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을 누리자 (롬5:1-11)
본문
로마서를 읽으면서 이 곳이 노른자위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곳이 몇군데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로마서 전체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1-2절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은혜에는 과거의 은혜가 있고, 미래의 은혜가 있고,현재의 은혜가 있습니다. 바 로 이 현재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믿는자 들이 누려야 할 은혜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 (1절)
둘째로 은혜의 보좌로 들어가는 것 (2절)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것(2절하반절) 이 험한 세상을 살 아가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입니다. 3-10은 이 은혜가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신칭의의 결과 또는 믿는자의 생활과 삶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서 진노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10절의 원수라는 말입니다.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관계에서 어떻게 평화를 누릴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멀리서 바라보고 미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받으시고,우리를 품에 품으셔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칭의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벙벙하 고 이해 되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순간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인으로 인정 받으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평입니다. 하나님 만 생각하면 기쁘고 편안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병들어도,가난해도,실패했어도 이상한 평화 가 있습니다.
EX) 얼마전에 남북합의서가 조인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하고 ,정치인들이 한 것을 눈을로 보지를 않았지만 믿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 대한 위협이 덜하고, 일선에 있는 자녀에 대해서도 걱정이 덜되고, 김일 성이가 덜 미워집니다. 이런 생각이 안들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에서 [누리자]를 누리자와 누리고 있다는 말로 번역을 할수 있습니다.그 중에도 누리고 있다는 말로 번역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믿는자에게 화평은 권리이고,자연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누리자하면 거 부할수도 있는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평안이 있습니까 믿는 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평안이 당연히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지 않 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마음 밑바닥에 은은히 흐르고 있어야 하 지않습니까
EX) 한여고생 [신증후군]이라는 단백질이 녹아 내리는 병을 앓고 설상가상으로 오른팔이 썩어져 들어가서 짤라내고 말았습니다. 한팔로 턱을 고이고,평화롭게 찍은 사진이 한 잡지에 나왔습니다.그 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나는 오른팔을 짜르러 들어 가면서도 담담했어요!라는 말이 나를 감동하고 한편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평화를 못누리는 사람은 비정상입니다. 불행한 사람 입니다. 그 이유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하나는 죄책이고 또다른 하나는 불완전성입니다. 먼저 죄책은 죄에 대한 가책입니다. 과거의 어떤 죄로 인해서 당하는 양심의 가책과 갈등입니다. 어떤 죄는 한번 회개하면 그만입니다.그러나 어떤 죄는 쇠못으로 가슴을 찌르듯이 뼈져린 고통이 계 속됩니다. 회개도 수없이했습니다. 벌써 오래전의 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계속짓고 있는 죄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이것은 환자의 통증같습니다. 낮에도,밤에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진통 제를 맞으면 사라진것 같다가도 또 다시 찾아옵니다. 고문과 같은것입니다. 불완전성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변하지 않은 옛자아에 대한 회의와 자기 혐오증에 빠지는 것 입니다.습관적으로 빠지는 죄와 실패에 대한 자기자신에 대한 미움입니다.그래서 자신과 혈투를 벌입니다. 바울도 이런 싸움을 했습니다. 롬7:19,24절-내가 원하는 선은 나 죽겠다정말못살겠다는 절규입니다. 이런 고통이 마음에 있으면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이런 죄책과 불완전성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성을 보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의로우냐를 보고 우리를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억지 않으시는데, 나는 왜 과거를 보고,고통스러워할까 왜 현재의 불완전성을 보고,괴 로워 할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골2:13절 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셧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은 기억속에 있는 것만 이라는 조건적입니다.그래서 자기의 기억 밖에 것을 잘못하면 그건 또 뭐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해서 모든 죄를 용서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를 지엇을 때-그건 또 뭐냐"고 물으시지 않습니다.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황당하게 들립니까그러면 여러분은 아직도 행위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도 과거의 죄와 현재의 부족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좋지 않 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 세상의법인데 하물며, 모든 법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한가 지 죄를 가지고 두번 벌하시겠습니까 나의 죄때문에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셨는데,그것을 가지고 또 나 를 벌하십니까 아닙니다. 지은죄는 한번 회개함으로 잊어버려야합니다. 우리가 잘못 배운것=
1.예수 믿고 지은 죄는 훨씬 더 무서워서 믿고 지은 죄는 다 벌을 받아야 한다.
2. 알고 지은 죄는 사할 곳이 없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불행을 않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알아서 그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있습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이 비결 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회개해서도 아닙니다. 죄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볼 때 만족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러한 모든 조건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 만 남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화평을 주십니니까 4장 마지막절-예수는 나의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되시고, 부활하심 5:6절-내가 연약하고 경건치 못함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8절-내가 죄인 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하심 9절-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빼어 내신 분 10절. 이 예수 때문에 내가 화평을 누리는 것이지 나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 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옆으로 밀어내고 나 혼자 하나님 앞에 앉습니다.그래서 남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완전 죄성인 인간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안에서 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이런 습관을 가져 야 합니다.예수만 바라보고, 예수만 생각하고,예수를 통해서만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 합니다. 믿음의 주요,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EX) 어린아이에게 [이리온]하면-얼굴을 홱 돌림 우리도 마귀가 너는 이처럼 추한 사람이야-이리온 하면 얼굴을 홱 돌려 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신 예수만 바 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없는 구원도, 예수없는 거룩도, 예수없는 천국도, 예수없는 사랑도, 예수없는 축복도 생각하지 맙시다.오직 예수 안에서 누릴수 있는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69장을 부르시는 중에 이 평화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잃어버렸던 평안 을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 (1절)
둘째로 은혜의 보좌로 들어가는 것 (2절)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것(2절하반절) 이 험한 세상을 살 아가면서 실제로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입니다. 3-10은 이 은혜가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신칭의의 결과 또는 믿는자의 생활과 삶이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서 진노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10절의 원수라는 말입니다.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관계에서 어떻게 평화를 누릴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멀리서 바라보고 미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받으시고,우리를 품에 품으셔서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칭의는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벙벙하 고 이해 되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순간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인으로 인정 받으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평입니다. 하나님 만 생각하면 기쁘고 편안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병들어도,가난해도,실패했어도 이상한 평화 가 있습니다.
EX) 얼마전에 남북합의서가 조인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하고 ,정치인들이 한 것을 눈을로 보지를 않았지만 믿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 대한 위협이 덜하고, 일선에 있는 자녀에 대해서도 걱정이 덜되고, 김일 성이가 덜 미워집니다. 이런 생각이 안들면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에서 [누리자]를 누리자와 누리고 있다는 말로 번역을 할수 있습니다.그 중에도 누리고 있다는 말로 번역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믿는자에게 화평은 권리이고,자연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누리자하면 거 부할수도 있는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평안이 있습니까 믿는 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평안이 당연히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지 않 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마음 밑바닥에 은은히 흐르고 있어야 하 지않습니까
EX) 한여고생 [신증후군]이라는 단백질이 녹아 내리는 병을 앓고 설상가상으로 오른팔이 썩어져 들어가서 짤라내고 말았습니다. 한팔로 턱을 고이고,평화롭게 찍은 사진이 한 잡지에 나왔습니다.그 밑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나는 오른팔을 짜르러 들어 가면서도 담담했어요!라는 말이 나를 감동하고 한편 부끄러움도 느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평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평화를 못누리는 사람은 비정상입니다. 불행한 사람 입니다. 그 이유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하나는 죄책이고 또다른 하나는 불완전성입니다. 먼저 죄책은 죄에 대한 가책입니다. 과거의 어떤 죄로 인해서 당하는 양심의 가책과 갈등입니다. 어떤 죄는 한번 회개하면 그만입니다.그러나 어떤 죄는 쇠못으로 가슴을 찌르듯이 뼈져린 고통이 계 속됩니다. 회개도 수없이했습니다. 벌써 오래전의 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계속짓고 있는 죄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이것은 환자의 통증같습니다. 낮에도,밤에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입니다.진통 제를 맞으면 사라진것 같다가도 또 다시 찾아옵니다. 고문과 같은것입니다. 불완전성은 무엇입니까 예수 믿은 후에도 변하지 않은 옛자아에 대한 회의와 자기 혐오증에 빠지는 것 입니다.습관적으로 빠지는 죄와 실패에 대한 자기자신에 대한 미움입니다.그래서 자신과 혈투를 벌입니다. 바울도 이런 싸움을 했습니다. 롬7:19,24절-내가 원하는 선은 나 죽겠다정말못살겠다는 절규입니다. 이런 고통이 마음에 있으면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이런 죄책과 불완전성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성을 보고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의로우냐를 보고 우리를 인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억지 않으시는데, 나는 왜 과거를 보고,고통스러워할까 왜 현재의 불완전성을 보고,괴 로워 할까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골2:13절 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셧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모든은 기억속에 있는 것만 이라는 조건적입니다.그래서 자기의 기억 밖에 것을 잘못하면 그건 또 뭐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해서 모든 죄를 용서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를 지엇을 때-그건 또 뭐냐"고 물으시지 않습니다.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황당하게 들립니까그러면 여러분은 아직도 행위에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상식으로도 과거의 죄와 현재의 부족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은 좋지 않 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 세상의법인데 하물며, 모든 법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한가 지 죄를 가지고 두번 벌하시겠습니까 나의 죄때문에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셨는데,그것을 가지고 또 나 를 벌하십니까 아닙니다. 지은죄는 한번 회개함으로 잊어버려야합니다. 우리가 잘못 배운것=
1.예수 믿고 지은 죄는 훨씬 더 무서워서 믿고 지은 죄는 다 벌을 받아야 한다.
2. 알고 지은 죄는 사할 곳이 없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불행을 않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알아서 그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있습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이 비결 입니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내가 회개해서도 아닙니다. 죄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볼 때 만족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러한 모든 조건을 물리치고 오직 하나 만 남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기에 화평을 주십니니까 4장 마지막절-예수는 나의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희생되시고, 부활하심 5:6절-내가 연약하고 경건치 못함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8절-내가 죄인 되었을 때 그것을 감당하심 9절-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빼어 내신 분 10절. 이 예수 때문에 내가 화평을 누리는 것이지 나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 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옆으로 밀어내고 나 혼자 하나님 앞에 앉습니다.그래서 남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 앞에서,완전 죄성인 인간의 초라하고 부끄러운 모습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 안에서 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이런 습관을 가져 야 합니다.예수만 바라보고, 예수만 생각하고,예수를 통해서만 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 못 합니다. 믿음의 주요,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
EX) 어린아이에게 [이리온]하면-얼굴을 홱 돌림 우리도 마귀가 너는 이처럼 추한 사람이야-이리온 하면 얼굴을 홱 돌려 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하신 예수만 바 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봅시다. 예수없는 구원도, 예수없는 거룩도, 예수없는 천국도, 예수없는 사랑도, 예수없는 축복도 생각하지 맙시다.오직 예수 안에서 누릴수 있는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69장을 부르시는 중에 이 평화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잃어버렸던 평안 을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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