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도 우리들은 주로 사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진리와 사실은 많은 차이가 있는데 도 우리들은 주로 사실만을 진짜인 양 받아들이고, 진리에 대해서는 그냥 그러하 려니 하고 지나간다. '결혼'을 사실로 보면, "나는 한 남자와 같이 살기 위해 혼인신고를 한 뒤 동 거하고 있다."가 된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 뜻을 펼 치시려 나에게 한 남자를 보내 주셔서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셨다."가 된다. 진리와 사실은 이만큼 차이가 난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 세 위로 계신다. 그러나 우리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머리 속에서만 생각하는 추상적 존재로 받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식이나 과학 기술로 파악 할 수 없는 분이다. 그만큼 엄청나게 크고 깊으며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 우리의 처지를 고려하여 알맞은 방법으로 당신을 알 려주셨다. 그 방법이 계시이다. 하나님은 계시로써 드러내셨다. 곧 신앙의 진리로 당신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음을 시사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증명되지 않는 분을 기술이나 지능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진리는 증명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과학적인 증명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신앙 안에서 접근해야 알아들을 수 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 면 정비 공장에서 고쳐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 들으려면 신앙의 길로 가야 한다. 저는 여러분을 신앙의 진리에로 초대하고 싶다. 초대된 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와 사랑과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갈 것이다. 아마 평생을 요하는 일이다. 성령님 강림으로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고 확장되어 갔다는 기쁜 소식을 접한 교회는 성령님 강림 주일을 기점으로 하여 주님의 부활시기를 마무리하고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이며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 곧 삼위 일 체이신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의 찬송을 올려 보내야 할 것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 일체에 관한 교리는 사실상 우리 인간이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마지막 까지 밝혀낼 수도 없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일찍이 어느 신학자는 삼위 일체이 신 하나님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고백 하였다. " 하나님, 우리는 당신에 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이해를 능가 하시고, 우리의 말도 뛰어 넘으십니다. 당신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우리에게 드러내 주셨 습니다. 그후로부터 우리는 당신을 증언하고, 전파하고 당신을 찬미합니다.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신 당신을 ! "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머리로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도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것이 그 만큼 어 려운 일이라는 뜻이리라. 하물며 하나님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서 깊이 체험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어떻게 유일하신 한 분이 세 위격으로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따지려 들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의 넓고 깊으신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성삼위는 서로 다르면서도 구별됨이 없 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하나가 되신다. 완전 무결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계 신다.
이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의 모델이다. 하나님은, 신체적으 로나 성격상 각기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한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들도 주 님 안에서 형제적인 사랑으로 일치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삶의 원리를 오늘 삼위 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나눔 먹고 산다는 것! 창조로부터 인류가 겪어온 가장 커다란 문제이다. 인간이 먹 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가 오랜 토론이 되어온 것처럼 먹는 것 만 큼 인류역사에 크게 작용한 것은 없었다. 그러기에 인류역사의 각 단락은 매순간 식량의 확보를 위해 계속된 투쟁과 전쟁, 암투와 담합으로 가득차 있으며 이 혼 란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끊기지 않고 있다. 반면, 식량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야말로 인류문명을 오늘날까지키워나온 힘이며, 미래의 발전에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고 있다. 먹는 것이 우리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먹을 것을 주시는 분 으로 이야기한다.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단지 양식의 공급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살린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명을 주시는 분, 살리시는 분으로 믿어왔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역시 인류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이 식량이 골고루 나누어지기를 원하셨다. 만나를 내릴 때, 많이 쌓아둔 사람은 하루가 지나 구더기가 끓고 썩는 식량을 보아야만 했다. 만나로 이야기되는 생명을 사람들은 골고루 나누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부터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 많이 쌓기 위해서,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는 것이 오늘날의 생명이다.
인간의 장기가 돈을 주고 사고파는 상품이 될 정도로, 있는 사람은 있는 만큼을 누리고 없는 사람은 그 없는 만큼을 빼앗기는 것이 오늘의 생명이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을 어린아이 모래장난하듯이 이리저리 모욕하는 우리들에게 정말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다름 아니라 당신 자신을 나 누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살을 떼어 주고 피를 나누어줄 테니 이제 혼자만 가지 지 말고 서로를 나누라고 말이다. 2000년 동안 교회는 적어도 세례를 받은 사람 들끼리는 예수를 나누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돌이켜 볼 때 우리가 나눈 것이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빵을 나누고 먹고 포도주를 나눠 마셨지만 뭔 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자칫 우리가 나누어 온 것이 껍데기뿐인 예수를 나눌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속알맹이는 창고에 쌓아 놓고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독점하기에 스스로를 내어 놓은 그 몸을 교회의 이름으로 한번 더 독점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대단히 높은 자리에 위치한다. 아무리 봉사직 이라고 해도 현실은 군림하는 자이며 지도하는 자이다. 예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나누어준 그 몸을 모든 사람들이 공평 하게 나누지 않을 때 그 몸은 또한번 먹고도 죽어갈 빵이 된다. 그러기에 껍데 기다. 껍데기를 벗겨 속 깊은 알맹이를 내어놓을 때 예수가 원한, 생명이 나누어 지는 세상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 사랑의 깊이와 정도는 같은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분명해졌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안에 강한힘으로 작용하시고 협조자 로 계시면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성부)의 사랑과 하나님이신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신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덕분으로 우리는 같 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우리안에 모시게 되었고 그분의 작용을 느낄 수 있게 되 었다. 흔히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일어나기가 무섭게 밥 한술 떠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와 차에 시달려야 하고, 퇴근때도 만원 버스에 매달려 기진맥진 한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현대인은 이래저래 신경만 날카로와진다. 이런 때일수 록 경건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면 얼마나 큰위안과 힘이 되겠는가 기도는 반드 시 자리에 앉아 하라는 법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는 가능하다. 잠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 그것이 바로 훌륭한 기도다. 우리는 전능자가 아니라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교우들은 이 미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이해는 매우 귀중한 지식이다. 구원의 모든 은총의 샘이 성삼위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 때 희미했던 삼위 (창세기 18장)를 예수님은 환히 밝혀 주셨다. 하지만 그 도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높고 깊고 넓고 큰 신비에 속한다. 보잘것없고 흠투성이로 얼룩진 우리들을 향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신뢰를 두면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주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멀리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서 사랑의 신비를 배운다. 셋이 합하여 하나되는 신비는 모든 인간의 이해타산적인 방법을 뛰어 넘는다. 우리는 흔히 받을 것을 먼저 따진후 투자를 하거나 베푸는 행위를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인 사람의 생활은 한없이 주는 삶 이 더없는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머리만 큰 인간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성부, 성자, 성신(=성령님)의 삼위일 체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참모습은 어떠해야 하는 가 아버지(=성부)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먼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의 삶 안에 심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삶은 자신과 주위에 무엇인가 를 창조하는 생기를 일으키고 심어주어야 한다. 어느누구의 눈치나 분위기에 좌 우되어서는 안된다. 세상을 '보기에 좋도록' 일구고 가꾸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 단의 의지가 필요하다.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서도 이러한 과감한 용기를 스스 로 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리저리 분위기를 타고 끌려다니지 말고 참으로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웃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창조하는 삶'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우리와 우리 주 위에 임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성자)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먼저 참 인간이어야 한다.
아버지(=성부)의 뜻을 이 땅에 심은 아들을 따라 먼저 받은 대로 그 삶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보이지 않고 숨겨져 있는 창조와 사랑 의 능력을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게 이 세상에 드러내 야 한다. 겉다르고 속다른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하여야 한다.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느낌으로 서 로가 서로에게 살 맛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목숨을 끊을 각오와 무덤을 팔 각 오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는 인정많고, 사랑많은 아들의 모습은 아버지의 뜻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구세주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들(=성자)을 닮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을 위 해 모든 것이 되신 아들의 모습은 이해타산적인 우리의 계산방법을 질책하고 위선적인 영웅주의의 삶을 탈피하도록 촉구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서 4,16)라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다. 성부는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아버지시기에 우리를 구원하러 독생성자를 세상에 보내셨 고, 성자이신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우리를 구속하려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셨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자께서우리에 게 오셨고(누가
1,35) 사랑이 우리 마음에 쏟아졌으며(로마 5,5) 우리의 마음 안에 거처하시면서(고전
3,16)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시고 덕을 닦게 해 주신다. 이렇게 성삼위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삼위일체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창세
1,26-27).
그러므로 성삼위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는 성삼 위의 사랑의 손길 안에 살아가야 하며, 성삼위가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으로 맺어져 살아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요일서4,8) 라고 사도요한께서 말씀하셨듯이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신비를 우리 자신이 생활로써 보여줄 때 비로소 체험적으로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인 것이다. 예수님꼐서도 계명으로 서로간의 사랑을 명하셨고, 또 서로 사랑할 때 당신의 제자임을 증거하게 될것이라고 하셨다(요한 13,34-35).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성부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심판의 기준도 불우한 이웃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 있다(마태 25,31).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된다. 사랑을 낳아주는 나, 사랑을 받아들이는 너,여기서 생겨나는 우리 라는 사랑의 관계 이것이 성삼위의 신비를 생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누구도 나를 몰라주고 관심밖에 두어도 하나님만은 나를 끝까지 아끼시고, 영원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연약한 풀꽃이 태양을 체험하듯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이해할수 없다.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수 있다면 그런 하나님 은 믿지 않겠다고 했다. 대조적으로 매우 비신앙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간혹 있다. 교회에 잘 다니고 큰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앉으시는 하나님을 믿 기가 어렵다고 하는 신자들이 있다.
그런 신자는 하나님을 부려 먹으려고 생각 하거나, 요모조모로 이해타산 따져서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대상쯤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려고 하는듯 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이것이 바 로창조가 아닌가 .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은 알게 말한다. 그 분은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 로 계시다. 사랑은 사랑받는 자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강생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와 함께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 사랑할수록 배신당한 고통은 더 큰 법이다. 우리없이 못 사실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또 배반해도 그 분은 결코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부모 가 자녀에 대해 아내가 남편에 대해, 아무에게나 함부로 나쁘게 말하지 않는 이 상으로, 천만 번 죽어 마땅한 우리지만, 오히려 당신이 또 죽으려 하실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를 몰라주고 관심밖에 두어도 하나님만은 나를 끝까지 아끼시고, 영원 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산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끝없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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