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영원 결정 두가지 (롬3:9-10)
본문
요즘 새벽마다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9절로 부터 그 이하를 읽고 현실을 말하니까 본문에 그런 것이 없는데 어찌 이 본문에서 그런 해석이 나올꼬 그렇게 오해를 하고 그만 아무렇게나 끌어다 붙여 그렇게 말하는가보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말씀이 예배시간마다 계속되는데 한 시간을 빠지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본문 어디를 근거해 가지고 말하는고 하니 우리는 다 죄 아래 있다고 9절에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고 했는데 무슨 죄 아래 있는가 무슨 죄 무슨 죄라는 것은 또 그다음에 있습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준해서 이 말씀에 삐뚤어진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해석이 다 되었는데 왜 또 현실을 들고 말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이 죄이지만 죄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고 무슨 효 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말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죄라는 그 자체를 우리와 관련된 범위를 넓혀 말을 하면 이제 현실이라 하는 것이 들려 나오게 됩니다. 그것까지를 말하지 않으면 이 죄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 하려고 할 때에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다 마귀에게 지고난 다음에 죄를 알면 뭐 합니까 그러기에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려고 하면 이 순서를 알아야 됩니다. (현실이란) (현실이란) 우리의 현실관, 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현 실을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것 같지만 현실을 만나 놓으면 그만 마귀가 주는 그 미혹의 지식이 들어와서 현실관이 삐뚤어져 버립니다.
현실을 바로 알면 현실은 어떤 현실이든지 우리가 원망할 현실은 아니고 참 감사 할 현실이고, 우리에게 해가 되는 현실은 아니고 유익이 되는 현실이고, 화가 아니 고 극히 복이 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잘못 사용하면 큰 화가 되고 현 실을 바로 사용하면 지극히 큰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니, 그러기에 이 현실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어떤 현실이든지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만드신 현실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시 만든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하나님께서 그대로 예정해서 계획을 딱 세워 놓았고, 세워 놓은 계획 그대로 하나님 이 내 현실을 순서대로 닥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실이란 시간으로 말하면 바로 이 시간이 현실의 시간이오. 또 장소로 말하면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그 장소가 현실의 장소요. 또 이 현실에 참가하고 있는 종류는 사람도 있고, 영도 있고, 악령도 있고, 사건들도 있고, 모든 만물들도 있고, 이 런 것들이 다 이 현실에 참가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합해서 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 안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 일곱 가지가 있다고 했 습니다. 악령, 죄, 또 사망, 또 심판법, 또 구속, 생명의 법, 영생하는 생명의 법, 또 그 위에는 성령님 하나님 있는데, (현실을 바로 살려면 바로 알아야) 어쨌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보다도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옳고 바른 것을 자기가 깨달아 가려고 얼마나 힘씁니 까! 생명 내놔야 됩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 주시지, 그저 예사로 하나님 말씀을 시험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지고 다른 사람 정죄나 하고, 다른 사람 비판이나 하고, 그러면 자기가 심판자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에 심판자 되 기 때문에, 네가 무엇인데, 심판자는 하나님이신데 네가 그러느냐. 그것이 너를 심판하는 멸망이라 하는 것을 야고보서에 말씀했습니다. 실은 우리는 삐뚤어진 것을 알 여가가 없습니다. 삐뚤어진 것은 알 여가가 없어 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옳고 바른 것만 알고, 또 그것만 알아 나가도 다 못 알아 나갈 터인데, 언제 삐뚤어진 것을 다 알 수가 있겠소 삐뚤어 진 것은 억만명의 머리로도 그걸 다 알 수 없는, 그만치 복잡하고 많은 것인데, 옳 은 것만 알면 삐뚤어진 그까짓 거야 억억만이라도 옳은 것 아니면 다 삐뚤어진 것이다. 이렇게 도매금으로 넘겨버리면 그만 됐습니다. 그렇지 않소
그러므로 아는 법은 자기를 산 제물로 드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산 제물로 드 린다' 말은 바로 알기는 알아도 잘 조절 해 가면서 타산 해 가면서 별 지장 없으 면 바로 아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그자에게 하나님이 바로 가르쳐 줍니까 안 가르쳐 줍니다. 바로 아는 데는 주여! 바로 알려 주옵소서. 내가 모가지가 끊 어지든지 살림살이가 달아나든지 내가 어떻게 매장이 되든지 바로만 가르쳐 주시면 제가 그대로 하겠습니다. 요 마음이 있는 자에게 바로 가르쳐 줍니다. 바로 가르 쳐 준다고 알맹이까지 주는 줄 압니까 아니오. 껍데기만 바로 가르쳐 줘요. 껍데기를 바로 가르쳐 주는 그걸 받아 가지고 자기가 어떤 해가 있어도 참 그대 로 달려들어 실행을 합니다. 실행을 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기가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고 나면 변화된 것만큼 이제는 또 새로 알아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주님 앞에는 참 이것이 제일 불행스럽소. 진실이 없는 자가 참 불행스럽습니다. 참이 없는 자, 꾀로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 지혜로 가 지고 예수믿는 사람, 수단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 참 불쌍합니다. 안돼요.
(현실에서 결정되는 두가지) (1. 심신기능의 생사 결정) 그러면 우리 현실 안에는 몇 가지가 있어요 일곱 가지. 이제 다 말했지요. 일곱 가지. 일곱 가지가 있는데, 거기 현실 속에서 죽고 살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어떤 것이 죽고 삽니까 이 일곱 가지 현실 속에 죽는 것들이 거기 들어 있는데, 어떤 것들이 그 현실에서 죽고 사는지 죽을 것은 어떤 것들이며, 살 것은 어떤 것들입니 까 자, 죽을 것은 여반에서 한번 말해 보고 살 것들은 남반에서 한번 말해 보지요 . 죽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여기 양성원 학생들이 대답 좀 해 보지요. 악령, 죄, 사망 그것이 죽을 것들이라 그것은 죽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원수가 돼 가지고 죽음 뭉텅입니다. 죽은 것 말고 어떤 것들이 죽을 것들입니까 그 것을 알아야 우리가 죽을 것들을 죽지 못하도록 하지요. 살릴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것도 알아야지요. 둘이 있습니다. 죽을 것들 살아날 것들, 둘이 있는데 안 죽으면 살고 죽으면 못삽니다. 이 둘이 사나 죽나, 사나 죽나 하는 이 문제가 현실에 매여 가지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는 데, 그만하면 알 수 있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뭐입니까 네. 마음과 몸의 기능 , 육의 기능들, 육의 기능들 이것이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 하는 것이 현실에 서 결정납니다. 몸의 기능, 육의 기능 말이오. (마음은 영이 아니라 몸과 함께 육, 육체라) 육의 기능이라 할 때 육은 육체라는 말인데 육체라면 심신을 합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일반 교회들이 육체라 하면 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은 영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영이라 생각해요. 마음을 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중생되고난 다음에도 제 마음이 하루 몇번이라도 하루 열 번도 더 죄를 짓기 때문에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는 다고 알게 되는데 실은 중생된 영은 다시 범죄치 않는 존재로 중생이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영이 아닌 마음입니다. 사람은 영, 마음, 몸 셋으로 되어있고 마음과 몸을 합해서 육이라고 하니, 곧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었으며 육은 다시 마음과 몸으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 이 중생될 때는 다시는 죽지 않는 영으로 중생되었고 이후 죄를 짓는 것은 마음과 몸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을 구별치 못하고 같은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중생된 자기 마음 과 영이 죄를 짓는다 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마음의 혼돈에서 나온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마음이 있습니다.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고 했지요. 사람하고 조금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그것도 슬픈 마음 있고, 기쁜 마음도 있고, 또 감사한 마음도 있고, 두려운 마음도 있고 다 있어요. 마음을 영이라고 혼돈한다면 짐승에게 있는 그 마음을 영이라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어 두워졌는지. 마음을 영이라고 하니 그 가르침이나 또 그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찌 됩니까 마음을 영이라고 해 버리니까 성경 해석 전부가 삐뚤어질 것 아닙니까 인 생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주격이 뭐이냐 하면 영입니다. 영이 주격체인데 이 주격 체를 없애 버렸으니까 구원은 무엇이 됩니까 (기능은 현실에서 영원 결정) 영은 진리와 성령님으로 중생되어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는데 영이 하는 일은 지금 무슨 일 하는고 하니 심신인 육, 자기의 육을 영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사람의 소유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주보다도 자기 육의 기능입니다. 육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되겠는데 육의 기능 이것을 영원한 사망에게 빼앗기느냐, 영원히 자 기 것을 만드느냐 하는 이 문제가 현실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맡은 성령님도 탄 식을 하고,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된 우리라는 중생된 영들도 탄식을 합니다. 왜 육의 기능을 현실에서 빼앗기면 다시 못 찾습니다. 육의 기능을 자기 것을 삼아 놓으면 영원히, 무궁세계에서 영원히 자기 기능으로 쓸 수 있습니다. 자기도 구로 쓸 수 있다 말이오. 이래서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병기 의의 도구가 된다고 했 습니다.
우리의 몸이 의의 도구가 되고, 죄에 드리면… 죄에게 바쳐서 죄 하는 대 로 이렇게 하면 죄의 병기 죄의 도구가 된다 이랬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것은 우리의 육의 기능이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서 결정됩니다. 한 현실에서 육의 기능 전부가 죽고 사는 것은 아니고, 고 현 실에 해당된 육의 기능 이것은 죽든지 살든지 하는 그 기회가 현실이라는 한번 기회 밖에 없습니다. 다른 심신의 기능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이 현실에 해당되지 아니한 것은 상관이 없어요. 이 현실에 해당된 그것은 그 현실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중생된 영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영원히 필요있는 도구, 제일 중요한 도 구를 이 현실에서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기 것을 삼느냐, 이 악령 죄에게 빼앗겨 버 리느냐는 이것이 지금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탄식하고 성령님도 지금 이를 위해서 일 하고, 이러니까 성령님하고 중생된 영하고는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이 현실에서 성령님 이 쓸 영과 합해서 애를 씁니다. 성령님이 쓸 것이 우리의 영이요, 영이 쓸 것이 이 육의 기능인데, 이것을 구원하려고 둘이 합해 가지고 애를 씁니다. 애를 써도 빼앗 기는 일 많고, 또 차지하는 일 많습니다. 빼앗기다니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무엇 때문에 빼앗겨요 (심신의 자유성 때문에)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 빼앗길려고 애를 쓰는데도 빼앗깁니까 전능이 아닌가보구먼.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능자이신데 왜 빼앗깁니까 능력이 없어 빼앗깁니까 그 심신에게도 유한된 자유이지만 자유를 줬기 때문에, 자유를 줬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자기가 능동적으로 성령님과 진리와 주 님의 공로를 영접하고 그쪽으로 속해야 되는 것이지, 강제로 뺏을진대야 뭐 이렇게 교회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에 만든 것 강제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야 대번에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도구나 짐승과 같은 존재이지 하나님의 형상은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는 만물이 가지지 못한 그 자유성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영은 자기 영원한 도구를, 자기 병기를, 자기 기구를 안 빼앗길 려고 애를 쓰고, 마귀란 놈은 뺏을려고 애를 쓰고 성령님도 안 뺏기려고 애를 쓰고 이래서 성령님과 중생된 우리 영 둘이 합해서 안 빼앗길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 심신의 기능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이 심신이 자유가 있으니 싫다고 배척하면 하나님이 쫓겨나가야 된다 말이지오. 이러니까 이걸 구원하기 위해서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사람을 통해 권면하기도 하고, 만물을 통해서 알리기도 하고, 온갖 방편의 역사를 해 가지고 비 로소 그 본인의 육이 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그 사망에 속한 것을 배척하고 하나님께로 이렇게 척 돌아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나님을 사귀는 법에 제일 요긴하고 가깝고 중요한 그런 시기가 뭐이냐 하면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악령의 모든 것을 싹 배척하고 하나님께로 척 돌아서는 요것이 하나님에게 제일 기쁨이요 만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두 사이에 있으면서 지금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세상도 지금 우리를 자기 들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공로도 자기 것을 만들려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두 사이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할 때에 양쪽에서는 참 탄식을 하면서 그 순간 조마조마 고대하고 있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을 척 버리고 저쪽으로 싹 돌아선 그것이 그다음에 급할 때는 주여! 주여! 암만 해 봤자 분개 하다 말이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뭐 돈이나 무슨 봉사나 희생이나 뭐이나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풀릴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까짓 거는 여기 비할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는 무슨 봉사나 연보나 그런 것이, 전도나 그런 것이 없어도 요 현실에 둘이 요렇게 시비를 할 때에 어디로 가는가 보자. 참 성령님도, 중생된 영도 가슴이 도곤도곤하고 있고, 이 악령들도 지금 가슴이 도곤도 곤하고 있는데 그럴 때에 거기서 머뭇머뭇 하다가 하! 내가 너 따라갈 줄 아느냐 마지막 척 돌아서서 주님 앞으로 딱 돌아서면 주님은 그만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그게 제일이오. 제일 주님을 사귀는 것은 바로 그게 제일이오. 그게 제일입니다. 그리되면 성령님은 부자인데 우리는 이 부자 성령님과 실력있는 영을 이제 가지 게 됐지, 또 중생된 영은 우리 심신을 자기의 영원히 쓸 병기로 만들었지 이러니까 기뻐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이랬습니다. 믿음 없이는 딴것 가지고는 기쁘시게 못해요.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시비가 자기 앞에 왔는데 이것이냐 저것이냐 네가 어디로 붙을래 할 때에 그때 척 배반하고 이리 딱 붙을 때야 하나님이 모든 것 아끼지 않습니다. 붙은 그에 게 대해서는 아끼지 않고 모든 걸 다 줍니다. 네가 내게 속했으니 뭐 그 이상 다른 거 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족입니다. 우리의 육은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하는데 육의 기능 이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2. 만물의 영원 결정) 또 하나는 뭐입니까 현실에서 또 하나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기와 관련된 만물 이 아니고 그 현실에 관련된 모든 만물들입니다. 그 현실에는 돈도 관련될 수 있고, 명예도 관련될 수 있고, 지위도 관련될 수 있고, 생명도 관련될 수 있고, 그 현실 에 관련된 것. 자기에게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현실에 관련된 모든 것들입니다. 자기 현실에는 사건도 있고 물건도 있고 모든 것 다 있지 않습니까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이용되는 그 모든 만물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만 하나님께 속해 버리면 그것들도 다 생명에 소속하여 살게 되고, 내가 넘어지면 그 모든 것들 도 다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그 현실에 참가한 만물, 그 현실에 관 련된 만물 그것이 영원한 멸망을 받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결 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이 탄식하면서 원하기를 뭘 원한다 했지요 하나님의 뭇 아들들의 자유입니다. 뭇 아들들이라 말은 남자만 말한 것 아니오. 여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이오. 여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뭇 아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중생된 하나님의 아 들이 자유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 자유하는 것입니까 영감대로 사는 것이 자유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새사람 아니오 하나님의 아들은 새사람이니까 새사람 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진리의 소원이지요. 이러니까,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지. 이러니까 하나님의 뭇 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새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살기를 고대한다 말입니다. 새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살기를 고대한다. 새사람이 자유하기를 고대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현실에는 일곱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니 까 죄, 마귀, 사망, 심판법을 이기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생명의 법에 안보받 고 하나님에게 안보받는 이것이 의의 걸음이라 말이오, 의의 걸음. 의의 걸음 걷기 를 탄식하며 고대합니다. 의의 걸음 걸으면 뭐하려고 의의 걸음을 걸으면 거기 관련된 그 모든 것은 영원 히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살아나지만 반대로 주인공이 되는 이 인간이 그만 범죄해 버리면 관련된 만물은 다 절단나 버리고 맙니다. (현실의 요소 일곱과 두가지 문제) 이러니까 현실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지워질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현실 에서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요, 또 하나는 내 현실에 해당된 모든 만물들입니다. 그 러니까 두 가지가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이 두 가 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 안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들어있다고 했습 니까 거기 일곱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와 현실에서 직접으로 관련된 원수가 뭐입니까 네. 죄입니다. 마 귀도 있고, 사망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제일 적이 아닙니다. 제일 의 적은 죄입니다. 죄 그놈만 없애버리면 마귀도 그까짓 거 뻐드러져 버리고, 사망 도 뻐드러져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 그놈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접선되어 있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현 실에서 내가 싸워야 할 적을 찾아야 되니까, 마귀도 있고 모든 것도 있지만
첫째로 내가 내 적을 찾아서 싸울 제일 적이 뭐이냐 죄입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지요 나를 모든 은혜가 많고 돕는 것이 많지만 첫 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이
첫째 급합니다. 이 공로만 입고 나면 그다음에 쭉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죄와 대속에 ) 그러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는 내 심신의 기능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과, 또 이 현실 속에 관련된 모든 만물 이것이 살아나면 영원히 나를 수종들고 그것 죽으면 나와는 영원히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 만물이 탄식하는 것이니, 만물 들이 탄식하고 있는 이 현실에 관련된 만물 이 둘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 려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 매여 있는 데, 관련된 만물에게는 자유가 있습니까 만물의 죽고 살 수 있는 것이 만물에게 자유할 수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 대해서, 이 두 가지가 죽고 사는 데 대해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우리 심신의 기능 이것이오. 이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죽고 사는 요 결정 속에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찾아 가지고 대적해서 그것부터 정복해야 됩니다. 네가 뉘 집에 들어가든지 들어가면 그 집에 제일 왕이 되는 그놈부터 정복을 해야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빼앗을 수가 있지 그것 내버려두면 빼앗지 못한다. 그것부터 먼저 처리해라. 그것부터 먼저 처리해라 말씀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제일 이 현실에서 먼저 처리해야 될 원수가 누구입니까 죄입니다. 죄 이놈을 잡고 지금 처리를 해야 됩니다. 또 내가 이 현실에서 제일 힘입어야 될 필요한 것이 많지만 제일 필요하게 힘입 어야 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공로입니다. 원수는 죄인데 나를 일차적으 로 도울 것은 주님의 공로이니까 이 공로와 죄를 한데 부딪히면 죄는 절단나 버리고 맙니다. 말씀을 어긴 죄나 자율로 하는 불의의 죄나 하나님과 원수된 죄나 언행심 사의 어떤 죄든지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되면 이것은 깨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되고난 다음에는 이제 예수님의 공로를 써먹고, 써먹고 나 면 일차적으로 원수가 다 정복됐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써 먹으면 죄도 절단나 버 렸고, 마귀도 볼일 다 봤고, 절단나 버렸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내가 힘입을 때에는. 그리고난 다음에 재빨리 우리가 힘입을 것이 무엇입니까, 힘입을 것이 하나님 의 안보입니다. 하나님의 안보의 법 이 진리를 빨리 힘입습니다. 이 진리를 힘입어 서 빨리 이 진리와 자기가 일치돼야 합니다. 그리고난 다음에는 누구와 일치됩니까 하나님과 일치됩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 구주 하나님이라니 예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을 가리 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이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뭐인가 성령님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내가 같이 있겠다. 하는 그 말씀은 신인양성일위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심이 아니고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 으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분을 힘입으면 이제는 그 현실에서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에 관련된 이 현실에 모든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죄를 말할 때에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죄를 이겨나갈 수가 없고, 벗어날 수가 없고, 우리가 이 대적하는 데에 전법이 희미해서 패전하게 되기 때문에 요 죄를 말하면서 요 현 실을 관련시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 바쳐 듣지 않으면, 욕심까지 뽑지 않으면 못 듣는 것이 도) 자기가 양심을 쓰지 않고 들으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엉뚱한 소리 하는 것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백목사 설교하는 것은 늘 하는 말 하는 것 이니까 뭐 새벽기도 갈 것도 없다. 같은 말만 항상한다'고. 그 사람은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항상 흐리멍텅하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드리지 않으면 이 도에는 참여할 것도 없다 그렇 게 말했소. 시몬아! 네 속에 불의가 가득하다. 악이 가득하다. 이 도에는 참예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이랬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는데 네가 열심 히 따라다녀서 남보다 우쭐해서 올라가려고, 제가 커질려고, 자기가 인기 끌려고 그 욕심 가지고 따라다녔지,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위해서 자기가 죽는 건데, 주님이 자기에게 해준 것 그것 받고 자기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 다 바쳐서 죽는 건데, 이것이 예수믿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가지고 자기가 유명해지고 자기가 유력해지고 자기가 존귀해지 고 자기가 인기 끌어지고 하려고 하니까, 예수까지 이용을 해먹고 예수님의 공로까 지 이용해 먹으려 하기 때문에 상도둑놈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시몬에게 대해서 네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 불의가 가득찼다. 이 도에는 받을 것도 없고 참가도 못한다. 네가 은과 함께 망할 것이다. 그러나 네 가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혹 용서하시리라. 이 말을 듣고서 그만 달려 들어서 회개를 했어요.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믿는 것이 뭐인지도 모르고 지금 마음대로 하고들 있습니다. 구약에는 고기 덩어리가 죽으니까 육안으로 보이지만 오늘 신약에는 고기덩어리보다도 그의 심신의 기능이 죽고, 영의 소유권이 죽고, 이렇게 중요한 것이 죽지만 이것이 눈에 보여야 지! 구약시대는 대번에 벌해서 죽지만 이 신약시대는 죽는 것이 안보이니까 죽는다는 말이 틀린 것으로 알지만 죽는다는 것이 왜 안 맞아요 영원히 살 요소들이 죽 습니다. 이 고기덩어리가 중합니까 그 안에 기능이 더 중합니까 기능이 중해요 영 이 중해요 영이 중합니다. 그러기에 모르는 자는 항상 모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새벽기도 말씀의 중요성) 이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한 말씀 한 말씀 또박또박 배워야 자기 심신이 변화가 되고, 구원얻을 자는 깨달아지게 되는 건데 이 새벽기도를 안 나오는 것은 전 생활 을 다 도둑 맞는 것입니다. 자기가 암만 힘쓴다 해도 자기 구원은 헛일입니다. 건설 구원은 헛일입니다. 사람 보기에 미꿈한 생활이야 뭘 못하겠소! 뭘로 인간을 변화 시킵니까 하나님 말씀 가지고 변화를 시키지요. 이러니까 자 이 중간반 반사(교사)들도 심방하는 그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 이 더 중요하고, 주일학교 반사들도 자기 반사 노릇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반사들이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 이 더 중요합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것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마니까 마지막은 껍데기 이것만 살아서 움직이고 있게 됩니다. 이 주 일학교 반사들이 새벽기도를 나오기 않기 때문에 힘이 속에서 능력이 없으니까, 억 지로 한다고 됩니까 제가 이제 그 파악을 똑똑히 했습니다. 참 진리로 사람을 고치려 하는 그것이 있으면 서부교회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반은 안 내려갑니다. 그 반을 맡은 선생 님이 아플수록, 병들어 누웠을수록 심방은 못해도 더 올라갑니다.
첫째는 병인데 외부적으로 병은 뭐이냐 하면 심방을 안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사가 두 달을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그 학생들에게안 온지가 얼마나 됐니 한 두 달 됐습니다. 안 오니까 가까운 교회로 가야 되지요. 그러나 그 책임이 얼 마나 무거운지! 자기가 그 사람의 영혼을 맡았으니 찾아 가면 되는데 게을부리고 심방하지 않아서 다른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서 구원이 바로 이루어 지면 다행이지만 만일 잘못 이루어지면 자기가 심판을 받아야지요. 그 사람이 교회 안 나오고 멸망받으면 그것은 자기가 심판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큰 멸망은 모르고, 눈 앞에 있는 공부 그까짓 거 하면 얼마나 대단한데 세상 지식은 몰라도 좋아요. 알아도 잘못 이용하면 큰 화가 됩니다. 몰라도 하나님의 지식만 가지면 다 돼 버립니다. 전지자가 돼 버려요. 이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 걸음을 걸을 수 없습니다. 일주일 중 에 제일 중요한 날이 어느 날이지요 주일날입니다. 주일날 중에 제일 중요한 시 간이 어느 시간입니까 예배시간입니다. 하루 중에 제일 중요한 시간은 어느 시간 입니까 새벽시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의논하고 여기서 하나님이 그날에 대한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참 불쌍하고 가 련해요. 암만 해도 안 듣는 것은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참 불쌍하다 말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9절로 부터 그 이하를 읽고 현실을 말하니까 본문에 그런 것이 없는데 어찌 이 본문에서 그런 해석이 나올꼬 그렇게 오해를 하고 그만 아무렇게나 끌어다 붙여 그렇게 말하는가보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말씀이 예배시간마다 계속되는데 한 시간을 빠지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본문 어디를 근거해 가지고 말하는고 하니 우리는 다 죄 아래 있다고 9절에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고 했는데 무슨 죄 아래 있는가 무슨 죄 무슨 죄라는 것은 또 그다음에 있습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준해서 이 말씀에 삐뚤어진 것이 다 죄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해석이 다 되었는데 왜 또 현실을 들고 말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이 죄이지만 죄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고 무슨 효 력이 있기 때문에 죄를 말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죄라는 그 자체를 우리와 관련된 범위를 넓혀 말을 하면 이제 현실이라 하는 것이 들려 나오게 됩니다. 그것까지를 말하지 않으면 이 죄에 대해서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 하려고 할 때에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다 마귀에게 지고난 다음에 죄를 알면 뭐 합니까 그러기에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려고 하면 이 순서를 알아야 됩니다. (현실이란) (현실이란) 우리의 현실관, 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똑똑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현 실을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것 같지만 현실을 만나 놓으면 그만 마귀가 주는 그 미혹의 지식이 들어와서 현실관이 삐뚤어져 버립니다.
현실을 바로 알면 현실은 어떤 현실이든지 우리가 원망할 현실은 아니고 참 감사 할 현실이고, 우리에게 해가 되는 현실은 아니고 유익이 되는 현실이고, 화가 아니 고 극히 복이 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현실을 잘못 사용하면 큰 화가 되고 현 실을 바로 사용하면 지극히 큰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니, 그러기에 이 현실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어떤 현실이든지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만드신 현실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시 만든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하나님께서 그대로 예정해서 계획을 딱 세워 놓았고, 세워 놓은 계획 그대로 하나님 이 내 현실을 순서대로 닥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현실이란 시간으로 말하면 바로 이 시간이 현실의 시간이오. 또 장소로 말하면 내가 현재 머물고 있는 그 장소가 현실의 장소요. 또 이 현실에 참가하고 있는 종류는 사람도 있고, 영도 있고, 악령도 있고, 사건들도 있고, 모든 만물들도 있고, 이 런 것들이 다 이 현실에 참가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합해서 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현실 안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 일곱 가지가 있다고 했 습니다. 악령, 죄, 또 사망, 또 심판법, 또 구속, 생명의 법, 영생하는 생명의 법, 또 그 위에는 성령님 하나님 있는데, (현실을 바로 살려면 바로 알아야) 어쨌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보다도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옳고 바른 것을 자기가 깨달아 가려고 얼마나 힘씁니 까! 생명 내놔야 됩니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 주시지, 그저 예사로 하나님 말씀을 시험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지고 다른 사람 정죄나 하고, 다른 사람 비판이나 하고, 그러면 자기가 심판자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성경에 심판자 되 기 때문에, 네가 무엇인데, 심판자는 하나님이신데 네가 그러느냐. 그것이 너를 심판하는 멸망이라 하는 것을 야고보서에 말씀했습니다. 실은 우리는 삐뚤어진 것을 알 여가가 없습니다. 삐뚤어진 것은 알 여가가 없어 요.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옳고 바른 것만 알고, 또 그것만 알아 나가도 다 못 알아 나갈 터인데, 언제 삐뚤어진 것을 다 알 수가 있겠소 삐뚤어 진 것은 억만명의 머리로도 그걸 다 알 수 없는, 그만치 복잡하고 많은 것인데, 옳 은 것만 알면 삐뚤어진 그까짓 거야 억억만이라도 옳은 것 아니면 다 삐뚤어진 것이다. 이렇게 도매금으로 넘겨버리면 그만 됐습니다. 그렇지 않소
그러므로 아는 법은 자기를 산 제물로 드리면 된다고 했습니다. '산 제물로 드 린다' 말은 바로 알기는 알아도 잘 조절 해 가면서 타산 해 가면서 별 지장 없으 면 바로 아는 그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그자에게 하나님이 바로 가르쳐 줍니까 안 가르쳐 줍니다. 바로 아는 데는 주여! 바로 알려 주옵소서. 내가 모가지가 끊 어지든지 살림살이가 달아나든지 내가 어떻게 매장이 되든지 바로만 가르쳐 주시면 제가 그대로 하겠습니다. 요 마음이 있는 자에게 바로 가르쳐 줍니다. 바로 가르 쳐 준다고 알맹이까지 주는 줄 압니까 아니오. 껍데기만 바로 가르쳐 줘요. 껍데기를 바로 가르쳐 주는 그걸 받아 가지고 자기가 어떤 해가 있어도 참 그대 로 달려들어 실행을 합니다. 실행을 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기가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변화가 되고 나면 변화된 것만큼 이제는 또 새로 알아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주님 앞에는 참 이것이 제일 불행스럽소. 진실이 없는 자가 참 불행스럽습니다. 참이 없는 자, 꾀로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 지혜로 가 지고 예수믿는 사람, 수단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 참 불쌍합니다. 안돼요.
(현실에서 결정되는 두가지) (1. 심신기능의 생사 결정) 그러면 우리 현실 안에는 몇 가지가 있어요 일곱 가지. 이제 다 말했지요. 일곱 가지. 일곱 가지가 있는데, 거기 현실 속에서 죽고 살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어떤 것이 죽고 삽니까 이 일곱 가지 현실 속에 죽는 것들이 거기 들어 있는데, 어떤 것들이 그 현실에서 죽고 사는지 죽을 것은 어떤 것들이며, 살 것은 어떤 것들입니 까 자, 죽을 것은 여반에서 한번 말해 보고 살 것들은 남반에서 한번 말해 보지요 . 죽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여기 양성원 학생들이 대답 좀 해 보지요. 악령, 죄, 사망 그것이 죽을 것들이라 그것은 죽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하고 원수가 돼 가지고 죽음 뭉텅입니다. 죽은 것 말고 어떤 것들이 죽을 것들입니까 그 것을 알아야 우리가 죽을 것들을 죽지 못하도록 하지요. 살릴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그것도 알아야지요. 둘이 있습니다. 죽을 것들 살아날 것들, 둘이 있는데 안 죽으면 살고 죽으면 못삽니다. 이 둘이 사나 죽나, 사나 죽나 하는 이 문제가 현실에 매여 가지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는 데, 그만하면 알 수 있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뭐입니까 네. 마음과 몸의 기능 , 육의 기능들, 육의 기능들 이것이 영원히 사느냐 영원히 죽느냐 하는 것이 현실에 서 결정납니다. 몸의 기능, 육의 기능 말이오. (마음은 영이 아니라 몸과 함께 육, 육체라) 육의 기능이라 할 때 육은 육체라는 말인데 육체라면 심신을 합해서 육체라고 합니다.
일반 교회들이 육체라 하면 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은 영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영이라 생각해요. 마음을 영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중생되고난 다음에도 제 마음이 하루 몇번이라도 하루 열 번도 더 죄를 짓기 때문에 중생된 영이 죄를 짓는 다고 알게 되는데 실은 중생된 영은 다시 범죄치 않는 존재로 중생이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영이 아닌 마음입니다. 사람은 영, 마음, 몸 셋으로 되어있고 마음과 몸을 합해서 육이라고 하니, 곧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었으며 육은 다시 마음과 몸으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 이 중생될 때는 다시는 죽지 않는 영으로 중생되었고 이후 죄를 짓는 것은 마음과 몸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을 구별치 못하고 같은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죄를 짓기 때문에 중생된 자기 마음 과 영이 죄를 짓는다 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과 마음의 혼돈에서 나온 것입니다. 짐승에게도 마음이 있습니다.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고 했지요. 사람하고 조금 차이가 있는 것뿐이지 그것도 슬픈 마음 있고, 기쁜 마음도 있고, 또 감사한 마음도 있고, 두려운 마음도 있고 다 있어요. 마음을 영이라고 혼돈한다면 짐승에게 있는 그 마음을 영이라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어 두워졌는지. 마음을 영이라고 하니 그 가르침이나 또 그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찌 됩니까 마음을 영이라고 해 버리니까 성경 해석 전부가 삐뚤어질 것 아닙니까 인 생에 제일 중요한 요소가 주격이 뭐이냐 하면 영입니다. 영이 주격체인데 이 주격 체를 없애 버렸으니까 구원은 무엇이 됩니까 (기능은 현실에서 영원 결정) 영은 진리와 성령님으로 중생되어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는데 영이 하는 일은 지금 무슨 일 하는고 하니 심신인 육, 자기의 육을 영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사람의 소유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우주보다도 자기 육의 기능입니다. 육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되겠는데 육의 기능 이것을 영원한 사망에게 빼앗기느냐, 영원히 자 기 것을 만드느냐 하는 이 문제가 현실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맡은 성령님도 탄 식을 하고,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가 된 우리라는 중생된 영들도 탄식을 합니다. 왜 육의 기능을 현실에서 빼앗기면 다시 못 찾습니다. 육의 기능을 자기 것을 삼아 놓으면 영원히, 무궁세계에서 영원히 자기 기능으로 쓸 수 있습니다. 자기도 구로 쓸 수 있다 말이오. 이래서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병기 의의 도구가 된다고 했 습니다.
우리의 몸이 의의 도구가 되고, 죄에 드리면… 죄에게 바쳐서 죄 하는 대 로 이렇게 하면 죄의 병기 죄의 도구가 된다 이랬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이것은 우리의 육의 기능이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서 결정됩니다. 한 현실에서 육의 기능 전부가 죽고 사는 것은 아니고, 고 현 실에 해당된 육의 기능 이것은 죽든지 살든지 하는 그 기회가 현실이라는 한번 기회 밖에 없습니다. 다른 심신의 기능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이 현실에 해당되지 아니한 것은 상관이 없어요. 이 현실에 해당된 그것은 그 현실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중생된 영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영원히 필요있는 도구, 제일 중요한 도 구를 이 현실에서 빼앗기지 아니하고 자기 것을 삼느냐, 이 악령 죄에게 빼앗겨 버 리느냐는 이것이 지금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탄식하고 성령님도 지금 이를 위해서 일 하고, 이러니까 성령님하고 중생된 영하고는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이 현실에서 성령님 이 쓸 영과 합해서 애를 씁니다. 성령님이 쓸 것이 우리의 영이요, 영이 쓸 것이 이 육의 기능인데, 이것을 구원하려고 둘이 합해 가지고 애를 씁니다. 애를 써도 빼앗 기는 일 많고, 또 차지하는 일 많습니다. 빼앗기다니 그러면 전능하신 분이 무엇 때문에 빼앗겨요 (심신의 자유성 때문에) 성령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 빼앗길려고 애를 쓰는데도 빼앗깁니까 전능이 아닌가보구먼.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전능자이신데 왜 빼앗깁니까 능력이 없어 빼앗깁니까 그 심신에게도 유한된 자유이지만 자유를 줬기 때문에, 자유를 줬기 때문에 유기적으로, 자기가 능동적으로 성령님과 진리와 주 님의 공로를 영접하고 그쪽으로 속해야 되는 것이지, 강제로 뺏을진대야 뭐 이렇게 교회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에 만든 것 강제로 만들어 버리면 그것이야 대번에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도구나 짐승과 같은 존재이지 하나님의 형상은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는 만물이 가지지 못한 그 자유성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된 영은 자기 영원한 도구를, 자기 병기를, 자기 기구를 안 빼앗길 려고 애를 쓰고, 마귀란 놈은 뺏을려고 애를 쓰고 성령님도 안 뺏기려고 애를 쓰고 이래서 성령님과 중생된 우리 영 둘이 합해서 안 빼앗길려고 애를 쓰는데도 그 심신의 기능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이 심신이 자유가 있으니 싫다고 배척하면 하나님이 쫓겨나가야 된다 말이지오. 이러니까 이걸 구원하기 위해서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사람을 통해 권면하기도 하고, 만물을 통해서 알리기도 하고, 온갖 방편의 역사를 해 가지고 비 로소 그 본인의 육이 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그 사망에 속한 것을 배척하고 하나님께로 이렇게 척 돌아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하나님을 사귀는 법에 제일 요긴하고 가깝고 중요한 그런 시기가 뭐이냐 하면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악령의 모든 것을 싹 배척하고 하나님께로 척 돌아서는 요것이 하나님에게 제일 기쁨이요 만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두 사이에 있으면서 지금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세상도 지금 우리를 자기 들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과 진리와 주님의 공로도 자기 것을 만들려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두 사이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할 때에 양쪽에서는 참 탄식을 하면서 그 순간 조마조마 고대하고 있는데, 그럴 때에 하나님을 척 버리고 저쪽으로 싹 돌아선 그것이 그다음에 급할 때는 주여! 주여! 암만 해 봤자 분개 하다 말이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뭐 돈이나 무슨 봉사나 희생이나 뭐이나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이 풀릴 줄 압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좋지만 그까짓 거는 여기 비할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평소에 하나님을 섬기는 무슨 봉사나 연보나 그런 것이, 전도나 그런 것이 없어도 요 현실에 둘이 요렇게 시비를 할 때에 어디로 가는가 보자. 참 성령님도, 중생된 영도 가슴이 도곤도곤하고 있고, 이 악령들도 지금 가슴이 도곤도 곤하고 있는데 그럴 때에 거기서 머뭇머뭇 하다가 하! 내가 너 따라갈 줄 아느냐 마지막 척 돌아서서 주님 앞으로 딱 돌아서면 주님은 그만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그게 제일이오. 제일 주님을 사귀는 것은 바로 그게 제일이오. 그게 제일입니다. 그리되면 성령님은 부자인데 우리는 이 부자 성령님과 실력있는 영을 이제 가지 게 됐지, 또 중생된 영은 우리 심신을 자기의 영원히 쓸 병기로 만들었지 이러니까 기뻐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이랬습니다. 믿음 없이는 딴것 가지고는 기쁘시게 못해요.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시비가 자기 앞에 왔는데 이것이냐 저것이냐 네가 어디로 붙을래 할 때에 그때 척 배반하고 이리 딱 붙을 때야 하나님이 모든 것 아끼지 않습니다. 붙은 그에 게 대해서는 아끼지 않고 모든 걸 다 줍니다. 네가 내게 속했으니 뭐 그 이상 다른 거 원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족입니다. 우리의 육은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하는데 육의 기능 이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2. 만물의 영원 결정) 또 하나는 뭐입니까 현실에서 또 하나 가지고 있는 문제는 자기와 관련된 만물 이 아니고 그 현실에 관련된 모든 만물들입니다. 그 현실에는 돈도 관련될 수 있고, 명예도 관련될 수 있고, 지위도 관련될 수 있고, 생명도 관련될 수 있고, 그 현실 에 관련된 것. 자기에게 관련된 것이 아니고, 그 현실에 관련된 모든 것들입니다. 자기 현실에는 사건도 있고 물건도 있고 모든 것 다 있지 않습니까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그때에 이용되는 그 모든 만물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나만 하나님께 속해 버리면 그것들도 다 생명에 소속하여 살게 되고, 내가 넘어지면 그 모든 것들 도 다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그 현실에 참가한 만물, 그 현실에 관 련된 만물 그것이 영원한 멸망을 받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결 정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이 탄식하면서 원하기를 뭘 원한다 했지요 하나님의 뭇 아들들의 자유입니다. 뭇 아들들이라 말은 남자만 말한 것 아니오. 여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이오. 여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뭇 아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중생된 하나님의 아 들이 자유하는 것은 죄짓는 것이 자유하는 것입니까 영감대로 사는 것이 자유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새사람 아니오 하나님의 아들은 새사람이니까 새사람 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요, 진리의 소원이지요. 이러니까,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이지. 이러니까 하나님의 뭇 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새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살기를 고대한다 말입니다. 새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살기를 고대한다. 새사람이 자유하기를 고대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현실에는 일곱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니 까 죄, 마귀, 사망, 심판법을 이기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생명의 법에 안보받 고 하나님에게 안보받는 이것이 의의 걸음이라 말이오, 의의 걸음. 의의 걸음 걷기 를 탄식하며 고대합니다. 의의 걸음 걸으면 뭐하려고 의의 걸음을 걸으면 거기 관련된 그 모든 것은 영원 히 만물을 새롭게 할 때에 살아나지만 반대로 주인공이 되는 이 인간이 그만 범죄해 버리면 관련된 만물은 다 절단나 버리고 맙니다. (현실의 요소 일곱과 두가지 문제) 이러니까 현실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지워질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그 현실 에서 해당된 심신의 기능이요, 또 하나는 내 현실에 해당된 모든 만물들입니다. 그 러니까 두 가지가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이 두 가 지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 안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들어있다고 했습 니까 거기 일곱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우리와 현실에서 직접으로 관련된 원수가 뭐입니까 네. 죄입니다. 마 귀도 있고, 사망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제일 적이 아닙니다. 제일 의 적은 죄입니다. 죄 그놈만 없애버리면 마귀도 그까짓 거 뻐드러져 버리고, 사망 도 뻐드러져 버리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아무 할 일이 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 그놈이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접선되어 있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현 실에서 내가 싸워야 할 적을 찾아야 되니까, 마귀도 있고 모든 것도 있지만
첫째로 내가 내 적을 찾아서 싸울 제일 적이 뭐이냐 죄입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무엇이지요 나를 모든 은혜가 많고 돕는 것이 많지만 첫 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이
첫째 급합니다. 이 공로만 입고 나면 그다음에 쭉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죄와 대속에 ) 그러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는 내 심신의 기능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과, 또 이 현실 속에 관련된 모든 만물 이것이 살아나면 영원히 나를 수종들고 그것 죽으면 나와는 영원히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 만물이 탄식하는 것이니, 만물 들이 탄식하고 있는 이 현실에 관련된 만물 이 둘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달 려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죽고 사는 것이 현실에 매여 있는 데, 관련된 만물에게는 자유가 있습니까 만물의 죽고 살 수 있는 것이 만물에게 자유할 수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 대해서, 이 두 가지가 죽고 사는 데 대해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우리 심신의 기능 이것이오. 이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죽고 사는 요 결정 속에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찾아 가지고 대적해서 그것부터 정복해야 됩니다. 네가 뉘 집에 들어가든지 들어가면 그 집에 제일 왕이 되는 그놈부터 정복을 해야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네가 빼앗을 수가 있지 그것 내버려두면 빼앗지 못한다. 그것부터 먼저 처리해라. 그것부터 먼저 처리해라 말씀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제일 이 현실에서 먼저 처리해야 될 원수가 누구입니까 죄입니다. 죄 이놈을 잡고 지금 처리를 해야 됩니다. 또 내가 이 현실에서 제일 힘입어야 될 필요한 것이 많지만 제일 필요하게 힘입 어야 될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공로입니다. 원수는 죄인데 나를 일차적으 로 도울 것은 주님의 공로이니까 이 공로와 죄를 한데 부딪히면 죄는 절단나 버리고 맙니다. 말씀을 어긴 죄나 자율로 하는 불의의 죄나 하나님과 원수된 죄나 언행심 사의 어떤 죄든지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되면 이것은 깨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공로와 연결되고난 다음에는 이제 예수님의 공로를 써먹고, 써먹고 나 면 일차적으로 원수가 다 정복됐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써 먹으면 죄도 절단나 버 렸고, 마귀도 볼일 다 봤고, 절단나 버렸고, 하나님의 심판법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내가 힘입을 때에는. 그리고난 다음에 재빨리 우리가 힘입을 것이 무엇입니까, 힘입을 것이 하나님 의 안보입니다. 하나님의 안보의 법 이 진리를 빨리 힘입습니다. 이 진리를 힘입어 서 빨리 이 진리와 자기가 일치돼야 합니다. 그리고난 다음에는 누구와 일치됩니까 하나님과 일치됩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 구주 하나님이라니 예수님의 영, 예수님의 영을 가리 켜서 그리스도의 영이라 이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뭐인가 성령님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하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내가 같이 있겠다. 하는 그 말씀은 신인양성일위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심이 아니고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 으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분을 힘입으면 이제는 그 현실에서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에 관련된 이 현실에 모든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죄를 말할 때에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이 죄를 이겨나갈 수가 없고, 벗어날 수가 없고, 우리가 이 대적하는 데에 전법이 희미해서 패전하게 되기 때문에 요 죄를 말하면서 요 현 실을 관련시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다 바쳐 듣지 않으면, 욕심까지 뽑지 않으면 못 듣는 것이 도) 자기가 양심을 쓰지 않고 들으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엉뚱한 소리 하는 것 같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 말하기를 백목사 설교하는 것은 늘 하는 말 하는 것 이니까 뭐 새벽기도 갈 것도 없다. 같은 말만 항상한다'고. 그 사람은 한마디도 못 알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항상 흐리멍텅하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드리지 않으면 이 도에는 참여할 것도 없다 그렇 게 말했소. 시몬아! 네 속에 불의가 가득하다. 악이 가득하다. 이 도에는 참예할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이랬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따라다니는데 네가 열심 히 따라다녀서 남보다 우쭐해서 올라가려고, 제가 커질려고, 자기가 인기 끌려고 그 욕심 가지고 따라다녔지,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위해서 자기가 죽는 건데, 주님이 자기에게 해준 것 그것 받고 자기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 다 바쳐서 죽는 건데, 이것이 예수믿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가지고 자기가 유명해지고 자기가 유력해지고 자기가 존귀해지 고 자기가 인기 끌어지고 하려고 하니까, 예수까지 이용을 해먹고 예수님의 공로까 지 이용해 먹으려 하기 때문에 상도둑놈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시몬에게 대해서 네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 불의가 가득찼다. 이 도에는 받을 것도 없고 참가도 못한다. 네가 은과 함께 망할 것이다. 그러나 네 가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혹 용서하시리라. 이 말을 듣고서 그만 달려 들어서 회개를 했어요.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즉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믿는 것이 뭐인지도 모르고 지금 마음대로 하고들 있습니다. 구약에는 고기 덩어리가 죽으니까 육안으로 보이지만 오늘 신약에는 고기덩어리보다도 그의 심신의 기능이 죽고, 영의 소유권이 죽고, 이렇게 중요한 것이 죽지만 이것이 눈에 보여야 지! 구약시대는 대번에 벌해서 죽지만 이 신약시대는 죽는 것이 안보이니까 죽는다는 말이 틀린 것으로 알지만 죽는다는 것이 왜 안 맞아요 영원히 살 요소들이 죽 습니다. 이 고기덩어리가 중합니까 그 안에 기능이 더 중합니까 기능이 중해요 영 이 중해요 영이 중합니다. 그러기에 모르는 자는 항상 모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새벽기도 말씀의 중요성) 이 새벽기도에 참석해서 한 말씀 한 말씀 또박또박 배워야 자기 심신이 변화가 되고, 구원얻을 자는 깨달아지게 되는 건데 이 새벽기도를 안 나오는 것은 전 생활 을 다 도둑 맞는 것입니다. 자기가 암만 힘쓴다 해도 자기 구원은 헛일입니다. 건설 구원은 헛일입니다. 사람 보기에 미꿈한 생활이야 뭘 못하겠소! 뭘로 인간을 변화 시킵니까 하나님 말씀 가지고 변화를 시키지요. 이러니까 자 이 중간반 반사(교사)들도 심방하는 그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 이 더 중요하고, 주일학교 반사들도 자기 반사 노릇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 반사들이 학교 다니며 공부하는 것보다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 이 더 중요합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이것이 제일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것을 다 빼앗겨 버리고 마니까 마지막은 껍데기 이것만 살아서 움직이고 있게 됩니다. 이 주 일학교 반사들이 새벽기도를 나오기 않기 때문에 힘이 속에서 능력이 없으니까, 억 지로 한다고 됩니까 제가 이제 그 파악을 똑똑히 했습니다. 참 진리로 사람을 고치려 하는 그것이 있으면 서부교회가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 반은 안 내려갑니다. 그 반을 맡은 선생 님이 아플수록, 병들어 누웠을수록 심방은 못해도 더 올라갑니다.
첫째는 병인데 외부적으로 병은 뭐이냐 하면 심방을 안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사가 두 달을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그 학생들에게안 온지가 얼마나 됐니 한 두 달 됐습니다. 안 오니까 가까운 교회로 가야 되지요. 그러나 그 책임이 얼 마나 무거운지! 자기가 그 사람의 영혼을 맡았으니 찾아 가면 되는데 게을부리고 심방하지 않아서 다른 교회로 가버렸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서 구원이 바로 이루어 지면 다행이지만 만일 잘못 이루어지면 자기가 심판을 받아야지요. 그 사람이 교회 안 나오고 멸망받으면 그것은 자기가 심판받아야 합니다. 지금 이 큰 멸망은 모르고, 눈 앞에 있는 공부 그까짓 거 하면 얼마나 대단한데 세상 지식은 몰라도 좋아요. 알아도 잘못 이용하면 큰 화가 됩니다. 몰라도 하나님의 지식만 가지면 다 돼 버립니다. 전지자가 돼 버려요. 이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 걸음을 걸을 수 없습니다. 일주일 중 에 제일 중요한 날이 어느 날이지요 주일날입니다. 주일날 중에 제일 중요한 시 간이 어느 시간입니까 예배시간입니다. 하루 중에 제일 중요한 시간은 어느 시간 입니까 새벽시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의논하고 여기서 하나님이 그날에 대한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 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되는 것입니다. 참 불쌍하고 가 련해요. 암만 해도 안 듣는 것은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참 불쌍하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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