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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된 사람 (롬5:1-4)

본문

우리가 어떻게 의로워 질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의로워 지는 길이, 깨 달음이나 자기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이외에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대개 그러합니다. 물론 인간의 수양이나 고행같은 것으로 어느 정도 의로워 지는 일이 가능하겠지만 완전한 의인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은 큰 의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는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의 말씀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히 의롭게 되어 졌다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여기서 생각 해야 하는 것은 '의롭다는 것'과 '의롭다고 하여 주신는 분', 이 두가지를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은 곧 하나도 없다'고 한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노력이나 행위로 의를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면 그것은 의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의입니다. 누가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할 여지가 없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하겠느냐'(롬 8:33)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 주신 분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본문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믿고 그를 영접하셨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의롭게 인정하 여 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의인'이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 33:29)라고 하 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사실 우리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행복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롬 3:23-24)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의로운 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를 만족시킬만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롭지 못한 인간들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또 그것이 타당한 일인가 죄지은 자가 죽는 것은 당 연하지만 죄없는 그 분이 죄인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 까 그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왜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결정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선택하 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섭리와 방법에 대해서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죄인들을 다 지옥으로 보냄으로써 지켜지는 것 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살려내심으로 오히려 입증되었 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에 그 고통은 바로 내가 당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 과 쓰라림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가 그러한 고통을 받으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만일 내 노력이나 내 공로로 내가 의롭게 되었다면 예수님이 무엇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러므로 성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 이 아니니 이는 누구던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교리의 기초요 근본입니다. 이 기초 적인 교리를 터득하고 있지 못하면 아직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 요 구세주이시다'라고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토록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요, 나의 주요,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소유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되 계속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를 믿는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 인하겠습니까 로마서 5장 1절에서는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 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 을 누리자'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화평이 있는가 지금 나는 하나님과 화 목됨으로 나의 양심이 편안한가 하는 것을 스스로 물어 본다면 곧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화평이 그 마음속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나서 뻔뻔스럽게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 니까'라고 대꾸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보실 때에 가인은 분노가 가 득했고 그 안색마저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을 행하였다면 어 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때문에 그 마음에 평화를 상실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가인이 이미 평 화를 잃어 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게 된 사람 들이 받을 수 있는 내적인 증거요 축복입니다. '양심'이라고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줌의 부끄러움도 없는 마음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갖고 사는 사람이 과연 있 습니까
그러므로 성서는 이것을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평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용서받음으로 죄책감이 없어지게 되기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로운 사람으로 부름받은 우리 성도들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들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말고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도 말고 각자 가 양심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어야만(고후 4:2-)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화평을 누리 자'라고 말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평이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축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성경구절을 면밀히 분석한 학자들 가운데는 '화평을 누리자' 보다는 '화평을 가지고 있다'라고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화평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자기의 노력이 아니라 위로 부터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 뜻인데 이미 의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 신 화평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의롭게 된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된 자들이고 하나님과 화목된 자들은 화평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화평은 성령님의 열매이요 의롭게 된 사람의 내적 증거입니다. 또한 화평은 하나님과의 조화있는 관계를 가짐으로 얻게되는 양심의 평정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은 갇혀있어도 그 양심은 자유를 얻은 자들이요 지극히 큰 평안 을 소유한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화평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러 한 화평이 이미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은 그의 화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하셨기 때 문입니다. 의롭게 된 사람들은 또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의롭 게 된 사람들이 받는 또 다른 하나의 축복은 은혜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런 은혜를 믿음으 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경험이 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 은혜에 들어가는 통로를 얻었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통로 안에 서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은혜'란 것은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란 그 은혜의 통로를 발견해야 되고 그 통로 속으 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경험입니다. 여러분들은 각각 그러한 은혜의 체험들을 많이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 다양한 체험들이 어떤 것이었던 간에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통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통로이기 때문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통로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경험 이고 체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에 어떤 시간의 과정속에서 한번 혹 은 두세번 경험하고 만, 단순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에 통로 에 들어와서 지금도 계속하여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들어 왔다는 것은 과거 에 있었던 사건이고 서있다는 것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마치 에스켈레이터에 오르면 거기 서있는 한 계속해서 올라가는 것 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은혜를 받는 경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거기에 서있지 못하면 그것은 다 지나간 추억일 뿐 지금 나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내가 믿음으로 서있는 그러한 은혜, 믿음으로 서있어서 은혜에 들어가고 있는 그러한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일이 어렵다는 것은 왜 입니까 그것은 '과거완료'가 아니고 '현재진 행'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믿음과 은혜가 계속 굳게 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으로는 믿음으로 계속 서서 있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 주저앉고 어떤 때는 넘어지고 혹은 뒷걸음질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현재진행형으로 지금 일어서야 하고 지금 전진해야 하고 지금 서서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소멸되면 다시 힘써 그 은혜의 통로를 찾아 내야 합니다. 기도가 중단됐으면 즉시 다시 계속해야 하고 영력이 떨어졌으 면 다시 회복해야 하고 사랑이 식어졌으면 다시 뜨겁게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에 들어가는 일을 계속되게 해 나가야 합니다. '의롭게 된 사람'이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서 있는 것처럼 계속하 여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 하여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며 완전해졌다는 것 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하신 상을 받으 려고 계속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2-)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달려 나아가야만 '의롭게 된 사람'들 이 받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계속 달려 나가야만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의 상속도 받고 또 큰 상급도 받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축복이지만 계 속해서 달려 나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그 의를 완성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또한가지 문제는 '의인'들에게도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왜 의인들이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는지 그 근본 이유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의인으로서 환난 을 당한다면, 그것은 환난이라도 손해가 없고 오히려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 라는 것입니다. 환난은 의인들을 더 연단시킵니다. 마치 광석을 용광로에 넣 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마침내 순수한 정금을 얻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 앙을 순수하게 만듭니다. 환난은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 버리고 큰 소망을 이 루게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당하는 환난은 유악헌 것입니다. 욥은 많는 환난을 당한 후에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다 알고 계신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처럼 깨끗할 것이다.'(욥 23:10)라고 고백 하였 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환난과 고통은 환영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환난과 고통을 환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는 환난을 불평없이 따른다, 또는 어쩔수 없이 견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환난 가운데에서 오히려 기쁨의 근거를 발견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즐거워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즐거원한다'는 말의 성서 원어 '카우 코마이'란 체념한다, 혹은 참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기양양하다', '자랑한 다', 심지어는 '기뻐 날뛴다'는 말입니다. 의인이 된 사람들은 의로운 일 때문에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체념하거나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의기양양하 고 자랑하고 오히려 기뻐 날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 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의롭게 하여준 사람을 세상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때 '자기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면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또 전도하고 설교하기를 시작하였더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 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다'(행 4:20-)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앞을 떠났다'(행 5:41)고 하였습니다. 아주 당당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의인으로서의 삶이란 환난중에도 기뻐 날뛰게 되고 죽어서도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로써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의롭다고 해주신 그 분의 일을 우리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힘써 감당하는 것 뿐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열심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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