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율법은 목걸이가 아닙니다 (롬2:17-29)

본문

우리는 흔히 아는게 병이라는 말을 많이합니다. 이 말은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을 오히려 알기 때문에 많은 갈등과 고민에 쌓여 결국 그것이 병이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중에 “선 무당이 사람잡는다.”라는 말 또한 있습니다. 실제로 어설프게 알아서 오히려 낭패를 보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백성이고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큰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방인들이 매우 저속한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게되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강요했고 또한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만 한다고 못을 박아두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어떤 궤변론자는 법은 어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세상에도 이 법을 어겼기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은 지켜지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지켜지지 못하는 법은 이미 그 존재가치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법에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다름아니라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그런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의 이익은 다 챙겨놓고, 자신들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법을 어겨가면서 힘없고 백그라운드가 없는 서민들에게만 지킬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요즈음 터지고 있는 세무비리가 실로 바깥으로 나타난 몇몇 세무서나 구청에서만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법이나 정의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얼마전 법무부의 몇몇 고위공직자들이 정년을 연장하기 위하여 호적을 고쳐서 나이를 줄이는 바람에 뉴스가 된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법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마구 주무르는 그런자들이 법무부에 앉아서 법을 집행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그 법을 신뢰할 것입니까 이런 사실들이 바로 인간들의 자기욕심에서 나타나는 잘못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실 이런일들이 높고 실력이 있는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교회에 장로님 한분이 지금 호적나이로 73세가 되셨는데도 시무장로로 활동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걸작입니다. 6.25사변때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자그마치 일곱살이나 나이를 많게 호적을 신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4년이나 장로의 시무를 다하다가 77세가 되셔서 은퇴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나이를 일곱이나 올려서 군대를 안갔으면 이미 나이를 올린 그 이익을 다 챙겼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로 피택될 때에도 올린 나이로 틀림없이 피택되었을 것이고요. 만일 호작으로 35세에 피택을 받았다면 실제로 스물여덟에 피택을 받았을 것 아빕니까 그렇게 엄청난 이익을 챙겨오고 이제는 내 나이 돌리도고 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어찌 한심한 일이 아닙니까
중요한것은 그 장로님은 항상 무슨일이 있을 때마다 법대로 하자고 사사건건 담임목사님의 의견에 반기를 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자들에게는 어떤법도 그 효용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자들에게 있어서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필요할 때에는 한껏 자신을 자랑하는 장신구로 사용되다가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슬그머니 주머니에 감추어지는 목걸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지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프라이드를 만족시켜주는 목걸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들은 율법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안식일날에는 음식을 전혀 만들지 않았습니다. 회당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문밖 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는 철저히 십일조를 했습니다. 기도시간도 철저히 지켜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향한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니요 자신들의 프라이드를 지키고 그리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행동으로서 지켜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하나님을 분노하시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0-13)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세리는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모든 율법과 규례를 다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은 자신의 교만에 빠져 제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팽배해 있던 교만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기 위하여 율법을 행하는 척 했을 뿐이요 실제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드리지 못했고 신령과 진정으로 율법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입을 빌어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그들에게 있는 율법은 그 가치를 철저히 잃어버린 목걸이 장신구에 지니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조목조목 따져서 그것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던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까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던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은 우리의 이로움을 자랑하는 목걸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 속에서 참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율법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한낱 목걸이로 전락시켜버리는 삶을 살아버린다면 이미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호를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게하는 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나타난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우리의 내면세계로 부터 우러나오는 참된 신앙적 결단을 통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난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할례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부터 탈출해 나아올 때, 유대인들과 함께 노예가 되어 있었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던 많은 이방인들과 애굽인들이 함께 나왔습니다. 바로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봉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베풂으로써 그들을 유대인으로 받아들일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할례라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증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로마교회에서도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받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폭탄적인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외적으로 나타난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저히 섬기고 지키는 자라야 참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할례자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들의 할례는 오히려 무할례와 같아지고, 무할례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는 바로 할례자의 반열에 서게된다는 선포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면적인 것을 거부하시고 철저히 이면적인 즉 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결단과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할례를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다는 말씀을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할례를 마음에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육신적 생각과 교만함 그리고 본성의 양심을 잃어버린 추해지고 화인맞은 양심을 도려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의와 올바름을 되찾고 하나님의 신령함 속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예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칭찬을 받아 누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문 즉 사람의 손과 자신들의 의지에 의해서 작성된 모든 율법조문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를 잃어버린 한낱 목걸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혹 인간적인 자랑이 앞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그런 삶을 살고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밖으로 나타나는 것에 마음과 눈을 빼앗겨 오히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지 않는지요 우리가 외식하는 유대인들을 율법을 목걸이로 전락시킨자라고 비웃었던 것 같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예수를 목걸이로 삼아 장식하고 다니는 허영덩어리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게 하는 삶을 살고있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신령함에 참예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마음 속에 할례를 행하지 못하여 계속 의문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 주신 올바른 삶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고 단호히 잘라버리시겠다는 뜻임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시다. 우리의 마음속에 할례의 삭도를 과감히 대어 잃었던 하나님의 양심과 의를 다시 회복합시다. 언제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을, 복음을 우리의 썩어진 육신을 치장하는 목걸이로 전락시킬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 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오직 너희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요엘 2:12-13, 신 10:12)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4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