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 믿음, 은총 (롬3:23-28)
본문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지금부터(1999년 현재) 482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2천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는 교권이 황제를 지배하고 다스렸을 정도로 그 권한이 막강할 때였습니다. 그만큼 당시 교황권의 세도는 추상 같았습니다. 종교는 끝까지 종교로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종교가 이렇게 권한이 커지면 변질되기 쉽습니다. 종교가 이렇게 세속권까지 잡을 정도로 힘이 강해지니까 타락하게 됩니다. 종교는 권세와 결탁을 하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는 순수한 삶 속에서 발전하고 성숙해지고 깊어져야 그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가 세속권까지 모두 한손에 쥐게 되면 자연적으로 변질되고 타락하고 그 종교가 지니는 본질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정신적인 순결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정신적인 값을 지니고 영적인 자질을 가져야만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세속화되면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는 타락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인간적인 방법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면죄부라는 것까지 등장하고 구원을 돈으로 사고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면죄부는 중세 기독교가 갈 데까지 다 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타락의 극치엿습니다. 이를테면 종교가 타락하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때를 가리켜서 “영적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시대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나서서 “이것이 아니다”하고 외치면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으로 된 반박문을 써서 교회 정문 앞에 붙여 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정문 앞에 대자보를 써 붙인 것입니다. 말은 95개 조항이지만 이것을 정리하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중심이고 뼈대이며 기초이고 근간입니다. 신앙에서 성경이 경시되면 그 신앙은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흔들리게 되면 두 가지 결과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본주의에 빠지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본주의로 또는 편의주의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신앙의 기준이고 중심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들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느냐” 그때 루터가 대답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권위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 할 말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모든 것의 가장 권위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 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정경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가감할 수 없는 엄숙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만법의 기초이고 기본이라는 뜻입니다. 또 성경을 무시하면 그 신앙은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을 경시하고 인간의 편의에 따라서 자의로 감정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신앙이 성경에서 이탈하게 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신비주의나 이단은 모두 이렇게 성경에서 이탈한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이렇게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말씀이 무시됩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신앙으로 빠져서 감각과 느낌을 중시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주의에 빠져서 너무 지식이나 윤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에 빠져서 객관성을 상실하고 개인의 감정이 앞선 주관적인 신앙도 문제입니다. 신앙은 말씀 중심에 근거한 건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고 갱신이 일어나고 그곳에 조용한 내적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이 말씀에 의해서 전해져 왔고 성장해 왔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말씀은 때로 능력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어느 부부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이혼 직전이었습니다.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말하기를 “갔다 와서 결론을 내리자”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갔다가 몇 달 후에 돌아왔습니다. 공항에서 아내를 보자마자 아내의 얼굴이 변해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얼굴에 온기가 돌고 있다”고 말하자 아내가 말하기를 “마음이 불안해서 교회에 몇 번 나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 교회에 몇 번 나갔을 뿐인데 창백하던 얼굴이 따뜻한 온기가 돌아온 것입니다. 짧은 시간 배운 것도 별로 없고 깨달은 것도 변변치 못한데 단지 교회에 몇 번 나가서 말씀을 접한 것뿐인데 그 얼굴이 달라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마음 속에 이 말씀이 떨러져서 그 씨가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지니는 능력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말씀이 이렇게 역사했습니다. 신앙은 연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내 마음속에 떨어져서 자라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세속화되었고 물질화되어서 타락했습니다. 말씀이 작용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기의 기독교는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가리켜서 영적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교권은 있으나 말씀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루터가 나서서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면서 종교를 개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성경이 무시되고 성경이 도외시되고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종교가 권세화되고 물질에 오염되면 믿음이 생명력을 잃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물질은 신앙과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질이 풍성한 사회, 그 사회는 어김없이 믿음이 식어 갑니다. 가난했을 때 그렇게 신선하고 참신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부해지고 편해지면 어김없이 그 신앙은 싸늘하게 식어집니다. 열정이 없어지고 뼈대만 남아서 싸늘한 신앙으로 변해 버립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신앙들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얼마나 열렸했고 왕성했고 열기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뜨겁던 신앙들이 왜 이렇게 싸늘해졌습니까 왜 기도가 없어졌고 찬송이 없어졌고 눈물이 없어졌습니까 그것은 생황이 그만큼 향상되고 살아가기가 편리해져서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편안했었습니다. 기독교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물질도 풍요로웠습니다. 권세도 쥐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외적인 도전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모두 인본주의에 빠져서 앙상한 신앙만 남아 있었습니다.
구원받을 힘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모습입니다. 그때 바로 면죄부라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돈을 내고 면죄부만 사면 죄사함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천국에 가는 것도 보장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면죄부는 천국 가는 티켓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니까 천국에 갈 자신은 없고 한편 마음이 두렵기는 하고 면죄부만 사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면죄부라는 것을 샀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온전했겠습니까 신앙이 온전하다면 면죄부라는 것을 사 가지고 오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믿음이 생명력을 상실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인이 믿음을 상실하면 수단이 나오고 편의주의가 나옵니다. 그때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용기 있게 나서서 외쳤습니다. "Sola Fide" 구원이나 죄사함은 면죄부가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신선하고 용기 있는 외침입니까 이것이 마침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로나 자선이나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은 될지언정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종교에서는 선행과 자선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굳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죄사함이나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루터가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그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믿음 말고 또 다른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집스럽게 기독교만을 믿을 필요가 없고 더구나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숭고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오직 은총으로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보다도 깊고 산보다도 높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은 그 깊이가 그야말로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복 중의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가 노력을 많이 해서도 아니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고 은총입니다. “면죄부를 사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구원은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긍휼이고 자비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이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은총을 베푸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은총을 받고 은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복된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 전을 읽어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추운 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에 거지 하나가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보니까 그 거지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거지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냐” 그랬더니 거지가 옷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래시스는 거지에게 겉옷을 벗어 줍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1단계 은총입니다. 긍휼입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가 속옷도 달라고 합니다. 프랜시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속옷도 벗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2단계 긍휼입니다. 은총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랬더니 이 거지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또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지는 단순한 거지가 아니고 문둥병자였기 때문입니다. 안아 주었다가 문둥병이 전염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이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거지를 덥석 안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거지는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총을 다 입은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은총뿐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좋은 것이고 따뜻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순간 거지는 없어지고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그 거지는 다름 아닌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지 모습으로 이 땅에 현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는 것도 이렇게 큰 축복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이겠습니까 그래서 루터는 95개 조항 가운데 62조항에서 말하기를 “교회에 진정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긍휼이고 은총이고 자비라는 말입니다. 그 은총의 깊이가 얼마며 그 은혜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그것을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이같이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 기독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버렸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면죄부를 팔았고 사람들은 그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얼마나 형식적이었겠습니까 형식은 고사하고 얼마나 애처로운 모습입니까 죄를 지었으니 사함을 받기는 해야겠고 천국에도 가기는 가야겠고, 당시는 영적 암흑기라 정상적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고, 종교 지도자들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죄 문제와 천국 가는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다고 하니까 돈은 있겠다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절간에 가서 부적 사오듯이 성당에 가서 면죄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가 얼마나 우매한 시대였습니까 종교가 이렇게 눈이 어둡고 우매하게 되면 그 시대, 그 민중이 우매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루터가 용기 있게 나서서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고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소리쳤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고 참신한 외침입니까 결국 이것이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나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자꾸만 형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 내용이 자꾸만 빈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들의 신앙이 굳어져서 전혀 감각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러다가 깊은 영적 잠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비극적인 불행입니다. 우리는 이 굳어 가는 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안주하려는 신앙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형식화되어 가는 나의 신앙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 밭을 갈아 엎으라고 했습니다. 밭을 그냥 두면 굳어져서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갈아 엎어야 합니다. 그래야 씨가 떨어지면 금방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참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내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인가 나는 지금 천국을 소유한 확신 있는 신앙인가 모두 힘이 있고 생동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세속권까지 모두 한손에 쥐게 되면 자연적으로 변질되고 타락하고 그 종교가 지니는 본질이 흐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정신적인 순결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정신적인 값을 지니고 영적인 자질을 가져야만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세속화되면 그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는 타락해서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인간적인 방법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면죄부라는 것까지 등장하고 구원을 돈으로 사고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면죄부는 중세 기독교가 갈 데까지 다 갔다는 것을 보여 주는 타락의 극치엿습니다. 이를테면 종교가 타락하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가들은 이때를 가리켜서 “영적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시대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나서서 “이것이 아니다”하고 외치면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으로 된 반박문을 써서 교회 정문 앞에 붙여 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게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정문 앞에 대자보를 써 붙인 것입니다. 말은 95개 조항이지만 이것을 정리하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중심이고 뼈대이며 기초이고 근간입니다. 신앙에서 성경이 경시되면 그 신앙은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렇게 흔들리게 되면 두 가지 결과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본주의에 빠지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본주의로 또는 편의주의로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신앙의 기준이고 중심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들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기준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느냐” 그때 루터가 대답합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것이 권위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더 이상 할 말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성경은 이렇게 모든 것의 가장 권위 있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 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정경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가감할 수 없는 엄숙한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만법의 기초이고 기본이라는 뜻입니다. 또 성경을 무시하면 그 신앙은 신비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을 경시하고 인간의 편의에 따라서 자의로 감정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신앙이 성경에서 이탈하게 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신비주의나 이단은 모두 이렇게 성경에서 이탈한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이렇게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말씀이 무시됩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신앙으로 빠져서 감각과 느낌을 중시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주의에 빠져서 너무 지식이나 윤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에 빠져서 객관성을 상실하고 개인의 감정이 앞선 주관적인 신앙도 문제입니다. 신앙은 말씀 중심에 근거한 건전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말씀이 떨어지는 곳에 변화가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고 갱신이 일어나고 그곳에 조용한 내적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난 2천년 동안 이 말씀에 의해서 전해져 왔고 성장해 왔고 발전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말씀은 때로 능력으로 나타나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어느 부부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이혼 직전이었습니다.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가면서 말하기를 “갔다 와서 결론을 내리자”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갔다가 몇 달 후에 돌아왔습니다. 공항에서 아내를 보자마자 아내의 얼굴이 변해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얼굴에 온기가 돌고 있다”고 말하자 아내가 말하기를 “마음이 불안해서 교회에 몇 번 나갔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주 짧은 시간 교회에 몇 번 나갔을 뿐인데 창백하던 얼굴이 따뜻한 온기가 돌아온 것입니다. 짧은 시간 배운 것도 별로 없고 깨달은 것도 변변치 못한데 단지 교회에 몇 번 나가서 말씀을 접한 것뿐인데 그 얼굴이 달라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마음 속에 이 말씀이 떨러져서 그 씨가 생명을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지니는 능력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말씀이 이렇게 역사했습니다. 신앙은 연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내 마음속에 떨어져서 자라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세속화되었고 물질화되어서 타락했습니다. 말씀이 작용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기의 기독교는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가리켜서 영적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교권은 있으나 말씀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루터가 나서서 “오직 성경으로”를 외치면서 종교를 개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성경이 무시되고 성경이 도외시되고 성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2. 다음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종교가 권세화되고 물질에 오염되면 믿음이 생명력을 잃고 형식만 남게 됩니다. 물질은 신앙과 상당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질이 풍성한 사회, 그 사회는 어김없이 믿음이 식어 갑니다. 가난했을 때 그렇게 신선하고 참신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부해지고 편해지면 어김없이 그 신앙은 싸늘하게 식어집니다. 열정이 없어지고 뼈대만 남아서 싸늘한 신앙으로 변해 버립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신앙들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얼마나 열렸했고 왕성했고 열기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뜨겁던 신앙들이 왜 이렇게 싸늘해졌습니까 왜 기도가 없어졌고 찬송이 없어졌고 눈물이 없어졌습니까 그것은 생황이 그만큼 향상되고 살아가기가 편리해져서 그렇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편안했었습니다. 기독교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물질도 풍요로웠습니다. 권세도 쥐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외적인 도전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믿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모두 인본주의에 빠져서 앙상한 신앙만 남아 있었습니다.
구원받을 힘도 없었고 용기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모습입니다. 그때 바로 면죄부라는 것이 등장하게 됩니다. 돈을 내고 면죄부만 사면 죄사함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천국에 가는 것도 보장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면죄부는 천국 가는 티켓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니까 천국에 갈 자신은 없고 한편 마음이 두렵기는 하고 면죄부만 사면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면죄부라는 것을 샀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온전했겠습니까 신앙이 온전하다면 면죄부라는 것을 사 가지고 오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겠습니까 믿음이 생명력을 상실하면 이렇게 됩니다. 신앙인이 믿음을 상실하면 수단이 나오고 편의주의가 나옵니다. 그때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용기 있게 나서서 외쳤습니다. "Sola Fide" 구원이나 죄사함은 면죄부가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신선하고 용기 있는 외침입니까 이것이 마침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로나 자선이나 선행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덕목은 될지언정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부 종교에서는 선행과 자선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굳이 죽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죄사함이나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루터가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가장 많이 강조한 것이 그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믿음 말고 또 다른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집스럽게 기독교만을 믿을 필요가 없고 더구나 믿음을 지키려고 순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숭고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오직 은총으로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보다도 깊고 산보다도 높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은 그 깊이가 그야말로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복 중의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가 노력을 많이 해서도 아니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이고 은총입니다. “면죄부를 사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구원은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긍휼이고 자비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이나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은총을 베푸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은총을 받고 은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복된 일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 전을 읽어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추운 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길에 거지 하나가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보니까 그 거지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거지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필요하냐” 그랬더니 거지가 옷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래시스는 거지에게 겉옷을 벗어 줍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1단계 은총입니다. 긍휼입니다. 그랬더니 이 거지가 속옷도 달라고 합니다. 프랜시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속옷도 벗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2단계 긍휼입니다. 은총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랬더니 이 거지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안아 달라고 합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또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거지는 단순한 거지가 아니고 문둥병자였기 때문입니다. 안아 주었다가 문둥병이 전염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참 망설이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거지를 덥석 안았습니다. 말하자면 이 거지는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총을 다 입은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은총뿐입니다. 은총은 이렇게 좋은 것이고 따뜻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순간 거지는 없어지고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그 거지는 다름 아닌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지 모습으로 이 땅에 현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는 것도 이렇게 큰 축복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축복이겠습니까 그래서 루터는 95개 조항 가운데 62조항에서 말하기를 “교회에 진정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가장 큰 은혜는 긍휼이고 은총이고 자비라는 말입니다. 그 은총의 깊이가 얼마며 그 은혜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그것을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루터는 이같이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세 기독교는 이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버렸습니다. 무시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면죄부를 팔았고 사람들은 그 면죄부를 사서 구원받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얼마나 형식적이었겠습니까 형식은 고사하고 얼마나 애처로운 모습입니까 죄를 지었으니 사함을 받기는 해야겠고 천국에도 가기는 가야겠고, 당시는 영적 암흑기라 정상적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고, 종교 지도자들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죄 문제와 천국 가는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다고 하니까 돈은 있겠다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 나도 절간에 가서 부적 사오듯이 성당에 가서 면죄부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 그 시대가 얼마나 우매한 시대였습니까 종교가 이렇게 눈이 어둡고 우매하게 되면 그 시대, 그 민중이 우매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루터가 용기 있게 나서서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고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소리쳤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고 참신한 외침입니까 결국 이것이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안합니다. 너무나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자꾸만 형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신앙 내용이 자꾸만 빈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들의 신앙이 굳어져서 전혀 감각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러다가 깊은 영적 잠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비극적인 불행입니다. 우리는 이 굳어 가는 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안주하려는 신앙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형식화되어 가는 나의 신앙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마음 밭을 갈아 엎으라고 했습니다. 밭을 그냥 두면 굳어져서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갈아 엎어야 합니다. 그래야 씨가 떨어지면 금방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참신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내 믿음은 구원받은 믿음인가 나는 지금 천국을 소유한 확신 있는 신앙인가 모두 힘이 있고 생동감 있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