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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참되심과 우리 (롬3:1-8)

본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속에서 하나님 께 감사하면서 살아왔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감사하던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원망들을 했던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어떻게 나를 이 모양 이꼴로 만들어놓았을까 어떻게 나를 이런 극한 상황으로 몰아 넣 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진정한 신앙의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지라 비록 잠시 동안은 그렇게 하나님을 불신했지만 결국에는 그런 하나님을 향 한 불신이 잘못임을 깨닫고 "오 하나님 하나님이 하신일이 진정 옳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해 여러가지 말로 표현을 하고 있는 데
1) 하나님의 미쁘심
2) 하나님의 참되심
3) 하나님의 의로우심
4) 하나님의 참 으심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아주 쉬운말로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의 길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1) 하나님의 미쁘심을 인정하고
2) 하나님의 참되심을 믿고
3)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인하고
4) 하나님의 참 으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을 부정합니다. 처음에는 이웃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하고 모두 다를 원망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까지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의 원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하게 이 부분에 대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롬 3:3-4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 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판단 받으실때에 이긴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참되신 하나님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살펴보고 신실한 주의 종의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첫번째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죄를 짓는 데는 몇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1) 죄를 짓는 죄요,
2) 그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죄요,
3) 지은 죄에 대해 변명하는 죄입니다. 이렇 게 되면 결국에는 그 지은 죄는 점점 더 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악의 골은 더 욱 더 깊이 파이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일단 빨리 신속하게 회개를 해야하는 데 그렇지 못할 경우 시간이 경과되어지면 결국에는 그 지은 죄를 정당화합니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 탓이 아니라 남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1994년의 한해를 얼 룩지게 했던 지존파의 경우도 자기들의 죄를 사회의 탓으로 돌렸고, 은행강도를 한 육사출신의 서울법대생도 자기의 죄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면서 정당화했던 것 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날카롭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이게 무 슨 말입니까 결국 정당화 한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장편 소설 "죄와 벌"에서도 이런 부분이 집 중적으로 취급되어지고 있습니다. 소설속에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가난한 청년 대학생으로서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이었던 허무주위적 초인사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것이 "누가 나폴레옹의 살인죄를 물었던가 "입니다. 결국 그는 돈 많은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내리쳐 살인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범행 직 후부터 양심의 가책과 고민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는 초라 한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소냐라고 하는 여인을 찾 아가서 자기의 범죄를 고백하는데 그때 그는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죽인 거야 .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의 짓이었어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 그는 평생을 양심의 가책속에서 괴로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성경속에서 한번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 하면 예수를 은 30에 팔아버린 제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룟유다가 만약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인류의 죄를 사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십자가 못박혀야 하는데 그 누군가 악역을 맡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희생적으로 그 악역을 맡아서 예수를 팔았다.
그러므로 나는 엄밀히 따져서 공로자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만 백성을 구원하게 되었고,만왕의 왕이 되었고,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 었기 때문에 가롯유다의 죄가 공로화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 과가 선으로 나타났다고 해서 지은죄가 정당화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런 기초적이고도 납득하기가 쉬운 죄 문제가 우리들 주위에서 아니 우리들 속 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앞에서 공의의 하나님앞에 서 번듯이 죄를 지어놓고 정당화시키는 것이 우리 사이에 생활화되어 간다는 것 입니다. 우리 이 점 참되신 하나님, 미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 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참으로 애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를 예를 들자면 다윗의 경우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다윗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자기를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우리아 의 아내를 범하고 결국에는 우리아까지도 전쟁터에서 죽게한 간강범이요 살인범 이 아닙니까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도데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죄악된 가운데서도 칭찬을 듣게 했습 니까 바로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 않고 곧바로 인 정하고 참회하면서 회개할때 하나님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주홍과 눈, 진홍과 양털 ! 이 얼마나 확실하게 비교가 되어지는 말입니까 따라서 우리의 죄가 주홍과 진홍같을 지라도 하나님앞에 다 털어내어 놓고 자복한 다면 눈과 양털과 같이 깨끗하게 희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법칙 이 있기에 강간범이요 살인범인 다윗이 하나님앞에서 합당한 사람이 될수가 있었 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간 이후로는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하지 맙시다. 하나님앞에 다 고백하고 털어내어 놓읍 시다. 이것이 참되신 하나님앞에선 우리의 자세인 것입니다.
2. 이렇게 해서 회개를 했다면 이제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뜻뜻하게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어떤 아이가 집에서 아버지가 고이고이 간직하는 도자기를 깨뜨렸다고 합시다. 그 아이는 도자 기를 깨뜨렸기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자기 잘못임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백을 합니다. 그리고 용 서를 빕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쾌히 용서를 해 줍니다. 이제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론 집안에 있는 다른 귀중품들을 장난을 치다 가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은 해야되지만 활기 있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데 아버지는 이미 용서를 했는데 매일같이 그 문제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와서 무뤂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 서 자백을 하고 용서를 빈다면 그 아버지의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처음 한두번 은 봐주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나중에는 대노를 할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의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지은죄에 대해 하나님앞에서 참회했다면 이 제 더 이상의 눈물을 흘리지 말고 눈물을 닦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그의 범죄의 씨인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팠을때 금식 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만 일단 그 아이가 죽자 다윗은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부하들이 왕에게 묻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 니 어찜이니이까 " 이 질문에 다윗은 대답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 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 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이 얼마나 놀라운 다윗의 당당한 모습입니까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런 다 윗의 모습과 그 당당한 모습의 결과인 솔로몬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 너무 과거지사에 매여 살지 맙시다. 우리의 과거 하나님께 다 맡겨버립시다. 과거에 매여서 오늘과 내일을 망치지 맙시다. 신앙의 사람은 과거에 억매이지 않습니다. 갈 2:20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잘 말해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 ! 지금까지 살아온 것 다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나님은 참되시고, 미쁘시고, 의로 우시기때문에 더군다나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의 잘 된것은 이미 기억하시고 우리의 잘못된 것은 이미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과거지사에 억매여 있지 맙시다.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최선의 길 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참된 도 리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일찍이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예찬한바 있는 인도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에 나오는 시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죽음의 신이 나의 문을 두드릴 때에 나는 그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내 생명의 그릇속에 내가 날마다 쌓고, 만들고, 저축한 보배를 죽음의 신 앞에 내어 놓아야 되겠다. 물론 이 시가 우리 기독교적인 신앙의 토대속에서 지어진 시는 아니지만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장차 우리가 하나님앞에 섰을때 과연 무엇을 내어놓을 것인가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앞에 섰을때 위축되어진 모습으로 근심과 후회 의 삶을 내어 놓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섰 을때 승리자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 땅위에서의 잘못된 것은 이미 용서함을 받 고 깨끗해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가 이땅위 에서 한 일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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